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만주사변 이후 활동이 주춤했던 독립군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린 동시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전국에 알린 계기가 된 항일무장투쟁이다.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 부대가 함경남도 혜산진 부근의 작은 마을인 보천보를 점령해 경찰 주재소와 행정 관청을 불태우고 ‘조선민중에게 알린다’ 등 포고문과 격문을 뿌렸다. 이들은 돌아가던 중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 일경 7명이 사망했다.
사실 이 전투는 규모나 전과를 특기할 것이 없어 차라리 ‘소동’이라 할 정도다. 그러나 유격대의 국내 침입이란 사실 자체가, 대중과 독립운동 진영의 패배주의를 단숨에 털어버렸기에 심리적 효과는 컸다. 여기에 〈동아일보〉가 비록 ‘비적(匪賊)’이라 표현했지만 호외를 발행하며 속보를 전해 ‘김일성 신화’를 낳는 데 일조했다.
이 전투 이후 ‘함흥연대 분전기’ 기사에서 보듯 국내에서 작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일제가 대규모 토벌전을 전개하면서 만주 일대의 항일유격대는 대부분 세를 잃었다. 따라서 김일성을 비롯한 항일유격대는 1941년 연해주의 하바롭스크로 도피해 광복 때까지 머물렀다.
한편 북한에선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를 항일투쟁의 상징으로 신성화한 반면 남한에선 2002년까지 교과서에서 이를 다루지 않아 대조적 태도를 보였다. 역사도 정치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6일
기관총 가진 200여 명 월경(越境)
보천보(普天堡) 시가를 습격 충화(衝火)
주재소, 우편소, 보교(普校), 면소(面所)에 방화
전선 절단, 상세한 피해 미판(未判)
5일 오전 11시 경무국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작 4일 오후 11시경에 함남 갑산군 보천보에 김일성 일파의 비적 200여 명이 경기관총 4정을 가지고 주재소, 우편소, 보통학교 등을 습격하였는데 동지 주재소에서는 즉시 응전하였으나 전화선 단절로 상세한 피해 상황을 아직 알 수 없고 손해는 많은 모양이다.
쌍방의 사상도 아직 알 수 없으며 한 명의 부상자가 있다 할 뿐이고 이 급보를 받은 혜산진 경찰서에서는 대산(大山) 경부보 이하 36명의 경관이 출동하여 방금 추격 중이라 한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7일
보천보 습격 사건 피해 판명
우편소 면사무소와 삼림보호구 전소(全燒)
소방조, 보통학교도 연소회신(延燒灰燼)
총 피해 5만여 원
[함흥지국 전화] 4일 함남 갑산군하 보천보에 김일성 일파 200여 명이 습격되었다 하는 것은 누보하였거니와 금 6일 오전까지 판명된 피해액은 약 5만 원 가량이라는데 습격 당시에 살해된 사람은 일본 내지인 두 사람으로 작보한 우근소삼랑(羽根小三郞)은 즉사하였고, 순사부장 딸 야내(野內) 에미코(2세)는 어제 10시 40분에 절명되었다.
우편소와 면사무소 삼림보호구 사무소는 모두 전부 방화로 인하여 전소되었는데 우편국 손해가 약 7000원, 면사무소 피해가 약 1만 원, 삼림보호구 피해가 약 3만 원에 달하고 이 방화로 인하여 다시 연소되어 소방조와 보통학교도 전소되었는데 그 손해는 약 2000원으로서 총 피해액은 5만 원을 넘는다 한다.
매일신보 1937년 7월 10일
토벌대와 교화(交火) 중에도 노래 부르는 여당원(女黨員)
김일성 일파 공비 격퇴코 개선한
함흥연대 분전(奮戰) 여화(餘話)
지난 30일 함경남도 신갈파진 대안 12킬로미터 동대정자(東大頂子)에서 김일성(金日成), 조국안(曺國安) 등의 혼합군과 교전하여 검열한 결과 전사 5명, 부상자 12명을 낸 김 부대의 격전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19사단 송전(松田) 참모가 현장에 급행하였다가 지난 6일 귀임하였는데 금번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현지는 통신이 전연 두절된 산간벽지로 김 부대의 격전은 얼마나 심하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당국자를 감격하게 하는 바가 있었다. 최초로 비적(匪賊)들을 만나는 30일 오전 4시경 비적들은 약 10배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 더욱이 경기관총이라든지 추격포와 같은 정예 무기를 가지고 종횡으로 설쳤다는데 결사적 돌격에 비적들이 흩어지자 통택(桶澤)부대가 추격하였으므로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는 바 비적들 중에는 여자 단원 20여 명이 새빨간 편의(便衣)를 몸에 둘러 감고 ××가를 높이 부르며 군악을 울리고 남자 비적들의 전투를 격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첫댓글 보천보 전투
교과서에서도 다루지 않아서 처음 들어보는군요
보천보 악단의 유래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