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한림읍 귀덕리 818번지(귀덕로30-2)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
김대원(金大元. 1910.01.25.∼1958.07.19.) 지사는 한림면 귀덕리 818번지가 원적지이며 한림리 1399번지에서 아버지 김창우(金昶宇) 어머니 박두오의 독자로 태어났으며 슬하에는 4남2녀를 두었다. 김창우는 귀덕리에서 태어나 1928년 7월 30일부터 1945년 11월 29일까지 한림면장을 지낸 사람이다. 이 시기의 면장은 해당 면의 어업조합장(해녀조합장)을 겸직하기도 했다. 명월리 명월대 옆 바위에는 기부자 명단에 金昶宇 이름이 새겨져 있고, 대림리 비구물 옆에는 昭和9년(1934)에 세워진 面長金昶宇紀念碑가 있으며, 1952년 한림공업고등학원 기성회장을 맡기도 했으므로 한림면 지역의 유지였음을 알 수 있다.
김대원 지사는 광주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중인 1929년 5∼6월 최규문(崔圭文)·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 등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을 주창하는 비밀결사인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이 독서회는 광주지역의 항일학생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것으로 전 회원을 5개조로 편성하였는데 김대원을 비롯한 오쾌일·김상환·김보섭·윤창하(尹敞夏) 등 5명이 각 조의 책임자를 맡았다. 지사는 조직교양부의 책임위원에 선임되어 항일의식을 고취하는데 앞장섰다.
독서회를 통한 조선인 학생들의 항일의식이 고조되고 있던 차에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한·일 학생간의 다툼이라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시작되었으나, 밑바탕에는 일제의 민족 차별 정책과 일본인 학생들의 한국 학생에 대한 멸시가 있었다. 독서회는 우발적인 싸움을 항일투쟁으로 전환시키도록 학생들에게 지침을 내리고 전단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지사는 광주고보생 가두시위 대열의 최선봉에서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주창하였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광주학생독립만세 시위에 대해서 1930년 5월 대구복심법원은 금고 4월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하였다. 또한 독서회 운동에 대해서는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3년형이 언도되자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조국광복 후 지사는 1952년 5월 자유당 후보로 북제주군 선거구에서 출마해 초대 도의회 의원으로 피선되어 나라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늘 일제의 모진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으며 1958년 7월 19일 49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하셨으며 유해는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409호
《작성 22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