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의 연말 무렵이지 싶다, 잠시 우리나라 선주 상선의 선장으로 있었는데 미국 미시시피강의 뉴올리언스 항에서
밀 2만톤을 싣고 칠레 Valparaiso 항에서 하역하고 나서 칠레 Conception 항에서 원목 약 2만톤을 싣고 중국 Shanghai로
가라는 항해 지시가 내려 왔었다.
당시에는 중국과의 국교가 맺어지지 않아 한국 국적의 선박은 공산국 중국 기항이 불가하였지만 그 배는 파나마 편의
취적을 받아 파나마 국기를 달고 다녔기 때문에 선원들은 한국 선원이라도 갈 수 있었는데 용선 계약에 따라 칠레에서
원목을 실으며 샹하이 행 최신 해도를 준비하고 약 한달간의 식료품도 싣고 항해를 시작했었다.
남태평양의 거석 상으로 유명한 모아이 섬을 지나 적도를 지나고 약 한달간의 항해 중 계약대로 샹하이 대리점에 보름전
일주일전, 이틀전, 하루전, 도착예정 시간을 알리며 가고 있었는데, 양자강 하구 도착 12시간 전 무렵에 중국 국영 샹하이
대리점으로 부터 뚱딴지 같은 무선 전보가 날라 왔다.
<Your detination is not Shanghai.>
용선계약서 대로 양하항으로 한달간 달려온 나에게 반나절 전에사 목적지가 샹하이가 아니니 오지 말라는 식의 황당한
전보를 받고 나니 이런 빨개이 시키들 욕도 나오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서울 본사와 칠레 용선주에게 전보를
쳐 알려 주고 어찌 해야 할지 회신을 요청했다.
서울에서 온 전보는 지구 반대편 용선주와 연락될 때까지 기다리라 해서 찝질해서 양자강 근방에 들어 가지도 못하고
표류하며 사흘간 기다리고 있으니 지나 다니던 중국 어선들이 불쌍타 생각했는지 잡은 생선을 던져 주기도 했다.
사흘뒤 양하항이 Xinkang(新港)- 북경의 출입관문 천진항의 신항만으로 변경 되었으니 그리 가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문제는 발해만을 통과해 Xinkang으로 갈 해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GPS도 없던 시절이라 있었다 해도 도로 표시가
없는 길을 운전할 수도 없지 않는가, 해서 인천 외항 도선사가 나오는 덕적도로 갈테니 도선사 선편으로 해도를 보내라
했더니 이런 바보 같은 직원들이 한국 배인 줄 행여 중공이 알게되면 어찌 나올지 모른다고 오지말고 어째 보란다.
있는거라고는 대한민국 전도에 나오는 중국 지도 밖에 없고 발해만 입구 좁은 협수로는 사전 통보 없이 지나치면 해군의
해안포 사격을 받을 수 있다는 국제 항해가이드도 섬찍하여, 밝은 대낮에 지나기로 하고 협수로 양단의 경위도와 20미터
등심선의 개략적 위치와 요주의 암초등의 위치를 전보로 보내라 하고 영국서 발행하는 항해 안내서 Notice to Mariners의
발해만 부분을 뒤져 간이 해도를 그려서 항해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그리 발해만에 진입했는데 곳곳에 설치된 유정에서 나오는 화광이 대낮에도 밝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때 지나가는
상선이 있어 무선통화로 호출하여 사정을 얘기하고 Xinkang으로 향하는 중에 있는 유정의 위치와 항로 표지를 불러
달랬더니 어찌나 친절하게 얘기해 줘서 국적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아프리카 콩고라 한다.
"살다 살다 콩고 깜둥이들에게 항해 가이드를 받을 줄이야."
우여곡절 끝에 외항에 투묘하여 열흘 넘게 부두 접안을 대기하였는데 그 때가 등소평의 개방개혁이 한창이라 입항하는
선박이 업청 몰리고 있었고 그러다가 도선사가 나올 때 앵커를 감아 올리는데 열댓명이 올라 오더니 다시 투묘하고 밥 좀
먹고 들어 가자는 바람에 부랴 부랴 식사 준비하고 대접했는데 조리장 얘기로는 평균 2~3 그릇씩 비우더란다.
접안하여 작업 중에 그게 생각이 나서 찾아 오는 관리들이나 관계인들에게 식사 대접할라치면 극구 사양을 해서 왜냐니까
누가 보고 고발이라도 하면 큰일 난단다. 하역반장은 검수반장이 볼까봐 못 먹고 검수 반장은 하역반장이 볼까봐 못 먹는다
해서 어느날 검수반장과 하역반장을 선장이 부른다 하고 식당에 둘다 불러 앉히고 커텐을 치고 느닺없이 식단을 채리고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 먹으라 했더니 처음에는 서로 눈치를 보며 숟가락을 들지 못하다가 억지로 잡아 줬더니 먹기 시작
하더니 순식간에 두그릇씩 비우는 걸 보고 이게 공산국가 인가 싶어 애처로워 보였다.
투묘하고 있던 중에 본사로부터 무선 SSB 통화로 원목을 하역하고 나면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Chinhwangdao(天皇島)에
가서 무연탄 2만톤을 싣고 그 해 연탄부족으로 파동을 겪고 있는 목포로 싣고 가는데 한국으로 가는 것이 발각되면 배가
압류 될수도,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으니 일체 비밀로 하고 모든 서류는 말레이지아로 가는 것으로 하고 출항하면 바로
목포로 가지말고 북한이나 중공에서 레이다 추적할 지도 모르니 말레이지아로 가듯이 중국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서향해서 목포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었는데.
12월말 발해만이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강 추위에 선원들에게 녹색 방한모를 사 주었는데 서로를 바라보며
"와, 우리가 독립군 같으네."
하다가 연탄을 실으며 연탄가루를 뒤집어 쓰더니
"독립군이 아니라 연팡 연탄 장수다."
출항하고서 비밀로 하던 목포로 향하는 사실을 선내 방송으로 알렸더니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의 6개월만에 그리운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에 통신실로 바삐들 항했다. 우체국 전보와 마찬가지로 글자수로 요금을 메기던
시절이라서 줄여서 전보를 친다.
<12월30일목포입항재회바람순돌아빠>
목포에 입항하자 입국 수속도 신속히 이뤄지고 떼지어 대기하고 있던 연탄 수송차량으로 바로 전라도 전역으로 수송 한단다.
공산국가에 갔다오면 , 선장은 <공산권 기항보고서>를 관계 기관들에 제출하는데 귀찮은 녀석들 만나게 되면 외사과에서
오라 가라 하기도 한다는데 연탄파동의 해결사로 봐 줬던지 간단히 방문 조사(?)만 받았었다.
계속, 그 시절의 삼편주(三鞭酒) 이야기
첫댓글 해양대학 졸업하면 화물선 선장도 되고 여객선 선장도 되는 모양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