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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스라엘 사람 (요1:43-51절)
타락한 인간의 심성 중에 가장 깊이 자리 잡은 연약성 중의 하나는 끊임없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려는 성향입니다. 제임스 돕슨 박사는 그의 저서 “숨든지 찾든지 하라.”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현시대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개인의 자질은 다름 아닌 외모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우리는 돕슨 박사의 주장대로 그것을 “최고의 인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굴이나 몸매를 뜯어고치는 성형 수술이 얼마나 유행하고 있습니까. 구약시대의 사무엘 선지자는 이새의 아들 중에서 키가 크고 얼굴이 잘 생긴 장남 엘리압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려 할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외모라는 말 ‘아인’은 곧 육신의 눈을 가리키며 ‘중심’이라는 말 ‘레브’는 마음의 눈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눈으로 사람을 판단하십니다. 즉 그 사람의 내적인 겸손, 신앙, 인격, 진실성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11:2-3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친구 빌립을 통해 자신에게 나아온 나다나엘에게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이 말은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칭찬입니까. 이 칭찬은 당시의 하나님 백성답지 못한 사람들에게 비추어볼 때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1장2절을 제외하고는 본문이 나다나엘에 대한 기록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이 일곱 절 뿐인 창문을 통하여 나다나엘의 탁 트인 성품을 앞산을 보듯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나다나엘을 통하여 참 이스라엘 사람에 대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참 이스라엘 사람은 종교적 편견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나다나엘은 이름이 두 개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바돌로메라고 불렀습니다. 바돌로메의 “바”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즉 ‘돌로메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나다나엘이라 불렀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 입니다. 그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일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입니다. 그리고 납달리 지파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고대 문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먼저 나다나엘의 성품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로서 당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편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사람, 바로 그 메시야를 우리가 만났는데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빌립이 얼마나 놀라고 감격했으면 곧 바로 제일 친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겠습니까. 빌립이 예수를 율법에 근거하여 소개한 것은 나다나엘이 율법에 정통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예수야말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는 메시야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큰 데 그의 친구들인 안드레,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모두 세례 요한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메시야를 ‘우리가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는 메시야를 만난 빌립의 감격과 확신에 찬 말이었지만 빌립은 예수의 인간적인 신분 외에는 성육신 사건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의 신분에 대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전하여 나다나엘의 반론을 야기시켰습니다. 모세는 때로는 모형으로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때로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민21:8-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이 예언에서 장대에 달린 놋뱀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니고데모에게 알리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아가 모세는 후일에 그리스도께서 직접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신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여기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선지자는 바로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도 그리스도를 예언하였습니다.
*시2:7-8 내가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라.
빌립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를 소개한 후 그 메시야의 인간적 신분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이는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여인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난 메시야가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고 있는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은 나다나엘의 반응은 의외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 말은 빌립의 말을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롱하는 투의 말입니다. 왜냐하면 빌립이 구약을 인용했는데 구약의 예언대로라면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당시의 갈릴리 사람들은 그들의 교양 부족과 품위 없는 사투리, 이방인과의 교역 때문에 멸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역적 편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나다나엘의 편견은 율법에 정통한 학자로서의 편견이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습니다. 그는 빌립에게 자기의 의견을 정직하게 말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의 편견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친구 빌립의 “와서 보라” 라는 전도를 받고 즉시 그를 따라나섰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친구의 말을 무조건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존중하고 직접 예수를 만나보고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2. 참 이스라엘 사람은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은 지키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킬 정도로 비윤리적인 삶을 살면서도 의롭고 거룩한 자로 자칭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이러한 위선에서 초월하여 초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예수님께로 오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대 보라 이는 참 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상대와 대화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성품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신성이 잘 나타나 보입니다. 주님은 ‘참 이스라엘 사람’ 이라는 말과 ‘간사한 것’이라는 말을 대조시켜 나다나엘의 성품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역사적으로 깊은 뜻이 내재 되어 있습니다.
첫째, 간사한 사람이라고 할 때에 이 단어는 원래 물고기를 낚기 위해 미끼를 쓸 때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즉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이중적 성품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야곱은 그 이름이 “남의 발꿈치를 잡는 자” 또는 “간사한 자” 로 그 성품이 간교하였습니다.
*창27:35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야곱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받으려고 형과 아버지를 속였던 것입니다.
둘째,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 때에 이는 변화된 사람을 말합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참 이스라엘이라는 뜻은 진실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옛 시대의 사람을 간사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만난 진정한 사람을 이스라엘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밧세바 간음 사건 후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시32:1-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나 참 이스라엘 사람이며 마음에 간사가 없다는 것이 절대로 무흠하거나 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히 인정하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나다나엘은 야곱처럼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축복을 가로챈 간교한 자가 아니라 메시야 대망을 충실히 기다리며 율법을 깊이 묵상하는 자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주님께서 보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3. 참 이스라엘 사람은 신앙의 깊이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나다나엘은 처음 대면하는 예수께서 자신을 너무 잘 아는 것이 신기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고 하셨습니다. 당시 무화과나무 그늘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고요히 묵상하며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이 어쩌다 한 번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한 것을 가지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가 고요한 가운데 늘 기도에 힘쓰며 율법을 공부하며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오기를 간절히 사모한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당시 회당과 큰길 어귀에 서서 기도했던 바리새인들과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보았노라.’라는 이 말은 단순히 본 것이나 알았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미 나다나엘을 당신의 제자로 지목하고 계셨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나다나엘의 삶의 자세를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기에 나다나엘의 반응은 실로 놀라웠습니다.
*요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그 순간 나다나엘의 편견은 봄 눈 녹듯 녹아 버렸습니다. 그가 메시야를 만난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의 답변에서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이 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고백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시고 만족시켜 주신 예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시편 2장에 나타납니다.
*시2:6-7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또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나타난 것은 시편 72편입니다.
*시72;1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나다나엘은 이 말씀을 근거로 그의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이 말씀 속에 있는 진의를 완전히 깨닫지 못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고백이 겉치례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시므온처럼 그도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이 가나 사람의 비밀스러운 성품을 아셨습니다. 자신을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는 예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당한 나다나엘은 그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의 고백은 마치 베드로가 주께 드린 고백과 직결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님은 제자들의 이러한 고백에 대해 크게 응답하십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이와 같이 나다나엘의 고백을 받으신 주님께서 더 많고 크고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요1:50-5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는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그동안 막혀 있던 하늘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열리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한 순간이라도 닫힘이 없이 항상 열려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이것은 야곱이 벧엘에서 꾸었던 꿈의 성취를 말합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하란으로 도망치던 도중 피곤하고 지쳐서 땅바닥에 쓰러져 돌을 베개하고 누워 잘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창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그 때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놀라운 비전을 주셨습니다.
*창28:13-14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야곱이 지금까지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서 듣고 믿었던 그 복에 대하여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야곱에게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야곱의 축복을 상기시킴으로서 이제 이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로 오신 메시야, 죄인인 야곱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사닥다리가 없었으면 그 날에 그 축복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야곱이 꿈에 보았던 그 사닥다리와 그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천사를 보여주신 것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메시야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잇는 영원한 사닥다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늘이 열리고 그동안 죄로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다시 회복됨으로 이제 야곱이 누웠던 가나안 땅은 영원히 그와 그 후손에게 돌아갔습니다. 그 뿐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이 그리스도를 인하여 복을 얻는 축복이 열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이스라엘 사람! 그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 언제나 그 삶의 자리가 무화과나무 아래였던 사람! 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야곱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에 간사가 없는 참 이스라엘인 나다나엘을 만나신 주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그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던 여호와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참 이스라엘로 만드시고 나의 영원한 하나님이 되어 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에게 허락하신 모든 축복이 우리의 축복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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