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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촉 시집: 검은 해바라기 해설>
노동-운동이 감춘 비밀과 그가 흘리는 애수 혹은 미소
정 명 교
운동 그 자체로서의 시
이촉 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운동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는 관조하지 않는다. 따라서 묘사하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운동 중에 자연발생적으로 몸에서 배어나는 사색의 액체이다. 요컨대 그의 언어는 조용히 땀을 흘리는 것이다. 왜 조용한가? 운동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과 언어 사이에 간극이 없다. 언어가 곧 운동이며 운동이 곧 언어이다.
하지만 이 말은 섬세하게 분별되어야 한다. ‘언어가 곧 운동’이라는 말은 ‘언어가 운동을 즉각 표현한다’는 뜻을 함의한다. 반면 ‘운동이 곧 언어’라는 말은 ‘운동이 언어를 내장하고 있다’라는 뜻이다. 운동이 언어를 내장한다는 말은 운동이 순수한 질량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특정한 의지와 방향을 가진 운동이다.
하지만 어떤 운동이든 의지와 방향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가령 아침에 왜 사람들이 뛰나?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서이다. 뚜렷한 의지와 집중된 방향이 있지 않은가? 그런 얘기가 아니다.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운동한다고 할 때, 그 운동은 ‘몸무게를 줄이는 사업’에 동원된 ‘운동’이다. 즉 ‘탈비만’과 ‘운동’ 사이에는 분리가 있으며, 전자는 목표이고 후자는 도구라는 얘기다. 이촉의 시에서 ‘운동이 언어를 내장하는’ 형국은 운동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 운동은 언어 그 자체, 즉 의지와 방향 그 자체라는 말이다. 일찍이 만해 선생은 「잠꼬대」라는 시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다 무엇이냐 진정한사람에게는 눈물도 없고 웃음도 없는 것이다”라고 쓰신 적이 있다. “눈물도 없고 웃음도 없는” ‘사랑’이 그러하듯, ‘진정한 사람’이 행할 운동은 어떤 다른 무엇을 파생하거나 거느리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운동 그 자체로서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일례를 들어보자.
레이를 타고 뒷좌석은
휠체어를 탄 여자 어르신을 태우고
응급실로 향한다
복부가 팽만 되어 오는데
관장하고 rectal tube라도 꼽고
금식하고 수액을 주입해야 할 판인데
요양원에서는 할 수 없어
응급실로 달린다
촉탁의에게 미리 전화로 보고하고
보호자에게 병원 진료가 필요함을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
응급실로 달린다
엑스레이를 찍고
예견대로 가스와 대변이 찬 장
이런 거로 입원은 안 돼요
하루 입원은 안 돼요
입원 결정은 간호사가 하는 것인가?
젊은 당직 의사는 침묵하고
똥을 여기서 치울래요?
가서 치울래요?
관장 대신 내뱉는 간호사의 말, 말
일단 관장해주세요
글리세린 관장하고 하는 말
기저귀는 가져왔어요?
물티슈는 가져왔어요?
안 가져왔으면 청구할게요
관장약이 새지 않도록 항문을 막고 있다
한참 만에 나오는 대변
장갑을 겹쳐 끼고 대변을 받는데
시원하게 배설되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항문에 걸친 대변을 파고
항문괄약근을 마사지하며
finger enema를 시도한다
슬그머니 응급실 밖으로 나가는 원장
고뇌에 찬 로뎅이 된다
입원하면 한 명이 빠져나가 고민인 원장
어르신 입원하여 고비를 넘겼다면 안되나요?
한 명 오니 또 한 명 빠져나가네!
휘파람 불듯
니코틴 냄새 풍기며
어두워진 도로를 달리며
계속되는 배설을 막으며 대변은 요양원으로 달린다
아 푸른빛 저수지 용두를 지날 즈음
날카로운 빛이 쏘아댄다
보호자한테 전화했나요?
전화할 시간이 어딨어요?
찍
흥분을 참지 못하고 갓길로 차를 세우는 원장
그 언어는 이미 간호사를 한 대 치고
뒤에 어르신 타고 계시잖아요
요양원으로 가요
요양원 원장과
간호사와
어르신의 침묵 농도
어둠 속을 달린다
각기 다른 침묵의 속도로 (「finger enema」)
운동의 리얼리티로 가득 찬 작품이다. 이걸 묘사로 본다면 이 정도로 꼼꼼한 세목 묘사를 보여주는 시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물론, 이미 말했지만, 이 시는 묘사 너머에 있다.) 여기에서 첫 연을 먼저 보자.
레이를 타고 뒷좌석은
휠체어를 탄 여자 어르신을 태우고
응급실로 향한다
이 연의 내용은 간단하다. 환자인 “여자 어르신”을 타고 응급실로 간다는 것이다. 이 내용만 보면 목표가 뚜렷하고 운동은 그 목표에 봉사한다. 즉 여기에서의 운동은 도구에 불과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니다. 우선 운동의 도구가 하나가 아니라 복수라는 걸 유념하자. “휠체어를 탄 여자 어르신”을 태운 “레이를 타고” “응급실로” 달리고 있다. ‘레이’는 달리는데 휠체어는 달리지 않는다. 게다가 이 ‘레이’의 운동은 존재이유가 희박하다. 왜냐하면 이 환자의 발병에 대비한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으면 달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연에 이렇게 썼다.
복부가 팽만되어 오는데
관장하고 rectal tube라도 꼽고
금식하고 수액을 주입해야 할 판인데
요양원에서는 할 수 없어
응급실로 달린다
할 수 없이 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읽어나갈수록 독자는 환자를 위한 운동이 거듭 장애물에 부딪치는 광경을 목격한다(그 광경들의 풀이는 생략하기로 하자. 이 해설을 읽는 독자들께서 직접 음미하시길 바란다. 이 시는 음미할 가치가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운동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해, 도구로서의 운동은 상당 부분 무기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강도는 여전히 높다. 왜냐하면 실제의 운반기구만이 운동하는 게 아니라 화자의 다급한 마음과 이곳저곳 관계자들과의 상의, 그에 대한 무척 다양한 반응들 및 환자의 ‘침묵’(침묵도 운동이다. 공포 혹은 불만 기타 등등의 마음 혹은 의식 정지 등이 작동하고 있다), 그 무수한 반응들에 다시 반응해 어지럽게 교차하는 나의 고민 등이 일제히 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특정한 운반기구의 움직임이 아니라, 마지막 연에 기술된 대로 모든 것들의 아주 이질적이면서 부조화를 일으키며 충돌하는 운동들이다.
어둠 속을 달린다
각기 다른 침묵의 속도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암흑의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이 멈춤 없는 운동은 정향을 상실하고 마냥 달리기만 하는 것 같다.
이 시는 그러니까 이상의 「오감도 1편」의 21세기 실사 버전이다. 「오감도」가 까마귀의 눈길로 불길하게 조명하고 있는 이 질주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듣지 못한 채로 한국의 독자들은 무려 1세기 동안이나 그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질주에 무언가 의미가 잠복되어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즉 「오감도」에 대한 기대는 의지와 지향 그 자체로서의 운동, 즉 ‘언어를 내장한 운동’으로서 그 시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오감도」에 대한 기대는 이촉의 시 「finger enema」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독자는 이 생생한 묘사 속에 표출된 급박하고도 우왕좌왕하는 움직임이 그 자체로서 현실에 대한 모종의 증언이자 현실 그 자체를 이끌고 가는 운동이 아닌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궁금한 비밀의 형태론적 전말
일단 독자는 시는 몇 개의 대답을 가정해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대답의 의미를 시적 효과로서 음미할 수도 있다.
첫 번째로 가능한 대답은 한국 의료 환경의 비체계성에 대한 재현이자 고발로서 이 시를 읽는 것이다. 그 양상은 지금 한국의 대형 병원에 가면 실제로 적나라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지리멸렬은 더욱 심화되어 가는 중이다. 이 엔트로피의 작동 양상을 누구도 돌릴 수가 없다. 생명이 역-엔트로피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라면, 이는 체제의 퇴화과정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대답은 무리가 있다. 우선, 시의 리얼리즘은 전체 시편들을 두고 볼 때 비중이 약하다. 다음, 이 대답은 시의 양상 자체를 ‘운동성’으로 보기보다는 파행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유사한 대답으로서 두 번째 대답이 가능하다. 개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다기화된 문명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해프닝에 대한 풍자 혹은 자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시의 양상 자체를 운동성으로 보기보다는 파행으로 본다는 점에서 독자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독자의 기대를 절대적인 지표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저 옛날 메리 루이스 프랫Mary Louise Pratt이라는 미국의 여성 평론가가 주장했듯이, 어떤 시든 일단 시로 제출된 이상은 최밀도의 언어로 직조된 미학적 대상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독자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 그 안에서 귀중한 문학적 가치를 찾아 밝혀야 하는 것이다. 단 필자가 판단컨대 기본적인 조건이 네 가지 있으니, 그 중 둘은 실증적 근거와 논리적 일관성이다. 이는 일반적인 인식의 증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필요한 조건이겠지만, 미학적 작품일 경우, 조건 둘이 추가된다. 첫째, 독자의 감동, 즉 작품을 둘러싼 작가(시인)와 독자의 체험적 진실의 교류이다. 그리고 다음엔, 이 감동의 회로가 작품의 영원성을 보장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적인 상태에 놓인 작품에게 요구되는 네 개의 조건이다. 모든 문학 작품이 이런 이상적인 상태에 놓일 수는 없으며, 독자들은 그보다 열등한 수준에서도 다양한 미적 체험을 향유할 수 있다. 다만 이상적 상태의 최대치를 도약을 위한 웜홀처럼 가정하면서 텍스트를 쓰고 읽는 것만이 인류의 미적 생산이 거듭 진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건 자명하다.
이런 관점을 유지하면서, 이촉의 위 시를 사회적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눈길을 돌려 시인 자신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자. 우선 이 시각의 전환은 기본적으로 타당한데, 무엇보다도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이 두루 시인의 실제 생활을 바탕으로 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각도에서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앞 절에서 살폈던 ‘운동’이 ‘노동’이라는 사실이다. 독자는 그의 직업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그는 아픈 사람을 돌보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아니, 수행하고 있다. 그 점을 고려할 때 앞의 시를 포함해 이촉의 대부분의 시는 ‘돌봄 노동의 고단함’과 ‘애수’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헌신의 의의와 동시에 헌신의 공허함을 동시에 비춘다. 사적인 이득이 아니라 공공적인 선을 수행하는 데 자신의 몸을 쓰는 것, 그것이 헌신이다. 그런 헌신이 사회적으로 예찬될 때조차도 실제 그에 합당한 최소한의 보상, 심지어 정신적인 보상마저도 주어지지 않는다. 압도적인 다수의 사람들은 돌봄을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아니 그동안조차도, 그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것이 공허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촉의 시들은 보상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헌신의 효과에 대한 비애감이다. 임사 직전의 환자들에 대한 모든 ‘케어’는 결국은 망자의 최후를 그럴 듯하게 장식하거나 불가능한 수명 연장의 시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건 헌신을 자기 위로에 쓰는 것은 아닌가?
‘돌봄 노동’이라는 체험의 다양성과 정서적 반응들과 지적 고뇌들의 복합체로서의 ‘시인의 마음과 손 사이에 놓인 의식의 회로’로부터 배출된 게 이촉의 시이며, 이 시들의 정서적 소통의 기본 주제는 ‘아무리 진실하려 해도 공허한 삶의 애수’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해석이 어느 정도 이 시집의 시편들에 대한 무난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면, 이는 또한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하고 있다. 그것은 ‘공허에도 불구하고’라는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진실하려고 하는 지향의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그런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왜 꾸준히 출현하는가? 아니 시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그런 무상한 삶이 어떻게 운동의 본래적 성격을 회복하고 지속적으로 수행되는가? 요컨대 이촉의 노동은 운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노동 운동’이 이상한 보상 회로 속에서 파행을 겪고 있지만 본래 노동 운동은 노동 가치에 근거하는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노동 가치에 근거할 때만이, 보상 회로도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그 작동을 비정상적으로 만든 것은, 오로지 ‘사용가치/교환가치’의 이분법, 더 나아가 ‘사용가지/교환가치/기호교환가치’라는 복합이분법에 근거해서만 노동을 파악해 온 철학자들의 사시(斜視)이다. 노동가치의 근본적인 의의를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일깨워 온 이들은 바로 작가, 시인들, 그리고 그들의 텍스트에 생산적인 활기를 불어 넣었던, 가령 바슐라르나 김현이나 롤랑 바르트같은, 비평가이다.
여하튼 이촉의 시는 그런 의미에서의 ‘노동 운동’을 적실히 수행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최초의 실마리는 왜 그가 이런 직업에 뛰어들었고 그것을 천직으로 삼고 있는가, 이다. 그 단서를 통해 독자는 이촉 시에서 등장하는 ‘헌신’의 까닭과 더불어 그 의의를 이해하는 데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단서의 통로까지 가보자.
이촉의 시편들을 읽다 보면 돌봄 노동의 생활과는 다른 제재를 다룬 시편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주로 그의 유년시절과 관련된 추억담들이다. 그리고 그 시편들은 대체로 많은 부분을 감추고 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시편을 읽어보자.
우리 집 아래채 고방 옆 아랫방에는 구렁이가 살았습니다
구렁이는 벽장 속에 살았는데
사는지 모를 정도로 나오지 않았는데
봄철 고모들이 놋그릇을 닦을 때 나왔다 들어가곤 했답니다
아랫방은 내가 온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던 방이었어요
일등 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이책 저책 펼쳐놓고 하면 공부가 잘되었어요
아랫방 옆 고방에는 사과 향이 흐르고 있었답니다
고방 큰 독아지에 사과 조각이 둥둥
가정방문 온 담임선생님은 엄마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했어요
사과주, 독 안의 사과…
그때 선생님이 사과할 게 뭐가 있나 궁금했어요
사과가 둥둥 뜬, 사과…
사과를 보면
엄마의 사과가 사각사각 다가오는 것 같아서
꿈에 가끔 아랫방 옆 고방이 있던 자리
우리 집이던 집 앞 골목에서 기웃기웃 서성서성 사과 향을 맡곤 합니다
담벼락 귀퉁이에 서 있던 방아 나무에 방아잎 하나
또 하나 방아 향 물씬 전 부쳐 먹고 싶은
거기 뒤꼍 그 길옆 따라 풀풀 아랫방 길
내 앉았던 자리 풀이 하나둘 자라던 새 푸르둥둥한 곳이었다 (「아래채」)
제목이 「아래채」인데, ‘아래채’의 ‘아랫방’은 좀 더 정확히 말해 ‘고방 옆 아랫방’은 ‘내가 공부하던 방’이면서 ‘구렁이’가 살고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구렁이’는 아래채 벽장 속에 살면서 “사는지 모를 정도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미루어 보면, 화자 자신과 관계된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사건’에 관한 시라고 짐작할 수 있다. 구렁이는 벽장 속에 감추어둔 모종의 사연을 가리키는 환유적 표지이다. 영어 속담에 “coming out of the closet”(이 말이 요즘 일상화된 용어, ‘커밍아웃’의 기원이다)이란 말이 있듯이. ‘벽장’은 비밀의 장소이다. 그리고 구렁이는 ‘저사람은 능구렁이다’ 라는 말에서 짐작하듯, 감추어진 사건의 제유라고 할 수 있다.
그 감추어진 사건은 ‘사과’라는 말 속에 단서가 숨어 있는 듯하다. 핵심 구절은
가정방문 온 담임선생님은 엄마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했어요
이다.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와서 한 말이다. 이 구절은 여러모로 모호하다. 우선 시 전체를 보아도 사과할 내용이 제시되지 않았다. 선생님이 일부러 가정방문을 올 정도면 중요한 문제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다음, ‘사과’의 주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어지는 행에서 “선생님이 사과할 게 뭐가 있나 궁금했다”고 썼으니, 선생님이 사과의 주체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 더 떨어진 행에서는 “엄마의 사과가 사각사각 다가오는 듯 같아서”라고 썼다. 분명하진 않지만 선생님이 와서 ‘엄마의 사과’를 요구한 것이 아닐까? 선생님이 사과의 주체라면, 시 안에서 선생님이 사과하는 광경이 지시되거나 묘사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광경 대신에 진술이 제시되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사과할 게 뭐가 있나 궁금했다”라고 적은 것은 ‘엄마는 사과를 해야 했다’는 차후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거꾸로 말하기’ 아닐까? 그리고 그렇다면 엄마가 사과를 해야 했던 것은 ‘나’와 관계된 학교에서의 어떤 사건이 아닐까? 즉 ‘나’ 때문에 엄마는 사과해야 했던 게 아닐까? 화자의 어린 시절의 ‘나’가 학교에서 무슨 사건에 연루되었고 그 사건의 피해자에게 엄마가 사과해야 했던 게 아닐까?
이런 짐작을 보증해 줄 수 있는 증거물은 하나도 없다. 그냥 추측일 뿐이다. 다만 이 막연한 짐작은 감추어진 사연에 대한 독자의 강렬한 호기심을 연장시키는 효과가 있다. 요컨대 이 짐작은 아주 다른 버전들의 이야기를 거듭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화자는 그 사건이 끈덕지게 잊혀지지 않다가 서서히 잊혀져 간 과정을 알려준다. 그 과정에 ‘사과’와 ‘풀’이 환기물로 등장한다. ‘사과’는 과일 사과이다. 그것은 “아랫방 옆 고방”의 “큰 독아지에” 조각으로 썰린 상태로 “둥둥” 떠 있었었다. 거기에서 풍겨나는 “사과향”이 아랫방에서 있었던 감추어진 사건을 환기시킨다. 반면 ‘풀’은 잊혀지지 않던 사건이 서서히 시간의 흐름을 따라 풀더미에 덮이듯 잊혀져 갔음을 가리키는 표지이다. 이 ‘사과/풀’의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각사각’, ‘풀풀’ 그리고 ‘푸르둥둥’(이는 ‘푸르등등’의 오기이다. 그런데, 앞의 “둥둥”과의 연관을 위해 일부러 오자를 낸 듯하다)의 부사어들까지 동원되었다.
그러니까 감추어진 사연은 끈덕지게 뇌리에 남아 있다가 이제는 망각의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화자가 그 사연을 잊고 싶어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은 거꾸로다. 그리고 이 ‘거꾸로’가 결정적이다.
화자는 시 안에서 이미 여러번 ‘사과’를 언급하고 그 사과를 환기할 과일 ‘사과’를 수다히 등장시켰다. 그것만으로도 화자가 ‘엄머의 사과’를 잊어버리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끊임없이 ‘회상(reminiscence)’하여 현재로 불러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화자는 꿈 속에서도 그날에 다가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목을 한 번 더 인용해보자.
꿈에 가끔 아랫방 옆 고방이 있던 자리
우리 집이던 집 앞 골목에서 기웃기웃 서성서성 사과 향을 맡곤 합니다
담벼락 귀퉁이에 서 있던 방아 나무에 방아잎 하나
또 하나 방아 향 물씬 전 부쳐 먹고 싶은
거기 뒤꼍
화자는 꿈 속에서 옛 집으로 돌아가 기웃거린다. 왜 그리할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날의 현장을 다시 돌이키고 싶어서이다. 그래놓고는 아닌 척 짐짓 시치미를 뗀다. 그래서 옛집으로 돌아가되 방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뒤꼍의 “담벼락 귀퉁이에 서 있던 방아 나무 방아 잎”을 따서 “전 부쳐 먹고 싶”어서 갔던 것인양 능청을 떠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가 얘기하는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화자가 ‘감추어진 사건’에서 ‘엄마의 사과’에 이르는 모종의 사연 덩어리를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바깥으로는 절대 내색치 않은 채 끊임없이 그것을 불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운동의 정수를 빚는 일의 애수
여기에는 두 개의 복합적 감정이 교차한다. 하나는 그 사연에 대해 화자가 ‘부끄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코 내색치 않으며 끊임없이 무언가로 가리려고 한다. 하지만 또 하나의 감정은 그를 재체험하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솟아나는 은근한 갈망의 감정이다.
사건의 내용은 감춰져 있지만, 그것의 존재 방식은 뚜렷하다. 그것은 부인되면서 유혹한다. 이러한 양태는 옌센W. Jensen의 『그라비다Gravida』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논문, 「옌센의 『그라디바』에서의 착란과 꿈들 Le Délire et les Rêves dans la « Gradiva » de W. Jensen 」(1907)을 상기시킨다. 젊은 고고학자가 노르베르트 하놀드는 한 미술관에서 이상적인 여인의 그림을 만나서 그 복사본을 사서 돌아와 걸어놓고는 그녀를 찾아가는 일련의 꿈을 꾼다. 실상 하놀드는 유년 시절의 짝, 조에 베르트강의 투영이었다. 그런데 꿈속에서든 깨어서든 그는 조에를 결코 떠올리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이를 두고 ‘부정적 환각negarive hallucination’이라고 명명하는데, 이런 부정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꿈의 여행을 지속시키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무의식의 행동에 대한 예증으로서 유명해진 프로이트의 이 논문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첫째, 억압된 것은 끊임없이 귀환하는데, 둘째, 그러나 그것은 다양한 언어적 변용을 통해 왜곡된 형태로 귀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왜곡의 이유는 이 귀환의 사건이 끝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촉의 「아래채」와 『그라디바』가 ‘동형성homologie’을 가진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시의 감추어진 사건이 은폐되면서 동시에 유혹하는 것은, 그것이 은폐될수록 유혹의 강도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제 「아래채」는 『그라디바』와 갈라진다. 후자의 작품에서 하놀드는 정신분석가이기도 한 조에 베르트랑에 의해 치유되어 욕망의 회로에서 벗어나지만, 「아래채」의 화자는 은폐를 영구화함으로써 그 사건이 변형되어서 현상하는 사건들에 육신을 투여하게 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엄마’에 대한 지속적인 회상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편으론 ‘돌봄 노동’으로 나아간다. 더 나아가 우리는 시편들을 통해 ‘엄마’와 ‘돌봄 노동’의 환자들이 무의식의 공간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구는 그런 생각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게끔 해준다.
그 말 그 얼굴에 엄마가 있어
엉덩이로 밀고와 의자에 후딱 앉는 웃음
아이고 이뻐라 내 딸
난 날마다 그 딸이 된다 (「아름다운 사람들」)
물론 ‘엄마’를 회상하는 시편과 ‘돌봄 노동’을 묘사하는 시편은 기능이 다르다. 엄마를 회상하는 시편들은 ‘엄마’를 생의 버팀목처럼 그린다. 엄마는 나의 허물을 지적하면서도 나를 따뜻하게 보듬어준다. 한국의 옛 어머니 상이다(오늘날에 이런 어머니가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어머니 상은 ‘나’가 탈진하였을 때 최후의 버팀목으로 기능한다.
“저년은 비만 오면 구례 온다는 엄마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목소리」)
‘엄마’는 꺼져가는 생명의 불을 지피는 배경의 광원이다. 다른 한편 돌봄 노동은 시인이 쉼없이 이행해온 노동-운동의 시시각각의 표출이다.
흥미로운 양상은 ‘엄마’ 부분과 ‘돌봄’ 부분이라는 두 파트가 ‘나’를 중심으로 전도된 거울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엄마’ 파트에서 ‘엄마’가 ‘나’에게 행한 일들이, ‘돌봄’ 파트에서는 ‘나’가 노인 환자들에게 행하는 일들과 동형 관계를 보여주면서, 후자에서는 ‘엄마’가 아니라 ‘딸’의 위치에서 그리한다는 것이다. ‘나’는 ‘엄마’의 행동을 ‘노인 환자들’에게 모방적으로 투여한다.
이 모방이 ‘엄마’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는 의도에서 선택된 것일 터이다. 그런데 ‘엄마’에게 갚으려 하는 의지가 ‘엄마’에게 돌아가지 요양원의 환자들에게로 전이됨으로써, 보상 의지는 한편으로 결락되면서 환자들에 대한 헌신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갈수록 강해지고 그만큼 환자들을 보살피는 노력은 배가된다.
이것이 시인의 노동-운동 그 자체에 의지와 방향이 밀착된 사연의 전말이라고 판단해도 될 듯하다. 이로써 이촉의 시편들은 노동의 정수를 빚어내는 미적 사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 자동사적 회로는 순수한 자율적 운동이다. 이 운동에는 충전 장치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운동은 탈진되지 않을까?
실로 표제작인 「검은 해바라기」는 그 사연을 애절하게 기술하고 있다.
덜렁거리는 다리 안고 누워 감내해야 했던 시간도 있다. 부러져 어긋난 뼈 사이로 숨 쉬듯 피로 적셔지는 다리 몸은 알고 있어도 말할 수 없어. 부어오른 다리 창백한 얼굴 내 몸을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몸은.
고인 사고를 흐르게 해 그건 생각의 사고야 부러진 골반 수술하면 위험해. 그냥 두고 거짓말처럼 새빨간 피를 한 양동이 흐르게 하는 사고. 빨갛게 새하얀 거즈가 흡입해야 할 슬픔 왜 나를 돌돌 말아 놓기만 해. 가운을 입은 사람 둘이 잡고 슬며시 내려놓는 다리. 눕듯 앉아 미음 몇 숟가락 떠 넣고 잠자면 아침이고 미음 몇 숟가락 먹고 나면 저녁이야. 썩어가는 몸 혈관으로 흐르지 못해 푸른빛을 띠지. 원래 혈관이 약해서라고 하얀 거즈로 덮어 놓지. 내 몸에서 흐른 피 한 양동이가 동영상으로 찍히는 것을 보았어.
비에 꺾여도 꽃을 피우는 해바라기야 네 옆에 지지대 하나 세운다.
담벼락에 기대어 죽어가는 해바라기야. (「검은 해바라기」)
마지막에서 두 번째 행의 “비에 꺾여도”는 앞에서 인용한 “저년은 비만 오면 구례 온다”는 ‘엄마’의 잔소리를 상기시키면서, 환자의 입장에서 환자에 대한 묘사인 것처럼 보이는 이 시가 시인-화자 자신에 대한 얘기임을 넌지시 가리키고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탈진 상태를 적나라하게 노출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일을 해야만 하는 까닭을 밝히고 있다. “빨갛게 새하얀 거즈가 흡입해야 할 슬픔 왜 나를 돌돌 말아 놓기만 해”는 그 반대 방향의 행동으로 자신의 몸이 나아가야 할 당위를 지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인 사고를 흐르게”하는 행위, 즉 살아있는 정신의 지속성에 통한다.
한데 마지막 행이 그대로 지시하듯이 그 행동의 막바지에는 에너지의 소진이 기다리고 있다. 이 시는 그 결말을 그저 방치하고마는 사람의 애수를 진하게 흘린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가 간직한 비밀이 헌신의 노동으로 바뀌는 일의 부단성(不斷性)을 담백히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 그건 스스로 선택한 삶이며,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이다. 죽음을 향해 가면서 스스로 완성되는 삶인 것이다. 그런 자신의 생애를 마음 깊은 곳의 빛에 비추어보면서 마지막 시는 ‘미소’를 흘린다. 그 음미를 독자에게 넘긴다.
눈에 가물거려 다시
느랭이골 비밀의 숲 지나
섬진강 건너 돌아 한 손으로 돌아
저 불상 눈에 걸려
한참 바라보고 지나치다 또 보고
보고 다시 들여다보고
그래도 모를 저 불상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눈을 보소
입가의 미소를 보소
너는 옆에서 앞에서 셔터를 누를 동안
저 불상 뒤에서 동백 웃기만 한다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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