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베이커리와 아프리카편의점
유병록
1
흰 가운을 입는다 눈사람의 몸통에 꽂힌 막대 같은 손으로 밀가루 반죽에 칼집을 내고 오븐에 넣는다 얼마 전 반죽덩어리처럼 누워 있던 아내는 일어나지 못했다 많은 칼집을 지닌 아내를 무덤에 넣고 봉분을 닫았다 익어가는 반죽덩어리에서 모락모락 사라지는 영혼, 노릇노릇해지는 몸, 오븐을 열자 열기가 쏟아진다 봄날의 눈사람처럼 땀이 흐른다 눈과 코, 끝내 온몸이 흘러내릴 것만 같다 밖을 내다보자 맞은편 편의점이 보인다 아르바이트생이 열어젖히는 냉장고 문, 저 얼음벽돌 속에 녹아내리는 몸을 집어넣고 싶다
2
편의점은 커다란 냉장고, 주인만이 플러그를 뽑을 수 있어요 천장 모서리에 걸린 볼록거울을 들여다보자 몇 달째 진열대에 처박혀 있는 정어리의 얼굴, 추위가 불러온 잠 속으로 몇 걸음 들어서다 화들짝 도망쳐 나와요 냉동차에 갇혀 죽었다는 사람이 떠올라요 냉기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도 얼어 죽은 사내, 그도 통조림에 갇힌 정어리를 떠올렸을까요 살갗에 얼음꽃이 돋아날 때 적도까지 헤엄쳐가는 꿈을 꾸었을까요 교대 근무자를 기다리는 아침, 동면에서 풀려난 물고기처럼 피를 녹이고 싶어요 맞은편 베이커리, 아프리카처럼 뜨거운 저 오븐 속으로 헤엄쳐 가고 싶어요
3
눈사람 베이커리와 아프리카 편의점이
마주 보고 있는 골목
어쩌다 눈사람과 정어리의 눈이 마주친다
하나의 심장으로 서로 다른 표정을 짓는 샴쌍둥이처럼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
-----------------
유병록 / 1982년 충북 옥천 출생. 2010년〈동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첫댓글 어쩌다 한대와 열대가 샴쌍둥이처럼 마주 보고 있는 저 상가 골목에서
나는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일상을 관조하게 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