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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리성
여주 봉미산 신륵사(神勒寺)
신륵사(神勒寺)는 경기도 여주시 봉미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서 신라 시대 때 창건되었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절은 산 속에 짓는 경우가 많은데 반하여 신륵사는 남한강이 보이는 강변에 세워져 있다.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때 처음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연못을 메우고 창건했다. "신륵(神勒)"이라는 절 이름의 유래로는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는 신이한 미륵(彌勒)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신륵사의 륵(勒)자는 말을 다스린다는 뜻이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두 번째는 고려 우왕 때 왕사 나옹(王寺懶翁)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를 신비한 굴레를 씌워 얌전하게 다스렸다는 이야기이다. 세 번째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 사나운 용마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자 승려 인당(印塘)이 나타나 고삐를 잡아채자 순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설화에 나타난 신력과 굴레에서 신륵(神勒)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신륵사에서는 고려의 고승인 나옹이 머물러 절이 크게 확장되었다. 나옹은 1376년(우왕 2)에 신륵사에서 사망하여 이색이 이곳에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을 봉안했다. 지금은 나옹과 나옹의 제자인 무학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1379년(우왕 5)에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이 이 절을 크게 짓고, 나옹의 부도(浮屠)를 세웠다.
조선 시대에는 1440년(세종 22)에 중수하였으며, 1473년(성종 4)에 세종의 능인 영릉을 여주로 이장하면서 영릉의 원찰로 신륵사가 지정되었다. 이때 국가에서 확장하여 크게 중수되어 사찰명은 보은사(報恩寺)로 바뀌었다.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 · 천심(天心) 등이 중수하였다. 원찰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뒤 신륵사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신륵사 다층전탑
(神勒寺多層塼塔)
지정번호 보물 제226호
비고 1963년 1월 21일 지정
신륵사 다층석탑
(神勒寺多層石塔)
신륵사 다층석탑과 탑신에 새겨진 용무늬 부조
지정번호 보물 제225호
신륵사 조사당
(神勒寺多祖師堂)
지정번호 보물 제180호
비고 1963년 1월 21일 지정
이 절에는 다층석탑(보물 225호) · 다층전탑(보물 226호) ·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228호) ·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229호) ·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230호)·보제존자석등(보물 231호) · 조사당(組師堂: 보물 180호) 등의 문화재가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 계획이 추진되면 신륵사가 수몰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으로 관심이 높다.
신륵사 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은 보물 제226호로,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벽돌탑이다. 진흙을 구워 만든 전탑은 대한민국에서는 드문 양식으로 신륵사의 것 외에는 경상북도에 몇 기가 있을 뿐이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는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높이는 9.4m이며, 재료는 기단부(基壇部)가 화강석, 탑신부(塔身部)가 벽돌이다. 일반 석탑의 기단과 비슷한 2중 기단 위에 다시 3단의 석단(石段)이 있고, 그 위에 탑신부를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1단이 있어 7층으로 보인다.
신륵사 다층석탑(神勒寺多層石塔)은 보물 제225호로, 신륵사에 있는 석탑이다. 높이는 3m, 건립 연대는 15세기 후반쯤으로 추측되는 8층 대리석제 탑이다.
신륵사 다층석탑은 2층기단 위에 세워졌고 기단부의 면석(面石)에는 용문(龍文)을, 위와 아래의 갑석(甲石)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갑석이나 조각의 기법은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통한다. 탑신은 낮고 평평하며 옥개석은 두터운 판석으로 되었다. 전반적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형 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8층 위에도 일부 탑신과 지붕이 남아 있어 전체 층수는 더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조사당(神勒寺祖師堂)은 보물 제180호로,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조건물이다. 정면 1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다포계(多包系) 건물이다. 내부에는 마루를 깔고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만들었으며, 불단(佛壇) 뒷벽에는 중앙에 나옹(懶翁)과 그 좌우에 지공(指空) 및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태조가 무학대사를 위해 지었다는 설이 전해 온다. 기록에 의하면 신륵사가 조선 예종(睿宗, 재위 1468∼1469) 때 중수되었다고 하므로 이 건물도 그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전기 목조 조각 수법을 보이며 전체적으로 작고 아담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Ⅰ. 신륵사의 유래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륵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한다.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가 유명해진 것은 고려말 이후의 일이고 그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
사명을 신륵이라 이름 짓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걸 곳이라고 알려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정확한 문헌자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
동국여지승람 여주목의 사찰편에서 보은사란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는 신륵사는 사명에 얼킨 전설을 통해 그 의미만을 부여, 즉 ‘신기한 미륵 또는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과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 했다.’고 하는 설이다.
Ⅱ. 신륵사의 역사적 배경
대한불교 조계종 제 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신륵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확실한 자료는 없다. 1725년에 쓴 「신륵사동대탑중수비병서(神勒寺東臺塔重修碑幷序)」에도 절의 내력을 적은 기록이 없다고 적혀있다. 신륵사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고려 말 부터로 특히 1376년(우왕 2년) 5월 나옹(懶翁) 선사의 입적을 계기로 자료가 많이 남아있다. 3개월 뒤에 그의 사리를 봉안한 석종을 북쪽 언덕에 조성하였는데, 「척약재학음집」에 화장하고 나서 사리와 두골을 수습하여 북쪽 언덕에 안치하고 석종을 만들어 눌러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색이 쓴 「여흥군신륵사보제사리석종기」에는 집을 지어 형상을 모시고 석종을 만들어 사리를 봉안하였으며, 석종 제작은 각신이 주관하고, 각주는 돌을 구해왔다. 비석은 부도보다 3년 뒤인 1379에 세웠다. 나옹의 석종과 비석을 조성하면서 대대적인 도량정비를 시행하였다. 이때 대전, 조당, 승당, 선당, 종루, 동익당, 서익당, 남행랑, 향적당 등의 건물이 중수되었는데 무엇보다 나옹의 진영을 모신 진당 건립에 비중을 두었다.
Ⅲ. 신륵사의 건축물
1. 신륵사 극락보전 (유형문화재 제 128호)
신륵사 극락보전은 현재 신륵사의 중심 불전으로 경내 가장 핵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신륵사의 좌향은 앞을 흐르는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남향을 취하고 있고, 극락보전 역시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극락보전은 1797년(정조 21)에 공사를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네 모서리에 활주가 받쳐져있다. 배면기단은 두벌대를 돌리고 정면 기단은 장대석을 4단으로 쌓았다. 가운데 돌을 위, 아래보다 높게 잡았고, 상단 장대석 하부의 면을 접어 처리한 것으로 미루어 기단 조성연대는 건물보다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정면과 좌우에 오르는 계단을 두었는데 소맷돌 없이 다듬은 장대석을 쌓은 모양이다. 자연석 초석을 놓고 민흘림으로 다듬은 굵직한 원기둥을 세웠다.
평면비례는 3:2에 가까우며, 기둥 간격은 정면 어칸이 양 협칸보다 넓고 측면은 비슷하다. 내부 바닥은 전체적으로 우물마루를 깔고, 내부 고주사이에 후불벽을 형성하여 앞에 불단을 배치하였다. 불단 위에는 19세기 조성으로 보이는 목조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고 1900년에 조성된 후불탱화를 후불벽에 걸고 상부는 화려한 닫집을 꾸몄다. 벽에는 신중탱화, 감로탱화, 1908년에 그린 지장탱화가 장엄하게 그려져 있다. 천장의 가운데 부분은 우물반자를 설치하고 주변은 작은 빗천장으로 설치하였다.
2. 신륵사조사당(보물 제 180호)
신륵사 경내 서북편에 위치한 조사당은 조선시대 초기인 예종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물 안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나옹을, 그 좌우에는 지공과 무학 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이 세 사람은 서로간의 관계가 돈독했던 스승과 제자로 고려 말 기울어 가는 불교계를 다시 부흥시킨 스님들이다.
평면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작은 규모로 정면에는 6짝의 분합문을 달았으며, 양측면 앞쪽으로 출입을 위한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내부는 전체에 우물마루를 깐 통칸의 구성이다. 초석은 다듬돌 초석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깔끔하게 치목한 원주를 세웠다. 공포는 정면과 후면에 각 4개, 양측의 각 칸에는 각 1개씩의 주간포를 둔 다포계이다. 평면 간살의 구성 특성상 공포의 간격은 정면과 양 측면이 다르고, 양 측면에서는 포벽을 일정하게 보이게 한 구성으로 점차의 길이를 달리하였다. 각각의 공포는 내외 2출목의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살미는 외단을 비교적 강직한 앙서형으로 하고 내부는 교두형으로 처리하였다. 첨차는 모두 교두형이다.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이고, 내부는 보 아랫면에 맞추어 우물천장을 들였다. 이러한 구조는 조선초기 다포집 계통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Ⅳ. 탑
1. 다층석탑(보물 제 225호)
드물게도 백색의 대리석으로 조성된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신라나 고려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 느낌이 아주 독특하다. 특히 상층 기단의 중석에 조각된 용무늬가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바닥 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파 조형미를 더하고 있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 올려져 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 시도하였다. 전체적으로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2. 신륵사다층전탑(보물 제226호)
탑은 기단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을 올렸으며 기단과 계단만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탑신부들은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 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아까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남북국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이 때문에 고려시기에 건립되었단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 진다. 다층전탑이 신라시대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지만 탑에 새겨진 보상화문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때의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또한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다르다.
신륵사의 명물 중 하나인 다층전탑은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 전탑이다. 여강에서 배를 타고 지나다 보면 강가 언덕위에 이탑이 보인다고 하여 고려시대에는 벽사(甓寺)라 부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