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高麗買書利害箚子(고려가 중국에서 서적을 구매하는데 대한 이해를 논한 차자) - 蘇軾(소식)
臣이 엎드려 보니, 高麗에서 보낸 사신들이 한 번 들어와 朝貢할 때마다 朝廷과 淮河‧浙江 두 路에서 이들에게 선물을 하사하고 음식을 내리고 연회를 베풀고 위로하는 비용이 약 10여만 貫인데, 이들이 머무는 관사를 수리하고 行市를 시끄럽게 동원하고 사람과 선박을 調發하는 비용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官吏들이 약간의 선물을 얻는 것을 제외하고는 털끝만 한 이익이 없고 다섯 가지 폐해만 있습니다.
高麗에서 朝貢으로 올려서 얻는 것은 모두 노리개로 쓸모없는 물건들인데, 우리가 허비하는 것은 모두 國庫에 있는 財貨들이요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폐해입니다.
사신이 이르는 곳마다 사람과 말과 여러 가지 물건을 빌려주느라 行市를 교란시키며 使臣들이 머무는 관사를 수리하느라 백성들의 힘이 갑절로 들어가고 배상하는 비용이 있게 되니, 이것이 두 번째 폐해입니다.
高麗가 얻어가는 하사품을 만약 契丹(거란)에 나누어주지 않는다면, 契丹이 어찌 高麗가 와서 朝貢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겠습니까? 이는 분명히 적에게 兵器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糧食을 가져다주는 미련한 행위이니, 이것이 세 번째 폐해입니다.
高麗가 겉으로는 의리를 사모하여 와서 朝會한다고 하나, 실상은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高麗의 本心을 헤아려보면 끝내 반드시 북쪽 오랑캐(契丹)에게 이용당할 것이니, 어째서인가 하면 오랑캐들은 충분히 高麗의 목숨(운명)을 제압하고 있으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신들이 이르는 곳마다 山川의 지형과 명승지를 그림으로 그려서 우리나라의 허실을 엿보고 헤아리니, 어찌 다시 좋은 뜻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네 번째 폐해입니다.
慶曆 연간(1041~1048)에 契丹이 盟約을 배신하고자 할 적에 먼저 塘泊을 더 설치했다는 것을 가지고 中國의 잘못이라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저들의 동맹국인 高麗를 불러와서 그들로 하여금 해마다 들어와 貢物을 바치게 한다면 塘泊보다 심한 트집거리가 될 것입니다.
다행히 지금 契丹이 공손하여 감히 사단을 일으키지 않고 있지만 만일 후일에 매우 호걸스럽고 간교한 오랑캐가 있어서 이것을 가지고 口實을 삼는다면 朝廷에서 어떻게 답변할지 알지 못하겠으니, 이것이 다섯 번째 폐해입니다.
臣은 마음속으로 이 다섯 가지 폐해를 알기에, 熙寧 연간(1069~1077)에 杭州通判으로 있을 적에 저들이 선물을 보낸 文書 가운데에 本朝의 正朔을 쓰지 않은 것을 트집잡아 저들이 바치는 물건을 물리쳤다가 저들이 文書에 우리의 年號를 다시 써넣은 뒤에야 받아주었으며, 이어서 빨리 출발하도록 독촉하여 머물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근년에 나가 杭州를 맡게 되자, 그들이 올린 金塔을 물리치고 아예 朝廷에 上奏하지 않았고, 또 沿路에서 이들을 접대하는 일을 너무 융숭하지 않게 하도록 분명하게 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과 내통한 교활한 商人과 僧侶들을 유배 보낼 것을 청하였고, 아울러 祖宗의 ≪編勅≫에 따라 杭州와 明州에서 모두 高麗로 배를 출발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 法을 어긴 자는 徒刑 2년에 처하고 財貨를 몰수해서 賞으로 충당할 것을 청했습니다. 아울러 元豐 8년(1085) 9월에 처음으로 제정된 ‘舶客에게 마음대로 外夷를 데리고 들어와 조공하고 또 물건을 팔 수 있도록 허락한 조항’을 삭제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이상의 몇 가지 일은 모두 朝廷에서 일일이 시행하도록 허락을 받았으니, 이것은 모두 臣이 평소에 高麗의 조공하는 일을 차츰 억제해서 거의 점차 오지 않도록 만듦으로써, 朝廷을 위해 영원한 폐해를 사라지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臣은 지금 이미 禮部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이것은 바로 제가 맡은 일입니다. 근자에 館伴으로 있는 中書舍人 陳軒 등이 相國寺에 있는 점포를 모두 강제로 差出하여 高麗 사신이 머무는 관사로 들여보내 점포를 열게 해서 이로써 사신의 매매에 대비할 것을 청한 것을 보니, 이것은 비단 시장을 옮기고 사람들을 움직여서 작은 나라의 陪臣을 받들어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겸하여 또한 서울에 있는 상점들을 강제로 배정해서 관리들이 널리 물건을 요구하고 취하는 것을 도와주는 행위로써 폐해가 적지 않았습니다.
臣은 이 때문에 이것을 都省(中書省)에 자세히 보고해서 시행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法을 어기고 폐단을 일으킨 관리들이 모두 都省에서 조금도 취조를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 陳軒 등이 신청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國子監에 公文을 보내어 여러 가지 文字(서책)를 수매하였는데, 이 안에는 ≪冊府元龜≫와 歷代의 史冊들과 ≪勅式≫이 들어 있었습니다. 國子監에서는 이것이 온당치 못함을 알고 다시 都省에 보고하여 이것을 禮部로 내려보내서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臣이 삼가 ≪漢書≫를 살펴보니, 東平王 劉宇가 朝聘 왔을 적에 上疏文을 올려서 諸子의 책과 太史公(司馬遷)의 글을 요구하자, 당시 大臣이 이르기를 “諸侯가 朝聘을 올 때에는 文章(典章과 制度)을 상고하고 法度를 바로잡아서 도리가 아닌 것은 말하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 東平王은 다행히 朝聘을 오자 예절에 맞게 하고 법도를 삼가서 잘못을 막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는 여러 책을 하사해줄 것을 요구하니, 朝聘하는 意義가 아닙니다. 諸子의 책들은 내용이 혹 經學과 상반되어 聖人을 비난하고, 혹 귀신의 일을 밝혀서 괴이한 일들을 믿으며, 太史公의 책에는 權謀術數를 부리는 온갖 책략과 漢나라가 일어난 초기에 謀臣들의 기이한 계책과 天官의 災異와 지형의 중요한 요새가 들어 있어서 모두 諸侯王에게 있어야 할 내용이 아니니, 하사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자, 詔令을 내려 이것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臣은 엎드려 생각하건대, 東平王은 骨肉의 至親으로 특별히 藩臣의 지위를 맡고 있었는데도 下賜받을 수 없었는데, 하물며 海外의 먼 오랑캐이고 契丹의 동맹국에 있어서이겠습니까?
臣이 들으니 河北 지방의 榷場에서 문서(서책)를 반출하는 것을 금지하여 그 法이 매우 엄격하다고 하니, 이는 오직 契丹 때문입니다. 지금 高麗와 契丹이 무엇이 다릅니까? 만약 高麗에게 주어도 된다면 榷場의 法 또한 아울러 폐지해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들으니, 전년에 高麗의 사신이 ≪太平御覽≫을 하사해줄 것을 청하자, 先帝(神宗)께서는 詔令을 내려 館伴으로 하여금 東平王의 故事를 구실 삼아 물리치게 하셨고, 근일에 또다시 요청하자 조칙을 내려 先帝의 遺旨라 칭하고 또다시 주지 않으셨다 합니다.
지금 歷代의 史冊과 ≪冊府元龜≫와 ≪北史≫는 엎드려 생각하건대 지난번에 본래 마땅히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이제 만약 곧바로 주어서 이것을 준례로 삼는다면, 위로는 先帝의 遺旨에 어긋나고 아래로는 이번에 ≪太平御覽≫을 하사하지 않은 聖旨와 차이가 있어서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都省에 보고하여 다만 자세히 참작해서 指揮를 내려줄 것을 바랐으니, 이것은 크게 잘못한 일이 아닌데도 곧바로 업무를 담당하였던 아전들이 견책을 받아 죄인의 장부에 기록되었습니다.
臣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이들에게는 적용할 만한 죄가 없고 비록 가벼운 견책을 받아 죄인의 장부에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지극히 지엽적인 일이라서 臣에게 털끝만 한 손실도 없으니, 臣이 이 때문에 上奏하여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석히 여기는 것은 만족할 줄 모르는 오랑캐의 요구를 사사건건 간곡히 따르는 것이니, 관리들이 만일 그들의 뜻을 따라 비록 백성들을 동원하고 물건을 해치더라도 죄로 여기지 않으며, 누군가 조금이라도 이들을 抑制하는 뜻이 있으면 곧 힐책하게 될 것입니다. 이 뒤에는 감히 저들의 요청을 거역하는 사람이 없어 저들이 의기양양하고 교만해져서 더욱 자주 오게 된다면, 그 폐해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지극히 論하는 것입니다. (동양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