기다림
임보
길가 담벼락 아래
한 녀석이 떨고 있네
12월 낡은 햇살
바람도 시린데
지난 여름 그 홍조(紅潮)
누구에게 다 뜯기고
버려진 수밀도(水蜜桃)
한 알의 단단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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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무리가 되었는지 며칠 맥을 못 추다가 겨우 회복이 되었습니다. 몇 개의 일정은 포기해야 했지만, 또 몇 개의 일정은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유니텍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올해 마지막 문화재청 공모사업을 잘 마무리하고, 이종일 선생님으로 인해 성사된 의성 동요 부르는 어른 모임이 의성미래교육지원센터에서 주관한 2021 의성학생ON토론대회에서 공식적인 첫 공연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두 행사 모두 일하거나 노래할 사람이 부족해 한 사람이 아쉬운 상황에 애태우던 터라 제가 갈 수 있다 하니 모두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지요. 작게나마 보탬이 되어 감사했습니다. 특히 동요모임 이원걸 선생님(전 안동YMCA 사무총장)은 오랜만에 동요모임이 함께 모여 노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막혔던 숨이 확 트였다’고 표현하실 정도로 애타게 이 순간을 기다리셨더군요. 기다림이 현실이 되는 순간 가슴 벅찬 기쁨이 샘솟아 올랐던 것이지요.
교회력은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을 맞으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게 됩니다. 작년 대림절을 맞이하며 교우들과 기다림의 대상과 마주할 때까지 하루하루의 삶을 정성스럽게 만들어가자고 다짐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훌쩍 흘러버렸습니다. 이맘때 맞이하는 기다림의 의미는 매번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올해엔 ‘씨’의 의미를 품으며 기다려볼까 합니다. 예배를 준비하며 임보 시인의 <기다림>이란 시를 만났습니다. 시인은 12월 찬 바람이 부는 어느 날 우연히 길가 담벼락 아래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복숭아씨를 발견합니다. 뜨거운 여름 강렬한 태양빛을 받으며 익어 누군가의 기분 좋은 먹거리가 되었을 복숭아는 씨만 남은 채 어딘가에 버려졌겠지요. 그 단단한 씨는 이리저리 치이다가 차디찬 12월의 어느 날 길가 담벼락 아래에서 시인의 눈에 발견된 것입니다. 씨는 쓸쓸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땅에 떨어진 복숭아씨를 유심히 보는 이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12월 어느 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길가 담벼락 아래 떨어진 복숭아씨가 제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시골 땅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과 오버랩되었습니다. ‘12월 낡은 햇살 바람도 시린데’는 아기 예수가 오실 즈음의 시대적 배경을 말해주는 듯하고, ‘지난 여름 그 홍조(紅潮) 누구에게 다 뜯기고’는 살아있는 동안 예수께서 짊어져야 할 생애를 예견하는 듯하고, ‘버려진 수밀도(水蜜桃) 한 알의 단단한 씨’는 십자가 상의 예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참 생명으로 태어날 ‘씨’인 아기 예수는 지금 어느 차디찬 길바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분을 외롭지 않게 해드리면 좋겠습니다. 기다림은 어쩌면 우리보다 주님이 더 간절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외롭지 않게 하는 일은 이 시대 베들레헴, 즉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누추한 곳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기는 일입니다. 우린 거기서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2021.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