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굴 쥐(tunnel rats)는 월남전 당시 지하에서 수색 섬멸 작전을 수행했던 미국, 호주, 뉴질랜드 병사들을 가리킨다. 전쟁 기간 동안 베트콩은 대단히 광대하고 복잡한 지하 땅굴을 건설했다.
부대가 노출된 땅굴 입구를 발견하면 땅굴 쥐들이 들어가 숨은 적들을 죽이고 폭약으로 땅굴을 폭파시켰다.
땅굴 쥐들은 겨우 M1911 반자동 권총 (45구경)과 회중 전등으로 무장했으나, 대다수의 땅굴 쥐들에게는 다른 종류의 권총으로 무장하는 일도 허용되었다.
피스톨 한 정에 후레쉬 하나 딸랑들고
실제 베트콩 부비트랩도 많이 설치되어있고 속이 어떤지도 모르는 베트콩 땅굴로 기어 들어가서
수색, 정찰, 암살, 폭파 등 작전을 수행했다.
몇몇 사단과 공수여단에 작은단위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미군들은 덩치가 크고 겁이 많아서 땅굴은 한국군이 대신 들어갔다는 말이 있었는데 꼭 그랬던것 만은 아니다.
밀폐된 공간 때문에 땅굴 쥐들은 자신들을 순간적인 귀머거리로 만들고 엄청난 총구 화염을 내는 M1911 권총을 좋아하지 않았고 우연한 경로로 입수한 권총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적군이 사용하는 소련제 권총을 특별히 선호했지만 매우 구하기 어려웠으므로 땅굴 쥐들은 고향의 아는 이들에게 민간용 권총이나 리볼버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중에 인기 있던 물건은 독일제 루거와 발터 권총이었으며 이 권총들 상당 수는 2차 대전에서 돌아온 미국 군대가 집으로 가져온 것이다. 그 밖의 땅굴 쥐들은 다른 병사들이 개인적으로 소지한 리볼버와 자신들 권총을 교환했다. 땅굴 쥐들 대다수는 소음을 보다 줄이기 위해서 권총에 소음기를 착용했다.
대부분 작은 체구의 병사들이 땅굴 쥐로 활약했으며 이들 상당수는 오로지 백인이나 중남미계 병사들이었고, 과반수는 푸에르토 리코와 멕시코 출신이었다.
폭격과 유혈로 물들였던 베트남 전쟁의 기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지하로 들어가면 암울한 현실이 등장한다. 손으로 파서 만든 120km의 땅굴이 존재하며, 살상용 함정으로 무장한 베트콩의 지하 본부가 있다.
베트남은 지하 전쟁의 최적지였으며, 지하에서 승부가 판가름 났다. TV, 영화로만 봤던 베트남전의 진실을 한 꺼풀 파헤친다.
베트남의 도시, 마을, 밀림의 지하엔 숨겨진 전쟁터가 있다.
베트남전 당시 사용됐던 땅굴, 참호, 동굴, 엄폐호는 밀림 속에 버려진 채로 잊혔지만 흔적을 찾아가보면 여전히 남아있다.
당시의 베트남은 가난한 분단국 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농부, 어부가 모인 군대로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이겨냈을까요? 땅을 파보면 답이 나온다.
베트남은 게릴라 전쟁의 역사가 깊다. 기원전 2세기부터 진나라의 침략을 막아냈고, 20세기 초반엔 프랑스 점령군에 저항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패하고 떠난 1956년 이후로 베트남은 위도 17도의 북쪽을 공산당이 지배하고 남쪽은 미국이 지원하게 됐다.
1960년대 초반, 남북 갈등이 급격히 고조됐고 1965년에 드디어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던 베트남은 전쟁에 철저히 대비하던 북베트남과 충돌하지만 더 심각한 건 남쪽에서 활동하던 게릴라인 베트콩과의 대결이었다.
1965년까지는 미군의 규모가 베트콩의 두 배에 달했다. 미국의 군사 작전은 게릴라의 활동이 가장 치열했던 105평방 킬로 면적의 철의 삼각지대에 집중됐고 그 핵심에는 `구치땅굴`이 있었다.
베트콩의 지하기지 탐색을 지원했던 정예 부대와 군인을 `땅굴 쥐`라고 불렀다.
적을 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땅굴은 지옥 같았다. '땅굴 쥐'는 입구를 찾다가 이런 함정에 빠지는 일이 잦았다.
입구의 손잡이를 당기면 연결된 수류탄이 폭발한다. 그 외에도 줄을 당기면 전갈이 쏟아지거나 날카로운 죽창이 박혀있는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었다. 떨어지기만 하면 죽지 않으므로 죽창을 분뇨 위에 박아 상처 감염으로 인한 처참한 죽음을 맞도록 했다.
지하 땅굴의 입구는 아주 작았다. 당시 베트남인의 체구가 아주 작았기 때문이다. 체격이 작은 베트콩은 통과할 수 있지만 덩치가 큰 미국인은 들어가지 못했다.
땅굴이 미로처럼 얽혀있었다?
40년 전이라면 어떤 군인도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이곳은 (프로그램 제작 시기로부터) 사람 손으로 직접 판 좁고 복잡한 미로로 불시에 부비트랩에 걸리거나 적군에게 포위당할 수도 있었다.
내부는 아주 어둡고 굉장히 비좁았다.
'땅굴 쥐'들은 손전등, 권총, 칼만을 휴대하고 포복으로 이동하며 적군의 기밀 정보를 빼내거나 베트콩 게릴라를 처치했다. 어두운 땅굴 속에서 최소한의 무기를 사용한 전투가 벌어졌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매복한 적군이나 폭발물이 있었고, 전갈과 뱀도 숨어있었다.
이 미로는 거의 20년에 걸쳐 조금씩 규모를 키워갔다. 원래 구치땅굴은 일본 점령이 끝난 후인 1940년대부터 프랑스와 전쟁할 때 사용된 벙커를 연결한 통로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복잡하고 꼬불꼬불한 미로로 성장했고 한 구간에 여러 개의 대체 경로를 만들어 폭발과 붕괴에 대비했다.
기본 방어 장비를 설치하고 폭발을 피하기 위해 주 통로를 갈지자로 배치했다. 100미터 간격으로 물을 채운 웅덩이를 만들어 최루탄과 연막탄의 연기를 빨아들이도록 했다.
농부들은 낮에는 논농사를 짓고 밤에는 지하에 굴을 팠다.
1일 평균 1입방 미터의 흙을 파내는 작업으로 손수레 6대 분이다. 하지만 파낸 흙은 항공사진에 포착되기에 논이나 폭파된 구덩이에 묻고 나뭇잎으로 덮어야 했다.
이동에 1분 걸리는 구간을 파는 작업은 하루 종일이 걸렸다. 고되고 더딘 작업이라 최소한의 크기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폭 120센티 높이는 90-180센티로 위로 50톤 탱크가 지나가도 무너지지 않는 최적의 크기다.
방과 굴의 천장 폭은 접지면 보다 작게 했다. 탱크 접지면 일부분이라도 견고한 지면에 닿아 무게 분산이 이뤄져 땅굴의 안정성이 유지된다.
구치땅굴은 베트콩의 생명줄이었다. 주요 본부 3개를 지하에 설치해 폭탄을 제조하고 수천 명의 게릴라를 양성했다.
구치땅굴에서 활동한 베트콩 군인 1만 6천 명 중 6천 명이 살아남았다.
우리는 베트남전의 진실을 만났다. 잊힌 전쟁 유적과 세계 최강의 미군과 싸워 전세를 역전시켰던 게릴라군의 숨겨진 전수를 찾아냈다.
베트남전은 TV로 중계된 사상 최초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전송된 장면은 전쟁의 일부에 불과했다.
밀림과 논바닥 아래는 지하 땅굴이란 또 하나의 전쟁터가 있었다.
베트남전 당시 이 나라 전체는 미군의 공격 표적이었다. 대도시와 작은 마을은 물론 산속의 동굴도 공격당했다.
1975년 4월에는 사이공이란 이름의 남베트남 수도였지만 운명은 곧 뒤바뀐다.
남베트남과 미국은 보이지 않는 상대와 10여 년을 싸우며 지친 상태였고 곧 끝이 다가왔다.
1975년 미국은 북베트남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고, 미군은 즉시 철수했다.
끝까지 항전하겠다던 남베트남 대통령은 북베트남군이 사이공을 점령하자 해외로 도피했다.
위기에 봉착한 미군 동조자가 탈출을 시도하던 4월 29일 일부는 미군 헬기에 탑승해 조국을 떠났다.
그리고 4월 30일 북베트남 탱크가 수도에 진입해 대통령궁을 점령한다. 14년의 끔찍한 전쟁 끝에 미국이 급히 퇴각하면서 버리고 간 장비는 암울한 시대를 무언으로 증명하고 있다.
독립궁전이라 불렸던 대통령궁은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서며 통일궁전으로 개명했지만 지하요새는 그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