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글은 본인의 글(엔타 ; 법신학이란 무엇인가? )의 서문에서 발췌한 글이다
법학과 신학의 관계
법신학의 과제는 신과 그의 법(νὀμος, Law)에 대하여 인간과 함께 관련되고 있는 학문을 연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여 신법(divine law)의 내용에 관한 학문으로서 신이 각자의 인간에게 부여한 직분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각 인간에게 부여한 권리에 대한 신학적 연구이며, 인간을 위하여 신에 의하여 창설된 여러 제도(institution)에 관한 연구이다.
그러나 법신학은 기초신학(Grundtheologiewissenschaft)의 한 분야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法學의 한 분야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신학이 유에 해당한다면, 법신학은 그것의 특별한 하나의 종에 불과 한 것은 아니다. 신학이란 항상 그 어떤 형식에서도 신의 현존재의 근본문제가 포괄적인 것으로 이름 붙인 것을 문제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법신학은 신학의 특수한 분야에 속하기 때문에 신학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적인 수법에 기해서 반성하고, 논의하고, 여기에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를 答하고자 하는 신학상의 원칙문제이자 근본문제이기 때문에 신학의 다른 문제와 구별될 뿐이다. 다소 무리한 표현을 쓰자면, 법신학은 신학적 안목을 지닌 법학자가 묻고, 법학적 이해를 가진 신학자가 대답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훌륭한 법신학자라면 양 분야에 정통하여야 한다.
법학과 신학의 교류는 비교적 독일에서는 활발한 편이다. 주지하듯 현대의 위대한 형법학자이자 법철학자, 법신학자, 법학사자, 그리고 교회법학자인 볼프(Erik Wolf, 1902-1977)와 역시 현대신학의 거장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교류를 들 수 있다. 에릭 볼프에 의해서 시작된 독일의 에큐메니칼 정신과 사회윤리적․정치적 문제를 들고 나온 '바덴 기독교 사회국민당'(Badisch Christlich Soziale Volkspartei)에서 바르트가 볼프에게 간 것과 아울러 바르트가 서거하기 직전까지(1968. 11. 27) 서신을 나눈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볼프의 일기 메모를 보면, 칼 바르트의 첫 방문은 1945년 7월 2일이었고, 이 해에 두 번이나 더 방문하였다. 볼프는 당시 프라이부르크의 총장이었던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도 교분이 두터웠었다. 바르트는 볼프를 위한 첫 번째 기념 논문집에서도 “요한의 이름으로부터 예수의 이름으로의 세례로”(Von der Taufe des Jahannes zur Taufe auf den Namen Jesu; Existenz und Ordung. 1962, S. 3-14)라는 논문을 실을 정도였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 법신학에 관심 하는 학자로서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최종고 교수를 비롯하여 연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서울에서 목회를 하는 지승원 목사를 꼽을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신학계에서 법학적 관심을 가지는 학자는 많지만 특별히 법신학적 성찰의 토대 위에서 학문적 성과를 올리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그 이유는 신학에서의 법에 관한 한(神法), 그것은 율법 도그마틱에 그 원인이 선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세속의 법철학(Rechtsphilosopie)은 항상 법에 관한 정당성의 여부를 그 대상으로 하지만, 율법에 관한 연구의 대상은 그것의 정당성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나타나고, 이것을 신앙과 신학적 반성 위에서 성경의 내용과 율법의 가르침을 해석하는가의 분야로 한정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법철학이나 법신학은 각각 법학의 기초법학과 신학의 기초신학의 학문분야라는 원인, 즉 학문으로서 포괄적인 분야가 아니고 아주 특별한 형식객체이기에 그 학문적 운신의 폭이 좁은 데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우리 나라의 학제상의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즉 법학자가 정규 신학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신학대학의 학부과정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데 문제가 있다. 법과대학 4년, 대학원(석․박사) 5년 이상을 공부하고, 신학부 4년을 건너뛰더라도 신학의 특별한 과정(M. Div) 3년, 그리고 신학석사 및 박사(Th. M, Th, D) 8년 이상을 수업하여야 학계에서 인정하여 주고 비로소 신학자로 입신하는 우리의 사회․교육 문화풍토가 신학과 법학의 교류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로 등장하는 것 같다. 나아가서 국가의 법이 종교의 법에 관여할 자리가 없고 종교는 국가에 기대할 심산이 없다는 것이 독일과 한국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되고 있다.
또한 법신학 과목의 학문적 시장성이 없다는 문제도 법신학의 중요성을 절연시키는 요인이라고 판단된다. 아울러 신학이 세계에로의 개방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도 지적해야 한다. 신학은 오직 신학적 판단이어야 한다는 것과 방법론적 폐쇄성에서도 학문적 운신의 폭을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고 보여진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사회개방성의 문제와 관련된 가장 심각한 폐쇄성의 단면이다. 신학은 오직 신적인 바탕 위에서 운위되는 학문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햇빛과 비를 내려 주시듯 신학은 모든 학문을 포용하고 개방하여야 한다. 그리고 신학의 독자성을 타학문과 비교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唯一性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신학은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는 우아한 호칭에 걸맞게 서로 교호하는 학문으로서의 개방과 포용이 절실한 것이다.
실제 어느 신학개론서 치고 학문성의 개방이라는 외침을 하지 않는 책은 없다. 그러나 현실의 실천적 상황은 요원하다. 그만큼 기독교 사회의 학문적 폐쇄성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우리가 바울 신학을 논의할 때, 율법의 본질적 내용을 얻고자 할 때는 법신학자의 시각을 우선 원용하고, 그 법이 인간을 상대하였을 때 나타나는 법현상을 주목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의 객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이 인간에게 주어진 그 시점부터 그 법을 다루고 운용하는 주체는 우리 인간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법과대학에서도 연구되어야 하지만, 사실상 그 법을 주체적으로 담당하기로는 신학교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법신학적 시각을 통하여 가능한 한 법학과 신학이 분리되었던 근대 이전의 학문적 풍토에의 회귀를 주장하고자 한다. 그것은 두 학문분과가 하나로 용해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학문적 교류를 통하여 서로 보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대학원과정에서라도 석․박사과정은 신학과 법학을 구분할 것이 아니라 양자 구분 없이 서로 연구할 수 있도록 학문적 토양을 배양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