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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암환주인(巖喚主人)
* 서암이 주인공을 부르다
당신은 주인공으로 사는가 아니면 손님으로 사는가
대승이 꿈꾼 화엄의 세계는
각각의 개성이 만개하는 곳
자신 존귀함 모르는 우리는
동화 속 미운오리새끼일 뿐
마마보이의 주인 아닌 사랑
자신·타인 모두에 비극 초래
서암 사언 화상은 매일 자기 자신을 “주인공!”하고 부르고서는 다시 스스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깨어 있어야 한다! 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예!예!”라고 말했다.
무문관(無門關) 12칙 암환주인(巖喚主人)
*喚은 '부를 환', '부르다(呼)', '외치다'는 뜻
1. 깨달음은 주인으로 사는 것
‘화엄경(華嚴經)’이란 불교 경전이 있습니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깨달음을 찾아가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던 경전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경전의 내용이 아니라, 경전의 제목입니다. 대승불교에서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를 화엄세계라고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화엄(華嚴)’은 산스크리트어 간다뷔하(Gan.d.avyu-ha)라는 단어를 의역한 말입니다. 여기서 간다뷔하라는 말은 온갖 가지가지의 꽃들을 의미하는 ‘간다(Gan. d. a)와 화려한 수식을 의미하는 ‘뷔하(vyu- ha)’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간다’는 꽃을 의미하는 ‘화(華)’로, 그리고 ‘뷔하’가 장관을 의미하는 ‘엄(嚴)’으로 번역되면서, 화엄이라는 말이 탄생한 겁니다. 결국 화엄이란 말은 들판에 잡다하게 피어 있는 수많은 꽃들의 장관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 선재동자(善財童子)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등장하는 구도보살로 53명의 선지식을 찾아다닌다. 불도를 구하는 모습이 순진한 어린 아이와 같다고 해서, 동자라고 부른다.[1] 남쪽으로 순례를 떠나기 때문에 남순동자(南巡童子)라고도 한다.
대승불교가 꿈꾸었던 화엄세계가 무엇인지 짐작이 되시는지요. 모든 존재들이 자기만의 가능성과 삶을 긍정하며 만개하는 세계, 바로 그것이 대승불교가 꿈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교에서의 자비란 바로 자기만의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연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향이 옅다고 나쁜 꽃이고, 색이 탁하다고 무가치한 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 각각은 모두 자기만의 자태와 향취의 주인공이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것이 주인의 모습입니다. 반면 노예는 붉은 장미꽃이 가치가 있다고 해서 꽃잎을 장미 모양으로 그리고 색깔을 붉게 만들려는 개나리에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장미꽃에 근접하게 자신을 모양을 꾸민다고 할지라도, 개나리로서는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입니까. 자신의 잠재성을 부정하고 성장한다는 것, 혹은 자신을 부정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애절한 일입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타자가 바라는 모습이 되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부정해왔습니까? 그만큼 우리는 행복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 아닐까? 깨달음의 희열이 별것이겠습니까?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열반일 테니까 말입니다.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나요. 서암 사언(瑞巖師彦) 스님이 왜 아침마다 자신을 “주인공(主人公)”이라고 불렀는지 말입니다. 단순한 주인이 아니라 존칭어인 공(公)을 붙여서 부를 정도로 서암 스님은 깨달음이란 별것이 아니라 바로 주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남이 아무리 선의지를 가지고 조언을 해도, 그 말에 따라 사는 순간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악의를 가지고 우리를 노예로 부리려는 사람에 대해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2. 사다리는 올랐으면 버려야
싯다르타(Gautama Siddha- rtha, BC563?-483?)가 이 세상을 떠나려고 할 때, 제자들은 몹시도 슬퍼했고 합니다. 하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반응입니다. 스승이 없어지니 자신의 갈 길이 막막하다고 느꼈을 테니까요. 이런 제자들에게 싯다르타는 마지막 사자후를 남깁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개나리는 개나리로 만개하고, 히아신스는 히아신스로 만개하고, 장미는 장미로 만개할 뿐입니다. 그러니 히아신스가 장미를, 장미가 개나리를, 개나리가 히아신스를 모방할 일이 아니지요. 물론 아직 자기만의 꽃을 피우지 못한 제자들, 다시 말해 자신의 잠재성을 실현하지 못한 제자들로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가 자신의 이상형으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만이 유일하게 존귀하다는 선언은 싯다르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 나아가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직 자신이 존귀하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우리들은 안데르센의 동화에 등장하는 미운 오리 새끼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모르니, 멋진 오리가 되려고 욕망할 수밖에요. 이럴 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가르침은 너무나 절절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싯다르타의 가르침이 동양만이 아니라 서양에도 그대로 울려 퍼졌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바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입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된다면, 그때 내가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일체의 외적인 권위에 기대거나 모방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서양에서 신이란 존재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모방과 숭배의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모방의 대상이 있는데, 어떻게 인간이 자신만의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렇지만 과연 신만이 모방의 대상일까요? “누구도 모방하지 말라”는 차라투스트라 본인이나 그의 가르침도 바로 모방의 대상으로 변질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자신의 절대적인 존귀함을 깨달은 차라투스트라도 “나를 부정하라”고 피를 토하듯이 외쳤던 겁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제자들 각각도 자기만이 존귀함을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유명한 말을 빌린다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하는 법입니다.
3. 주인공이 될 때 사랑도 가능
그렇다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으로 산다고 해서 마치 독재자나 잔혹한 자본가, 혹은 권위적인 아버지처럼 누군가를 노예처럼 부린다는 것은 아니니까요. 단지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 달리 말해 내 자신이 가진 잠재성을 활짝 꽃피우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진정한 주인은 타인을 노예로 부리지 않는 법입니다.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사람은 겉으로는 주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노예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고개를 갸우뚱거릴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분명해지는 일이니까요. 타인이 밥을 차려주어야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또 타인이 운전을 해주어야 길을 떠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법입니다.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요.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사람은 겉보기에는 주인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자기가 부리는 사람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요.
그렇다면 이토록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자기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타자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무엇인가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기의 모습보다는 분명 당당한 주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더 사랑스러울 테니까요. 동시에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마마보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법적으로나 신체적으로는 성숙한 어른이지만 매사에 어머니의 말에 순종하고 그녀의 눈치를 보는 남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마마보이는 여성들에게 강한 호감을 줍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마마보이가 교제하는 여성의 속내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미묘한 얼굴 표정이나 말투만 접해도 금방 그녀의 속내를 쉽게 헤아릴 겁니다. 이미 그는 어머니라는 여자의 눈치를 보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속내를 자기만큼 잘 헤아리는 남성을 어느 여자가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사랑에 빠지겠지요.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깊어갈수록 여성은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두 사람만이 두 사람의 일을 결정해야 하는데, 자꾸 남자친구의 어머니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테니까 말입니다. 서로 의견이 충돌할 때마다 남자친구는 당혹스럽게 말하곤 합니다.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야.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나를 좀 이해해줘.” 그렇지만 분명하지 않나요. 남자친구가 이해해달다는 것은 사실 자기 어머니의 마음이니까 말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계속 불만을 토로하는 여자가 마마보이는 서운하기까지 할 겁입니다. 그렇지만 과연 이것이 여자 친구의 잘못인가요. 남의 집에 얹혀사는 사람은 친구를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주인의 눈치를 보는 집에서 얼마나 친구가 불편해하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요. 어머니로부터 독립된 성숙한 남성이 될 때까지 마마보이는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강신주
그 사랑은 자신에게나 사랑하는 타자에게나 모두 비극을 초래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에 대한 것이든 타자에 대한 것이든 사랑은 주인공만이 할 수 있는, 아니 주인공이어야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침마다 일어나서 서암 스님이 자신에게 던진 말을 자신에게 던져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지지 않았나요. “주인공!” “예!”
https://namu.wiki/w/%EC%A3%BC%EC%9D%B8%EA%B3%B5
주인공 主人公
주인공의 어원은 불교의 용어라는 설이 있다. # 대부분 불교용어인 줄 모르고 그냥 쓰는 점에서 관념, 나락, 이판사판, 야단법석 같은 단어와 비슷한 경우라는 설이 있다. 또다른 설로는, 절강성 태주의 서암 사언 선사를 말하며 암두스님의 제자라는 설이 있다.[7] 해당 일화에서의 주인공은 불성(佛性)이나 본래불, 진면목, 총지, 법장, 무진장, 이 뭣고, 한 물건 그러니까 마음 다시 말해 즉심여불의 그 심(心)을 지칭한다. 생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인간과 우주 전체를 이루고 있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진리인 마음자리를 말한다.
그러나 상기 내용은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내용이 <무문관> 등 자료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표현이 오늘날의 '주인공'과 의미적으로 관련되어야 비로소 어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법보신문 등에서는 <무문관> 12칙을 주인공의 어원이라고 했지만 법보신문의 오독이라고 해야 한다.법보신문 주인공(主人公)
<무문관> 제12칙의 주인공은 주인옹(主人翁)과 같은 표현으로, 주인(主人)은 일단 그 '소유자, 주인'이라는 뜻이고 나아가 인간의 '깨어있는 마음'을 의인화한 표현이다. 翁, 公 모두 공경의 의미로 점잖게 부를 때 덧붙이는 호칭이다. 해당 단어는 본래 (손님을 접대하는) '집주인'이나 '주인장'을 뜻하는 말이었다. 즉, 서암선사가 "주인공!" 하고 부른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의식이다. 그 마음이 어두워지거나 외물(外物)에 속아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경계한 것이 <무문관> 제12칙의 내용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의 주인공과 의미가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이라는 표기 자체는 <무문관>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 어원이 여기에 있다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주역, 중심 인물의 뜻으로 '주인공'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고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다. 이런 경우 대체로 서구 용어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번역어를 이것으로 채용한 경우가 많다. 영어 protagonist의 번역어로서 '주인공'은 메이지 18년 츠보우치 소요가 저술한 근대소설론인 《소설신수(小説神髄)》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말이다. 당시 츠보우치는 이 단어를 '본존(本尊)'으로 번역할지도 고민했던 듯하나, 결국 언중의 선택에 맡겼다. 둘 다 불교 용어를 차용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불교용어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불교 용어
3000포석정
2023. 2. 22. 21:58
1) 누비옷
본래는 스님들이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해 넝마의 헝겊 조각을 기워서 만든 옷 납의(衲衣)를 말한다. 즉 납의장삼(衲衣長衫)에서 나온 말이다. 납의가 '나비'로 소리 나다가 다시 '누비'로 정착된 것이다. 여기서 누비다라는 새로운 바느질 양식이 나오게 되었으며, 나아가서는 종횡무진 거침없이 나아간다는 뜻으로 발전했다.
2) 찰나(刹那)
지극히 짧은 시간을 나타내는 말로 1찰나는 1/75초에 해당하면 산스크리트어 크샤나의 음역이다.
3) 단말마(斷末摩)
죽음 또는 죽을 때를 가르키는 말로써 '말마'는 산스크리트어의 '말마'를 그대로 옮겨 쓴 것으로 관절이나 육체의 치명적 부분 즉 급소를 말함, 이 말마를 짜르면 죽음에 이름
4) 뒷바라지
바라지란 원래 절에서 재(齋)를 올릴 때 법주 스님을 도와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하고 시가(詩歌)를 읊는 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죽은 영혼들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비는 의식인 재에서, 바라지 스님은 법주 스님을 도와 목탁을 치고 경전을 읊고 향(香)과 꽃과 차(茶)를 올린다. 바라지 스님이 이처럼 자잘하고 수고스러운 일들을 해준다는 데서 '뒷바라지하다', '옥바라지하다' 등의 말이 생긴 것이다.
5) 살림(産林)
한 집안을 운영, 관리하는 일을 살림이라고 한다. 원래 이 말은 불교용어인 산림(山林)에서 나온 말로써 산림은 절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말하는데 주로 사판승(事判僧)이 관리한다.
6) 명복(冥福)
죽어 저승에서 받는 복을 말함,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사후세계에서 심판을 받는데 그곳을 '명부(冥府)'라 하는데 그곳에서 복된 심판을 받으라는 뜻임.
7) 시달리다
흔히 성가시거나 괴로운 일을 당하는 것을 '시달린다'라고 하는데 본디 이 말을 불교의 '시다림'에서 나온 말이다. 시다림은 인도 북부에 있는 숲의 이름으로, 사람이 죽으면 이곳에 시신을 내다 버리는 일종의 공동묘지였다.
그 때문에 이곳은 공포와 각종 질병이 창궐하는 지옥 같은 장소가 되어 버렸는데, 도를 닦는 수행승들이 고행의 장소로 이곳을 즐겨 택하곤 했다. 수행자들은 이곳에서 시체가 썩는 악취와 각종 질병과 각종 날짐승들을 견뎌내야 했다. 따라서 이 시라림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곧 고행을 가리키는 것이다.
8) 짐승
본래는 불교에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뜻하는 '중생(衆生)'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두 갈래로 그 의미가 분화되었다. 그 하나가 '중생'으로서 끊임없이 죄를 지으며 해탈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만 사용되었다. 또 하나는 '중생'의 소리가 즘싱 또는 짐승으로 변하면서 사람을 제외한 동물만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9) 기특하다(奇特)하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온 일을 가리키는 말로써, 매우 드물고 특이한 일을 가리킨다.
10) 아귀(餓鬼)다툼
불교에서 아귀는 탐하고 질투하는 마음만을 가진 굶주린 귀신이다. 아귀는 무려 36종이나 있다고 하는데 그 모양새가 하나 같이 끔찍하기만 하다. 일반적인 아귀의 형상은 대개 집채만 한 몸에 작은 입과 가늘고 긴 목구멍을 가지고 있어 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탐한다. 이들은 만나기만 하면 음식을 차지하기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기만 한다. 그 모습이 흡사 지옥도를 방불시키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워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사찰이나 박물관에 가면 감로탱화를 볼 수 있는데 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보내는 영가천도(靈駕薦度)때 봉안하는 불화로서, 조선시대에 성행하였다. 감로탱화란 아귀나 지옥의 중생에게 감로미(甘露米)를 베푼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아래 탱화에서는 성반상 아래에 불을 뿜는 아귀상을 크게 쌍으로 묘사하고 있다.
11) 아비규환(阿鼻叫喚)
아비규환은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의 준말이다. 불교에서는 지옥을 8군데의 열지옥과 8군데의 혹한지옥으로 나누는데, 8군데의 열지옥 중에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으로서 오역죄를 범하거나, 절을 파손시키거나, 스님을 비방하거나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뜨거운 열이 일어나는 이곳에서 끊임없이 지독한 고통의 괴로움을 받는다. 규환지옥은 살생, 도둑질, 음행 등을 저지른 사람이 들어가는 지옥으로서, 가마솥에서 삶기거나 뜨거운 쇠집 속에 들어가 고통을 받고 울부짖는 곳이다. 그러므로 아비규환이라 함은 아비지옥과 규환지옥 두 군데의 지옥에서 동시에 고통을 받아 울부짖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12) 아수라장(阿修羅場)
아수라장, 아수라왕이 제석천과 싸운 마당. 끔찍하게 흐트러진 현장이란 뜻으로, 전란 등으로 인하여 큰 혼란 상태에 빠진 곳이나 법석을 떨어 야단이 난 곳을 말한다. '아수라'는 산스크리트어 Asura의 음역이다. '아'는 '무(無)', '수라'는 '단정(端正)으로, '아수라'는 무단정 혹은 추악하다는 뜻이다. 아수라는 본래 육도 팔부중(八部衆)의 하나로서 고대 인도 신화에 나오는 선신(善神)이었는데, 후에 하늘과 싸우면서 악신(惡神)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증오심이 가득하여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전신(戰神)이라고도 한다. 아수라가 하늘과 싸울 때 하늘이 이기면 풍요와 평화가 오고, 아수라가 이기면 빈곤과 재앙이 온다고 한다. 인간이 선행을 행하면 하늘의 힘이 강해져 이기게 되고, 악행을 행하면 불의가 만연하여 아수라의 힘이 강해진다. 아수라는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인 흉측하고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비슈누 신의 원반에 맞아 피를 흘린 아수라들이 다시 공격을 당하여 시체가 산처럼 겹겹이 쌓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아수라장'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13) 야단법석(惹端法席, 野檀法席)
야단법석은 그 표기와 뜻이 두 가지로 나뉘어 있으므로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 '惹端法席'이라고 쓸 떄의 야단은 '야기요단'의 준말이다. 야기요단(惹起鬧端)은 곧 '요단을 일으킨다'는 준말인데 줄여서 '야료'라고 한다. 흔히 생트집을 잡고 괜한 시비를 거는 사람을 가리켜 '야료를 부린다'고 하는데, 이때 쓰는 야료가 바로 야기요단의 준말이다. 그러나 불법(佛法)에서 말하는 '야기요단'은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진리에 대한 의심은 꺠달음으로 가기 위한 첫걸음이 되는 것이므로 그것의 가치 또한 만만하게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단법석(惹檀法席)이라 함은 진리에 대한 의심을 묻고 대답하는 설법의 장(場)을 애기하는 것이다. 두 번째 '野檀法席'으로 쓸 경우는 글자 그대로 야외에 법단을 차려놓고 설법을 여는 것을 말한다. 대중들이 많이 모여서 미처 법당 안에 다 수용할 수 없을 땐 할 수 없이 법석을 야외에 펼수밖에 없게 된다. 그럴 경우 많은 사람이 모였으니 그 모양이 성대하고 시끌벅적할 것임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14) 건달(乾達)
불교의 건달바에서 유래되었다. 건달바는 수미산 남쪽 금강굴에서 사는 하늘나라의 신인데, 그는 고기나 밥은 먹지 않고 향으로만 먹고살며 허공을 날아다니면서 노래를 하는 존재다. 또 하나는 불가에서 사람의 생을 네 단계(本有, 死有, 中有, 生有)로 나누는데 죽어서 다음 생을 받기 까지를 중유(中有)라고 한다. 중유의 몸은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살아생전에 지은 업에 따라서 생명을 받아 태어나게 되는데 죽어서 다시 환생하기까지의 불안정하고 허공에 뜬 존재상태를 말한다. 존재의 뿌리가 불확실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근대 이후,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으로 의미가 별절되어 불량배, 난봉꾼 등의 이미지로 이어졌다.
15) 나락(那落)
불교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나라카(naraka)'에서 온 말로 지옥을 뜻하는 불교용어이다.
16) 가책(呵責)받다
스님들이 수행하다 잘못을 저지르면 여러 스님들 앞에서 죄를 낱낱이 고하고 거기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 제자 중에 지혜와 노혜라는 두 비구가 있었는데 이들이 걸핏하면 싸움을 하여 이를 보다 못한 다른 비구들이 부처님께 고하였고 부처님은 비구들을 소집하여 두 비구를 가채(呵責, 꾸짖을 가, 꾸짖을 책)했다. 가책받은 두 비구는 그동안의 여러 구권뢰와 자격들을 박탈당하고 가책이 풀어질 때까지 근신을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주로 양심의 가책이라는 용어로 많이 상용한다. 사실, 가책이란 단어가 스님들이 벌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책을 느끼다'라는 표현보다는 '가책을 받는다'라는 표현이 더 올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7) 개안(開眼)
흔히 안과에서 '개안수술'등으로 말하는 개안은 절에서 불상을 만들거나 불화를 그린 뒤 부처님을 모시는 봉안식(奉安式)을 하기 전까지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채로 남겨 두었다가 첫 공양을 할 때 점안(點眼) 의식을 한다. 이것을 '개안공양'이라고 하는데 비로서 불상이나 불화에 눈이 생겨 하나의 온전한 불상이나 불화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18) 다반사(茶飯事)
불교용어로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을 의미한다. 극히 일반적이고 당연한 일로서 불교 중에서도 선종(禪宗)에서 유래되었다. 참선 수행을 하는 데는 유별난 방법은 있는 것이 아니고, 차를 마시고 밥을 먹듯이 일상생활이 곧 선(禪)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19) 도락(道樂)
원래는 도(道)를 닦아 깨달음을 얻은 뒤 생기는 기쁨을 말하는 불교용어이다. 오늘날에는 '식도락'등의 단어에 쓰이면서 재미나 취미로 하는 일 등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냥 '도락에 빠졌다'로 쓸 경우에는 주색이나 도박 따위의 못된 일에 흥미를 느껴 푹 빠지는 일을 가리킨다.
20) 동냥(動鈴)
동냥은 원래 불교 용어 동령에서 나온 말이다. 동령이란 '용령을 흔들고 다닌다'는 뜻이다. '요령'은 원래 금강령을 가리키는 말인데, 금강령이란 옛날 불교의식에서 쓰던 도구로서 번뇌를 때뜨리고 불심을 더욱 강하게 일으키기 위해서 흔들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의 스님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탁발에 나설 때 요령을 흔들고 다니게 되면서부터 동령을 구걸과 같은 뜻으로 쓰게 되었다. 이 동령이 동냥으로 변음되면서 '동냥하다, 동냥주머니'등의 말이 생기게 되었다.
21) 말세(末世)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나온 말로 잘 못 알고 있는 말이다. 불교에서 부처님의 법이 퍼지는 때를 세 때(삼시사상)로 나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과 깨달음이 골고루 이루어지는 시기를 정법시(正法時), 가르침과 수행은 있으나 깨달음이 없는 시기를 상법시(像法時), 수행도 깨달음도 없고 교만만 있는 말법시(末法時)가 있다. 이 중에서 불법이 땅에 떨어지면서 오는 악독하고 어지러운 세상인 말법시를 말세라고 한다.
정법시대 : 석가 입멸 후 500~1000년
상법시대 : 그 이후 1000년
말법시대 : 그 이후 1000년
22) 면목(面目)
불교에서 면목이란 누구나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불성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면목을 지킨다', '면목이 선다'는 말은 자신의 본모습을 잃지 않고 지킨다. 불성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말이다. '면목이 없다'는 말은 자신의 본래 모습이 불성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23) 명색(名色)
'명색이 주인인데', '명색이 사장인데' 등에 쓰이는 이 말은 불교에서 온 말이다. 본래 산스크리트어 '나마루파(namarupa)'에서 온 말로써 불가의 12 인연(因緣) 중의 하나를 카리키는 말이다. 명(名)은 형체가 없고 단지 이름만 있는 것이요, 색(色)은 형체는 있으나 아직 육근(肉根)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단지 몸과 뜻만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명색이라 함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겉으로 내세우는 이름을 가리키는, 보통 실제와 이름의 내용이 합치하지 않을 때 쓴다.
24) 무진장(無盡藏)
엄청나게 많아 다함이 없는 것을 말하며 불성을 넓고 크며 무궁하여 신묘한 작용이 끝이 없으니 무진장이라 함(소동파가 지은 적벽부에 이 단어가 인용됨)
'무진장'이란 원래 불가에서 덕이 한량없는 것을 비유한 말이었는데, 후에는 엄청나게 많아 다함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이는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식(蘇軾)의 <적벽부>에서 찾아볼 수 있다.
25) 방편(方便)
방(方)은 방법(方法)을 말하는 것이고, 편(便)은 편리(便利)를 말하는 것으로서, 사람의 근기에 알맞은 방법을 이용하여 깨달음을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묘한 방법을 말한다.
26) 점심(點心)
보통 이야기하는 세 끼란 아침, 점심, 저녁을 이르는 말이다. 그중 아침과 저녁은 때와 끼니를 동시에 일컫는 말로 쓰지만 점심은 오직 끼니를 일컫는 말로만 쓴다. 아침, 저녁이 순우리말이듯 점심도 순우리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선종에서 선승들이 수도를 하다가 시장기가 돌 때 마음에 점을 찍듯 아주 조금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마음 심(心)에 점 점(點)을 쓴 것이다. 이처럼 점심은 간단하게 먹는 중간 식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들 중식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일본식 한자이니 되도록 쓰지 않도록 한다.
27) 주인공(主人公) 득도한 인물을 가리키는 말.
꺠달음을 얻은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번뇌망상과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참된 자아를 누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28) 이판사판(吏判事判)
마지막 궁지에 몰린 상황을 말할 때 쓰는 말이다. 절에서 이판은 참선, 경전공부, 포교 등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스님이고, 사판은 절의 산림(山林)을 맡아하는 스님이다. 여기서 살림이라는 말도 나왔다. 다른 말로 공부승(工夫僧), 산림승(山林僧)이라고도 한다. 조선조에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함으로 스님이 성안에 드나드는 것도 금지된 시대에 스님이 된다는 것은 마지막 신분계층이 된다는 것이므로 이판이 되었던, 사판이 되었던 그것은 이미 신분의 마지막이라는 끝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29) 심금(心琴)을 울리다
심금이란 마음의 거문고를 말하는 뜻이다. 이 말의 유래는 부처님의 설법 중에 '거문고의 비유'에서 비롯된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스로오나'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는 고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고자 했다. 그러나 고행을 통한 수행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깨달음의 길이 보이지 않자 '스로오나'는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고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를 본 부처님이 그에게 '거문고의 비유'를 설했다. "스로오나야. 거문고를 쳐본 일이 있느냐? 거문고는 줄이 너무 팽팽해도 너무 느슨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수행도 이와 같이 알맞게 해야 하느리라"라고 꺠침을 주셨다는 이유로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30) 사자후(獅子喉)
부처님의 한 번 설법에 뭇 악마가 굴복하고 귀의한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의 포효에 비유한 말이다. 뜻이 바뀐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크게 외치면서 열변을 토하는 연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31) 행각(行脚)
불가의 선종에서 스님이 도를 닦는 한 방편으로 여러 지방과 절을 돌아다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구름이나 물곽 ㅏㅌ이 정한 곳 없이 떠돌아다니다고 해서 '운수행각'이라 한다.
32) 저승
불교에서 '저승'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영혼이 가서 살게 되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저승'은 지시대명사 '저'와 삶을 뜻하는 한자어 '생(生)'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말로서 '저생'의 소리가 변해서 '저승'이 되었다. 이 세상을 가리키는 '이승'도 역시 같은 이차로 만들어진 불교용어이다.
33) 사리
사찰에서 국수를 먹을 때 '사리를 추가한다'는 말을 하는 '사리'를 보통 일본어라고 잘못 알고 있다. '사리'는 '사리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실 같은 것을 흩어지지 않게 동그랗게 포개어 감은 것을 말한다. 국수나 새끼, 실 등을 동그랗게 감은 뭉치를 가리키는 순 우리말이다. '몸을 사린다'는 말에 쓰기도 한다.
34) 공염불(空念佛)
부처님의 법에 대한 신심(信心)없이 입 끝으로만 되되는 헛된 염불을 가리키는 말이다.
35) 도로(徒勞)아미타불(阿彌陀佛)
도로아미타불은 헛수고를 뜻하는 '도로'와 서방 극락 세계의 부처님을 뜻하는 '아미타불'이 합쳐진 말이다.
지극 정성으로 불도(佛道)를 공부하면 자기의 본성(本性)안에 아미타불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36) 탈락(脫落)
집착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이 해탈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벗어버림'이라는 본래의 의미가 '낙오'의 의미로 변질되었다.
37) 출세(出世)
부처가 이 세상에 나타남을 의미하는 것. 중생의 세계에 출현하여 중생을 교화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높인다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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