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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성문협 원문보기 글쓴이: 임충빈
박두진 시에 나타난 ‘자연’
조동구(부경대학교)
I. 서론
박두진의 시세계는 일반적으로 ‘자연 → 인간 → 신(神)’이라는 단계를 거쳐 변모되어 온 것으로 보고 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그의 시작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자연의 생명력에 바탕을 둔 초월적 이데아에 대한 호소와 미래에 대한 낙관적 염원을 보이는 초기와 민족과 사회현실에 대한 강한 저항과 비판적 자세를 보이는 중기, 그리고 신앙체험의 고백과 신에 대한 찬미와 귀의를 노래하는 한편, 수석을 통한 근원적, 초월적 본체와의 교감과 황홀을 노래한 후기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반세기가 넘는 시력(詩歷)을 통틀어 볼 때, 그의 전체시를 일관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순수하고도 항구적인 사랑이다. 자연은 그의 시의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마지막으로 안착하는 안식처이며, 신앙인으로서의 메시아의 기다림과 신에의 귀의 또한 자연이 지닌 보편적․초월적 섭리에 동화되는 과정이다. 그것은 자연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변함없는 우주적 질서를 간직한 가장 근원적 세계의 표상이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자연은 반목과 대결, 억압과 구속이 사라진 절대 이상향의 세계이자 재생과 구원이 약속되는 은유적․상징적 세계로 형상화된다. 따라서 그의 시에 나타나는 민족의식과 현실의식, 또는 신앙적 자세 또한 자연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서부터 출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곧 자연은 민족의 시련과 고통의 시기엔 내일의 희망찬 약속을 간직한 생명력으로, 사회악과 부조리가 만연된 시기엔 정의와 양심을 회복할 수 있는 자유의지의 실천적 힘으로, 또는 인간존재의 한계에 절망하고 신앙적 회의에 빠질 때에는 이를 구원하는 순수와 초월적 본체로 현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상과 같은 입장에서 박두진 시에 나타난 자연의 의미를 시의 변모과정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II. 본론
1. 생명의 찬미와 이상향 동경
1940년 1월, 정지용은 박두진을 추천 완료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朴君의 詩的 體臭는 무슨 森林에서 풍기는 植物性의 것입니다. 실상 바로 다옥한 森林 이기도 하니 거기에는 김생이나 뱀이나 개미나 죽음이나 슬픔까지가 무슨 獸臭를 發散할 수 없이 白日에 서늘없고 푹은히 젖어 있습디다. (……) 恒時, 멀리 海潮가 울듯이 솨- 하 는 極히 纖細한 松籟를 가졌기에. 詩壇에 하나 『新自然』을 紹介하며 選者는 滿悅 以上 이외다.(「詩選后」)
박두진 시의 새로움에 대한 정지용의 평가는 ‘滿悅 以上’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지만, 실은 ‘신자연’이라는 한 마디 말로 압축된다. 그러나 정지용에게 있어서 ‘신자연’이란 말은 문맥 속에서 ‘植物性의 森林’, 또는 ‘서늘없고 푹은히 젖’은 정서, ‘海潮가 울듯이 纖細한 松籟(솔바람, 필자주)’와 같은 의미로 파악된다. 그런 점에서 이같은 의미의 자연은 한국 서정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이다. 정지용의 이러한 태도는 초회 추천사에서도 이미 내비치고 있었다. 그 대상작품은 바로「香峴」과 「墓地頌」인데, 정지용이 말한 ‘유유하고 편한’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山 넘어 큰 山 그 넘엇 山 안 보이어, 내 마음 둥 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山, 묵중히 엎드린 山, 골골이 長松 들어 섰고, 머루 다랫넝쿨 바위엉서리에 얽 혔고, 샅샅이 떡갈나무 윽새풀 우거진데, 너구리, 여우, 사슴, 山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 리 等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山, 山, 山들! 累巨萬年 너희들 沈黙이 흠뻑 지리함즉 하매
山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 확 치밀어 오를 火焰을 내 기다려 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 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 「香峴」 --
北邙 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髑髏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ㅅ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太陽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삐이 배, 뱃쫑! 배쫑!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군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 「墓地頌」 --
「香峴」이나 「墓地頌」에 제시된 자연은 관조적이며 미학적인 한국시의 전통적 자연이라기보다는, 모든 생명이 함께 공동체적 삶을 누리는 현장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죽음과 생명,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는 일원화된 세계로 그려진다.
먼저 「香峴」에서 시인은 구름을 타고 날아올라 입체적으로 이어진 산들을 조망한다. 그러나 내려다 보이는 산은 많은 동식물을 거느리고 있지만 너무나 조용하여 오랜 세월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 미동도 하지 않는다. 움직일 듯한 조짐도 전혀 없는 산의 인내와 침묵에 대해서 시인은 마침내 “山! 山! 山! 累巨萬年 너희들 沈黙이 흠뻑 지리함즉 하”다는, 분노에 가까운 질타를 던지고 그 감추어진 폭발적 잠재력이 분출되기를 호소한다. 그런 점에서 “확 확 치밀어 오를 火焰”은 침묵과 정적의 세계를 뒤엎고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는 능동적 힘의 표상이자 혁명적 염원의 표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노와 혁명적 염원으로 그가 도래하기를 꿈꾸는 세계는 화염으로 모든 것이 평정되어 새로운 질서를 갖춘 자연이다. 곧 여우와 이리가 생존을 위해 약한 짐승들을 잡아먹어야 하는 최소한의 사냥도 그만둔 세계이고, 싸릿순이나 칡순을 함께 뜯어 먹어야 하는 새로운 생존법칙이 실현되는 세계이다. 곧 자연은 가장 소박하고도 본질적인 법칙으로서 약육강식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인데, 이 시에서 그려진 자연은 원시적 질서마저도 사라진 세계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에 나타난 자연은 시인이 바라는 초월적 이상세계를 일종의 알레고리적 형식으로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스스로도 이 시가 일제말의 절망적 상황에서 대변혁을 꿈꾸며 쓰여진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의 시정신의 연원이 당시대적인 관심만이 아니라 ‘인간사의 부조리 인식과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원초적인 의문’과 같은 근원적인 것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墓地頌」에 제시된 자연은 ‘어둠’과 ‘태양’이 공존하는 세계이다. ‘무덤’은 죽음과 髑樓(해골), 외로움과 서러움 등으로 인식되는 세계인데, 시인은 전혀 다른 ‘태양’과 봄볕, 향기로움과 포근함의 이미지로 그 세계를 전환시키고 있다. 곧 무덤은 인간이 최후로 돌아가는 안식처이지만, ‘금잔디’와 ‘할미꽃’이 함께 피고 ‘멧새’들의 울음소리가 즐거이 들리는 생명현장으로서 인간의 유한성이 자연의 영원성 안에 일치하고 동화되는 재생의 화해로운 세계로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살아서 살던 주검 죽었으매 안서럽’다는 것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또다른 부활과 구원으로 이어지는 한 과정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생성과 소멸, 소멸과 생성이 이루는 자연의 순환반복적 섭리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지용은 비록 간과하고 말았지만, 박두진의 초기시에 나타난 ‘신자연’은 다만 관조와 향수의 객관적 세계이기보다는 모든 생명들이 스스로의 생명력을 발휘하여 주체적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능동적 삶의 공간이다. 특히 모든 대립과 반목이 해소된 절대 순수의 세계이며, 죽음과 재생의 순환으로 영원한 생명력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이며 보편적인 질서를 갖춘 이상향이기도 하다.
새로운 이상향에 대한 기대와 염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는 흔히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해」라는 작품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 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 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헐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 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 「해」 --
‘해’는 박두진의 시에서 가장 많이 제시되는 자연물이자 상징 가운데 하나다. 때로는 ‘햇볕’이나 ‘햇살’과 같은 따뜻하고 포용적인 이미지로, 때로는 ‘화염’이나 ‘불덩어리’처럼 모든 것을 태우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죽음과 재생의 초월적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것은 해가 영웅적인 힘과 용기, 생명과 창조적 에너지의 근원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있어 해는 무엇보다도 미래지향적인 낙원 회복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에너지원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시의 창작배경에 대해서 “8․15해방이라는 거대한 격동을 계기로 한 벅차고 웅대한 기대와 이상을 노래”하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해는 모든 가치의 통합과 대조화의 질서를 회복한 이상세계를 실현시킬 수 있는 통합적 힘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이 시에서 무엇보다 먼저 발견되는 것은 명령형의 숨가쁜 반복과 의성어와 의태어, 누진적으로 첨가되는 어휘를 통한 구문상의 점층법적 사용이다. 그것은 해의 수직상승적 이미지와 함께 시인의 시적 기대를 실현시키는 지속적 힘의 원천이 된다. 그리고 떠오르는 해의 점진적 상승과 부정적 세계의 표상인 ‘어둠’과 ‘달밤’을 물리치는 거대한 힘의 실현을 강화하고 있으며, 시적 자아가 그 속에 수용되는 과정의 당위성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의 실현을 어쩔 수 없는 대세로 인식하는 시인의 역사의식의 잠재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자연이 지닌 친화력과 절대 조화의 생명력을 믿는 확고한 의지의 발현이기도 하다.
곧 그가 이 시에서 꿈꾸는, 해가 솟아 실현된 공간은 ‘어둠’과 ‘달밤’이 물러간 ‘밝음’의 세계이지만, 그 밝음의 세계는 단지 어둠과 대비되는 밝음의 세계만은 아니다. 사슴과 칡범, 꽃과 새, 짐승이 한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는 대화합과 조화의 세계이다. 사슴과 칡범은 강/약, 또는 악/과 선을 상징한다면 ‘모두 불러 한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그 대결과 반목이 사라진 평화로운 세계를 뜻한다. 곧 시인의 자연의 영원한 질서와 생명력에 대한 믿음은 분열과 갈등을 초극하고 통합된 삶을 이룰 수 있는 신화적 구도에 의해 가장 이상적인 낙원을 창조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박두진의 초기시에 나타난 자연은 원시적 생명들이 서로 화합하고 조화가 되어 공동체적 삶을 구가할 수 있는 이상향으로 그려진다. 그곳은 힘과 힘의 대결, 약육강식의 법칙이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 세계로서, 이는 일체의 존재와 생명을 영원한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포용하고자 하는 평화주의적 이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 ‘인간’의 한계인식과 이념의 실천
그러나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이상향의 세계는 현실에서는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1950, 60년대의 6․25와 4․19 등 전쟁과 정치사회적 격동기에 걸쳐서 쓰여진『午禱』(1952)와 『거미와 성좌』(1961), 『인간밀림』(1963) 등의 시집에서는 고통과 외로움의 세계로 나타난다. 시적 자아는 “영겁을 볕만 쬐는 나 혼자의 曠野”에서 핏덩이처럼 기진해 있거나, 약육강식의 “처절한 정적”만이 지배하는 어두움의 세계 속에서 “지옥에서 지상에의 유배”당해 먹이를 사냥하는 한 마리 거미처럼 오열한다.
우선 이상적 낙원의 터전으로 제시되었던 ‘산’은 삶의 현실적 현장이기보다는 오히려 외로움과 무서움, 부끄러움을 주는 공간으로 바뀐다. 그것은 해방으로 실현될 수 있을 것 같았던 평화가 전쟁과 정치․사회적인 혼란으로 파괴되어 버렸으며, 더 이상 실현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에서 비롯된다. 이는 이 무렵의 시가 동족상쟁의 6․25의 처참한 현실에서 쓰여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초기시의 이상향에 대한 기대와 평화에 대한 낙관적 믿음이 현실의 많은 죽음과 고통, 상실과 파괴를 경험하면서 보다 큰 좌절과 고통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좌절과 고통의 경험은 그의 시와 삶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 반성과 비판은 한편으로는 민족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으로, 또 한편으로는그 근원적 비극성의 연원에 자리잡은 인간의 원죄의식과 속죄를 통한 신앙적 구원에 대한 바람으로 이어진다.
이 무렵 그의 이러한 현실과 인간존재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심정적 변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 밝고 긍정적이고 절대적인 세계의 높이로부터, 그러한 이상적이고 너무나 타당하고 건실한 정신에의 추구로부터, 어둡고 악에 차고 모순투성이이고 죄에 찬 생생한 오늘의 세계로 내려오고 싶어졌다.(……)
내 시의 영토는 곧 현실이며 오늘의 세계의 오늘의 상황이어야 한다. 사상적 현실주의 와 시적 리얼리티는 별개의 것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상적이며 초월적인 것에서 나의 시가 지상적이며 현실적인 세계로 내려온다는 것은, 하나의 필연적인 단계여야 하는 것이었다. 이미 설계되어 있던 ‘자연’과 ‘인간’과 ‘신’의 삼단계에서 보면 이 시는 그 제2단 계인 ‘인간’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그러한 범주에 드는 것이다.(「거미와 성좌 시대」)
자신의 시가 그동안 ‘천상적이며 초월적’이었다는 것은 자연을 알레고리의 한 방식으로 사용한 초기시가 지나치게 낙관적 이상주의에 기울었었다는 것을 반성한 것이며, 초월의지의 실현 또한 막연한 염원으로서만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초월적이거나 종교적인 군림으로 현대의 악에 대해서는 안되며, 현대의 죄악적 성격의 내오로 깊숙히 들어가 그 생리를 체험화해야” 한다는 시적 관심의 변화를 선언한다. 그런 점에서 그가 ‘자연’ 다음으로 선택한 세계가 시대와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타락하거나 고통받는 ‘인간’ 의 현실세계이자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인간’의 실존세계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일히도 새도 없고,
나무도 꽃도 없고,
쨍쨍, 永劫을 볕만 쬐는 나 혼자만의 曠野에
온 몸을 벌거벗고
바위처럼 꿇어,
귀, 눈, 살, 터럭
온 心魂 全靈이
너무도 뜨겁게 당신에게 닳습니다.
너무도 당신은 가차히 오십니다.
- 「午禱」-
“쨍쨍, 永劫을 볕만 쬐는 나 혼자만의 曠野”와 같은 극한상황 속에서 그는 오히려 영적 충만을 경험하고 새로 거듭날 수 있는 빛의 세례를 기원한다. 발가벗고 꿇어앉아 ‘눈물’과 ‘땀방울’, ‘핏방울’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그는, 스스로를 ‘벌레’처럼 낮추고 초월적 힘의 거대한 포옹 속으로 귀의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보인다. 그것은 “나 자신의 피흘리는 속죄의식과 자각과 자책자경만이 시대고(時代苦)와 민족의 참극을 이겨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 근원되는 태초적인 원죄를 깨달아 신 앞에 무릎 꿇고 빌어야” 한다는 원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인간 한계를 고백하고 신앙적 속죄의식과 구원을 갈구하는 태도는 이 무렵 그의 뛰어난 신앙고백시 「갈보리의 노래」1․2․3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갈보리의 노래 2 」는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가 인간적 고뇌와 신앙적 믿음의 어쩔 수 없는 간극 사이에서 희생을 감수하는 고귀한 사랑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인간적 죽음으로 신이 될 수 있었던 그 뒤에는 죽음과 부활, 증오와 사랑, 패배와 승리 사이의 수많은 갈등과 고통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으니, 그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인간한계의 고백과 절대신앙에 귀의해야만 하는 절대적 요청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무엇보다도 뚜렷한 변화는 민족의 현실적 삶의 고통을 통한 구체적인 경험을 직설적인 표현과 뜨거운 육성으로 외친다는 점이다. 시대의 현실악과 부조리를 면면한 역사의식으로 꾸짖고 있으며, 민족의 미래에 대한 예언자적 호소가 신념과 의지로 노래된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기빨을 내린 것이 아니다.
그 붉은 鮮血로 나부끼는
우리들의 기빨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絶叫를 멈춘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 피불로 외쳐 뿜는
우리들의 피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불길이여! 우리들의 隊列이여!
그 피에 젖은 주검을 밟고 넘는
불의 怒濤, 불의 颱風, 革命에의 前進이여!
우리들 아직도
스스로는 못막는
우리들의 피 隊列을 흩을 수가 없다.
革命에의 前進을 멈출 수가 없다.
-「우리들의 기빨을 내린 것이 아니다」-
4․19의 이념을 구체적 현장감각과 함께 형상화한 작품으로서, 정의와 순수, 진리를 회복하기 위한 자유실현의 의지를 찬미하고 영구히 지속되기를 호소하고 있다. 특히 “우리들의 기빨을 내릴 수가 없다”와 같은 도도하고 당당한 외침의 이어짐은 앞으로 어떤 불의와 반인간적인 행위에 대해서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준열한 역사의식과 예언자적 심판의식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 이같은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은 이밖에도 「아, 조국」이나 「三月一日의 하늘」, 「우리들의 8․15를 4․19에 살자」와 같은 작품들에도 나타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민족의 비극적 현실인 분단을 민족적 생명력과 저력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을 서사적 구성을 빌어 토로한 장시「아, 민족」은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자연과의 교감과 ‘신’에의 귀의
박두진의 신앙시, 특히 60년대 이후에 줄기차게 이어지는 기독 찬미와 신앙고백의 시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 이상으로 그 단점과 한계를 지적하는 견해가 적지 않다. 이를 요약하면, 관념에 우위를 둠으로써 시의 긴장과 예술성이 성취되지 않는다는 점과 극히 개인적이며 단편적인 신앙고백이 일종의 넋두리 차원에 머물었다는 점, 그리고 그 원인으로서 구체적 경험의 부족과 언어구조의 단순성에 기인한 산만한 시형식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신앙시는 정신적 높이로서 절대 초월적인 이상에 대한 끊임없는 갈구와 인류애와 희생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영구적인 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정신적 모색과 실천을 보인 것이었다. 많은 반복과 단조로운 구성, 관념적 어휘의 사용은 물론 시적 긴장을 저해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시정신의 투명성과 지속성을 강화하고 신앙적 의지를 주제로 응결시키는 효과를 자아낸다.
『使徒行傳(1-20)』의 연작시들은 스스로도 말하듯이 기독교 사도의 행적을 바탕으로 고난과 시련, 수난의 현대를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스스로를 대상화한 작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 영광과 은총을 노래하면서 인간적 삶의 의미와 가치를 완성하고자 하는 구도시이다.
먼저 시인이 절대자인 ‘당신’을 만나는 것은 자아의 자연 및 우주 삼라만상과의 교감으로 노래된다. 여기에는 풀, 나무, 꽃, 새를 비롯한 많은 자연생물과 물, 불, 흙, 빛, 바람과 같은 자연을 이루는 원소들이 등장하는데, 자연은 절대자의 초월적 현현의 모습이자 시인의 신앙심이 만나는 통로가 된다. 그리고 자연의 순수하고 신비로운 생명력을 통한 신성함의 발견과 그 경이로움이 주를 이룬다.
신과의 만남을 놀라운 경이와 황홀로 노래한 다음과 같은 시에서 시인은 바람과 흙, 물과 불, 별과 꽃, 새, 낙엽과 갈대와 같은 자연과 서로 하나가 되어 일체감을 이룬다.
커다랗게 허릴 굽힌 당신의 접근
손으로 처음 빚어질 땐 황홀했었네.
그때 나는 나혼자서 불이었었네.
조금씩 전신으로 불을 느끼며
땅에 처음 발 디딜 땐 황홀했었네.
바람이 넋이 되고
흙이 그 살이 되고
물이 그 피가 되고
바람이 그 혼이 되고
불이 그 사랑, 사랑이 불로 일어
당신의 그 불어넣음이 안에 달을 때,
- 「使徒行傳 3」 -
별을 보면 별들 속에 내가 있었네
그 속에서 언제나
당신 만났네
꽃을 보면 꽃들 속에 내가 있었네
그 속에서 언제나
당신 만났네
바닷가 아침에 반짝이는 모래알
하나씩의 모래알에 내가 있었네
바람이 불고 가면 바람 소리 그 속
산새가 울고 가면
산새소리 그 속에
아, 불려 가는 낙엽 속에 내가 있었네.
거기서도 언제나
당신 만났네.
서걱이는 갈대 속에 내가 있었네.
거기서도 언제나
당신 만났네.
-「使徒行傳 9」-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만물들이 창조주에 의한 생명받음, 탄생의 신비로움을 낳는 주체이자 함께 하는 동반자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과 인간을 엮어주는 매개물이이며 창조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절대자를 향한 신앙의 열렬한 사도로서의 길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다. ‘바람에나 불리는 엉겅퀴나 가시찔레, 이름없는 새와 방황하는 작은 짐승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존재이자 무서움에 가슴 떨며 기다리고 폭풍 속의 어둠을 헤매지만 당신을 만나지 못해 영혼울음우는 불쌍하고 초라한 존재’(「使徒行傳 6」)일 뿐이다. 또 ‘햇볕 내리쬐는 모래벌을 바람도 풀도 구름도 새도 없이 그림자와 함께 가면서 마주 오는 누군가를 기다려야’ (「使徒行傳 17」)한다. 그런 점에서 절대자가 현현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연은 자연 질서로부터 소외되거나 생명력을 잃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시인이 만나는 자연 또한 수난의 현장이자 외로움과 무서움으로 방황하는 고뇌의 가시밭길일 뿐이다.
이러한 자연을 매개로 한 신앙고백은 『抱擁無限』에 이르러 그 절정을 맞는다. 자연물 또한 내면의 풍경을 나타내는 매개체나 선험적인 질서를 나타내는 본유적 관념이 된다. 『抱擁無限』은 “자신의 정신적 내면의 자전적 편력과 방황을 신과의 관계에서 고백적으로 써보려 한” 것으로, 탄생과 어린 시절, 식민지하의 궁핍한 생활, 신에의 귀의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삶을 일련의 신앙사로서 조망한 연작시이다.
『抱擁無限』의 시 또한 『使徒行傳』과 마찬가지로 많은 자연물과 자연현상이 제시된다. 그리고 자연은 시인과 신을 엮어주는 통로이자 만나는 현장이다. 그러나 그 만남은 수평적․동시적이라기보다는 수직적․무시간적으로, 태초의 오랜 역사 또는 그 이전부터 지상 또는 우주에 걸쳐서 입체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때」는 비록 천지창조 전이지만 우주공간 속에서 신의 품에 이미 안겨있었음을 고백하고 있으며, 「어떻게 나를 빚으셨을까」는 많은 자연생물과 자연현상 속에서 한 인간존재로 태어나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찬송하고 있다.
그때 아직은 아무도
사랑도 미움도 모르고 없을 때,
남도 죽음도 모르고 없을 때,
말씀은 곧 불이었고,
곧 물이었고,
바람이었고,
불과 물은 갈리기 이전의 서로 하나,
빛과 바람은 갈리기 이전의 핵, 精,
(……)
내가 아직 나기 이전부터 나를 아시는
당신의 별밭에서 나는,
그 별들의 어느 별에 살면서 있었을까.
푸르른 빙원 속
혹은 뜨거운 열기 속에
가장 청청하고 싱싱한
어느 별 어느 품에 살면서 있었을까.
- 「 그 때」 -
(……)
아으
높은 곳
하늘이신 하느님
그때 그 아득한 때
어떻게 당신은 처음 나를 있게 하셨을까
비로소 처음
내가 나 이도록
어떻게 당신은 처음 나를 빚으셨을까
-「어떻게 나를 빚으셨을까」-
하느님은 창조주로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만들었으며, ‘나’의 탄생 또한 하느님의 뜻에 따른 생명받음의 결과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물론 하고많은 자연생물 가운데 하필이면 인간으로 만드셨는가 하는 의문도 보이지만, 자신 또한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자연물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감사하고 있다. .
4. 자연과 인간, 신
박두진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이자 집요하게 노래된 대상은 수석이다. 70년대 이후 『수석열전』(1973), 『속․수석열전』(1976), 『수석연가』(1984)등으로 이어지는 10여 년 동안 수백 편의 수석시들은, 그 양에 있어서나 시적 밀도와 깊이에 있어서도 박두진시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무생물에 불과한 수석에 매달리게 한 것일까?
수석과 관련된 수상과 대표적인 수석시들을 가려뽑은 『돌과의 사랑』의 「자서」에서 밝히고 있지만, 그것은 수석이 지닌 세 가지 특성 때문이다. 곧 첫째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인간적인 자각과 확인을 압도하면서 동시에 유구 영원한 실존성과 그 상징성을 인식시키는 불변성. 둘째로 그 조직과 그 입자의 내밀한 비밀과 침묵이 우주적 역동에 직결되는 무한성. 셋째로 예술과 시의 예술성을 능가하는 본질미로서의 예술성이 그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석은 ‘초월적인 대자연으로부터 표출된 영원 완벽한 하나의 조형’으로서, ‘시간과 공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 순간과 영원에 대한 인생론, 우주론적인 상징이며 그 숙명적인 진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석시는 그 영원 완벽한 조형성에서 비롯된 상징성과 생명력을 내재한 수석의 신비를 찬양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때 처음 열리던 하늘의 응결된
푸른 정기 처음 숲의 초록 바람
처음 바다 처음 강의 파도소리 여울소리
네게서 들린다.
그때 처음 태양의 금빛 촉감
처음 타오르던 지열
처음 만발한 꽃들의 향기.
처음 울음 울던 맹수들의 포효
처음 지저귀던 새소리 네게서 들린다.
(……)
너는 지금 나의 창가 오월
바람이 뜰의 그 신록의 잎새 사이 먼
천산산맥의 청청한 햇살에 젖어
불어와 서성대는 책상에
그러나 의젓이 그러나 잠잠하게 볕살 속에 앉아 있다.
- 「精」-
이미 이전의 『使徒行傳』이나 『抱擁無限』의 신앙시들에서도 보였지만, 시인은 수석을 통해 천지창조의 신화적 세계를 떠올린다. 수석은 오월 창가의 햇살 속에 조용히 앉아 있지만, 그 속에서 들려오는 신생의 자연이 열리는 소리, 뭇 생명들과 사람들이 첫 삶을 시작하는 그 신비로운 창조적 순간을 엿보고 있다. 곧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돌이지만 시인은 그 속에 창조적 생명력을 간직한 수석의 내밀한 떨림을 감지하는 것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시는, 그 위에 놓였던 수석은 비록 사라졌지만 上臺만 남은 공간을 통해서 경험하는 눈부신 환희를 노래하는 놀라운 상상력을 보인다.
먼 항하사
영겁을 바람부는 별과 별의
흔들림
그 빛이 어려 산드랗게
화석하는 절벽
무너지는 꽃의 사태
눈부신,
아
하도 홀로 어느 날에 심심하시어
하늘 보좌 잠시 떠나
납시었던 자리.
한나절내 당신 홀로
노니시던 자리.
- 「天台山 上臺」 -
수석이 있었던 자리를 창조주이신 ‘당신’이 심심하여 놀러왔다가 가버린 자리라고 볼 수 있는 여유, 이런 상상력으로 떠올리는 세계는 가장 근원적인 절대순수의 세계이자 영구불변의 초월적 세계이다. 영겁을 부는 바람과 별들의 반짝임은 꽃비로 내려 마침내 눈부심으로 ‘아’라는 감탄사만으로도 황홀할 수 있는 그런 세계이다. 적어도 이 시에서는 인간적인 것은 최대로 줄어들어 절대존재의 권능과 숭고함만이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석시들은 수석의 완벽한 조화의 형상미를 노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석으로 현현되어 나타난 영구불변의 근원적 세계와 초월적 본체에 대한 일치를 꿈꾸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꿈은 수석이 지닌 신성성에 대한 발견과 수석의 생리인 인내와 기다림의 극치인 견고한 의지의 실천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은 절대 완미, 초월적 본유의 실체인 수석 앞에서 느끼게 되는 인간의 유한성과 실존적 한계의 고백이다.
(……)
바람에도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있어
사랑에도 독주에도 취하지 않는다.
천의 만의 억의 부피
천의 만의 억의 깊이
천의 만의 사색의 억의 갈필 지닌
너 의연하고 자약한
안의 푸른 무게
너는 너의 가장 안에
열 개의 뜨거운 태양을
열 개의 출렁이는 바다를
열 개의 태풍을
열 개의 개벽 천지 천지 개벽을 지니고도
무한 무한 침묵 속에 억만 명의 함성을
무한 무한 침묵 속에
억만 명의 깃발을
억만 명의 금나팔과
억만 명의 합창
그 황홀한 천지를 지니고도
지금은 다만 잠잠한
너, 나의 앞의 너의 너여
있으리로다.
- 「完璧한 山莊」-
(……)
언제나 모두요 하나로
착한 자나 악한 자
우리들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꿈도 자랑도 슬픔도
파도 덮쳐
너의 품에 용해하는
다만
끝없이 일렁이는
끝없이 정열하는 무한 넓이
무한 용량
푸르디 푸른
너 천 길 속의 의지
천 길 속의 고요로다.
-「젊음의 바다」 -
(……)
우주 공간 아득 층층 절벽이 절벽에
매달려 있다.
어디에나 까맣게
절벽에 절벽이 매달려 있다.
- 「가을 絶壁」-
먼저 「完璧한 山莊」은 내부에 신비하고도 충만한 생명력을 가지고서도 어떤 세속적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성채(城砦)를 노래하고 있다. 견고하게 결정된 수석은 인간적 고뇌와 지상적 윤리를 떠난 의연하고 고고한 천상적 세계를 안으로 다진 채 홀로 우뚝 서있을 뿐, 인간은 그 앞에서 그 절대적 초월성에 다만 숨막히고 만다.
한편 수석은 또한 모든 자연과 인간사를 포용하여 응축한 존재이다. 「젊음의 바다」는 선과 악, 욕망과 갈등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융해시키는 아량을 지닌, 수석으로 현현된 초월적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내적으로 끝없이 출렁이면서 화해와 조화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돌의 의지와 그 의연한 힘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석을 통한 절대 초월적 힘과 신성성에 대한 일치의 꿈은 시인으로 하여금 오히려 그 절대절명의 높이에 절망하거나 스스로의 한계를 고백하게 만든다. 「가을 絶壁」은 그 한계 앞에 선 인간의 비극적 인식을 드러내는데, 끝없이 중첩된 절벽은 구원과 초월을 향해 인간이 타고 올라가야 할 숙명의 길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 절벽에는 무수한 절망의 흔적들, 고통과 좌절, 죽음과 죄의 상처들이 매달려 있다. 그것은 끝없는 구원의 높이에 이르기까지 인간세계가 치루어야 할 고난과 속죄의 운명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석은 구원과 영원의 초월적 상징이자 본체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유한성과 한계성을 초월하는 삶과 존재방식에 대한 각성과 반성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수석시들은 수석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그의 구원과 초월의 이상이 다만 종교적, 구도적 입장에서의 형이상학적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적 실존과 한계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수석이 지니고 있는 근원적 생명력의 발견과 이에 대한 믿음은 자연과 인간, 신을 하나로 엮어주는 그의 시의 핵심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다음의 시는 수석(자연)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공존하는 세계를 그리면서, 닫힌 세계가 아닌 무한대로 열려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초월적 의지와 그 실현을 구체화하고 있다.
(……)
그 돌 속의 불, 돌 속의 물, 돌 속의 빛, 돌 속의 얼음, 돌 속의 시, 돌 속의 꿈, 돌 속의 고독, 돌 속의 눈물, 돌 속의 참음, 돌 속의 힘, 돌 속의 저항,
돌 속의 의지, 돌 속의 평화, 돌 속의 사랑,
돌 속의 자유,
돌 속의 우주, 돌 속의 환희
있는 것 일체 모두
하나로 엉겨,
하늘 천지 땅 천지 둥둥 뜨는 함성
만세 만세 돌들의 외침 끝이 없었다.
- 「水石 會議錄」-
돌들이 모여 이루어내는 하나된 세계, 그것은 물질과 물질, 관념과 관념, 자연과 인간이 대립과 갈등을 이겨내고 마침내 실현한 화합의 이상세계이다. 그리고 이 때 들려오는 함성은 수석과 시인이 하나가 되어 이룬 또 하나의 화합된 세계를 알리는 증언이기도 하다.
5. 공존과 통합의 세계
1982년 이후 1989년까지의 시들을 모아 엮은 시집 『氷壁을 깬다』(신원문화사, 1990)는 자연과 인간, 신이 하나로 통합된 이상세계가 구체적인 자연의 이미지들을 빌어 형상화된 것으로, 박두진 시의 궁극적인 도달점을 보여준다.
특히 이 시집에는 자연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산’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산은 초기시에서 보았던 초월적 이상향으로서의 산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육화된 산이다.
(……)
양 한 마리, 노루, 토끼, 너구리와
다람쥐 한 마리,
작은 산새, 풀벌레,
나비 하나의 죽음에도 눈물 머금고
갈댓잎 하나의 꺾임에도 마음 아파한다.
산은,
낮의 해와 밤의 별,
햇덩어리 끌어안고 볼을 비비고,
억억 천만 별의 나라 별의 세계 황홀,
무궁 무진 끝이 없는 별의 옛날 들으며,
안에 끓는 열기, 안에 끓는 사랑,
안의 깊는 눈물의 강,
안의 영원 무지개숲 홀로 가꾼다.
-「산의 노래, 너」-
초기시의 산이 밝음과 평화의 관념적인 세계였다고 한다면, 이 시에서의 산은 애정과 연민을 지니고 울기도 하는 인간적인 세계로 제시되고 있다. 그 산은 자연의 운행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순응하지만 약한 짐승의 피흘림과 비명소리, 죽음에도 가슴 졸이며 마음 아파하고 있다. 이는 산이 초월적 이상세계를 상징한다기 보다는 고통과 수난, 죽음이 함께 하는 현실적 세계라는 것을 뜻하며, 현실적 삶에 나타나는 갖은 죄악과 불행을 함께 이고 간다고 하는 것을 뜻한다. 곧 사랑의 열기만큼 애정과 연민의 고통도 겪으며, 세계의 부정적․긍정적 삶의 방식들을 보다 높은 곳에서 굽어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그의 시를 일관하여 부정과 악에 대한 불같은 분노와 그 청산을 위한 적극적인 저항을 보여왔던 모습과는 크게 다르다. 오히려 울음 운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인간세계를 자연세계의 통합과 조화의 관점에서, 그리고 자연세계를 인간세계의 인정과 화해의 관점에서 함께 보고자 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곧 자연과 인간의 개념적 구분이 없어지고 생명들의 공존하는 공간으로서의 그 당위성과 현실성을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숲을 노래한 시에서도 이같은 공존과 화합에 대한 시인의 이상을 찾아볼 수 있다.
뿌리 뻗어라.
뿌리끼리 손 내밀어 어루만지며
온 땅 속 어디나가 그물처럼 총총히
대지(大地) 깊이 지심(地心) 깊이 뿌리 뻗어라.
가지 뻗어라.
가지 서로 손 흔들어 너풀거리며
하나씩의 잎새가 하나씩의 깃발이게
온 하늘 수런수런 가지 뻗어라.
햇살이 바람 속에
바람이 그 햇살 속에
바다 파도 밀고 오는 초록 아침 정기(精氣)
가슴 가득 금빛 바다 출렁거려라.
아, 하나씩의 너희 넋은 하나씩의 별
발돋움해 소리 높여 성좌(星座)의 별 불러 내려
땅의 어둠 칠흑 속에 등불 달아라.
죽어 잠든 영혼마다 불을 질러라.
-「숲에게, 숲들에게」-
이는 그 동안 그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적 동력이 되어왔던 초월과 상승의지보다는 하강적, 수평적 어울림을 바라는 욕구가 중심이 되고 있다. 나무들이 뿌리와 가지를 뻗어 얽히는 깊이와 단단한 결합, 숲은 그런 관계와 공동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별 또한 밤하늘 높은 곳에서 천상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어둠을 밝히는 등불로, 넋을 살리는 불로 지상에 임하기를 노래한다.
이는 모든 생명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힘과 존재의미를 나눌 수 있을 때 바람직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절대순수와 초월적 이상이 구체적 삶의 현장인 지상에서 또 다른 구원과 해방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 후기시에 이르러 확인하게 되는 그의 시정신은 바로 이런 공존과 통합의 세계에 대한 실천적 믿음이다.
III. 결론
이상으로 박두진의 초기시에서부터 후기시까지 자연을 중심으로 시적 변모양상을 살펴보았다. 초기시에서 자연은 그의 이상적 낙관주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초월적 절대공간이었다고 한다면, 중기시에서는 그 이상적 세계가 현실에서는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때로는 민족과 역사에 대한 예언자적 호소로, 때로는 인간의 원죄에 대한 속죄의식과 구원에의 갈망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낙관적 믿음 또한 ‘기’나 ‘비’와 같은 ‘인간’적이고 이념적인 형이상학적인 대상으로 전환된다. 곧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그 관심사가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관심은 초월적 이상향에 대한 바람과 원죄의식에 바탕한 구원에 대한 갈망의 한 표현으로서 60년대 이후 신의 찬미와 신앙고백의 신앙시들로 자연스럽게 발전한다. 신앙체험의 고백과 신의 찬미는 주로 자연과 우주의 생명과 자연물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자연은 신과 내가 만나는 통로이자 현장이고, 또 신앙에 따르는 고통과 회의를 고백하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과 ‘신’의 사이에서 그 교통을 이어주는 중간적 존재나 배경일 뿐, 초기시에서 노래한 이상세계의 초월적 질서나 존재의 원리가 되지는 못한다.
매개물이자 과정으로서의 자연이 하나의 통합되고 완결된 존재로서 초월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후기에 쓰여진 일련의 수석시에 와서이다. 그것은 수석이 가장 근원적이고 영원한 생명력을 응축한 결정으로서 자연과 인간, 신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수와 영원의 표상인 수석은 그 깊고 높은 절대성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의 실존적 한계와 유한성을 자각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1980년대의 시들을 모은 시집 『빙벽(氷壁)을 깬다』는 자연과 인간, 신이 하나로 통합된 이상세계를 보여주면서 박두진 시의 궁극적인 도달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곧 모든 생명들이 서로 나누는 존재의미와 공존의 삶의 방식을 통해 절대순수와 초월적 이상이 구체적 삶의 현장인 지상에서 또 다른 구원과 해방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동구(曺東九)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논문 및 저서:「안서 김억 연구」, 「송욱 연구」, 「한국현대시와 아방가르드」 외 다수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현)
첫댓글 이제야 시간을 두고 다 읽어 봅니다. 김현태 시인님 좋은 자료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시인님께는 은사님이시겠습니다.
네. 교수님께 은혜를 많이 입었었고, 늘 한결같고 천사같은 분이십니다. 명절은 잘 보내셨지요? 인사가 늦었지만 새해 건강하시고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