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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묵상글 (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 새 시대를 여는. 등 )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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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01 03:01
- 새 시대를 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2022
“하느님, 온갖 좋은 일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니
저희가 즐거운 마음으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며
새 시대를 열어주신 하느님의 은총을 찬양하고 그 은총의 완성을 기뻐하게 하소서.”
오늘 축일의 이 예물 기도는 오늘 축일의 의미를 잘 담고 있습니다.
전부터 새해 첫날을 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는지 의문이 있었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의문의 한 실마리가 풀린 것도 같아 기쁘기도 합니다.
세상이 세상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었음을 기념할 때
우리는 교회 달력으로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기념하자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은 새해가 아니라 새 시대이어야 하고,
우리에게는 새해가 열리는 정도를 넘어 새 시대가 열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새해가 열리는 것의 의미는 잘 알겠는데
새 시대가 열렸다는 것의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성탄 신비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느님이신 분이 이 세상에 탄생하심으로 인간인 우리가 신화하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하느님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연결 고리가 되시고,
그 중심에 계시는 분이 바로 성모 마리아십니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심으로써
당신은 천주의 어머니가 되시고 당신의 아드님처럼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여신 겁니다.
이것을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연결하면
하느님이신 분이 성모의 아들이 되시고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종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새 시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새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우리는 종일 뿐 자녀가 아니었으며,
하느님을 주인님이라고 부를 뿐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고
당연히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아무런 상속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는 옛날에 정실에게서 태어나지 않고
종에게서 태어난 서자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종의 자식으로 아무런 상속을 받지 못하던 것과 같은 거지요.
그런데 이 새 시대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고작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가 아니라
새 시대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겠냐는 말입니다.
작년에 못 이룬 또는 작년에 실패한 것을 올해는 이루고,
지금까지 하지 않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올해 시작하는 그런 정도를 넘어
죄의 종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뀐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는데
새해를 맞아 이 새 시대의 삶을 본격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민수기의 말씀처럼
자신이 복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복이 되는 사람,
악마의 자식처럼 입에서 저주나 욕이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답게 늘 축복을 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어려움과 혼란 가운데 202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강론에서 말씀드렸듯이
그저 물리적인 새해가 아니라 새 시대가
저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열리기를 바라고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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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25년 을사년 (乙巳年)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지난 2024년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특히 지난 연말에 찾아온 많은 아픔은 우리를 더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왜 이렇게 많이 일어났는지….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해지시길 기도합니다.
여행 등을 통한 다양한 경험을 해야만 복잡한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정말 그럴까 싶었습니다.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오신 분과 성지순례를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해외여행을 많이 하셨으니 다른 사람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이분 덕택(?)에 너무 힘든 순례가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싫은 것이 많은지, 그리고 자기 다녀온 경험과 계속해서 비교하시는지,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듣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여행 안에서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가 임마누엘 칸트는 평생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인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의 경험 통로는 책과 사람들과의 대화뿐이었습니다. 여기에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가르치는 데 몰두했습니다. 여행 등의 경험이 전혀 없지만, 그는 엄청난 철학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경험의 객관적 형태보다 자기가 마주한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하더라도 해석하는 힘이 없다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해석은 우리 신앙 안에서 묵상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안에서 분명 깊이 있는 깨우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구세주를 이 세상에 낳아 주신 어머니를 기리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구세주의 어머니시지만, 앞에서 먼저 말씀하시지도 또 행동하시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지만, 특별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도, 또 예수님을 성전에서 다시 찾으셨을 때도 보여주셨던 모습입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면서, 하느님의 뜻을 해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의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모습, 즉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 뜻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지금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생각으로써는 절대로 하느님의 뜻을 알 수도 따를 수도 없게 됩니다.
새해 첫날, 천주의 성모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모습을 따르면서 하느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024년과는 다른, 보다 의미 있는 2025년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타인이 내게 내어주는 시간은 언제나 소중한 선물이다. 지금은 나미브 사막의 폭풍우처럼 희소해졌지만 누군가에게 한 시간 혹은 하루 동안 온전히 집중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토마스 힐란드 에릭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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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2025년을 여는 새해의 첫 날이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요, 세계평화의 날입니다.
‘새해 첫 날’이라 함은 한 해의 다른 날들의 ‘어머니인 날’입니다. 무엇에든지 어머니가 있다는 것, 참 신비로운 일입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있을 수가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어머니는 참 소중합니다. 나아가, 모든 어머니들의 어머니이신, 스스로 계신 오직 한 분이신, ‘어머니이신 하느님’은 그지없이 존귀합니다.
이제 어머니께서는 새로이 한 해를 잉태하시고, 잉태한 한 해를 365일 매일 매일 하루씩 탄생시키실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존귀하신 하느님의 탄생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 대축일” 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사건, 이를 두고 우리는 ‘강생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그야말로 지극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강생을 담은 신비로운 그릇이 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이 사실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좀 듣기에는 거북한 비유이지만, 실로 사람이 개를 사랑한 나머지 개로 태어난 가당치 않는 사건에 해당합니다. 더욱 당혹스런 것은 이제 사람이 하느님을 낳았다고 해서, 사람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일컫습니다. 이는 마치 개가 사람을 낳았다고 해서, 개를 보고 사람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참으로 당혹스런 일입니다.
대체, 이 당혹스런 신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대체,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품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신 일이었습니다. 곧 ‘인간을 하느님의 어머니 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당신 자녀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기 몸 안에 잉태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탄생시키며 살아가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셈입니다. 바로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이 신비의 그릇이요, 통로요, 그 첫 번째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비를 꿰뚫어보았던 중세의 유명한 신비신학자 마에스트로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다”
이 얼마나 놀랍고 어마어마한 일입니까? 그는 동시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1400년 전 마리아한테서 태어났을 뿐, 지금 내 인격, 내 문화,
내 시대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한 해가 시작되는 이 첫 날에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의 축일을 기념하면서, 새로운 한해를 진정으로 사는 길은 우리도 이처럼 “하느님을 낳는 일”일 것입니다. 평화이신 하느님을 낳는 날이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이 특별한 날, 한 해를 잉태하는 날을 맞아, 우리가 “하느님을 낳을 수 있다”는 이 엄청난 신비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에 깊이 뿌리내려야 할 일입니다. 다시 한 번, 이 지고한 축복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진정한 축복이 이루어지길 빕니다.
또한, 오늘은 “세계평화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4년 “세계 평화의 날”을 맞이하여, “형제애,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길”이란 제목으로 담화를 발표하셨습니다.
이 메시지에서 교황께서 강조한 것은 다름 아닌 “형제간의 우애”, 곧 “형제애”였습니다. 교황께서는 ‘평화의 근본도,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도 우애를 재발견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곧 형제애를 회복함으로써 참된 평화를 회복할 수 있음을 일깨우셨습니다. “형제애”야말로 가난한 형제들을 구하고, 경제를 정의롭게 바로 세우며, 참혹한 전쟁을 중지하고, 온갖 부패와 범죄까지도 근절할 수 있는 방법임을 일깨우셨습니다.
오늘, 이 새해의 첫 아침,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빌며, 주님의 축복과 기쁨 속에 우애로 이루어진 평화가 넘쳐나길 빕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주님!
지난 한 해 동안 당신이 하신 일,
그 큰 자비를 제 마음 한가운데 새겨 주소서.
그 자비가 제 중심이 되고,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그 자비를 늘 맨 첫자리에 두고,
그 어느 것도 그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올 해도 그 자비가 날로 커지고, 그 기쁨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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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평화를 빕니다
새해 첫날에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나라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민수기에 보면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6,24-26) 복을 주시는 주체가 우리의 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을 잘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상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신명11,27).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될 것이다”(신명12,28). 결국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그 복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면 그는 분명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편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 소와 새기 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 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에서도 밖에서도 복을 받으려거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말씀을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주님의 말씀에 머물면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하고 그 공허를 채우려 엉뚱한 곳에서 위로받으려 합니다. 술을 찾는 사람도 있고, 쇼핑에 매달리는 사람, 도박이나 다른 무엇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모님은 순종의 모범이십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복된 여인으로 부릅니다. 여러분도 말씀대로 행하는 가운데 복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행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1,45)으로 불리었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갈라3,9).
시편 24,4에서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고 자기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으리라.”라고 말합니다. 허망한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으로 복을 누려야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복을 잃어버립니다. 올 한 해는 세속적인 복을 얻으려 헤매지 않고 주님 안에서 복을 만들고 또 빌어주며 복을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흔들려서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언제라도 그분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우리가 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복인 줄 모르는 까닭은 많은 경우 내 입에 맞는 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올 한 해는 주님의 복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며 그분께서 원하시고 기대하는 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복을 누리기 위해 과거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복에 감사하길 바랍니다. 과거에 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지금 받은 복을 감사할 줄 모르면 더 큰 복을 주어도 복으로 여기지 못하며 앞으로 받을 복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처지에서 감사함을 발견하고 기뻐하시길 빕니다.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을 감싸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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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올해는 ‘을사년(乙巳年)’ 뱀의 해입니다. 뱀은 다양한 문화권과 종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뱀이 탈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동물, 지혜로운 동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동양 철학에서 뱀은 뱀이 자연의 순환, 지혜, 그리고 생명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12지신 중 뱀은 날카로운 통찰력과 결단력을 가진 동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서는 뱀에 대해서 두 가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유혹의 상징입니다.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뱀이 독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뱀에게 물리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어쩌면 그런 점에 착안해서 인간을 유혹한 상징으로 ‘뱀’을 나타냈을지 모릅니다. 저도 산행 중에 뱀을 만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뱀을 피해서 돌아갔습니다. 뱀이 저를 피해서 가는 예는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뱀은 구원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구리 뱀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구리 뱀을 만들어 높이 들었고, 그 뱀을 본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유혹과 시련을 겪지만, 이를 통해 성장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뱀은 인간의 연약함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지혜와 재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뱀에 대해서 성서는 양면성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구리뱀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사명과 십자가의 구속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모세의 구리뱀 이야기는 민수기 21장에 등장하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으로 인해 독사에게 물리자,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도록 명령하십니다. 물린 사람들이 그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자신의 십자가 희생과 연결 지어 말씀하셨습니다. 죄와 죽음의 결과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뱀은 원래 인간의 죄와 타락을 상징하지만, 하느님께서 이 상징을 구원의 도구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을 자신이 짊어지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고, 이 사건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났습니다. 이는 단순히 구리뱀을 보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을 믿고 순종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자신을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구리뱀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느님께 의지함으로 치유와 구원을 얻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십자가 희생이 영적 치유와 구원을 가져올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가는 인간에게, 십자가는 죄 사함과 새로운 생명을 주는 도구가 됩니다.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들에게 치유와 생명이 약속되었듯이, 십자가를 믿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청중들이 이미 알고 있는 구약 사건을 통해 그분의 십자가 사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구리뱀처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들리실 것이며, 이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뱀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을사년 새해에는 악의 유혹은 과감하게 물리치면 좋겠습니다. 을사년 새해에는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을사년을 맞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공동체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더 큰 영적, 지적 성숙을 이루면 좋겠습니다.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2025년에는 모두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께로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저희에게 복을 내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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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그들이 들은 것을 아기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들려줍니다. 어떤 이야기들이었을까요? 희망에 관한 이야기였을까요? 아니면 고난에 관한 이야기였을까요? 어쩌면 두 가지 다였을지도 모르지요.
중요한 것은 마리아는 들었던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의하면 아기 예수님은 할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때가 차서 할례를 받았다는 복음 말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준비하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이제 ‘예수’라는 이름으로 구원역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십니다.
이 모습을 마리아는 보고 있습니다. 묵묵히 그리고 마음에 간직한 하느님의 뜻을 하나씩 다시 새기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올해도 역시 그럴것입니다. 아무 일 없이 평탄하게 지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기쁨도 있을 것이고 고난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고통도 함께할지도 모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선물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기쁨에도 선물이 들어있고 고통에도 선물이 들어있습니다. 그 선물은 하늘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 역할을 할 것입니다.
늘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혹여나, 그렇지 못한 일이 있더라도 실망치 말고 곰곰이 그 안에 선물을 찾아 하늘나라를 향해 걷는 한 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 고무줄 바지
집에서 고무줄 바지를 즐겨 입습니다.
외출복을 벗고 고무줄 바지를 입는 순간 ‘편안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밥을 많이 먹었어도 고무줄 바지는 늘 편하게 저를 맞아줍니다.
고무줄 바지는 이런 사람과도 같습니다.
1. 편한 사람
2. 포근한 사람
3. 어떤 곳에서도 어울리는 사람
4.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 사람
5.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
이렇게 고무줄 바지는 늘 반겨주는 편한 사람의 미소를 닮았습니다.
누군가에게 고무줄 바지가 되어주면 어떨까요?
값비싸진 않아도 편하고 상냥하고 온화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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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만복의 근원이신 하느님
<축복받은 우리들>
“거룩하신 어머니,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하늘과 땅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임금님을 낳으셨나이다.”
입당송이 깊은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계속되는 성탄축제중 맞이하는 새해 첫날 오늘은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이 대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인 1931년부터 보편교회의 축일이 되었고, 1970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1월1일에 지내고 있습니다. 또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 1968년부터 오늘 새해 첫날을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심으로 교회는 오늘 새해 첫날 세계 평화를 위해 미사를 봉헌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만복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친히 복을 내려주십니다. 올해는 을사년으로 성장과 번영을 상징하는 푸른 뱀의 해이기도 합니다. 험난한 여정중에도 하느님의 각별한 은총으로 민주주의가 성장하고 나라가 안팎으로 번영하는 해가 되리라 굳게 믿으며 기도합니다. 100년전 을사늑약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됩니다. 바로 1905년 11월17일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일본군을 동원하여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 을사늑약입니다.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재작년 2023년 8월15일부터 부른 만세칠창중 이 기도가 각별할수 뿐이 없는 나라의 현실입니다.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2024년이었습니다. 한강의 노벨평화상으로 기쁨으로 출렁이던 분위기가 12.3일 비상계엄으로 꽁꽁 얼어붙었고 내란 위기는 계속중입니다. 지난해 12.2일까지 교수들이 선정한 올해 사자성어는 도량발호(跳梁跋扈;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날뛴다)였고, 2위는 후안무치(厚顔無恥;낯짝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다)였습니다. 12월3일 비상계엄이 이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참고로 그전 해 2023년은 견리망의(見利忘義;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였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말씀들입니다.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이 문제가 된 세상입니다. 2025년 새해는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노력으로 이런 어둠의 현실이 말끔히 청산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나부터 분투의 노력으로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하신 어머니, 천주의 모친,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2025년 새해 휘장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통해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온누리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방금 부른 손상오 곡,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흥겨웠던지요.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시편67,2ㄱ)
오늘 하루종일 화살기도 노래로 바치려 합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느님의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유일한 즐거움이자 기쁨은 우리에게 복주시는 일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시어 언제나 ‘영원한 오늘’을 사시는 하느님은 민수기의 모세를 통해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이렇게 복을 내려 주시는 만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입니다. 복중의 복이 평화의 복입니다. 참으로 평화의 복이 간절한 세상입니다. 평화를 갈망하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은 끊이지 않습니다. 하느님 탓이 아니라 무지한 탐욕의 인간탓입니다. 하느님을, 복받은 인간 존재임을 까맣게 망각한 탓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복받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탐욕덩어리가 아닌 주님의 복덩어리 우리들입니다. 바로 성모님이 복덩어리 인간의 원형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자렛의 시골처녀, 동정 마리아를 찾았을 때 인사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은 우리의 원형이자 본모습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정말 동정 마리아 성모님처럼 복받은 이답게 주님의 복이되어 고결한 품위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동정 마리아 성모님은 복받은 관상가의 전형입니다. 오늘 미사중 감사송의 고백도 은혜롭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령으로 외아들을 잉태하시고, 동정의 영광을 간직한 채, 영원한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으셨나이다.”
새삼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만복의 통로通路가 된 순수하고 고결한 영혼의 동정 성모 마리아임을 깨닫습니다. 고결한 영혼의 특징은 마음안에 담아두는 능력에 있습니다. 목자들이 전한 말에 모두 몹시 놀라워할 때, 마리아만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관상의 대가이자 렉시오디비자의 대가인 동정 마리아 성모님은 과연 복받은 분으로 우리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분입니다. 우리가 받은 복중의 복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진정 여러분은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입니다.”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그러니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복받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의 상속자 답게, 주님의 복이 되어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세 받으니 부를 이름 하느님이 있어서 참 좋다는 고백도, 아버지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눈물이 난다는 고백도 생각이 납니다. 복받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최고의 응답이 찬양과 찬미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구원자 아기 예수님의 탄생 축복을 충만히 받은 목자들이 그 모범입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찬양과 찬미와 더불어 감사로 가득한 평화로운 분위기였음이 확연히 감지되는 목자들입니다. 이제 목자들은 예전의 목자들이 아닙니다. 외관상 가난해도 찬미와 감사, 평화의 사람들로 내적으로는 참으로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평생 끊임없이 하늘 천사들로부터 들었던 대영광송 찬미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 평화!”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찬미와 감사, 평화의 사람이 되어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는 평화의 복이 되는 축복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새해,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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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의 축복이게 하소서
나를 축복하시는 하느님
새해 새날마다
내가
벗들에게
당신의 축복이게 하소서
나에게 오시는 하느님
새해 새날마다
나의 오롯한 발길이
버려진 벗들에게
당신의 축복이게 하소서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
새해 새날마다
나의 곰살가운 눈길이
보잘것없는 벗들에게
당신의 축복이게 하소서
나에게 웃으시는 하느님
새해 새날마다
나의 해맑은 웃음이
어두운 벗들에게
당신의 축복이게 하소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
새해 새날마다
나의 나긋한 목소리가
지친 벗들에게
당신의 축복이게 하소서
나에게 들으시는 하느님
새해 새날마다
나의 열린 귀가
말 못하는 벗들에게
당신의 축복이게 하소서
나에게 손 내미시는 하느님
새해 새날마다
나의 부드러운 손길이
응어리진 벗들에게
당신의 축복이게 하소서
나를 품으시는 하느님
새해 새날마다
나의 따스한 품이
외로운 벗들에게
당신의 축복이게 하소서
나를 살리시는 하느님
새해 새날마다
나의 당찬 삶이
움츠린 벗들에게
당신의 축복이게 하소서
나를 축복하시는 하느님
새해 새날마다
내가
벗들에게
당신의 축복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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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16-20)
가장 먼저 복음을 선포한 목자들
목자들은 천사에게 들어 알게 된 숨겨진 신비들에 관해 입 다물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알렸지요. 교회의 영적 목자들은 바로 이 일을 하도록 임명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의 신비를 선포하고,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 놀라운 일들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존자 베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피조물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피조물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가득 채워지기 위해 비우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비움은 의도라든가, 목표라든가, 이유와 같은 것을 비우는 데까지 확장된다. 이와같이 하여 우리는 예술가가 그림을 그릴 때처럼 아무 목표 없이 그저 흐름과 흘러 넘침에 몸을 맡기면서 깊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의도를 앞세우지 않고, 의로움이나 커다란 목적을 위해 특별한 의도를 품지 않고 덕스러운 일을 하고,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되 ”이유” 없이 한다면, 그 사람은 덕을 완전히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전에는 덕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유 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벗 사이의 사랑을 배우는 것과 같다. 그러한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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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3.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의 의식은 우주 자체에까지 손을 뻗는다. “나는 천상의 존재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똑같은 목적을 추구한다고 말하고 싶다 ... 우주를 존재하게 하고, 우주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천상의 존재들이 부단히 움직이면서 추구하는 목적이다." 엑카르트는 별과 혹성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한다.
“우리가 천상의 존재들에께서 배울 점은 많습니다. 그들은 흔들림이 없고, 순수하고, 모든 것을 품고,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이와 같은 특성들이 사람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이 거주하시는 하늘이 되어야 합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혼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사건이 우리를 쥐락퍼락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광대하고, 얼마나 창조적인가를 가르친다.
“천상의 존재들은 … 모든 것을 감싸고, 모든 것을 품어 안습니다. 사람도 이 모든 것을 사랑 속에서 품어 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 벗과 원수까지도 품어 안을 수 있습니다. 벗은 하느님 안에서 사랑을 받고, 원수는 하느님을 위해 사랑을 받습니다. 창조된 것은 무엇이든지 하느님과 관련하여 사랑을 받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돕습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 그런 까닭에 천상의 존재들은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목수가 집을 지을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합니다.”
중세의 전형적인 관심사가 소우주와 대우주의 상호 관계였던 만큼, 액카르트는 우주적인 경향을 띠는 자연으로 시선을 돌린다. “자연은 선한 우주를 본받는다. 자연은 발생을 위해 모든 것의 생성과 소멸을 꾀한다. 자연의 일차적인 목적은 우주의 보존이다." 이처럼 엑카르트의 영적인 자각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진행된다. 이것으로 보건데, 쉬르만이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엑카르트는 신학과 인간학과 우주론의 방법론적 구분을 폐지한다." 엑카르트의 시각은 단편적인 시각이 아니라 통전적인 시각이다. 이런 이유로, 엑카르트는 우리가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이 통전적으로 사랑한다고 믿었다. 이처렴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사랑하고, 그들에게 자신을 가득 부어준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정답게 대해야 한다. 모든 피조물을 정답게 대하라고 엑카르트는 우리에게 촉구한다.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고,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는 다른 모든 존재와 더불어 하느님 안에서 살아간 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과거에 있었던 것 - 우리의 공통된 근원 - 과 지금 현존하는 것 - 우리의 공통된 존재 -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을 것도 우리에게 훤히 드러날 것이다. 엑카르트는 우주가 미래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미래는 무엇인가? 그것은 만물과 하느님의 동화(司化)다. “창조된 우주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 만물과 하느님의 동화에 협력하기 위해 노력한다. " 만물과 하느님의 동화는 떼이야르 드 샤르탱의 시각과 유사하다. 그것은 우리가 “온통 하느님처럼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본디의 우리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 실로, 우리의 흘러 니옴은 안에 머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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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작년昨年은 이제 <과거>라는 시간의 창고로 옮겨졌으며, 금今年년은 <현재>라는 시간의 진열대에 올라왔습니다. 매년 말 교수신문은 지난 한 해를 짧은 사자성어로 축약해서 발표합니다. 그래서 매년 발표하는 사자성어를 저는 즐겨 찾아봅니다. 과거와 미래는 바로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과거를 반성하고 성찰할 시간을 그리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2024년 교수신문의 사자성어 <도량발호 跳梁跋扈>는 뛸 도(跳), 들보 량(梁), 밟을 발(跋), 뒤따를 호(扈)로,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뛰다’는 의미입니다. 도량발호를 추천한 정태연 중앙대학교 교수는 “권력자는 국민의 삶을 위해 노력하고 봉사하는 데 권력을 선용해야 함에도 사적으로 남용하고 있다.”라며 “권력을 가진 자가 제멋대로 행동하며 주변 사람들을 함부로 밟고 자기 패거리를 이끌고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교수신문은 “이번 설문은 비상계엄 선포가 있기 직전 지난 12월2일까지 진행됐다.”라고 발표하면서, “도량발호가 비상계엄 선포 사태만을 반영하지는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라는 뜻인데, 이는 참으로 부끄럽고 참담한 우리 현실을 말하는 것 같아서 더욱 자괴감마저 듭니다. 어찌하면 좋을꼬! 이런 상황에서 12월29일 무안의 제주항공 참사로 죽은 179명의 안타까운 소식은 우리 모두를 초라하게 비참하게 무력하게 합니다. “주님,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베풀어 주시고, 유족들을 위로해 주소서. 아멘.”
어둠 속에서도 새해 첫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전구로 금년 2025년 한해, 우리 각 개인과 가정, 공동체, 교회와 우리나라, 온 세상에 평화가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우리는 새해 첫날 아침, 만나는 사람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서로 주고받는데 이는 곧 하느님의 축복에서 출발한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독서 민수기에서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사제 직분을 맡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축복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백성들에게 축복을 빌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6,24~26) 그렇습니다. 이는 단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한 축복의 기도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다만 세상 사람이 바라는 복과 하느님을 믿는 우리의 축복이 다를 수는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어둠과 거짓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엇이 인생의 올바른 삶이며 가치인가를 찾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축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빌어주어야 하는 축복은 바로 참 평화이신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새해 첫날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과 함께 성모님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별을 따라온 동방박사들처럼 그리고 마구간의 구유에 누워계신 갓난아기를 찾아 달려 온 목동들처럼 우리 모두 세상의 빛이신 주님 안에서 참된 평화를 찾고, 그 평화를 간직하며 새해를 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우리 마음과 가정과 교회에 간직하면서, 이 평화가 세상으로 번져 나가고 퍼져나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평화가 세상에 충만할 때 비로소 세상에는 다름으로 말미암은 차별, 곧 성性, 인종, 피부, 종교, 신분, 지역 등의 차별을 받지 않고, 다름으로 인한 갈등과 불목, 억압과 폭력, 불의와 부정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이 함께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하나가 되는 세상을 이룰 수 있으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이 평화는 바로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현존의 표징이며, 고난과 죽음을 통해 가져온 새 삶(=부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2025년 한 해 세상의 어린양이신 주님을 천사들과 함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2,14)를 노래하며 기쁜 마음으로 새해를 힘차게 출발합시다.
이 평화를 우리가 먼저 살고 세상에 빌어주기 위해서, 우리 모두 오늘 복음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본을 보여 준 신앙의 태도를 본받아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으며, 이를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2,17~18)왜 그들은 목자들의 말을 듣고 놀라워하였을까요? 아마도 무식하고 천한 그들의 입에서 천상의 신비가 선포되었기 때문일 것이며 동시에 그들을 예언의 도구로 선택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느꼈기에 그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분명 아기의 부모이신 요셉과 마리아 또한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루카는 홀로 마리아만이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2,19)하고 전하는 의도는 곧 우리 역시도 성모님의 이 마음의 태도를 배우며 실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성모께서 마음에 간직한 이 모든 일은 포대기에 싸인 채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장래에 대한 계시입니다. 성모님께서 ‘마음속에 간직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마리아가 이 모든 일을 한 번 간직한 것이 아니라 후에 표현된 ‘되새겼다.’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곧 되새겨서(=자꾸 골똘히 생각하다.) 간직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울러 ‘마음속에 간직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기억한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바로 성령의 기억과 어머니 마리아의 기억에 힘입어 성경을 기록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공생활 시작하실 때까지의 모든 일은 바로 어머니 마리아의 기억과 진술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가장 고유한 특성 중 하나는 기억력입니다. 특히 어머니들의 자녀에 관한 기억은 너무도 생생합니다. 이처럼 어머니 마리아는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자신이 겪은 일은 간직하였을 것이며 그 힘은 바로 자녀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속에 간직하다.’는 표현은 이후 예수님이 성전에서 되찾으셨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라고 대답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2,51)라는 대목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처럼 성모님께서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일들 앞에서 평안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기다리시는 모습은 참 평화를 바라는 신앙인이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참된 평화는 예수님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께서 일관되게 보여 주신 모든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고 하느님의 뜻을 살려는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이를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참된 신앙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한 해가 나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 나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갑시다. 새해 첫날인 오늘 다시금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축복을 빕니다. 저 역시도 올 한 해, 예전 프란치스꼬 교황님께서 언급하셨던 것처럼, ‘양 냄새가 물씬 나는’ 목자가 되길 희망하며 다짐합니다. 이를 위해 저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가도록 결심합니다.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네.”(복음환호성:히1,2참조) 새해 첫날, 우리 모두 성모님처럼 하느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며 평화를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다짐하면서 새롭게 시작합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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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 /
박윤식 [big-llight] 241231. 20:58 ㅣNo.178952
새해 첫날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머물면서 우리 안에 시작된 새로운 변화를 느낀다. 신앙인으로서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물고자 하시며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고 계심을 아는 것일 게다. 올 한 해 그분께서 주실 것들을 우리 마음 안에 잘 간직하자. 행복의 다른 이름은 참 평화이다. 진정한 행복을 안은 평화는 하느님에게서 오지만, 고난과 시련의 과정을 견뎌야만 하리라. 그렇다면 믿는 이에게는 과연 어떤 게 복 받은 삶일까?
새해 아침이 밝았다. 한 해를 성모님 대축일로 시작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만나는 이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한다. 이렇게 복을 기원하는 것은 모든 이의 염원이리라. 마음을 깨끗이 하여 복음에 귀를 기울이자. 순박한 목자들이 기쁨에 겨워 아기를 경배하러 달려오는 그 밤의 움직임 한가운데서 성모님의 모습을 가만히 떠올린다. 성모님은 그들이 전해 준 말을 곰곰이 새기고 계신다. 이제 예수님을 동반하신, 성모님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가,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아기에 관한 말을 그들에게 전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다.’ 모두들 목자들이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이렇게 새해 첫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잘 기억하고 계실, 성모님의 삶을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목자들과 마리아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앙을 가져다주는 말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목자들은 보았고 그 본 것을 외쳤으며, 그들이 외치는 것은 마리아를 건너 하느님께 닿아 있다. 결국은 하느님이 목자들에게 전해 준 말이 돌고 돌아 사람들과 하느님을 연결한다. 이 말들을 마리아께서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침묵으로 되새긴다. 단지 말없는 침묵이 아닌, 곱씹고, 느끼고, 깨닫는 거다. 목자는 말을 하고 마리아께서는 말을 침묵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에 일어난 참으로 기억되는 유명한 일화다. 그는 예수님을 잘 드러낼 것 같은 19세의 젊은이 ‘피에트로 반디네리’를 그분 모델로 삼았다. 그 뒤 6년 동안 그는 11명의 제자를 그렸고, 마지막으로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의 모습을 잘 그릴 수 있는 모델을 찾았단다. 그러다가 탐욕과 사악함으로 가득 찬 어느 부랑자에게서 유다를 느껴 그를 모델로 삼아서 초상화를 완성한다. 그런데 그자가 바로 그 옛날 예수님 모델이었다나.
그렇다. 세월이 가져다 준 여정이 이렇게 죄인을 성인으로, 성인을 죄인으로 만들기도 한다. 새해를 맞아 주어진 소중한 새 한해의 하루하루를 어떻게 지낼지를 내심 차분하게 그려보자. 지나가는 날들을 그냥 보내지 말자. 예수님의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던 성모님처럼 우리 시간들을 주님 안에서 하나하나 되씹으며, 의미를 지닌 삶을 살도록 하자.
어쩌면 성모님의 삶은 행복과 평화가 충만한 삶이었지만, 아드님의 가시밭길을 따라 가신 삶이었다. 그렇지만 성모님을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나. 이는 성모님은 언제나 그분 말씀대로 사셨고 그분께서 늘 함께 하심을 믿으셨기에. 하느님께서 또 새로운 한 해를 그저 주셨다. 그분 축복을 가득 받는 해가 되길 진심으로 빌자.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그분의 말씀을 되새기자. 그리고 오직 순종으로 우리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께서, 그분께 늘 전구하도록 기도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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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새해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오늘 독서가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결같지 못할지라도,
충실하신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변함없는 보호와 돌봄이 축복이겠지요.
문득 창세기 25장과 27장에 나오는 에사우와 야곱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조상 대대로 전해지는 하느님의 축복인 맏아들의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빵과 불콩죽 한 그릇에 팔아넘긴 에사우의 일화는
신앙의 악화 일로를 걷는 오늘날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빛을 던져 줍니다.
결국 하느님의 축복은 그것을 간절히 바란 동생 야곱에게 이어졌습니다.
축복을 놓고도 경쟁하였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하느님의 소중함을 알아보고 하느님께 기대어
그분의 사랑과 돌봄을 체험한 야곱에게 축복이 이어졌다는 메시지만큼은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또한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새해를 맞아 서로 축복을 나누는 이날, 교회는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참으로 뜻깊게 다가옵니다. 모든 축복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평화입니다.
참사랑과 존중을 체험하여 자신의 귀함을 알고
다른 사람의 존귀함도 배워 아는 이들이 북돋워 갈 수 있는 것이 평화입니다.
우리 교회는 평화를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고백합니다.
평화는 한결같은 위대한 사랑의 뒷배인 하느님 없이는 늘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더욱 깊이 깨닫고,
그분 사랑의 동반자인 우리의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한 해 보내기를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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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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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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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 16)
하느님의
어머니를
뵈옵는
은총 가득한
새날입니다.
어머니의
절절한 사랑을
만나는
새날입니다.
고마움과
소중함과
특별함은
우리 삶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로
이어집니다.
사람의 아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드디어
한 여인이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시는
어머니께서는
어머니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첫마음이신
어머니를
첫 번째로
만나십니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우리 믿음의
고백입니다.
싹을 틔우고
꽃이
피기까지는
사랑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가장 큰 용기이며
가장 좋은
평화입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겨 있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에서
진정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
평화를 얻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도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십니다.
더 기쁘고
더 행복한
새해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진심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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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평범한 일상을 사랑했던 마리아님,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이토록 큰 부끄러움과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은총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인간 역사의 잔악함과 남루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아무리 슬프고 스산함에도 불구하고 힘과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주님 축복과 사랑의 표시로 받은 이 은혜로운 첫날, 우리 모두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죽음과도 같은 깊은 슬픔에 잠긴 이웃에게 그분의 복음을 선포하며 따뜻이 위로하는 사랑의 예언자로 살아가기를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교회 전례는 새해 첫날을 세상 모든 신앙인들의 모델이요 이정표이신 성모님 대축일로 정해 경축하게 합니다.
참으로 바람직하고 의미 있는 결정이라고 확신합니다.
사실 마리아는 지극히 작은 존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산골이자 변방 나자렛 출신의 어린 소녀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토록 작은 존재 마리아를 당신 인류 구원 사업의 첫째가는 협조자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휘황찬란한 영광의 길, 떠들썩한 권력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큰 것을 작은 것 안에, 참나무를 도토리 안에, 말씀을 육신 안에, 영원을 순간 안에 담아두기를 좋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화려한 겉모습이나 번쩍거리는 빛 또는 성전의 장엄함과는 거리가 먼 하느님의 새로운 길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누워계실 거친 지푸라기로 만든 구유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아기는 젖이 먹고 싶어서 훌쩍 거리기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소 지으며 우리를 향해 아주 작은 손을 내뻗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아기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신앙 여정의 가장 좋은 모델이요 본보기가 되시는 나자렛의 마리아의 삶과 영성에 대해 소개하는 짧으면서도 유익한 소책자가 하나 출간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종 수도회 소속 사제이며 대 영성가인 에르메스 론키의 ‘마리아는 길을 떠나’(바오로딸)입니다.
열심히 책을 읽다보니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너무나 적합한 기도문이 눈에 띄길래 소개합니다.
평범하고도 거룩한 여인 마리아님, 저희가 평범한 일상의 삶을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는 터전으로 여기도록,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나자렛 집의 냄비와 베틀 사이에서, 눈물과 기도 사이에서, 양모 실타래와 성경 두루마리 사이에서
당신은 진정 온전한 여성의 품위를 지닌 모습으로
회한 없는 기쁨, 절망하지 않는 슬픔, 기약없는 이별을 체험하셨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사랑했던 마리아님,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하늘의 모후 관을 쓰시기 전 가련한 이 땅의 먼지를 먼저 맛보셨던 마리아님, 저희가 하느님의 업적에 경탄하는 마음만은 잃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스도에게 위안을 받는 그리스도인이기보다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안토니오 벨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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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며, 성 바오로 6세께서는 1968년부터 이날을 세계 평화의날로 제정하셨다. 마리아께서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낳아 주시면서 새해의 모든 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기를 기원하는 듯하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복음은 목자들이 천사가 그들에게 알려준(루카 2,11) 구세주를 찾아가는 장면이 소개하고 있다. 목자들의 관심은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에게 있다. 그들이 찾고 있던 것도 아기였고, 그들이 본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도 아기에 관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아기에 대해 말하면서 그 옆에 있는 어머니에 대해 말을 하지 않을 리는 없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19절) 간직하는 마리아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목자들이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기쁨이 퍼져나가도록 하지만, 마리아는 그 일에 담겨 있는 보다 깊은 의미와 주님의 가르침들을 파악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마리아의 모성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아들의 신비에 언제나 보다 철저히 참여하고자 하는 사랑에 불타는 모성이다. 그 모성은 갈바리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까지 동화하는 모성이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이름이었다”(21절). 할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 계약의 징표였다(창세 17,11). 남자에게는 하느님의 백성에 속한다는 징표이다. 예수께는 구원업적인 수난의 전표이기도 하다. 마리아는 십자가의 죽음에 처할 운명을 타고난 아들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 때문에 마리아의 모성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기에 더욱 풍요롭다.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서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의 피로써 생겨난 자기의 자녀들(요한 19,26)로 받아들인다. 마리아는 항상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역할에 종속되어있는 모습을 우리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갈라타서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고 성령의 선물을 베풀어주신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극하여 악의 힘에 억눌렸던 우리를 속량하시어(참조: 갈라 4,5), 당신 자신의 신적인 자녀 관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5). 이 자녀는 법적인 권리를 얻는 것보다도 우리의 존재를 다시 나게 하는 내적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성령을 받음으로써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갈라 4,6)로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7).
하느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기 위해 마리아가 필요하셨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을 구원해 내시고.”(갈라 4,4-5). 때가 찼을 때, 즉, 하느님의 구원이 실현되려는 때,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 하느님의 아들은 율법의 속박을 없애기 위해 율법의 지배하에 태어나신 것처럼 마리아에게서 살과 피를 취하실 필요가 있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서 결정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없었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지 못했을 것이고, 그분이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갖는 우리의 하느님의 자녀 관계도 어느 정도 마리아의 모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리아의 역할을 볼 때, 마리아가 어떻게 평화의 주인(이사 9,5)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해의 평화에 대한 표징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평화는 바로 자녀들-형제들의 관계를 생기게 하는 모성이라는 표징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자녀-형제 관계에서 사람들은 서로 이해하고, 존경하고, 용서하고, 섬길 수 있게 된다. 결국, 평화는 우리의 어머니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초의 선물이며, 그 모성을 통하여 생명의 신성함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공격은 모성을 파괴하는 것이며, 따라서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태중에 잉태된 생명을 파괴하는 것도 안 되는 일이다. 또한, 젊은이들을 그릇된 길로 몰아가는 사회적 폭력의 원인이란, 바로 폭력을 쓰는 젊은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모성적 사랑의 결핍에 있다. 그 사랑의 결핍으로 모든 것을 헛되이 여기고 누구에게나 반항한다.
마리아는 이렇게 평화의 상징이며, 마리아의 모성을 펼침으로써 평화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평화의 창출자이시다. 마리아는 마리아의 찬가에서,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루카 1,51-52). 폭력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민수기의 대사제가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이유를 알아들어야 한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이제 이 축복이 마리아의 미소와 함께, 그리고 우리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한 해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새해를 봉헌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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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머니는 자녀의 어떤 미래를 지원했느냐에 따라 공경의 수준이 결정된다
개신교에서는 성모님을 한 신앙인으로서 공경하지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공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처음부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알고 지지하고 어머니의 역할을 했기에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공경받아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우리는 예수님을 낳고 키우시며 그분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평생을 헌신하신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 묵상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단순한 명예가 아니라, 구원의 계획에서 하느님과 깊이 협력하신
마리아의 역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어머니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것은 희생적인 사랑과 자녀의 진정한 목적을 위한 변함없는 헌신입니다.
진정한 어머니는 자신이 받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미래를 위해 주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1열 3장 16-28에서 솔로몬 왕의 유명한 판결은 이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두 여인이 한 아이의 어머니라고 주장하지만, 솔로몬은 희생정신을 통해 진짜 어머니를
알아냅니다.
참된 어머니는 아이가 다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말하며, 자녀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희생할 수 있다면 어머니가 확실합니다.
성모님도 요셉 성인과 함께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 이집트로 피신하셨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이십니다.
성경에서도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보여준 헌신을 볼 수 있습니다.
탈출기 2장 1-10절에서 그녀는 파라오의 명령에서 아들을 지키기 위해 석 달 동안 모세를
숨기고,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그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맡겼습니다.
그녀의 사랑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지도자로 모세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강물에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심장을 찢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탈출시키는 인물인 모세가 되었기에 구약의 모세의 어머니로서 공경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받아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떤 자녀든 그 정체성에 대한 사명이 존재합니다.
그 사명에 협조했다면 어머니는 그 사명을 수행한 자녀의 어머니로 공경받습니다.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어머니인 투르 페카이의 삶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문맹이었고, 여아 교육을 금기시하던 사회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딸의 여성 교육에 대한 꿈을 지지하며 위험에 직면해 있던 말랄라를 끝까지 응원했습니다.
말랄라가 생명을 위협받으면서도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힘은 어머니의 도덕적 지지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말랄라는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고, 어머니의 믿음과 희생이 세상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투르 페카이는 그냥 어머니가 아닌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 지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은 처음부터 ‘하느님 아드님의 사명’을 지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명은 당신 희생으로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메시지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한 순간부터 마리아는 믿음과 용기로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였습니다.
천사가 지시한 대로 그녀는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며(루카 2,21), 그분이 인류를 구원할 사명을 맡고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의 삶 동안 마리아는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매 순간 지지했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마리아는 종들에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말하며 예수님이 첫 번째 기적을 행하고 공생활을 시작하도록 도왔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아래에서도 마리아의 침묵 속의 존재는 그녀가 아들의 사명에 얼마나 헌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리아의 삶은 어머니의 역할이 단순히 생물학적 관계를 초월하여, 하느님 아드님의 사명을 지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고 지혜가 자랐다고 합니다.
부모가 예수님의 사명을 지원하며 키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아드님, 곧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불리시고 공경받아야 당연합니다.
저의 어머니도 교육받지 못하고 자라셨습니다.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라셨지만, 아들 셋을 잘 키웠고 그중 하나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성당 가면 사제의 어머니로서 존경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어떤 공경을 받을지는, 내가 이 세상에서 누구의 어머니가 되느냐에 달렸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하느님 자녀를 낳고 성장시키면 하느님 자녀의 어머니로서 하늘에서 공경받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은 인간이 어떻게 하늘에 들어가고 하늘에서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지 보여주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은 마리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가까이 이끄는 삶을 살 때, 우리도 이 거룩한 사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우리가 땅에서 하느님의 일을 어떻게 양육하고 지원했는지에 따라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계획에 봉헌하며, 우리의 희생이 영원한 열매를 맺을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마리아의 믿음, 용기, 사랑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을 올바른 목적을 향해 인도하는 영적 어머니와 아버지가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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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땅에서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루카 2,16-21).”
1)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예수님은 황제의 집안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시골의 가난한 목수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황궁의 침대가 아니라 구유에 누워 계셨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셨던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를 나타내는 표징, 또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나타내는 ‘표징’이 됩니다.
“메시아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표징.
2) 그리고 천사 군대가 나타나서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첫 번째로 들었던 목자들, 바로 그 사람들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즉 충실하고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천사는 그들에게 ‘소식’만 전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두 가지 선물도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과 ‘평화’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4.17-18).”
그리스도 예수님은 참 평화의 원천이신 분이고,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이고, 참 평화를 누리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그 평화가 어떤 평화인지를 잘 나타냅니다.
최소한의 자기 방어력도 없는, 너무나도 연약하기만 한 갓난아기, 그러나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 그 모습 자체가 평화입니다.
4) 아기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사야서의 예언이 연상됩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 11,6-9).”
이 예언을 간단하게 줄이면, “메시아의 나라는 약육강식도 없고, 적자생존도 없는, 오직 사랑만 있는 나라이다.”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이고, 그 나라에는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고, 증오심도 없고 적개심도 없습니다.
5)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리려면 우리 쪽에서도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야 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평화를 빼앗아가는 죄들에서 벗어나려면 회개해야 하고, 이기심과 미움과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언제나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과도 함께 살아야 합니다.
혼자서는 안 됩니다.
높은 장벽을 쌓아 놓고서, 또 감시 카메라와 경보 장치들을 잔뜩 설치해 놓고서, 그 안에 숨어서 혼자서 살면, 몸은 ‘안전’할 수 있겠지만, ‘영혼의 평화’는 없습니다.
사랑 없이는 평화도 없습니다.
두려움만 있습니다.
바로 그 두려움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6ㄴ-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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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2,16-21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25년 새해의 첫날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서로 인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신앙인의 새해 인사는 그들과는 달라야겠지요. 그 정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막연하게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할 게 아니라, 우리 생명과 구원에 도움이 되는 참된 복을, 하느님께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기도 중에 함께 청하자고 서로에게 권하는 것이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훨씬 더 유익한 마음가짐일 겁니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성모님의 축일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구세주를 잉태하신 어머니가 되셨음을 함께 기뻐하고, 그분께서 낳으신 아기 예수님이야말로 죄 말고는 우리와 똑같은 참 사람이시자, 본성으로는 참 하느님이심을 기념하는 축일이지요. 또한 성모님께서 일생을 하느님만 바라보고 그분 뜻에 철저히 순명하는 ‘동정’의 삶을 사심으로써 모든 그리스도 신앙인의 어머니가 되셨음을 기억하며 우리도 올 한해 동안 성모님처럼 하느님 뜻에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그분께 전구와 도움을 청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즉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라는 호칭은 개신교에서 지적하며 비판하는 것처럼 성모님을 하느님과 똑같은 신적 존재로 ‘신격화’하여 숭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 번역된 그리스어 “테오 토코스”는 ‘하느님’을 뜻하는 명사 ‘테오’에 ‘낳다’라는 의미의 동사 ‘토코스’가 더해진 것으로 직역하면 “하느님을 낳으신 분”이라는 뜻이 됩니다. 성모님이 낳으신 예수님이야말로 참 하느님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한편, 우리도 성모님처럼 행동과 삶으로 주님 뜻을 철저히 실천하고 따름으로써 그분을 이 세상에 낳아드리는, 다시 말해 주님이 나를 통해 이 세상에 현존하시게 하는 주님의 영적 어머니가 되어 드려야 함을 강조하는 호칭인 겁니다.
성모님께서 주님을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낳으신 참된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말씀을 소중히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그분의 마음가짐 덕분입니다. 주님은 ‘한 처음’부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이루시는 ‘말씀’으로 존재하셨기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실천하면 자연스레 그분께서 이 세상에 현존하시게 되지요. 그래서 성모님은 목자들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 말씀을 단 한마디도 소홀히 여겨 흘려버리지 않고 당신 마음 안에 차곡차곡 담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분의 의도를, 그분 말씀이 자기 삶에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을 때까지 곰곰이 되새기셨습니다. 작은 일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시면서 하느님의 진의(眞意)를 헤아리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 노력의 결과가 바로 ‘천주의 성모’라는 영광인 것이지요.
하느님 말씀을 대함에 있어 중요한 두 가지는 ‘간직’과 ‘되새김’입니다. 좋고 싫음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하느님 말씀의 ‘유불리’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일단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과 의도를 깨달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분 말씀을 되새기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소가 자기 위에 담긴 풀을 소화시키기 위해 몇 번이고 끌어올려 되새김질 하는 것처럼, 말씀의 되새김질을 충분히 해야 그 말씀 안에 담긴 은총이라는 양분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5년 을사년(乙巳年)에는 하느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실천함으로써 신앙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마음과 영으로 낳아드리는 그분의 어머니가 되어드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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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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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서둘러 찾아내 더불어 축복을 나누자
새해 첫날이다. 지난 한해는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의 근본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가슴 아픈 사건들이 많았다. 새해에는 하느님 안에서 고귀한 인간성을 인식하고 존중받을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을 하기로 다짐했으면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도하자. 나아가 평화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서로에게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 수 있기를 청하자. 새로운 한해에도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의 빛이 되어주시고 희망이 되어주실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는 우리가 서로 빌어주어야 할 ‘아론의 축복’이 나온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이 축복은 사제들에 의해(신명 21,5) 성소에서 예배 의식에 참석하러 온 이들에게 베풀어지고(시편118,26) 또 참석자들이 나갈 때 행하여졌다(2사무 6,18). 그러나 축복문에서 주님이라는 호칭이 세 번 반복되는 데서 알 수 있듯 사제는 중개자일 뿐이며 하느님이 축복의 근원이다. 하느님의 축복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은혜와 평화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축복의 근원이신 분께서 ‘되돌아보고, 앞을 바라보는’ 새해의 이 첫 시간을 축복해주신다. 시간은 사람이 살아가는 중요한 터다. 시간을 축복해 주심은 곧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축복해주심이다. 시간의 축복은 변화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새해에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하느님의 바램은 각자가 새롭게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변화란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내 편에서의 응답으로 이루어진다. 곧 진정한 성숙과 변화를 위해서는 우리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우리에게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하느님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되었으며(갈라 4,5),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셨기 때문이다(4,6). 우리가 이것을 믿고 그 축복 속에 살아간다 해도 고통과 시련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일상의 삶이 가져다주는 시련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아빠’(Abba)라 부름으로써 그분의 선과 행복과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기에 복된 존재인 것이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축복을 사는 이들이 지닐 자세에 대해 가르친다. 목자들은 ‘베틀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고,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을 말을 알려주었으며, 자신들이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카 2,16-18). 우리도 가난하고 소외받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서둘러 가서 찾아내고’, 그 상황을 공유하여 함께 하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행한 모든 것에 감사하며 찬미 드려야 한다. 축복이란 그렇게 함께 하고 나누어질 때 참 축복이 된다.
한편 마리아는 자신을 중심으로 일어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2,19). 마리아는 하느님의 길을 발견하기 위하여 그 모든 일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고 생명의 씨앗으로 간직하였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시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기도도 생각도 살핌도 없이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는 ‘속절없는 가벼움’을 내려놓고, 축복의 근원이자 주인이신 주님 안에서 ‘영적 숙고와 생명을 간직하는 마음’을 키워가도록 하자! 이 새해를 평화의 어머니의 따뜻한 도움을 받아 희망 속에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시작하며 더불어 복된 존재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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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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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2025.1.1> 아침을 여는 묵상 (수 1:1~9절)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그분의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집니까?
➲ 하나님의 약속은 말씀을 확신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1~4절).
하나님의 종 모세는 죽었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수종자였던 여호수아에게 요단을 건너 약속으로 주신 그 땅으로 가라 명합니다. 모세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멈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준비된 종 여호수아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계속되어 갑니다. 여호수아는 끝까지 모세를 향한 신의와 헌신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주시겠다 말씀(3잘)하셨는데, 여기에 사용되는 동사는 완료형입니다.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의심에 여지없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증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구체적입니다(4절).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는 여호수아에게 직접 말씀하심으로, 새 역사의 지도자로서 여호수아의 권위를 강화시키며, 그를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의 정도는 우리 자신의 믿음과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후사가 되어 그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으며, 하나님은 우리를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얻기까지 우리에게도 싸워 이겨야 할 영적 싸움이 있기에, 영적 싸움에 대한 무장과 훈련이 필요합니다(엡 6:11~18절). 나아가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 즉, 신실한 믿음 안에서 준비된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말씀하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믿음을 요구하시며, 때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에 대한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홍해나 요단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때론 지금 우리가 짊어지고 가는 이 일이 너무나 힘들다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사명이라 믿고, 다시금 용기를 내어 믿음의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삶이어야 합니다. 올 한 해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여,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약속은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5~6절).
하나님은 누구도 여호수아를 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입니다(5절). 그러므로 승리의 관건은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는 것이며, 여호수아에게 앞으로 치를 전투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 말씀을 믿음으로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6절)고 말씀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세상에 보낼 때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는 보증으로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이룰 수 있는 성공의 본질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탐욕을 멀리할 것을 가르치시면서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는 뜻으로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우리에게 장차 닥칠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담대함을 갖게 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매 순간 우리를 엄습해오는 악한 세력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발아래 정복당한 존재임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임마누엘의 예수님을 잊지 않는다면 지금의 고통과 아픔과 외로움을 이겨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므로 바른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올 한 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약속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7~9절).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다 지키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으면 그가 형통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강하고 담대하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7절). 그리고 이어서 율법을 가까이하고 항상 묵상하며 지켜 행해야 합니다. 율법을 입으로 읽고, 마음으로 묵상하고, 온몸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형통...’(8절)하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단 강 도하와 가나안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다시한 번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9절)하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갈 길을 가르쳐 주고 있고, 우리의 인생의 길에 등불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특히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최고의 가치이자, 우리가 영원히 바라보고 따라야만 하는 푯대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삶을 형통케 하심을 누리는 방법은 날마다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말씀 앞에 겸손하며, 그 말씀이 우리 삶의 전부가 되기를 바라며 묵상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 이 길만 걷는 삶이 되기를 소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임을 깊이 깨달아 올 한 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실 능력과 성실함을 모두를 갖고 계심을 깨달아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뿐 아니라 강하고 담대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 안에서 승리하는 2025년 한 해가 될 수 있기를(수 1장 1~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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