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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믿음 (눅4:23~30절)
독수리나 곰을 박제로 만들어 전시해 놓은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박제된 독수리나 곰은 살아 있을 때와 똑같습니다. 독수리는 눈이 반짝반짝하고 곰은 발톱을 드러내고 지금이라도 뛰어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은 죽었고 생명이 없어 조금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적인 박제된 믿음은 종교적인 형식이나 의식은 잘 행하지만 그 안에 생명력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신앙이 아니면 그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하신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설교하실 때에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놀랍게 여기며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도 여기지 않고 단지 목수인 요셉의 아들로만 판단하고 무시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는 자가 없다.’고 하시며 자신이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는 원인이 결코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사악함과 어리석음을 함께 꾸짖는 말씀입니다. 저들이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을 순수한 마음으로 믿고 주님을 구주로 고백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기들의 죄를 고백했어야 옳았습니다. 주님은 이사야 61:1절에 있는 말씀 즉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 말 말씀이 곧 자신에게 응하셨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숨기시던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고향에서는 밝히 공개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은총이기 때문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은총을 받은 고향 사람들은 주님을 경외하고 환영했어야 옳았지만 저들은 반대로 주님을 조롱하고 비웃고 거부했습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는 말 속에는 가난하고 배움도 없는 천박한 목수의 아들이 자신을 유대인의 소망인 메시야로 위장했다는 비웃음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기심과 질투심, 시기심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하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나사렛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영안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은 사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한다.’는 마가복음 4:12절의 말씀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지 않고 배척하고 거부하는 고향 사람들에게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와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이 사람들 역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심판하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시절에 3년 6개월 동안 이스라엘 온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을 때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그 참담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특히 재산이 빈궁했던 과부들의 삶은 하루를 겨우 연명하는 극한의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가뭄에서 엘리야를 지키기 위해 그를 베니게의 큰 도시 시돈에 있는 작은 마을 사르밧에 사는 한 이방 과부에게로 보냈습니다. ‘사르밧’이라는 말의 뜻은 ‘녹이는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격렬한 시련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고 하셨을 때 엘리야는 그 과부가 기근이 끝날 때까지 자신에게 음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부유한 과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부는 한 줌의 밀가루를 바라보며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마지막 빵을 만들어 먹으려는 참으로 가난하고 가엾은 사람이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몸부림치는 슬픈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녀로 하여금 자기의 종 엘리야 선지자에게 음식을 제공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자기 앞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음식을 요구한 것입니다. 엘리야의 출현은 그녀에게 있어서 칠흑같은 어둠에 빛이 비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 사르밧 과부의 삶은 절망에서 광명으로, 슬픔에서 소망으로 변화되는 삶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어찌 우연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사르밧 과부의 삶을 지켜보고 계셨던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녀가 근본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을 감동시켜 성취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르밧 과부의 신앙에 대하여 고향 사람들에게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설교의 말씀을 쉽게 풀이하면 극심한 가뭄 끝에 마지막 남은 한 웅큼의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판에 하나님의 선지자를 섬기라는 말씀을 순종할 이스라엘 여인은 그 당시에 한 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사르밧 과부가 은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성품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은 그녀의 생존과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엘리야의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녀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최후의 것, 자기 전부를 드리는 것을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마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참모습입니다. 철저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것을 먼저 추구하는 모습이야말로 신앙인의 바른 자세요,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적인 강퍅함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유순한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그녀를 향한 엘리야의 말은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그리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요구대로 하였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한 웅큼의 가루를 그녀의 주린 영혼과 함께 엘리야에게 바쳤습니다. 이는 사실상 하나님의 명령 앞에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 앞에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던져버린 것입니다. 그녀에게 일찍이 이러한 행동이나 소망에 대한 선례가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방 땅에서 여호와에 대한 이러한 신앙의 선례나 모범을 보았던 적도, 들었던 적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단지 자신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권능에 대한 믿음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통의 가루는 바닥이 나지 않았고 병의 기름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 날 동안 그들은 기적의 떡을 먹으며 부족함이 없이 생존했습니다. 참으로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통의 바닥에 가루가 있는 한 그들을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현대인들은 너무나 풍족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까짓 한 줌의 밀가루가 대수냐고 묻겠지만 3년이라는 대 기근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죽어가는 상황에서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신 분임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오라비의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을 믿지 못하는 마르다에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되 전적으로 의지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었고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인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주어졌을 때에 그 말씀을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자기가 선택할 것인데 사르밧 과부는 현실의 상황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의 과부들은 말씀을 듣고도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반대로 사르밧 과부는 이방 여인이지만 하나님이 종 엘리야의 말을 듣고 그 말씀을 믿기로 작정을 하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서 실천하는 믿음에 대해서 기적을 이루어 준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이란 쉽게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외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서커스를 본 적이 있습니까. 미국의 유명한 블론딘 이라는 줄타기 서커스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서 미국과 캐나다 양쪽에 줄을 쳐 놓고 장대를 들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올 때는 조그마한 손수레를 허리에 걸고 그 줄을 타고서 건너왔습니다. 밑에는 천길만길 폭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아찔합니다. 캐나다 편에서나 미국 편에서 수많은 관중들이 모여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때 그가 미국 편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 수레에 내가 사람을 태워서 이 줄을 타고 캐나다 편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모두 다 "믿습니다." "그러면 누구 자원하는 사람 여기 수레에 타십시오. 내가 안전하게 모시고 가겠습니다." 한 사람도 안 탔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것은 벼랑에서 뛰어내리는 것인데 모두 다 이 사람이 손수레에 사람을 싣고 그 외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갈 것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수레에 자원해서 올라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 믿음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다고 하지만 행동을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르밧의 과부가 엘리야에게 물 한 그릇과 빵을 만들어 주었다는 성경을 우리가 읽을 때 마음으로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여러분이 직접 당하면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보고 그렇게 못하겠다고 말했으면 그대로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말을 듣고 그녀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했습니다. 죽어도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실천한 결과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르밧 과부의 일을 말씀하셨을 때 고향 사람들은 그 말씀의 진의를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가 찾아온 것이 그녀에게 일생의 행운이요 빛이요 생명이었던 것처럼 고향 나사렛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일대의 영광이요 행운이요 구원이요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사실을 바로 깨닫고 주님을 영접했더라면 놀라운 구원의 축복이 나타났을 것인데 아직은 저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은 이어서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아람 사람 나아만 장군이 받은 구원을 예로 들어 다시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크고 존귀한 자였으며 굉장한 명성과 부를 누렸던 자였습니다. 그는 재산과 명예, 왕의 은총과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지만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은 그가 문둥병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둥병은 그에게 있는 모든 것을 무력화시켰으며 아무 소용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육신의 건강을 잃었고 영적으로 무지했으며 살아 있는 하나님에 대해 무감각했고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육신적으로는 치명적인 문둥병을 앓고 있었고 영적으로는 무서운 불신앙을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에게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와서 자기 집에서 일하는 계집종이 자기 부인에게 하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더라면 좋았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이스라엘에는 자기의 병을 고칠 수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참으로 헛소문 같은 말이었지만 그는 이 계집종의 말을 믿고 왕에게 나아가 이스라엘에 가도록 허락을 받고 예물을 준비합니다. 나아만은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갑니다. 은 십 달란트는 340kg에 해당하며 금 육천 개도 약 69kg에 해당합니다. 거액의 재물을 준비한 것입니다. 나아만이 생각하기에 문둥병을 고치려면 이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문둥병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불치의 병입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오직 도움은 여호와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영적 무지였습니다.
*시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시68:20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실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
나아만의 첫 번째 실수는 병을 치료하는데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금이나 은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아만의 두 번째 실수는 치료하는 사람을 잘못 찾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집의 계집종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선지자에게 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집종의 말을 무시하고 이스라엘 왕을 찾아갔습니다. 즉 잘못된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146: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에 인본주의적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만 이것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문제를 하나님 앞에 들고 가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의 방문은 이스라엘 왕국에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서 자기의 옷을 찢고 불안에 떨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 선지자가 사람을 보내어 나아만을 자기에게 오도록 합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에 도착할 때에 엘리사는 사환을 통하여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나아만은 화를 잘 내는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엘리사의 사환의 말을 듣고 즉시 대노하여 일행을 데리고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는 엘리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권세와 명예만을 먼저 생각하고 분노를 터뜨린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와는 전혀 반대의 행동을 취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만은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문둥병이 단지 요단강물에 몸을 일곱 번 씻는다고 나을 리가 있겠느냐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아 와서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사실 엘리사가 이러한 치료법을 제공했더라면 그가 순순히 순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치료 방법을 제시하자 그만 몸을 돌려 분노하고 떠나버렸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이스라엘의 선지자, 곧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했더라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엘리사의 말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약4: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심지어 살아온 체험까지도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하고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자만이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교제해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얄팍한 내 신앙의 지식이나 체험을 앞세우고 나가다가는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나아만은 일종의 혼합 종교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도 빌리고, 의식은 이방 종교에서 배운 대로 행하며 거기에 마술적인 힘을 가미하고자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순종은 억지로 하는 순종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사가 말한 대로 행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천진난만한 어린애와 같은 성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록 종들의 말이지만 자신의 어리석음을 지적해 주는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듣고 이내 순종합니다. 그 결과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의 순종은 타의에 의한 것이었으며 억지로 하는 순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린 이스라엘 계집종의 말을 듣고 믿음으로 행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지만 실제 당해보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원수의 나라입니다. 함부로 가서 체포당할 수도 있습니다.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과연 엘리사가 문둥병을 고칠지 못 고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집종의 말을 듣고 믿고 그 말을 수긍하고 실천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와 같이 눈에는 아무 증거 아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아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모험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생사를 걸어놓은 모험입니다. 천길만길 벼랑에 믿음으로 한 발자국 들여놓는 것입니다. 그가 엘리사의 집에 갔을 때에 엘리사가 직접 마중을 나오지 않고 그의 종 게하시가 나와서 하는 말에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명색이 자기는 아람의 군대 장관인데 주인이 나오지 않고 종이 나와서 하는 말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가 있지. 분을 내고 돌아서는데 그 종들이 말합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라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니이까” 믿음은 동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믿음이 약할 때 옆에 있는 사람이 도와주면 굉장히 좋습니다. 그대로 돌아갈 뻔했는데 자기 종들이 간청하는 바람에 그는 요단강으로 갔습니다. 요단강에 들어가서 흙탕물에 들어가 몸을 씻습니다. 한 번. 두 번, 여섯 번. 여전히 문둥이입니다. “일곱 번” 일곱 번째 씻고 올라오니까 문둥이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깨끗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도 어린 이스라엘 계집종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까지 와서 행동하는 믿음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 있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복제된 믿음이 있고,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의 형식은 둘 다 가지고 있어도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믿는다. 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면 자기의 몸을 주님을 믿고 맡기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벼랑 끝에 설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믿음을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고, 자기가 의지할 곳은 다 의지해 봅니다. 그러면서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복제된 신앙인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목숨을 내어 건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벼랑 끝에 서서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주님을 믿을 때 그 신앙은 살아 있는 믿음이 되고 거기에 주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의 무덤가에 가셨을 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주님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 무덤 문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아라고 하셨습니다. 마르다가 울상이 되어서 예수님을 쳐다보고 “주여, 우리 오라버니가 무덤에 들어간 지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그런데 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합니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결단을 못 내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마르다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생각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결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결단을 내리고 돌을 옮겼습니다. 내가 정말 믿으면 끝까지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마르다와 마리아가 믿음을 보여 주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는 힘을 다해서 돌을 옮겨 놓으니까 썩은 냄새가 무덤에서 진동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수의를 동인 채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실천하면 주님이 기적을 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현실과 타협만 하고 믿음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적이 일어날 것을 언제나 기대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기적이 없으면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기적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이 기적이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것이 기적이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깨끗이 하고, 파도를 잠잠하게 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바구니에 남기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그렇게 한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기적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기적을 빼놓으면 겉장밖에 없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은 모두 다 기적의 이야기요, 기적이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감사하지 아니하면 믿을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히 종교적이었으나 죽은 신앙, 형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에 대한 지식을 알고 의식은 집행하지만 살아있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엘리야 때 가뭄이 와도 하나님의 기적을 믿지 않았습니다. 엘리사 시대 많은 나병 환자들이 있었어도 치유 받을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없는 종교는 의식에 묶인 죽은 박제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사렙다의 과부처럼 받아들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처럼 명예와 권세를 다 잃어버릴지라도 이스라엘 적국의 나라에 가서 엘리사에게 몸을 맡겨 보자. 이처럼 실천하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이요, 이런 믿음이 있으면 적으면 적은 데로, 크면 큰 데로 오늘날도 주님은 기적을 행하셔서 여러분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역사하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을 행하여 주님의 기적 속에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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