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기업으로 삼은 다윗
시편 16:5,6,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기업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찬송가 435장(나의 영원하신 기업)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기업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분깃’이라는 말도 같은 의미로 여기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하나님께서 어떤 민족이나 가문이나 가정에 정당한 몫으로 분배해준 삶의 터가 되는 재산을 가리킵니다. 농사를 짓는 논밭이나 과수를 짓는 감람원이나 포도원과 가축들을 풀어놓고 기르는 목초지, 그리고 집을 짓고 살 수 있는 거주지가 이러한 기업에 해당합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기업이 갖는 의미는 지극히 큰 것입니다. 기업을 지키고 그것을 자자손손에게 전승하는 것은 신앙의 진실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증명한 예로 구약 시대 나봇이라는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악한 왕 아합 왕이 이스르엘 평원에 별궁을 짓고 별궁 곁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사서 자기의 나물 밭이나 채소 밭으로 가꾸려고 나봇을 불러서 가격 흥정을 했습니다. 돈으로 값을 치러 주거나 그보다 더 좋은 다른 포도원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하면서 나봇의 포도원을 달라고 청했을 때에 나봇은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시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나봇의 이 대답 속에는 그의 포도원이 자기 개인의 것이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받았고 또 자기 후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주어야 할 유산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그의 선민 이스라엘을 인도해들여서 각 지파별, 가문별로 기업을 나눠주어서 지금까지 그 기업을 지켜온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지키는 사명이요 신앙의 증거이기 때문에, 그것을 왕이라도 돈 받고 넘겨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불의하고 탐욕스런 왕에게 그 포도원을 팔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알면서도 그는 단호하게 하나님께서 금지한 것을 할 수 없다고 포도원을 팔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결국 왕의 아내 이세벨의 간계로 그와 그의 아들들이 다 돌을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기업을 지키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알았고 그 신앙으로 인하여 순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나봇을 죽인 일로 인하여 아합 왕과 그 아내 이세벨과 그의 손자들 70명과 아합의 가문에 속한 모든 자손들을 다 처참하게 죽여 멸족시켰습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화살에 맞아 죽거나 부하 예후의 화살에 등이 뚫려서 죽었고 그 자손들의 머리가 다 베어져 소쿠리에 담겨 예후에게 전달되었으며 간악한 이세벨 왕비도 결국 왕궁의 창밖에 내던져져서 그 몸이 개에 뜯혀 먹히는 처참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기업을 지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데, 다윗은 자기의 기업을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기업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에게 가장 좋은 땅, 가장 좋은 집, 가장 좋은 목초지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것들을 자기에게 속한 기업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을 지켜 자손들에게 물려줄 가장 중요한 재산으로 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산업, 자신의 잔의 소득, 자기의 분깃, 자기의 기업으로 알았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비록 왕이었지만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았던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늘 부러워하였습니다. 레위인들은 목초지와 포도원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서 섬기는 수고를 따라 십일조와 각종 제사의 고기와 밀가루들을 가지고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제단을 섬기는 그들은 그 제단으로부터 먹고 마시게 해주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자기를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친히 먹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바로 그러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너무나 부러워서 그가 법궤를 모시고 예루살렘으로 이끌어들일 때에 세마포 옷감으로 만든 에봇을 입고 법궤 앞에서 춤을 추면서 예루살렘에 들어왔습니다. 그가 얼마나 기뻐서 춤을 추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잊고 지냈는지, 사울 왕 미갈이 창문으로 그것을 보고서 왕으로 체면 없다고 나중에 직접 면박을 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모든 기쁨의 춤을 춘 것이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이라고 정색하며 대답하였습니다. 믿음의 눈이 없이 다윗의 이 거룩한 기쁨과 감사의 춤을 보지 않고 육신적인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왕을 가족들 앞에서 비난했던 미갈은 그때부터 다윗 왕의 눈밖에 완전히 나서 아이도 낳지 못한 채 쓸쓸하게 살았습니다. 미갈은 본래 다윗의 첫 아내로서 다윗의 깊은 애정의 대상이었지만 다윗의 심령 깊은 곳에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갈망과 헌신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은 나중에 완전히 버림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17편 14~15절에 보면 다윗의 이렇듯 하나님 한 분만을 자기의 유일한 기업으로 삼는 그의 신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분깃을 받아 땅에서 재물로 만족하며 자녀로 만족하며 남은 유산은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일반적인 이스라엘 사람들도 잘못 된 것은 아니지만, 자기는 그들보다 더 온전하고 영원하고 더 영광스러운 기업을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세상 재물, 자기 가문의 번영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자기의 축복의 기업을 하나님이라고 여기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가장 큰 상급이요 자기의 유산이요 자기의 분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무엇과도 절대로 바꾸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봇이 자기의 기업 포도원을 목숨걸고 지킨 것처럼 자기도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다른 어느 것도 부러워하지 않고 그를 가까이 섬기는 것을 가장 큰 행복이요 특권이요 영광으로 삼겠다고 여기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27편 4절에서 그의 가장 유일한 소원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기업으로 삼은 자의 소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자기의 기업, 자기의 완전한 분깃으로 삼고 그 어떤 것과 바꾸지 않으려 한 다윗이기에, 하나님께서도 그를 두고서 이르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사도행전 13:22)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하신 대로 이 세상 사는 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성실하게 다 챙겨주시며 우리를 끝까지 돌보아주실 것이 확실하니, 우리가 부름받은 자리 곧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성실하게 생활하되 우리의 영원하고 완전한 기업이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우리 구주 예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한 자가 됩시다. 우리 주님을 섬기는 것을 우리의 행복의 근원으로 삼읍시다.
그리할진대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풍부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요 나아가 세상 것으로 얻을 수 없는 기이하고 놀라운 기쁨과 행복과 영광과 활력을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넘치게 부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