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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여러 가지 종류의 기도(2)
(3) 합심(合心)기도: 하나 됨의 힘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
*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라!
하나님은 물론 각 개인과 직접 교통(交通)하시며 또한 그 기도에 친히 응답(應答)하시는 분이지만, 마18:19,20에서 굳이 ‘두 사람’ 또는 ‘두세 사람’이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보면, 두 사람 이상이 합심(合心)하여 기도하는 것을 더욱 좋아하시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 이상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을 더욱 좋아하시는 듯하다. 본래부터 하나가 아닌 둘을 창조하셨으며, 그 둘 역시 따로따로가 아닌 서로 연합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
어째서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되 본래부터 하나가 아닌 둘을 창조하셨으며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또한 그 둘 역시 따로따로가 아닌 서로 연합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合)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사실을 더 유추해낼 수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각 사람을 좋아하시지만 이보다는 둘 이상의 연합을 더욱 그리하시며, 개개인의 기도를 기뻐하시지만 이보다는 합심기도, 곧 둘 이상이 합심하여 구하는 것을 더욱 그리 하신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9절 하)
물론 하나님은 각 사람을 좋아하시지만 이보다는 둘 이상의 연합을 더욱 그리하시며, 개개인의 기도를 기뻐하시지만 이보다는 둘 이상이 합심하여 구하는 것을 더욱 그리 하신다. |
물론 두 사람은 수적으로 보면 가장 작은 연합(聯合)입니다. 하지만 가정이나 교회도 결국은 이 둘로부터 시작되므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아니 무시해서는 안 되는 연합임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도 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 연합 자체를 기뻐하시고, 그 가운데에 임재하시며 또한 복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곧 예수께서 개인적으로 임재(臨在)하듯이 교회적으로 임재 하신다는 말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절)
예수께서 개인적으로 임재(臨在)하듯이 교회적으로도 임재 하신다. |
한편, 여기서 ‘합심하여’(헬, 쉼포네오)는 단어는 ‘symphony’(교향곡)의 어원으로, ‘함께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연출해 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비록 성격과 기질은 달라도)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지휘대로 한데 어우러져 멋진 조화, 곧 심포니를 만들어 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시사해줍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께서 개인적으로 임재 하듯이 교회적으로 임재 하심을 깨닫고 있습니까? 또한 개개인의 기도를 기뻐하시거니와, 둘 이상이 합심하여 구하는 것을 더욱 그리 하신다는 점을 알고 있느냔 말입니다.
예수께서 개인적으로 임재 하듯이 교회적으로 임재 하심을 깨닫고 있는가? 또한 개개인의 기도를 기뻐하시거니와, 둘 이상이 합심하여 구하는 것을 더욱 그리 하신다는 점 역시 알고 있는가? |
* 단,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
이 같은 합심기도가 제대로 그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뒤에 나오는 ‘내 이름으로’(20절)라는 구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20절 상)
어째서입니까? 일찍이 예수께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받을 것이요,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이와 같은 합심기도가 제대로 그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예수님) 이름으로’ 예수님을 지향하면서 함께 모여야 한다. |
따라서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합니다. 곧 예수님을 지향(指向)하여 함께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문자적인 의미로 ‘나를 지향하여 함께 있는 곳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의 날이 가까워 옴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고 있습니까? 또한 모일 때마자 예수님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지향하여 함께 그리하고 있느냔 말입니다.
또한 두 사람 이상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되, ‘예수님의 이름으로’ 곧 예수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의지하여 구해야 한다. |
둘째,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두 사람 이상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되,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20절) 그리 해야 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의지하여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이든지 합심하여 구하되,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의지하여 구하고 있느냔 말입니다. 할렐루야!
무엇이든지 합심하여 구하되,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 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의지하여 구하고 있는가? |
* 합심하여 기도할 때 그 역사는 배가(倍加)가 됩니다!(행12:1~17)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12:5) |
야고보 사도가 순교하고 베드로 사도마저 붙잡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예루살렘 교회는 어찌 했습니까?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모여서 베드로를 위해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5,12절)
그 결과 베드로는 어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 그를 깊은 옥중에서 구출해주셨습니다.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7,10절)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무작정 그를 구출해달라고 생떼를 썼을까요? 분명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이미 스데반 집사나 야고보 사도의 순교를 직접 목도했거나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1,2절)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어떻게 기도했는가? 무작정 그를 구출해달라고 생떼를 썼는가? 아니다. 오히려 주의 뜻이 있으시다면, 베드로를 구해달라고 간구했다. |
다만 그들은 주의 뜻이 있으시다면, 베드로를 구해달라고 간구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4:15)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여서 함께 기도하되, 혹 무작정 이루어달라고 생떼를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당시의 예루살렘 성도들처럼, 주의 뜻이라면, 이것을 이루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아버지의 손에 맡긴 채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모여서 함께 기도하되, 무작정 이루어달라고 생떼를 쓰고 있지는 않는가? 이제라도 모든 것을 다 아버지의 손에 맡긴 채, 주의 뜻이라면 이것 역시 이루어달라고 간구해보자! |
한편, 예루살렘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기도 중이면서도, 막상 베드로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풀려나오자, 오히려 믿지를 못하는 유약한 모습이 드러냈는데, 혹 우리도 이와 같지는 않는지 삼가 되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니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행12:14,15)
* 합심기도는 교회와 그 역사를 같이 해왔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5,26) |
성경에는 합심기도의 사례들이 무수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120문도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에,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태동하는 기쁨을 맛보았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더라.”(행1:13,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행2:1,2)
120문도는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함으로써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태동하는 기쁨을 맛보았고,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 중에도 합심하여 기도할 때,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으며,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도 합심하여 기도함으로써 매인 것이 풀리고 옥문이 열리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다. |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 중에도 합심하여 기도할 때,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으며,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에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도 합심하여 기도함으로써 매인 것이 풀리고 옥문이 열리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5,26)
두 사람 이상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는가?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곧 예수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의지하여... |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둘 이상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구하지 않으시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곧 예수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의지하여 말입니다. 할렐루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4) 서원기도: 성장의 디딤돌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민30:2) |
* 서원기도: 하나님을 향한 자발적 약속과 그 이행!
서원(히, 네데르)은 ‘맹세하다’, ‘서원하다’, ‘다짐하다’ 등의 뜻을 지닌 ‘나다르’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결코 강제적 의무 규정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발적 의지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그 무엇을 하겠다고 ‘자발적으로’ 약속한 행위로써, 이 같은 자발적인 약속을 담은 기도를 흔히 ‘서원기도’(誓願祈禱)라고 일컫습니다.
서원기도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그 무엇을 하겠다고 ‘자발적으로’ 약속하는 기도. |
물론 이는 강제적 의무 규정이 아니기에, 불이행 자체만으로 죄가 되지는 않았으나, 만일 서원을 한 경우라면 (무심코 행했든지, 아무리 사소한 것이든지, 또한 자기에게 해로운 것이든지 간에) 반드시 이행해야만 했으며, 불이행 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으로 간주(레19:12), 그 징벌을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서원은 강제적 의무 규정이 아니기에, 불이행 자체만으로 죄가 되지는 않으나, 만일 서원했다면 반드시 이행해야만 했으며, 불이행 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으로 간주, 그 징벌을 면하기 어려웠다. |
만일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면 어찌 됩니까? 그때에도 서원이 성립될 수 있습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어째서 입니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서원은 강제적 의무 규정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발적 의지에 그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 역시 인색함으로나 억지가 아닌 자원하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서원의 무분별한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들: (자발적인 경우라 할지라도) 미혼 여성은 그의 아비가, 기혼 여성은 그 남편이 이행 여부를 판단, 그 이행을 면제받을 수 있었음. |
또 자발적인 경우라 할지라도, 어떤 경우에 그 이행을 면제받을 수 있었습니까? 미혼 여성의 경우는 그의 아버지가, 기혼 여성의 경우는 그의 남편이 그 서원의 이행 여부를 판단, 그 이행을 면제받을 수 있었습니다(민30:3~8,13). “모든 서원과 마음을 자제하기로 한 모든 서약은 그의 남편이 그것을 지키게도 할 수 있고 무효하게도 할 수 있으니.”(민30:13) 어째서입니까? 서원의 무분별한 남용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떤 목적을 두고 하나님 앞에 서원기도를 하신 적이 있는가? 비단 서원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자발적인 행위들을 품으신 적이 있는가? |
* 서원은 신중하게! 그 이행은 신속하게!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전5:4,5) |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 서원기도를 드릴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서원했다면, 성실히 이행해 나가야 하구요. 어째서입니까? 서원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되지 않지만, (만일) 서원을 했는데도 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죄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지적하고 있는 대로 말입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전5:4,5)
서원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되지 않지만, 만일 서원을 했는데도 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필시 죄가 될 수밖에 없다. |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가 우매한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서원을 했는데도 갚기를 더디 하는 자들입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전5:4) 허니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무엇이 낫다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아예 서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전5:5)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서원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낫다. |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서원을 했는데도 갚기를 더디 하는 자들이야말로 우매한 자들임을 깨닫고 있습니까? 또한 어떻습니까?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서원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사실 역시 깨닫고 있습니까? 바라건대 서원은 신중하게 하면서도, 서원한 바에 대해선 성실히 이행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서원을 했는데도 갚기를 더디 하는 자들이야말로 우매한 자들이며, 또한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서원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사실 역시 깨닫고 있는가? |
* 신앙성장의 디딤돌: 서원기도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시65:1) |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이 서원기도가 신앙성장의 디딤돌 중 하나라는 사실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서원하고 이행하지 않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낫겠지만, 이행하지 못할 것이 두려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옛말처럼 말입니다.
신중한 서원 이행은 진일보한 신앙성숙에로 나아가는 발판이자 디딤돌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행하지 못할 것이 두려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서원 하고 성실히 이행하는 편을 택해야 한다. |
따라서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이행하지 못할 것이 두려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 앞에 서원 하고 성실히 이행하는 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신중한 서원 이행은 진일보한 신앙성숙에로 나아가는 발판이자 디딤돌이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서원과 그 이행은 한 사람의 인생을, 한 공동체를, 나아가 한 국가의 미래까지 바꿔놓기도 한다. |
한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적절한 서원과 그 이행은 한 사람의 인생을, 한 공동체를, 나아가 한 국가의 미래까지 바꿔놓기도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1:11)
지금 우리는 어떤가? 서원이 신앙성장의 방편 중 하나라는 점을 깨닫고 있는가? 혹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옛말처럼, 이행하지 못할 것이 두려워 아무 것도 안하고 있지는 않는가? |
* 한나의 서원기도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의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1:10,11) |
한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서원기도를 드렸습니까? 아들을 주시면 그를 여호와 앞에 평생 나실인으로 바치겠다는 서원입니다.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1:11하)
왜 그녀는 이 같은 서원을 하게 된 것입니까? 단순히 아들을 얻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허면 어째서 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의 근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무엇 말입니까? 하나님께 제대로 된 일꾼 하나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가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한나는 왜 이 같은 서원을 했는가? 단순히 아들을 얻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나?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근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
다윗이 자신의 시편을 통해 노래했듯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 하는도다.”(시14:2~4)
한나는 하나님께 제대로 된 일꾼 하나 없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 한 명이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
사실 당시는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각종 전행을 저지르는 등 하나님의 저주를 자청했으며, 엘리 역시 이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바로잡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한나처럼, 항상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마땅히 읽어낼 줄 알고, 또한 거기에 맞는 합당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그것이 서원이든 아니든 간에 말입니다. 혹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은 남 몰라라 하면서, 오로지 서원들만을 남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나처럼,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마땅히 읽어낼 줄 알고, 또한 거기에 맞는 합당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아니면 혹 하나님의 마음은 남 몰라라 하면서, 오로지 (내 자신들을 위한) 서원들만을 남발하고 있지는 않는가? |
(5) 통성기도: 부르짖는 기도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
* 하나님 앞에 소리 내어 부르짖으라!
하나님은 시위대 뜰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에게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렘33:3 상)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렘33:3 중) 어째서입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해주실 뿐만 아니라 그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까지도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하)
하나님은 왜 예레미야로 하여금 자신을 향해 부르짖으라고 하셨는가? 응답해주시기 위함이며, 또 그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까지도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작금의 현실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이 목 놓아 부르짖고 있습니까? 당면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절규하고 또 절규하고 있습니까? (‘부르짖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라’인데 이 말의 어원적 의미는 ‘절규한다’는 의미임) 다윗이 자신의 한 시편에서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시61:1,2)
지금 우리는 어떤가? 작금의 현실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이 목 놓아 부르짖고 있는가? 당면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절규하고 또 절규하고 있는가? |
한편, 이 같은 부르짖는 기도를 ‘크게 목소리를 내어 기도한다’는 의미로 흔히 ‘통성기도’라고 하는데, 이를 영어권에서는 한국식 기도(Korean prayer)라 칭하기도 하나, 이는 엄연히 성경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흔한 기도의 방식 중 하나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시107:6)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사30:19)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2:2)
영어권에서 ‘통성기도’를 한국식 기도(Korean prayer)라 칭하기도 하나, 이는 엄연히 성경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기도의 일반적인 방식 중 하나이다. |
참고로, ‘부르짖으라’(히, 카라)는 말은 하나님의 교제가 끊임없이 계속되어 온 상태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기도생활에 힘써 오던 예레미야에게 ‘부르짖으라’ 하심으로써, 더욱 기도에 박차를 가하게 하고자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르짖으라’(히, 카라)는 말은 하나님의 교제가 끊임없이 계속되어 온 상태를 전제함. 따라서 본문은 기도생활에 힘써 오던 예레미야에게 ‘부르짖으라’ 하심으로써, 더욱 기도에 박차를 가하게 하고자 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부단히도 기도생활을 해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2%가 부족하다고 느껴지십니까? 또한 기도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싶으시다구요?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 단, 하나님 앞에 네 심정을 통하면서...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삼상1:12~15) |
물론 통성기도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어째서입니까? 한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신의 심정을 통하되, 소리를 내지 않고 오로지 마음속으로 기도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12,13절)
물론 통성기도만이 능사는 아니다. 한나의 경우처럼,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신의 심정을 통하되, 소리를 내지 않고 오로지 마음속으로 기도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
한나가 이같이 속으로 기도하자, 곧 입술은 움직이되 그 음성이 들리지 않자, 당시 어떤 해프닝이 있었습니까? 제사장 엘리는 그녀가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이라고 오해를 했고, 한나는 이 일에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해명해야만 했습니다.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13~15절)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크게 소리를 내서 부르짖든, 마음속으로 기도하든 그 형식은 상관이 없고, 다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심정을 통하도록 기도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
본문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크게 소리를 내서 부르짖든, 또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든 간에 그 형식은 상관이 없고, 다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심정을 통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15절 하) 즉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심정만 통(通)할 수만 있다면, 기도의 형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도 기도 형식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17,18절)
지금 우리는 어떤가? 통성기도만이 능사는 아님을 알고 있는가? 또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크게 소리를 내서 부르짖든, 또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든 간에 그 형식은 상관이 없고, 다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심정을 통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있는가? |
* 부르짖어 기도할 때의 3대 주안점!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삿15:18) |
끝으로, 삼손의 경우를 통해, 우리가 통성으로 기도할 때 어떤 점들을 유념해야 하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위대한 역사를 상기함으로써, 그 도우심을 갈망했다. |
먼저 삼손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위대한 역사를 상기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했습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18절 상)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단순히 부르짖는 데에만 급급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내 뜻만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삼손처럼,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먼저 상기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겸손히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를 ‘종’이라 부르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로 다시 사용될 수 있기를 갈망했다. |
둘째, 삼손은 스스로를 ‘종’이라 부르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로 다시 사용될 수 있기를 갈망했습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18절 중) 즉 하나님께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종으로 사용하셔서 큰일을 이루셨듯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사용해주시기를 원하는데, 결국 그리 되기 위해서는 곤경에서 자신을 건져주셔야 함을 역설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단순히 부르짖는 데에만 급급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내 뜻만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삼손처럼, 이제부터라도 자신을 ‘종’이라 부르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로 다시 사용될 수 있기를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죽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것을 더 두려워하면서 간구했다. |
셋째, 삼손은 자신이 죽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것을 더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18절 하) 무슨 말입니까? 만일 하나님의 큰 능력을 힘입어 블레셋 군대를 물리친 바 있는 삼손이, 고작 갈증 때문에 허망하게 죽어버린다면, 하나님께서 그 대적들의 눈에 어떻게 비춰지겠습니까? 필시 조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하루속히 자신을 이 위기로부터 구원해달라는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마치 오래 전 광야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듯 말입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출32:11,12)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단순히 부르짖는 데에만 급급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내 뜻만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삼손처럼, 이제부터라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위기 가운데서 건져달라고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단순히 부르짖는 데에만 급급해 하고 있지는 않는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내 뜻만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지는 않는가? 삼손처럼,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위대한 역사를 상기함과 동시에,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종)로 다시 한 번 사용되게 해달라고, 또한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간구해보자. |
(6) 금식기도: 단절 가운데 나아감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1:4) |
*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믿음의 선진들에게 있어서 금식기도는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신앙생활의 한 방편이었습니다. “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단10:3)
그렇다면 금식(禁食)기도란 무엇입니까?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행위입니다. 왜 식음을 전폐하는 것입니까? 음식은 곧 생명과도 직결되는 것인데 이를 끊어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부인함은 물론 오로지 하나님 한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기 위함입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여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4:16)
금식(禁食)기도란 무엇인가?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행위이다. 왜 식음을 전폐하는가? 음식은 곧 생명과도 직결되는 것인데 이를 끊어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부인함은 물론 오로지 하나님 한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기 위함이다. |
한편, 금식은 경건의 연단을 위한 방편 중 하나로 사용되어 왔으며(눅18:12), 특히 고통 중에서 참회할 때(삼상7:6), 극도의 슬픔을 표현할 때(느1:4), 절박하고 간절한 요청할 때(삼하12:16),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성직을 수행할 때(출34:28) 시행되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눅18:12)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삼하12:16)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출34:28)
지금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 앞에 기도와 간구로 나아가되, 우리의 생명과도 직결되는 식음을 전폐하고서 그리 하신 적이 있는가? 단순히 단식(斷食)하는 차원을 넘어서, 철저히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
*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슥7:5,6) |
그러나 이 같은 금식기도는 종종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형식적이며 외식적인 형태로 흘러갔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금식하는 날에 백성들이 오히려 오락을 구하고, 품꾼들을 압제하며, 서로 논쟁하고 다투며 주먹질 했던 바를 지적했고,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사58:3,4)
이 같은 금식기도는 종종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형식적, 외식적인 형태로 흘러갔다. |
또 스가랴를 통해 당시 백성들의 금식이 하나님의 명령이나 권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의 종교적 이기심을 만족시킬 목적으로 시행되었음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슥7:5,6)
예수님께서도 금식할 때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슬픈 기색을 보이거나 얼굴을 흉하게 하지 말라고 하셨구요.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마6:16)
지금 우리는 어떤가? 혹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본래의 정신과는 다르게 형식적이며 외식적인 형태로 흘러가지는 않았으며, 스스로의 종교적 이기심을 만족시킬 목적으로 행하지는 않았는가? 또한 사람에게 보이려고 슬픈 기색을 보이거나 얼굴을 흉하게 하지는 않았는가? |
*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로만 향하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17,18) |
한편, 위의 세 본분은 모두 금식 자체가 잘못되었다거나 또는 금식의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허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외적인 형식보다는 내적인 목적을, 금식의 방법이 아닌 그 정신을 더 중요시 하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금식은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 재정립이 그 목적으로써, 결국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삶의 원점으로 돌아가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회귀(回歸)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형식보다는 내적인 목적을, 금식의 방법이 아닌 그 정신을 더 중요시 하신다. 어째서인가? 금식은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 재정립이 그 목적으로써, 결국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삶의 원점으로 돌아가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회귀 행위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도 만일 금식하는 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재정립보다 금식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있다면, 금식보다 더 우선적 목적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사58:1~7),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고 있다면(마6:16) 어찌 되겠습니까? 아무리 40일 금식, 아니 그 이상을 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적 수양(修養) 내지는 고행(苦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금식의 방법이 아닌 그 정신을, 외적인 형식보다는 내적인 목적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까? 금식 그 자체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재정립이 그 목적임을 깨닫고 있습니까?(사58:6,7) 따라서 금식보다 더 우선적 목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알고 있습니까? 또한 (금식을 통해) 모든 것을 제쳐둔 채 삶의 원점으로 돌아가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행위임을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까? 할렐루야!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하나님께서 금식의 방법이 아닌 그 정신을, 외적인 형식보다는 내적인 목적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알고 있으며, 금식 그 자체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재정립이 그 목적임을 깨닫고 있는가? 따라서 금식보다 더 우선적 목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알고 있는가? 또한 금식을 통해 모든 것을 제쳐둔 채 삶의 원점으로 돌아가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행위임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가? |
(7) 새벽기도: 하루를 여는 열쇠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108:2) |
*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믿음의 선진들은 항상 기도에 힘쓰되, 다윗의 고백처럼 특히 새벽(또는 아침)에 기도했습니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108:2) 어째서입니까? 하루 중 고요하고 청아하게 가라앉은 새벽(또는 아침)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항상 기도에 힘쓰되, 특히 새벽(또는 아침)에 기도했다. 왜인가? 하루 중 고요하고 청아하게 가라앉은 새벽(또는 아침)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바로 이런 새벽(또는 아침)에 정결하고도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새벽에 하나님을 찾는 자가 곧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히, 새벽에)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이 같은 새벽(아침) 기도는 (매일 드려졌던) 아침 소제에서 비롯되었다. |
이 같은 새벽(아침) 기도는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매일 드려졌던) 아침 소제 입니다.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올라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왕하3:20) 여기서 ‘소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민하’는 ‘소제’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종류의 제물’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다른 역본에서는 ‘제사’(공동번역), ‘제물’(RSV, NIV, Living Bible)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구약시대 성소에서는 매일 아침과 저녁 두 번씩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다. |
그렇다면 이런 아침 소제(제사)는 구체적으로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제사장의 위임식 제사 때 아침과 저녁으로 나눠 드렸던 소제(레6:20)나 매일 드려야 할 상번제에 대한 규례(출30:38~42) 등으로 보건대, 구약시대 성막(성전)에서 매일 아침과 저녁 두 번씩 규칙적으로 제사 전통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합니다. 유대인의 전승 역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일 아침과 저녁 두 번씩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다는 점을 뒷받침 해주고 있구요.
“아론과 그의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 이러 하니라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항상 드리는 소제물로 삼아 그 절반은 아침에, 절반은 저녁에 드리되.”(레6:20) / “네가 제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 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양 두 마리니 한 어린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양은 저녁때에 드릴지며.”(출29:38,39)
이 같은 규칙적인 제사 전통은 포로 시대에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습관으로 정착되었다. 곧 아침 제사와 관련된 새벽 기도 시간, 저녁 제사와 관련된 제 구시(오후 3시) 그리고 황혼 무렵 하루 세 번 기도 |
이 같은 규칙적인 제사 전통은 포로 시대에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 어떤 습관으로 정착되었습니까?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습관입니다. 즉 아침 제사와 관련된 새벽 기도 시간, 저녁 제사와 관련된 제 구시(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 그리고 황혼 무렵 하루 세 번씩 기도했던 것입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행3:1) 예수님께서는 주로 새벽 미명을 이용하셨던 것이구요.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의 선진들처럼, 아침 제사와 관련된 새벽(아침)에 기도하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새벽 미명에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물론 하루 24시간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지만, 특별히 새벽에(아침에) 더욱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힘쓰고 있느냔 말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처럼, 아침 제사와 관련된 새벽(아침)에 기도하기를 힘쓰고 있는가? 또한 예수님처럼, 새벽 미명에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가? |
*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
한편, 왜 믿음의 선진들은 항상 기도하되, 특히 새벽(또는 아침)에 그리 하기를 힘썼습니까? 새벽에(아침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우시되, 종종 새벽에(아침에) 그리 하셨습니다. 즉 출애굽한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에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셨으며(출14:24,25), 또한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들이 앗수르 18만 대군에 의해 포위, 고립되었을 때도 그 천사를 보내 18만 4천 명을 모두 몰살시키셨던 것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신다’고 노래한 고라 자손들의 시처럼 말입니다.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출14:24,25) /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왕하19:35)
믿음의 선진들은 왜 특히 새벽(아침)에 기도하기를 힘썼는가?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우시되, 종종 새벽에(아침에) 그리 하셨기 때문이다. |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항상 기도하되, 특별히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되, 특별히 아침에 정결하고도 경건한 마음으로 그리 하고 있느냔 말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새벽에 하나님을 찾는 자가 곧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히, 새벽에)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새벽(아침) 기도란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림으로써 매일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두는 행위요, 또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선물임을 고백하면서 매일을 기도로 여는 행위이다. |
결국 새벽(아침) 기도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림으로써 매일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두는 행위요, 또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선물임을 고백하면서 매일을 기도로 여는 행위인 것입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8:8)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시143:8)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지금 영적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고통의 밤중에 있습니까? 이럴 때 일수록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매일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두시기 바랍니다. 이럴 때 일수록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선물임을 고백하면서 기도로 매일을 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예비해두신 기쁨의 새날이 밝아올 것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할렐루야!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매일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두라!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선물임을 고백하면서 기도로 매일을 열라! 하나님이 예비해두신 기쁨의 새날이 밝아올 것을 기대하면서 기도로 나아가자! |
(8) 묵상기도: 심정을 통하는 기도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창24:63) |
* 묵상기도는 곧 마음의 묵상입니다.
이삭은 평소 습관처럼 이 날도 고요한 저녁 무렵 한적한 들판에 나아가 하나님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조용히 기도드리고 있었습니다. 즉 어머니 사라의 부재(창23:1,2)와 부친 아브라함의 연로함(창24:1), 이로 말미암은 집안의 여러 가지 문제들, 무엇보다도 당면한 자신의 결혼 문제 등을 놓고서 말입니다.
이삭은 습관을 따라 고요한 저녁 무렵 한적한 들판에 나아가 하나님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조용히 기도드렸다. |
한편, 본문은 여기서 이삭이 어떻게 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묵상(또는 묵상기도)입니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63절 상) 곧 그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거나(‘묵상’은 히브리어로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는 뜻) 또는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소위 ‘묵상기도’로 조용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묵상기도란 작은 소리로 읊조리거나,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드리는 기도. 시편 19편에서 ‘내 입의 말’과 대비되는 ‘마음의 묵상’이다. |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삭처럼, ‘습관을 따라’(눅22:39) 고요한 저녁 무렵 한적한 곳에 나아가 당면한 문제들을 놓고 조용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또한 한나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간절히 기도하되, 때로는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집중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삼상1:12,13)
정리컨대, 묵상기도란 작은 소리로 읊조리거나 또는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하는 기도를 가리킵니다. 즉 시편 19편에서 ‘내 입의 말’과 대비되는 ‘마음의 묵상’ 말입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지금 우리는 어떤가? 내 입술의 말(소리 내서 기도하거나) 또는 마음의 묵상(묵상기도)로 하나님 앞에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는가? |
* 묵상기도는 명상, 관상기도, 마인드컨트롤이 아닙니다.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 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삼상1:15) |
오늘날 이와 같은 묵상기도를 종종 초월적 명상, 관상기도, 마인드컨트롤 등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은 (묵상기도와) 염연히 다른 것들입니다.
초월적 명상은 눈을 감고 차분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되, 마음을 비우고 모든 생각과 감정을 지움으로써(지․정․의의 활동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무아의 경지에 도달, 무의식 상태에서 우주적 신 내지는 에너지의 근원을 만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불교, 힌두교, 요가, 뉴에이지). 관상기도 역시 모든 생각과 의식이 사라져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무의식 상태에서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만난다고 주장합니다(로마 가톨릭, 다원화 기독교). 마인드컨트롤(mind-control)은 정신통제, 최면이나 자기 암시 등을 가리키구요.
묵상은 초월적 명상이나 관상기도가 아니며, 마인드컨트롤은 더더욱 아니다. |
그러나 묵상은 초월적 명상이나 관상기도가 아닙니다. 마인드컨트롤은 더더욱 아닙니다. 어째서입니까? 단순히 눈을 감고 차분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내 심정을 통하는(쏟아놓는) 시간이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삼상1:15) 또한 모든 생각과 의식이 사라져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의 세계 안에서 지․정․의를 가지고 전 인격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묵상기도는 단순히 눈을 감고 차분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내 심정을 통하는(쏟아놓는) 시간이요, (모든 생각과 의식이 사라져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의식의 세계 안에서 지․정․의를 가지고 전 인격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이다. |
더군다나 무의식 상태에서 막연한 대상(우주적 신, 에너지의 근원)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인 것입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시19: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또한 성령님을 힘입음으로써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묵상기도를 초월적 명상 내지는 관상기도, 마인드컨트롤 등과 혼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단순히 눈을 감고 차분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내 심정을 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분명한 의식적 세계 안에서 지․정․의를 가지고 전 인격으로 하나님과 교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또한 성령님을 힘입음으로써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묵상기도를 초월적 명상 내지는 관상기도, 마인드컨트롤 등과 혼동하고 있지는 않는가? 단순히 눈을 감고 차분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차원에만 머물고 있지는 않는가? 오히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심정을 통하는 데에까지 나아가자! 분명한 의식적 세계 안에서 지․정․의를 가지고 전 인격으로 하나님과 교통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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