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a-Cola의 역사-9】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소 양 진영은 영향력 행사를 위해 서로 경쟁했고,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대리전쟁을 벌이며 싸웠다.
이 기간에 코카-콜라는 단지 미국만이 아니라 서구적 가치관인 자유, 민주주의, 자유시장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연상시키게 되었다.
반대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코카-콜라는 자본주의의 온갖 잘못된 것을 대표하는 상징이며, 특히 소비자들의 가끔은 사소한 요구까지도 만족시키는 것이 경제를 움직이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코카-콜라를 비난했다.
1948년에 코카-콜라가 개최한 컨벤션의 플래카드에는 “우리가 공산주의자를 생각할 때 우리는 철의 장막을 생각한다.그러나 그들은 민주주의를 생각할 때 코카-콜라를 생각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코카-콜라 회사는 1940년대 후반 동안 해외사업을 급속히 확대했고, 그 결과 1950년에는 회사 전체 이익의 3분의 1이 해외에서 발생했다.
그때는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고 미국이 주도하는 유럽재건 계획인 마샬 플랜도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미국의 영향력에 반대하고 마샬 플랜을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로 비판하는 사람들은 코카-콜라를 향해 그들의 분노를 표출했다.
‘코카 식민화 Coca-Colonization’ 즉 코카-콜라를 통한 식민지 정책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프랑스의 공산주의 지지자들이었다.
그들은 프랑스에 코카-콜라 공장의 건립을 반대하는 격렬한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국내의 와인 산업이나 광천수 산업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코카-콜라에 유독한 성분이 있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롤 요구하기 까지 했다.
이것은 미국에서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신문의 사설들은 미국에 감사할 줄 모르는 프랑스에 마샬 플랜을 통한 지원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신문들이 다시 반대하고 나섰다.
르몽드는 코카-콜라의 범람 때문에 “프랑스의 도덕적 지평이 위태로운 상태에 처했다.”라고 경고했다.
최종적으로 코카-콜라에 대한 반대운동은 별 효과가 없었다.
실제로 코카-콜라회사는 이러한 사태로 코카-콜라가 이국적이면서도 금단의 음료라는, 그것도 무료로 엄청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유사한 저항 운동들이 다른 나라에서도 발생했다.
공산주의 활동가들은 코카-콜라는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며, 코카-콜라가 보급되면 미국의 문화적 가치가 유럽의 국가들을 오염시킨다고 주장했다.
맥주 제조업자, 광천수 업자, 청량음료 제조업자도 공산주의자의 反코카-콜라 운동을 지지했다.
자료의 출처
세계사를 바꾼 6가지 음료
톰 스텐디지 지음,캐피털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