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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배운 삶
아버지는 안양에 있는
별장에 묻히셨습니다.
개성 사람들에게는
별장에 집안 어른의 묘소를
만드는 풍습이 있습니다.
종가집 장손이었던 아버지는
당신의 부모님보다 일찍
세상을 뜨신 것입니다.
자식을 앞세워 보내는 일보다
더 험한 일은 없다고들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못내
애통해하시던 할아버지도
아들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지
팔 개월 만에 아버지의
뒤를 따르셨습니다.
집 안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자리가
휑뎅그렁하니 비어
가장이 될 만한 이가 없자,
결혼해서 분가해 살던
큰오빠 내외가 다시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나는 마치
실이 끊어져버린
꼬리연 같았습니다.
어느 때 어느 곳으로
처박힐 줄 모르는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런 연 말입니다.
내가 고통을 당할 때,
내 형제들조차도 외면한 그때
내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 머리 속에는 오직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꿈 속에서라도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해서
억지로 잠을 청해보는
날도 많았습니다.
지극한 사랑으로 감싸안아
주셨던 아버지를 잃고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절망과
암흑뿐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20세의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내 인생 최고의 젊음을
밟고 선 시기였음에도
나는 바싹 말라서
생기를 잃어갔습니다.
마음의 주파수를 돌려보려고
북적대는 거리를 걸어보고
백화점의 화려한
진열장 속을 들여다보아도
내 사랑하는 아버지의
자애로운 미소는
그럴수록 더욱 내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때껏 몸뚱아리로
겪었던 어떤 아픔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마음의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나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나는 이 세상 사람이고
아버지는 저 세상 사람이다:'
마음 속으로
아무리 다짐을 해도
그 마지막에 나도 모르게
내뱉아지는 한 마디는
"아버지! 뵙고 싶어요"
였습니다.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아버지를 만나려면
당신이 가신 길을
나도 쫓아서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가볍게
흥분되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년 만에
나는 어머니를
졸라 분가했습니다.
마음의 충격에서 벗어나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나혼자서 감수하겠다는
명분 아래 가족들의
허락을 얻었습니다.
가정부 아주머니 한 분과
장위동에 집을 마련하여
가족들의 곁을 떠나 왔습니다.
그 때부터 나의 산책 코스는
동네 약국이었습니다.
수시로
이 집 저집을 드나들면서
불면증 환자 노릇을 했습니다.
그렇게
일 년간 사 모은 수면제는
엄청난 양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주변 사람들에게
짐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그 분은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었는데
이제 그 언덕조차
무너지고 없었습니다.
죽을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음력 석달 스무아흐레.
이틀 후면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설이 가까워지자
집 안은 분주해졌습니다.
가정부 아주머니는 고향인
전라도 해남으로
떠나신다고 했고,
어머니도
명절 음식 준비에 바빠
내가 있는 장위동 집은
들러볼 엄두도 못 내실 것입니다.
거추장스러운 내 육신을 벗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가정부 아주머니를
떠나보내고 난 뒤,
내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정리했습니다.
사용하던 소지품이며 옷가지,
사진 한 장까지 모조리
남기지 않고 불태웠습니다.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자마자
그것들은 기다렸다는 듯
화르륵 타올랐습니다.
불꽃,
그 속에서 빨간 원피스를
입은 다섯 살의 내가,
뽀얗게 단장하고
노래를 부르는 열 살의 내가,
아버지 품에 안긴 앙상한
열 네 살의 내가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나로부터 나는 이미
한 걸음 물러서 있었습니다.
한복을 꺼내 입었습니다.
다가오는 설에 입으라고
어머니가 준비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앞깃을 여미고
옷고름을 매면서
이 고운 옷을 입기에
오늘처럼 좋은 때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모아둔 수면제는
수백 알이 되었습니다.
하루에 한 컵이 채 못 되는
물만 마시고 살아왔는데
그 알맹이들을
다 삼켜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득해지기도 했습니다.
알약을 집어 입에 털어
넣으려는 순간이었습니다.
내 귓전에
'네가 그걸 먹고
죽을 것 같으냐'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문득 이것들을 삼키고도
살아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죽음의 기회를 만났지만
종래에 그것은 늘
나를 비켜갔기 때 문입니다.
마침 얼마 전에 마을 단위로
쥐약을 배포해
준 것을 기억해냈습니다.
부억에 가서 뒤져보니
찬장 아래에 뜯지 않은
약병 두개가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수면제와 쥐약을 앞에 놓고
살아서는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 이제 애란이는
아버지한테 갈거야.
아버지, 조금만 기다려.
내가 곧 갈께."
수백 알이나 되는 수면제를
쥐약 두 병을 물 삼아
모두 삼켰습니다.
삼키는 대로 다시 꾸역꾸역
넘어오는 것을 되삼키느라
목구멍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약을 모두 삼키고는
가만히 드러누웠습니다.
어머니한테
마지막 인사도 못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엄마! 설 쉴
준비 하느라 바쁘지?
내가 못 도와줘서 미안해
나 못 가니까 고생스럽더라도
엄마 혼자 준비 잘 해."
나는 울먹이지 않았습니다.
내 머리 속은 오직
아버지를 만나러간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을 뿐,
다시는 어머니를
못 보게 될 것이라는
슬픈 생각은
자리하지도 않았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그처럼 태연할 수 있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안부 전화였는데도
어머니는
그 전화를 받고부터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지셨다고 합니다.
명절 준비에 경황은 없는데
내게 꼭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은 떨칠 수가 없고,
어머니께서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할 때였습니다.
나와 같이 사는 가정부
아주머니한테서
전화가 온 것입니다.
''사모님! 여기 서울역인데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차표를 못 구했어요.
고향 가기는 틀린 것 같네요.
일 많으시죠? 지금
제가 그리로 가서 도울께요.''
"아니, 아니야. 아줌마!
그보다 방금 애란이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아무래도
내 느낌이 이상해요.
이리로 올 것 없이
장위동으 로 가봐요.
꼭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아줌마, 얼른 가봐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구."
초인종이
사납게 울어댔습니다.
누가 남의 집 초인종을
저렇게 눌러대는 것일까.
내 의식이 혼미해지고 있음을
느낄 즈음이었습니다.
충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는 걸음을 수습하며
문을 열어줄 수 있었음에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문을 열어주면 내가 약을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년이 넘게 준비해 온
아버지와의 만남은 실패에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의식은 더욱더
가물가물해져가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이 없자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직감하고
겨우겨우 담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안방 문을 열어보고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주인집 아가씨는 곱게 한복을
차려 입은 채 실신해 있고
약병은 어지러이
방 안 여기저기를 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 말입니다.
바로 뒷집에 진맥을 잘 하는
여자 한의사가 살고 있었는데,
아주머니는 급히
그 한의사를 불러
진맥을 하게 하고
어머니께
연락을 취했습니다.
한의사는 맥이
전혀 뛰지 않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명절을 며칠 앞두고
이웃 사람들도 모두
고향으로 내려간 터라
도움을 청할 데가 없어
아주머니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데
그 때도 하늘은 나를
부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주머니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울고만 있던 바로 그때
아주머니의
남편이 찾아온 것입니다
가정부 아주머니는
결혼을 해서 첫아이를 낳은 지
얼마안 되어
집을 나왔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
부부싸움이 잦다가
아이까지 버려두고
가출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머니는
우리집에서 처음으로 남의 집
살이를 시작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어떻게 알았는지
남편이 아내를 수소문해
장위동 집으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아내를 만난
반가움은 뒷전이고,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놀란
그이는 나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달렸습니다.
응급실로 실려갔는 데
병원에서는 위세척을
할 수 없다고 못박았습니다.
워낙 몸이 약해져 있고
맥도 뛰지 않는 데다가
신체의 모든 기능이 정지된
상태라 겁을 낸 것입니다.
위세척을 하다가
환자가 죽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병원측에서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 없이
그이는 다시 나를 들쳐업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눈을 떴을 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가족들의 불안한 시선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그렇게
혼수 상태로 있다가
정확하게
스물 네 시간 만에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니까
음력 12월 29일날 약을 먹고,
30일 하루를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
정월 초하루날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어머니는
전혀 의식을 회복할 기미가
없는 나를 뉘어놓고서도
"애는 안 죽는다.
살아날 거야. 꼭 살아난다" 라는
말만 되풀이하셨다고 합니다.
건강한 보통 사람 기준의
치사량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약을 먹었고,
위세척도 못 했으며,
전혀 토해내지도 않았는데
나는 어느 곳 한 군데도
잘못되지 않고
말짱하게 깨어났습니다.
그 약들이 전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신기한 일이라고,
기적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안양 별장에 모셔져 있는
아버지의 산소를 찾았습니다.
소복히 하얀 눈이
덮여 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 무덤 앞에
엎드려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가신 길은
이렇게 해서도 닿지 않는
머언 먼 길이었던가요.
아버지의 모습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건가요.
그러나 그 통곡의 소리도
죽음 저편의 아버지를
깨워놓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한나절을
울고 있는 사이,
문득 나는 늘 아버지는
나와 함께 계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 지금까지
그것을 몰랐을까요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내가 죽어야만
아버지 곁으로 갈 수 있다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는 내가
어떤 고통 속에 있을 때도
항시 내 옆에서
응원해주고 힘을
북돋아주셨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미련한 생각을 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아버지!"
그 날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나는 다시는 내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내 아버지가
어떻게 지키신 생명인데,
당신의
목숨과 맞바꾸면서까지
지켜주신 생명인데.:'
하는 생각을 하니
나는 살아야 했습니다.
내 아버지의 몫까지
두 배로 살고 싶었습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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