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암 유희춘의 각종 유물이 보관돼 있는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의 모현관. ‘미암일기’를 비롯해 여러 고문서와 목판이 있다. 모현관 인근에 종가와 사당, 연계정(漣溪亭)도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 건국 이후 2세기 동안 축적되었던 전적(典籍) 문화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경복궁이 불타면서 고려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적과 조선 건국 이후 2세기 동안 생산된 방대한 문헌들이 하루 만에 잿더미가 됐고, 전국 각 지방 관아에서 축적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목판들도 남김없이 재가 돼 사라졌던 것이다. 실록의 기초 자료가 되는 사초(史草) 역시 한 줌의 쓸쓸한 먼지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자, 이제 무엇으로 실록을 쓸 것인가. ‘미암일기(眉巖日記)’란 책이 있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1567년부터 1577년까지 11년 동안 쓴 일기다. 개인의 일기지만, 이 일기는 매우 치밀하고 방대해 마침내 선조실록의 뼈대로 채택된다. 개인의 성실한 하루하루의 기록은 이렇듯 한 시대를 증언하는 자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미암일기에 책 수집 방법·과정 상세히 남겨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 보물 제260호로 지정돼 있다.
‘미암일기’의 내용은 매우 광범위하다. ‘미암일기’를 보면 16세기 조선 사람의 일상을 손바닥 보듯 환히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조선 전기 생활사를 복구하는 데 결정적 자료가 된다. 나는 그가 꼼꼼하게 기록해놓은 음식 재료를 보고 언젠가 16세기 음식과 요리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건 뒷날의 일이다.
유희춘은 대단한 장서가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미암일기’를 통해 유희춘이 어떻게 서적을 집적(集積)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미암일기’의 1575년 10월29일조를 보면, 유희춘은 다락방의 책을 중당(中堂)으로 옮기고 있는데 모두 3500책이란 막대한 분량이다. 하지만 ‘미암일기’에 가장(家藏) 서적을 여러 차례에 걸쳐 정리하고 옮기는 것을 보면, 이것은 전부가 아닌 그의 장서 중 일부로 짐작된다.
물론 3500책이라 해도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책이 흔해 빠진 물건이 된 오늘날에도 개인 장서가 3500권인 경우는 흔하지 않다. 교보문고와 같은 대형 서점이나 예스24 등의 인터넷 서점이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책을 수집한다는 것은, 개인의 피나는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책은 결코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인쇄본일 경우도 결코 많은 분량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예컨대 유희춘은 1571년 자신의 외조 최부(崔溥)의 문집 ‘금남집(錦南集)’을 인쇄했는데 15부에 불과했다. 15부라니 너무나 적은 양이 아닌가. 하지만 상업적 출판이 아닌 이상 많이 인쇄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소수의 부수만을 제작해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인쇄 형태였던 것이다[그는 이 책을 박순(朴淳)·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 등 당대의 명류들에게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책을 수집한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과연 유희춘의 장서는 어떻게 구축되었던가. ‘미암일기’에 그는 자신이 책을 수집한 내력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제 그 기록을 따라 그의 장서 축적기(蓄積記)를 써보자.
국가로부터 하사받거나 직접 인쇄 의뢰
(위)담양군 대덕면 비차리에 있는 유희춘 신도비. (아래)유희춘이 후학을 가르치고 시회를 즐기던 연계정.
조선시대에 책을 인쇄해 공급하는 곳은 국가가 거의 유일했다. 19세기 어림이 되면 방각본(坊刻本)이라고 해서 민간에서도 상업적 출판이 등장하지만 그 양은 미미했고 수준 역시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조선시대 전체를 놓고 본다면, 역시 대종을 이루는 것은 중앙의 교서관(校書館)과 지방 감영, 군·현 등 행정단위의 출판이었다. 금속활자의 인쇄는 대개 교서관을 비롯한 중앙관청에서 이루어졌고, 지방의 행정단위에서는 주로 목판본을 제작했다. 이처럼 관(官)이 출판을 주도하는 것이 조선시대 인쇄, 출판의 특징이다.
조선 최대의 출판처(出版處)는 역시 국립출판사라 할 교서관이다. 교서관은 금속활자와 다수의 책판(冊版)을 보유하고 책의 인쇄와 공급을 맡았다. 교서관에서 인쇄한 책은 국가 행정기관과 고급 관료에게 공급됐다. 임금이 녹봉이나 물건을 하사해주는 것을 반사(頒賜)라고 하는데, ‘미암일기’에는 유희춘이 책을 반사받았다는 기록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그중 참고가 됨직한 것을 인용해보자.
교서관에서 ‘백가시(百家詩)’를 다 인쇄했다고 하여 먼저 15건을 진상하고, 나머지 국용(國用) 150권 내에서 10건은 융문루(隆文樓)와 융무루(隆武樓), 그리고 여러 관(館)·부(府)·조(曺)에 나누어 간직하게 했다. 그 나머지 138건은 낙점(落點)하여 종친(宗親)·부마(駙馬)로서 2품 이상, 삼공(三公), 1품에서 2품, 여섯 승지, 홍문관 주서(注書), 한림(翰林), 대간(臺諫) 및 참의(參議), 감사(監司) 등 통정(通政) 중에서 빼어난 사람에게 하사하였다.(1570년 9월26일)
교서관에서 책을 찍으면 임금의 개인적 용도로 일정한 양을 바친(進上) 뒤, 국가 발행의 도서를 납본받아 소장하는 궁중의 도서관인 융문루와 융무루에 일정량을 할당한다. 그런 다음 관·부·조 등의 명칭을 단 중앙관청에 하사한다. 그 뒤에 개인에게 반사가 이루어지는데, 종친이나 부마 등 왕실의 친척, 그리고 관료조직의 상층부를 이루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승정원의 승지,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관찰사 등 권력기관에 책이 배포되는 것이다.
유희춘은 상당히 많은 책을 반사받았다. 하지만 반사만으로는 충분한 책을 확보할 수 없었다. 한데 반사 이외에도 책을 구할 길은 있었다. 금속활자 인쇄본의 경우는 책을 찍고 난 뒤 책판을 해체해버리므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지만, 목판본은 다시 인출할 수가 있었다. 목판본은 처음 목판을 제작했을 때 일정한 양을 찍어 분배한 뒤 목판을 간직해 뒷날 인쇄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의 목판은 대체로 지방 관아에서 제작돼 해당 지방에 보관한다. 하지만 일부는 서울로 이관해 교서관에 보관한다. 같은 목판으로 뒤에 다시 찍어낸 책을 후쇄본이라 하는데, 요즘의 재판에 해당한다. 후쇄본은 대량 제작하는 경우도 있었고, 단 1부 내지 2, 3부를 찍어내는 경우도 흔하게 있었다. 교서관의 목판은 인쇄에 필요한 종이와 비용을 가져오면 책을 인쇄해주었다. 유희춘의 기록에 의하면, 교서관의 목판을 인쇄해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 허봉(許)이 고사(告辭)하였다. 나는 이절책지(二折冊紙) 27권, 장지(壯紙) 4권, 백지(白紙) 3권, 모두 합쳐서 68첩(貼)으로 ‘운부군옥(韻府群玉)’ ‘전등신화(剪燈新話)’ ‘본초(本草)’ □(□는 원래 판독 불능의 글자다)권의 15의 19차 및 ‘중용혹문(中庸或問)’을 인쇄하게 하였다.(1567년 10월9일)
(3) 인본(印本) ‘본초’의 낙권(落卷)과 ‘계사(繫辭)’ 하권, ‘대학’ 등 4책의 인쇄에 필요한 종이를 외교서관 정자(正字) 박민준(朴民俊)에게 보냈다.(1569년 6월20일)
모두 교서관에 책의 인쇄를 의뢰한 것이다. 이처럼 교서관의 책판을 인출해 인쇄할 경우는 필요한 종이를 보내고 있다. 궁금한 것은 인쇄공에게 노임을 줬는가 하는 점인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생각해보면 교서관 제조까지 지낸 유희춘에게 인쇄 공임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다.
유희춘은 교서관에 소장된 목판에서 상당량의 책을 인쇄했다. 한데 책판의 절대 다수는 각 지방 관아에 소장돼 있었다. 이 책판의 관리자는 각도의 관찰사와 지방관이므로 만약 지방 책판에서 책을 인쇄하고 싶다면, 감사나 지방관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기록을 보자.
아침에 새 경상감사 박공(朴公) 대립(大立)을 만났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례(周禮)’ ‘속몽구(續蒙求)’ ‘익재난고(益齋亂藁)’ ‘역옹패설(翁稗說)’ 등의 책을 인쇄해주면 좋겠다고 청하자, 수백(守伯, 박대립)이 모두 허락하였다.(1570년 5월10일)
유희춘은 같은 날 편지를 써서 책의 인쇄를 부탁해 허락을 받고 있고, 13일 임지로 떠나는 박대립을 전송하면서 자신의 집에서 준비한 다과를 대접하고 책의 인쇄를 재차 부탁해 허락을 얻어내고 있다. 관찰사는 도(道)의 행정을 책임지고, 주·부·군·현의 장관은 그의 관할 아래에 있기 때문에 관찰사를 통하는 것이 지방의 책판을 인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외에는 직접 해당 지방관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각 지방관이 책을 인쇄해준 경우를 보자.
(1) 윤안동(尹安東)의 편지를 보니, ‘이정전서(二程全書)’를 이미 나를 위해 인쇄해왔다고 하였다.(1567년 10월3일)
(2) 들으니, 성주목사(星州牧使) 한성원(韓性源) 명숙(明叔)이 다시 편지를 보내 ‘당감(唐鑑)’을 인쇄해 보내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1567년 10월4일)
(3) ‘고문궤범(古文軌範)’이 윤참판(尹參判)으로부터 왔다. 관동(關東)에서 인쇄한 것이다.(1568년 6월3일)
이런 사례는 ‘미암일기’에서 매우 흔하게 발견된다. 그는 책판이 가장 많이 있었던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등에서 허다한 책을 인쇄해내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유희춘의 경우만이 아니라, 사대부가에서 책을 구입하는 가장 보편적인 경우로 생각된다.
전국 각지의 지방관들에게도 목판인쇄 부탁
그런데 지방 관아의 목판에서 서적을 인쇄할 경우, 종이와 인쇄 비용은 어떻게 감당했을까. 여기에 관한 자료를 본 적은 없다. 거개는 지방관의 호의로 무료로 인쇄해주지 않았나 한다. 물론 간혹 종이를 보내는 경우도 있다. (3)의 경우를 보면, 강원도에서 인쇄해 보낸 ‘고문궤범’은 원래 그가 이절(二折) 장지(壯紙) 4권 12장을 윤참판을 통해 강원감사에게 전해주어 찍게 한 것이다.
유희춘은 지방관과의 안면을 이용하여 지방 소재 책판에서 책을 찍는 방법으로 장서의 일부를 구축했다. 물론 이와 같은 방법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지방관과 두루 안면을 통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방법이었다. 유희춘의 경우는 그가 임금의 신임을 받는 고급 관료였기 때문에 지방의 책판을 마음대로 인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기록도 음미할 만하다.
도내(道內)의 책판을 기록한 장부를 보았다. 그중 볼 만한 책들을 뽑아 그 첩수(貼數)를 기록해두었다.(1571년 5월10일)
유희춘이 1571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일기의 한 구절이다. 관찰사가 되어 전라도 소재의 책판을 기록한 장부를 보고, 인쇄할 필요가 있는 서적을 추려놓았던 것이다.
반사를 받거나 아니면 교서관과 지방 관아의 목판을 이용해 후쇄본을 찍어내는 것으로 그의 장서가 완성되었던 것인가. 천만에! 이것은 그야말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책의 수집에 일단 뛰어들면 그 다음부터는 온갖 방법이 총동원된다. 다음 호에서 유희춘의 책 모으기를 계속 따라가보자. (끝)
2006.07.25 545 호 (p 86 ~ 87)
[조선의 인물,조선의 책|미암 유희춘의 책 모으기 下]
사고,베끼고,수입해서라도 “내 책으로”
‘미암일기’에 수집 경로 상세히 기술…임진왜란 등 거치며 장서 사라져 아쉬움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미암 유희춘의 유물이 보관돼 있는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 내부. 유희춘의 후손인 유근영 담양군 대덕면 부면장이 목판을 살펴보고 있다.
책모으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거저 받는 것이다. 나 역시 명색이 공부를 한다 하여, 학계 선후배에게서 귀중한 연구물을 종종 거저 받는다. 출판사에서도 가끔 책을 보내준다. 이렇게 해서 서재에 쌓인 책이 제법 된다. 하기야 엄밀히 말해 거저는 아니다. 언젠가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들이다.
각설하고 지난 호에서 미암 유희춘이 교서관과 지방의 책판에서 책을 다시 인쇄해 장서를 구축했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는 이 방법 외에도 다양한 경로로 책을 모으고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앞서 말했다시피 거저 얻는 것이다. ‘미암일기’에는 선물로 받은 책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1) 이산(尼山) 김판윤(金判尹) 수문(秀文)의 편지와 ‘강목(綱目)’ 150책이 선물로 왔다. 백 년에 한 번 있을 큰 은혜라 할 만하다.(1567년 11월9일)
‘미암일기’에는 이런 대가 없는 책의 기증 사례가 허다하다. 물론 서적을 선물한 사람이 어떻게 해당 서적을 마련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친교가 있는 지방관이 유희춘이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맡고 있는 고을에서 제작한 목판본을 그에게 기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또 자신에게 필요 없는 책을 유희춘에게 증정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기증 방식은 사대부 사회 내부에서 서적을 유통시키는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방법의 하나로 상정할 수 있다.
중개인 통해 책 팔 사람 수소문
모현관 인근에 있는 미암사당.
한데 기증 역시 유희춘이 서적을 손에 넣었던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기증은 타인의 호의에 기대는 불확실한 방법이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서적을 구입하려 한다면 공짜가 아닌, 즉 일정한 대가를 치르고 구입하는 방법이 가장 유력한 것이다. 다시 말해 매매다. 그는 상당한 양의 책을 매매하고 있다. 책의 매매라면 즉각 서점을 떠올리겠지만, 유희춘의 시대에는 서점이란 것이 없었다. 유희춘의 서적 구입은 개인과 개인 간에 이루어지는 물물교환에 가깝다. 다음 예를 보자.
(1) 교서 저작(著作) 정염(丁焰) 군회(君晦)가 찾아와 함께 ‘예기(禮記)’를 화매(和賣)하여 사는 일과 ‘본초(本草)’의 빠진 권(卷)을 인출(印出)하고, ‘서하집(西河集)’을 인출하는 등의 일을 의논하였다.(1568년 6월13일)
‘미암일기’의 한 부분. 허준을 내의원 의관으로 추천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빨간 줄 친 부분).
(2) 고 참판 김안정(金安鼎)의 얼자(孼子)로 관상감 참봉을 맡고 있는 상(祥)이 나첨정(羅僉正)을 통해 내알(內謁)하였는데, 나는 그에게 ‘두시(杜詩)’를 팔 사람을 찾아보게 하였다.(1568년 7월28일)
(3) 박원(朴元)이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자치통감(資治通鑑)’ 12권을 가지고 와서 매매(賣買)를 의논하고 갔다.(1570년 10월5일)
(4) 박원(朴元)이 또 ‘자치통감’ 2권을 갖고 왔다. 전에 가져온 것과 합치면 13권이다. 나는 녹미(祿米) 3두(斗)와 콩 3두를 주었다.(1570년 10월10일)
(5) 이조원(李調元)이 와서 ‘주역’ ‘맹자’를 화매할 것을 청하였다. 나는 허락하였다.(1573년 4월10일)
(6) 이여근(李汝謹)이 와서 인삼 8량을 받아 갔다. 곧 ‘사서집석(四書輯釋)’ ‘구본구공집(具本歐公集)’ ‘십일가소설(十一家小說)’ 중 1건을 화매할 요량이었다.(1573년 5월12일)
(7) 국봉범(鞠奉範)이 ‘옥기미의(玉機微義)’를 가지고 와서 값을 의논하였다. 또 ‘여지승람’은 장악원 하인(下人)에게 있다고 하였다.(1573년 7월1일)
서적 매매의 사례다. 이런 방식의 매매에는 반드시 중개인이 있다. (2)의 김상, (7)의 국봉범 등이 중개인에 해당하는데, (2)에서는 김상을 시켜 ‘두시’를 팔 의사가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고 있고, (7)은 유희춘의 요구에 따라 국봉범이 ‘여지승람’의 소재처를 알아냈다고 보고하고 있다.
모현관에 보관 중인 목판.
중국 사신단에 수차례 책 구입 부탁
‘미암일기’의 자료에 의하면 중개인은 유희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 중에는 양반도 있으나, 대개의 경우 신분이 낮거나 아니면 유희춘보다 여러 모로 아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중개인은 양자 사이에서 가격을 절충한다. 이것이 ‘화매’다. 화매는 ‘파는 사람이 사는 사람과 값을 합의해서 파는 행위’로 두 사람 사이의 가격 절충이다. 가격 절충이 이루어지면 책값이 지급된다. (5) (6) (7)은 서적 대금을 지급한 사례다. 물론 중개인에게도 일정한 수수료를 지급했다.
국내에서 구입할 수 없는 책도 있다. 이런 책은 중국에서 수입했다. 중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한정돼 있으므로 유희춘은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단(使臣團)에 책의 구입을 부탁하기도 했다.
군기(軍器) 이원록(李元祿) 정서(廷瑞)가 내가 불러서 찾아왔다. 악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사문유취(事文類聚)’의 값을 그에게 맡겼으면 했다. 이때 정서가 사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베이징에 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서는 허락하였다.
무진년(1568) 2월11일의 일기인데, 서장관으로 베이징으로 떠날 예정인 이정서에게 ‘사문유취’를 사올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는 이튿날 서책의 구입가로 녹포(祿布) 2필, 백첩선(白帖扇) 10자루를 보냈고, 이정서는 그것을 받고 책을 구입해오기로 약속하고 있다. 이것도 불안했던지 유희춘은 3월3일 다시 이정서를 찾아갔던 바, 그는 ‘사문유취’를 사오겠다고 ‘깊이’ 약속하고 있다.
베이징에 갔던 사신단이 돌아왔다는 것을 유희춘이 안 때는 9월6일이었고,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정서를 찾아갔다. 이때 그는 강섬(姜暹)도 방문하는데, 강섬은 그를 위해 원래 ‘거가필용(居家必用)’이라는 책을 사오기로 약속했다. 그는 이튿날인 9월7일 이정서에게서 ‘사문유취’ 60책을 받고 9월8일에 ‘거가필용’ 10책을 받았다. ‘사문유취’의 경우 책을 구입해달라고 부탁한 날로부터 거의 5개월이 지난 뒤였다.
담양군 대덕면 비차리에 있는 유희춘 묘소.
소유 불가능한 책들은 빌린 뒤 필사
이처럼 중국 서적을 구입하는 방법이란 사신단에 포함되는 친지를 통해, 책의 비용을 미리 지불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일 뿐이었다. 이것은 역으로 사신단에 포함되는 사람과 모종의 친근한 관계가 없다면 서적의 구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쨌든 유희춘은 사신단에 여러 차례 중국 서적의 구입을 요청한다. 이런 사례는 상당히 자주 발견된다. 물론 유희춘처럼 사신단에 중국 서적의 구입을 요청하는 것은, 서울의 고급 관료들이 중국 서적을 구입하기 위해 이용하는 주요 루트였을 것이다.
교서관과 지방의 책판에서 책을 찍어내거나, 기증을 받거나, 구입하거나, 중국에서 수입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는 없는가. 지금은 희귀한 책을 구입할 수 없으면, 복사기에 의한 복제의 방법이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로 말하면 필사다. 즉, 책을 베끼는 것이다. 유희춘 역시 필사본을 만들고 있다. 물론 스스로 필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혼자 힘으로는 거대한 장서를 구축할 수 없다. 당연히 많은 책의 필사를 남에게 의뢰한다. 그 예를 보자.
(1) 책색서리(冊色書吏) 경용(景鏞)이 나를 위해 베껴주었고, 서사관(書寫官) 이정(李精)이 나를 위해 ‘논어석(論語釋)’을 베껴주었다.(1568년 2월22일)
(2) 오대립(吳大立)이 필사한 ‘국조보감(國朝寶鑑)’과 ‘역석(易釋)’을 가지고 내알(內謁)하였다. 나는 황모필(黃毛筆)과 부채를 주어 사례하였다.(1568년 3월28일)
(3) 조수복(趙壽福)이 내알(內謁)하였다. 나는 백지 1권을 그에게 주고, ‘소문쇄록(聞錄)’을 필사하도록 부탁하였다.(1568년 6월23일)
(4) 서사관과 책색서리 최언국(崔彦國)을 통해 ‘천해록(川海錄)’을 필사하였다.(1568년 6월23일)
(5) 서사관 문서린(文瑞麟)이 외조부의 ‘동감론(東鑑論)’을 다 썼다. 정말 기쁘다. 또 ‘상서방통(尙書旁通)’ 2책의 재료를 문서린과 정치(鄭致) 등 4명에게 주었다.(1568년 6월28일)
(6) 봉상시(奉常寺) 하전(下典) 복룡(福龍)이 와서 ‘금낭집(錦囊集)’을 필사할 재료를 받아 갔다.(1568년 9월12일)
모두 1568년의 것이다. 위 필사의 예는 그야말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미암일기’에는 필사본을 의뢰하는 수많은 자료가 나온다. 필사의 원본은 홍문관과 같은 국가 도서관이나 친지에게서 빌린 희귀본, 또는 간본을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경우다. 필사는 거의 타인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필사자는 일반화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자신 주변의 친지, 혹은 글씨를 잘 쓰는 양반, 서사관과 같은 관청의 전문 필사자, 서리 등이 있다. 필사자에게는 대개 종이를 주고, 필사가 끝나면 필사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했다.
중앙과 지방의 목판에서 책을 찍어내고, 기증을 받고, 사들이고, 교환하고, 중국에서 수입하고, 필사하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유희춘은 거대한 장서를 마련했다. 아마도 그는 이름이 알려진 조선시대 최초의 장서가일 것이다. 그가 장서를 구축한 방법을 검토하면 조선 전기 사대부 사회의 서적 유통과 집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서적 유통과 집적의 흥미로운 사례인 것이다.
유희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년 전에 죽었다. 그의 장서는 조선 전기 사대부 문화를 압축한 것일 터다. 유희춘의 경우를 통해 우리는 조선 전기 사대부 사회의 지적 활동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의 장서는 오유(烏有)로 돌아가고 말았다. 너무나도 아쉽다. 유희춘과 서적은 나에게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쓸 거리는 많은데, 이것으로 그쳐 더더욱 아쉽다. (끝)
2006.08.08 547 호 (p 82 ~ 84)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이수광과 '지봉유설']
우물 안 조선, 세계로 안내하다
광범위한 독서와 메모 통해 이룬 수작…성리학 뛰어넘어 열린 지식의 땅 서양 인식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곤여만국전도팔폭병풍(坤輿萬國全圖八幅屛風). 이수광은 ‘곤여만국전도’를 인용해 조선에 세계 지리를 알렸다.
책한 권을 소개하자. 지봉(芝峰) 이수광(李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이다. 중·고등학교에서 암기식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지봉’ 하면 ‘이수광’, ‘이수광’ 하면 ‘지봉유설’이 절로 떠오를 것이다. 물론 읽어보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를 편히 하기 위해, 번거롭겠지만 이 책의 목차나마 잠시 훑어보자.
‘지봉유설’은 모두 20권이다. 1권은 천문·시령(時令)·재이(災異), 2권은 지리·제국(諸國), 3권은 군도(君道)·병정(兵政), 4권은 관직, 5권은 유도(儒道)·경서(經書)1이다. 6권은 경서2, 7권은 경서3·문자(文字), 8권에서 14권까지는 문장(文章)1에서 문장7까지다. 15권은 인물·성행(性行)·신형(身形), 16권은 언어, 17권은 인사(人事)·잡사(雜事), 18권은 기예(技藝)·외도(外道), 19권은 궁실(宮室)·복용(服用)·식물(食物), 20권은 훼목(卉木)·금충(禽蟲)이다. 중세인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이 중 8권에서 14권까지 모두 7권, 즉 3분의 1 이상이 문장(문학)이다. 조선이 문인의 나라였던 것을 이런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봉유설’ 이전의 한국 역사에서 이와 유사한 저작은 없었다. ‘지봉유설’은 이런 방면의 최초의 저작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 책의 탄생 과정이 너무나도 흥미롭다. 나는 이렇게 상상한다. 독서광들은 책을 읽으면서 메모의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다음 내용이 너무 궁금하기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다. 또는 대다수의 인간이 그렇듯 게으름을 타고난 탓에 실천은 충동을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드물게 부지런한 독서가도 있다. 중요 부분을 옮겨 적는가 하면, 요약도 하고 비평을 곁들이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 메모는 더미를 이루고, 그 더미는 스스로 질서를 갖는다. 그 질서에는 독서가의 독서 취향이 자연스럽게 반영돼 있다. 어느 날 메모를 뒤적이면, 자연적으로 생겨난 그 질서는 이제 독서가에게 독서와 메모의 방향을 권유한다. 세월이 더 흘러가면 메모는 쌓이고, 산이 된 메모는 자연히 책으로 변신한다. 성실한 독서의 결과는 새로운 저술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지봉유설’이 이런 과정을 거쳤으리라 상상한다. 따라서 ‘지봉유설’은 특별한 책이라고 할 수 없다. 지봉의 독서와 메모의 결과일 뿐이다. 다만 그 독서와 메모는 너무나 광범위하다.
등장인물만 2265명 방대한 내용
이수광은 1614년 52세 때 이 책을 탈고한다. 자신이 작성한 범례에 의하면, 이 책은 3435조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등장하는 인명은 2265명에 달한다. 방대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인용한 서적의 저작자는 무려 348명이다. 생각해보라. 348명의 저작자가 얼마나 거창한 규모인지는 책을 써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왼쪽)과 지봉유설을 쓰는 데 인용한 ‘오학편’.
이 책은 한마디로 가치를 규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부분이 눈에 먼저 뜨이는가. 이 책의 2권 제국부(諸國部)를 보자. 제국부에서 소개하고 있는 ‘외국’은 먼저 베트남, 라오스, 유구(琉球), 타일랜드, 자바,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의 30개 아시아 국가이며, 이어 포르투갈, 영국, 구라파국(유럽) 등에 관한 소개가 이어진다. 21세기의 입장에서 보면, ‘지봉유설’의 지리 지식은 정보량이 박약하고 오류로 점철된 것이지만, 그래도 이런 지식들은 당시 조선인의 지리 인식을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궁금한 것은 이수광이 이런 지식을 얻은 경로다. ‘지봉유설’은 마테오 리치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문헌으로도 유명한데, 해당 부분을 읽어보자.
구라파국(歐羅巴國)은 일명 대서국(大西國)이라고도 한다. 이마두(利瑪竇·마테오 리치)란 사람이 바람과 파도를 헤치고 바닷길 8만 리를 8년을 항해한 끝에 동월(東)에 도착해 거기서 10여 년을 살았다. 그의 저술 ‘천주실의’ 2권은 첫머리에 천주(天主)가 천지를 창조하고 안양(安養)을 주재하는 도리에 대해 논하고, 그 다음으로 사람의 영혼이 불멸하여 금수와 크게 다름을 논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육도(六道)를 윤회한다는 설의 오류와 천당과 지옥이 선악의 과보(果報)임을 논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사람의 본성은 본디 선함과 천주를 공경히 섬기는 뜻을 논하였다. 그에 의하면 구라파의 풍속은 임금을 ‘교화황(敎化皇)’이라고 하는데 결혼을 하지 않으므로 후손이 없고 어진 이를 선택하여 임금으로 세운다고 하며, 또 그 풍속은 우의(友誼)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재산을 축적하지 않는다 하였다. 그는 또 ‘중우론(重友論)’이라는 책을 지었다고 한다. 초횡(焦)은 “서역(西域)의 이군(利君·마테오 리치)이 ‘벗이란 제2의 나’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관한 자세한 것은 ‘속이담(續耳譚)’에 보인다.
이것이 마테오 리치와 ‘천주실의’, 기독교, 교황 등 서양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한국 학계의 통설은 이 기록에 등장하는 ‘천주실의’와 ‘중우론’ 등의 서적을 이수광이 직접 수입해 본 것처럼 여기고 있지만, 믿기 어렵다. 위의 인용 끝에 자세한 내용은 ‘속이담’이라는 책에 나온다고 했으니, 이수광은 ‘속이담’을 축약해 실었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지봉유설’ 19권 복용부(服用部)의 ‘금보(金寶)’란 조목에서 다시 ‘속이담’을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마테오 리치가 8년을 항해하여 중국에 왔고, 올 때 가지고 온 물건 중 가장 기이한 것이 자명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 보아 이수광의 ‘천주실의’와 ‘중우론’은 그가 구입해 읽은 것이 아니라 ‘속이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안 것일 따름이다. ‘속이담’은 명(明)의 유변(劉)이 지은 책이라 하지만, 더 이상은 알 길이 없다.
앞의 동남아시아 제국에 관한 그의 기록 역시 다른 책에서 인용된 것이다. 그는 동남아시아 제국에 대한 정보는 ‘오학편(吾學編)’에서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는 바, ‘오학편’은 명나라 사람 정효(鄭曉)의 1599년 저작이다.
서양 이야기가 나왔으니, 약간 첨가하자. 이수광이 1603년 홍문관 부제학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중국에 사신(使臣)으로 파견됐다가 돌아온 이광정(李光庭)과 권희(權憘) 두 사람은 6폭짜리 세계지도를 홍문관으로 보낸다.
원래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은 베이징에서 서적을 구입할 경우 통상 2부를 구입해 1부는 국가 도서관인 홍문관에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1부를 구입해도 국가에 소용이 닿는 것은 역시 홍문관에 기증했다. 이때 홍문관에 기증된 세계지도는 마테오 리치의 것으로 1584년 광둥에서 다시 인쇄되어 중국 지식인의 지리관에 큰 충격을 준다. 그 뒤 마테오 리치로 인해 천주교 신자가 되었던 이지조(李之藻)에 의해 1602년 베이징에서 판각되는데, 이것이 바로 홍문관에 수장(收藏)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6폭이다. 이 지도는 이수광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듯, 중국과 아시아, 서역에 국한돼 있던 조선인의 세계 지리관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다. 지도는 시각적으로 서양의 존재를 확인케 하는 최초의 경험이었던 것이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에 있는 이수광의 가족묘. 맨 위가 이수광과 부인 안동 김씨의 합장묘다.
이수광은 책을 통해 서양을 인식했다. 이 책들은 이수광 당대에 간행된 최신의 것이었다. 서양 지식만이 아니라, 20권 중 7권을 차지하는 문장, 곧 문학비평에서도 그는 당시 명의 문단을 지배하고 있던 왕세정(王世貞, 1526~1590)의 저작을 적극 인용하고 있다. 요컨대 ‘지봉유설’은 인용과 그에 대한 해설로 이루어진 책이되 그 책의 절대다수는 중국산이었던 것이고, 또 중국의 최신 책을 다량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3차례 사행 통해 신간 서적 구입
이수광은 어떻게 이 많은 책들을 볼 수 있었던가. 구간(舊刊)은 조선에 있을 수도 있지만 신간이라면 중국에서 구입하는 수밖에 없다. 유희춘(柳希春)의 장서 축적을 다루면서 언급한 바 있지만, 중국의 책은 오로지 사신 편에 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수광은 이런 점에서 유리했다. 그는 선조 23년(1590)에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선조 30년(1597)에 진위사(進慰使)로, 광해군 3년(1611)에는 주청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그가 3차례의 사행에서 서적을 구입해왔으리라는 것은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지봉유설’과 같은 형태의 책은 조선에서 최초의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최초가 아니다. 이런 저작을 유서(類書)라고 하는 바, 유서는 여러 서적에서 발췌한 유사한 내용을 분류해 묶은 책을 뜻한다. 당(唐)나라 구양순(歐陽詢)의 ‘예문유취(藝文類聚)’, 송(宋)나라 축목(祝穆)의 ‘사문유취(事文類聚)’가 모두 그런 예다. 그리고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완성된 1만 권이란 무시무시한 규모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도 빠질 수 없다. 조선에서는 드디어 17세기 초반 이수광에 의해 최초의 유서가 탄생했던 것이다.
‘지봉유설’은 학술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이수광이 살았던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지식인의 최대 관심사는 성리학 연구였다. 퇴계(退溪)가 1543년 ‘주자대전’을 정밀하게 읽기 시작하면서 본격화된 성리학 연구는 율곡(栗谷)에 이르러 경전과 성리학 이외의 서적은 읽을 필요가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지식 탐구의 범위를 축소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학문의 편협화를 두고 급기야 장유(張維, 1587~1638)가 “조선에서는 오로지 성리학만 공부할 뿐 다른 학문이 있는 줄을 모른다”고 탄식했음은 전에 언급한 바 있다.
‘지봉유설’은 이런 점에서 빛을 발한다. 성리학이 성(性)과 리(理), 기(氣)와 같은 고도로 추상화된 언어를 도구로 삼아 오직 관념의 조작에 몰두한다면, ‘지봉유설’은 지시대상이 분명한 현실의 구체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성’과 ‘리’와 ‘기’를 가지고 아무리 사고한들, ‘곤여만국전도’에 나타난 서양의 존재를 설명할 수는 없다. ‘지봉유설’의 세계는 성리학과는 대척적 공간에 놓인 지식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성리학에 대한 반발로서 탄생한 것은 아니다. 재래의 해석은 ‘지봉유설’을 성리학에 대한 반발로 나온 실학의 비조쯤으로 여기지만, 사실 이 책은 조선 전기 사대부들의 지식 문화의 축적에서 나온 것으로 성리학과는 다른 지식 공간에 속할 뿐이다. 그리고 이 지식 공간에서 뒷날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宋南雜識)’,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 등이 탄생한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지식 공간에서 최초로 탄생한 ‘지봉유설’로 조선은 좁은 틈으로나마 세계사의 변화를 어렴풋하게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끝)
미암 유희춘의 각종 유물이 보관돼 있는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의 모현관. ‘미암일기’를 비롯해 여러 고문서와 목판이 있다. 모현관 인근에 종가와 사당, 연계정(漣溪亭)도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 건국 이후 2세기 동안 축적되었던 전적(典籍) 문화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경복궁이 불타면서 고려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적과 조선 건국 이후 2세기 동안 생산된 방대한 문헌들이 하루 만에 잿더미가 됐고, 전국 각 지방 관아에서 축적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목판들도 남김없이 재가 돼 사라졌던 것이다. 실록의 기초 자료가 되는 사초(史草) 역시 한 줌의 쓸쓸한 먼지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자, 이제 무엇으로 실록을 쓸 것인가. ‘미암일기(眉巖日記)’란 책이 있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1567년부터 1577년까지 11년 동안 쓴 일기다. 개인의 일기지만, 이 일기는 매우 치밀하고 방대해 마침내 선조실록의 뼈대로 채택된다. 개인의 성실한 하루하루의 기록은 이렇듯 한 시대를 증언하는 자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미암일기에 책 수집 방법·과정 상세히 남겨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 보물 제260호로 지정돼 있다.
‘미암일기’의 내용은 매우 광범위하다. ‘미암일기’를 보면 16세기 조선 사람의 일상을 손바닥 보듯 환히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조선 전기 생활사를 복구하는 데 결정적 자료가 된다. 나는 그가 꼼꼼하게 기록해놓은 음식 재료를 보고 언젠가 16세기 음식과 요리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건 뒷날의 일이다.
유희춘은 대단한 장서가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미암일기’를 통해 유희춘이 어떻게 서적을 집적(集積)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미암일기’의 1575년 10월29일조를 보면, 유희춘은 다락방의 책을 중당(中堂)으로 옮기고 있는데 모두 3500책이란 막대한 분량이다. 하지만 ‘미암일기’에 가장(家藏) 서적을 여러 차례에 걸쳐 정리하고 옮기는 것을 보면, 이것은 전부가 아닌 그의 장서 중 일부로 짐작된다.
물론 3500책이라 해도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책이 흔해 빠진 물건이 된 오늘날에도 개인 장서가 3500권인 경우는 흔하지 않다. 교보문고와 같은 대형 서점이나 예스24 등의 인터넷 서점이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책을 수집한다는 것은, 개인의 피나는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책은 결코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인쇄본일 경우도 결코 많은 분량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예컨대 유희춘은 1571년 자신의 외조 최부(崔溥)의 문집 ‘금남집(錦南集)’을 인쇄했는데 15부에 불과했다. 15부라니 너무나 적은 양이 아닌가. 하지만 상업적 출판이 아닌 이상 많이 인쇄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소수의 부수만을 제작해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인쇄 형태였던 것이다[그는 이 책을 박순(朴淳)·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 등 당대의 명류들에게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책을 수집한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과연 유희춘의 장서는 어떻게 구축되었던가. ‘미암일기’에 그는 자신이 책을 수집한 내력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제 그 기록을 따라 그의 장서 축적기(蓄積記)를 써보자.
국가로부터 하사받거나 직접 인쇄 의뢰
(위)담양군 대덕면 비차리에 있는 유희춘 신도비. (아래)유희춘이 후학을 가르치고 시회를 즐기던 연계정.
조선시대에 책을 인쇄해 공급하는 곳은 국가가 거의 유일했다. 19세기 어림이 되면 방각본(坊刻本)이라고 해서 민간에서도 상업적 출판이 등장하지만 그 양은 미미했고 수준 역시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조선시대 전체를 놓고 본다면, 역시 대종을 이루는 것은 중앙의 교서관(校書館)과 지방 감영, 군·현 등 행정단위의 출판이었다. 금속활자의 인쇄는 대개 교서관을 비롯한 중앙관청에서 이루어졌고, 지방의 행정단위에서는 주로 목판본을 제작했다. 이처럼 관(官)이 출판을 주도하는 것이 조선시대 인쇄, 출판의 특징이다.
조선 최대의 출판처(出版處)는 역시 국립출판사라 할 교서관이다. 교서관은 금속활자와 다수의 책판(冊版)을 보유하고 책의 인쇄와 공급을 맡았다. 교서관에서 인쇄한 책은 국가 행정기관과 고급 관료에게 공급됐다. 임금이 녹봉이나 물건을 하사해주는 것을 반사(頒賜)라고 하는데, ‘미암일기’에는 유희춘이 책을 반사받았다는 기록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그중 참고가 됨직한 것을 인용해보자.
교서관에서 ‘백가시(百家詩)’를 다 인쇄했다고 하여 먼저 15건을 진상하고, 나머지 국용(國用) 150권 내에서 10건은 융문루(隆文樓)와 융무루(隆武樓), 그리고 여러 관(館)·부(府)·조(曺)에 나누어 간직하게 했다. 그 나머지 138건은 낙점(落點)하여 종친(宗親)·부마(駙馬)로서 2품 이상, 삼공(三公), 1품에서 2품, 여섯 승지, 홍문관 주서(注書), 한림(翰林), 대간(臺諫) 및 참의(參議), 감사(監司) 등 통정(通政) 중에서 빼어난 사람에게 하사하였다.(1570년 9월26일)
교서관에서 책을 찍으면 임금의 개인적 용도로 일정한 양을 바친(進上) 뒤, 국가 발행의 도서를 납본받아 소장하는 궁중의 도서관인 융문루와 융무루에 일정량을 할당한다. 그런 다음 관·부·조 등의 명칭을 단 중앙관청에 하사한다. 그 뒤에 개인에게 반사가 이루어지는데, 종친이나 부마 등 왕실의 친척, 그리고 관료조직의 상층부를 이루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승정원의 승지,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관찰사 등 권력기관에 책이 배포되는 것이다.
유희춘은 상당히 많은 책을 반사받았다. 하지만 반사만으로는 충분한 책을 확보할 수 없었다. 한데 반사 이외에도 책을 구할 길은 있었다. 금속활자 인쇄본의 경우는 책을 찍고 난 뒤 책판을 해체해버리므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지만, 목판본은 다시 인출할 수가 있었다. 목판본은 처음 목판을 제작했을 때 일정한 양을 찍어 분배한 뒤 목판을 간직해 뒷날 인쇄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의 목판은 대체로 지방 관아에서 제작돼 해당 지방에 보관한다. 하지만 일부는 서울로 이관해 교서관에 보관한다. 같은 목판으로 뒤에 다시 찍어낸 책을 후쇄본이라 하는데, 요즘의 재판에 해당한다. 후쇄본은 대량 제작하는 경우도 있었고, 단 1부 내지 2, 3부를 찍어내는 경우도 흔하게 있었다. 교서관의 목판은 인쇄에 필요한 종이와 비용을 가져오면 책을 인쇄해주었다. 유희춘의 기록에 의하면, 교서관의 목판을 인쇄해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 허봉(許)이 고사(告辭)하였다. 나는 이절책지(二折冊紙) 27권, 장지(壯紙) 4권, 백지(白紙) 3권, 모두 합쳐서 68첩(貼)으로 ‘운부군옥(韻府群玉)’ ‘전등신화(剪燈新話)’ ‘본초(本草)’ □(□는 원래 판독 불능의 글자다)권의 15의 19차 및 ‘중용혹문(中庸或問)’을 인쇄하게 하였다.(1567년 10월9일)
(3) 인본(印本) ‘본초’의 낙권(落卷)과 ‘계사(繫辭)’ 하권, ‘대학’ 등 4책의 인쇄에 필요한 종이를 외교서관 정자(正字) 박민준(朴民俊)에게 보냈다.(1569년 6월20일)
모두 교서관에 책의 인쇄를 의뢰한 것이다. 이처럼 교서관의 책판을 인출해 인쇄할 경우는 필요한 종이를 보내고 있다. 궁금한 것은 인쇄공에게 노임을 줬는가 하는 점인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생각해보면 교서관 제조까지 지낸 유희춘에게 인쇄 공임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다.
유희춘은 교서관에 소장된 목판에서 상당량의 책을 인쇄했다. 한데 책판의 절대 다수는 각 지방 관아에 소장돼 있었다. 이 책판의 관리자는 각도의 관찰사와 지방관이므로 만약 지방 책판에서 책을 인쇄하고 싶다면, 감사나 지방관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기록을 보자.
아침에 새 경상감사 박공(朴公) 대립(大立)을 만났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례(周禮)’ ‘속몽구(續蒙求)’ ‘익재난고(益齋亂藁)’ ‘역옹패설(翁稗說)’ 등의 책을 인쇄해주면 좋겠다고 청하자, 수백(守伯, 박대립)이 모두 허락하였다.(1570년 5월10일)
유희춘은 같은 날 편지를 써서 책의 인쇄를 부탁해 허락을 받고 있고, 13일 임지로 떠나는 박대립을 전송하면서 자신의 집에서 준비한 다과를 대접하고 책의 인쇄를 재차 부탁해 허락을 얻어내고 있다. 관찰사는 도(道)의 행정을 책임지고, 주·부·군·현의 장관은 그의 관할 아래에 있기 때문에 관찰사를 통하는 것이 지방의 책판을 인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외에는 직접 해당 지방관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각 지방관이 책을 인쇄해준 경우를 보자.
(1) 윤안동(尹安東)의 편지를 보니, ‘이정전서(二程全書)’를 이미 나를 위해 인쇄해왔다고 하였다.(1567년 10월3일)
(2) 들으니, 성주목사(星州牧使) 한성원(韓性源) 명숙(明叔)이 다시 편지를 보내 ‘당감(唐鑑)’을 인쇄해 보내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1567년 10월4일)
(3) ‘고문궤범(古文軌範)’이 윤참판(尹參判)으로부터 왔다. 관동(關東)에서 인쇄한 것이다.(1568년 6월3일)
이런 사례는 ‘미암일기’에서 매우 흔하게 발견된다. 그는 책판이 가장 많이 있었던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등에서 허다한 책을 인쇄해내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유희춘의 경우만이 아니라, 사대부가에서 책을 구입하는 가장 보편적인 경우로 생각된다.
전국 각지의 지방관들에게도 목판인쇄 부탁
그런데 지방 관아의 목판에서 서적을 인쇄할 경우, 종이와 인쇄 비용은 어떻게 감당했을까. 여기에 관한 자료를 본 적은 없다. 거개는 지방관의 호의로 무료로 인쇄해주지 않았나 한다. 물론 간혹 종이를 보내는 경우도 있다. (3)의 경우를 보면, 강원도에서 인쇄해 보낸 ‘고문궤범’은 원래 그가 이절(二折) 장지(壯紙) 4권 12장을 윤참판을 통해 강원감사에게 전해주어 찍게 한 것이다.
유희춘은 지방관과의 안면을 이용하여 지방 소재 책판에서 책을 찍는 방법으로 장서의 일부를 구축했다. 물론 이와 같은 방법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지방관과 두루 안면을 통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방법이었다. 유희춘의 경우는 그가 임금의 신임을 받는 고급 관료였기 때문에 지방의 책판을 마음대로 인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기록도 음미할 만하다.
도내(道內)의 책판을 기록한 장부를 보았다. 그중 볼 만한 책들을 뽑아 그 첩수(貼數)를 기록해두었다.(1571년 5월10일)
유희춘이 1571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일기의 한 구절이다. 관찰사가 되어 전라도 소재의 책판을 기록한 장부를 보고, 인쇄할 필요가 있는 서적을 추려놓았던 것이다.
반사를 받거나 아니면 교서관과 지방 관아의 목판을 이용해 후쇄본을 찍어내는 것으로 그의 장서가 완성되었던 것인가. 천만에! 이것은 그야말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책의 수집에 일단 뛰어들면 그 다음부터는 온갖 방법이 총동원된다. 다음 호에서 유희춘의 책 모으기를 계속 따라가보자. (끝)
2006.07.25 545 호 (p 86 ~ 87)
[조선의 인물,조선의 책|미암 유희춘의 책 모으기 下]
사고,베끼고,수입해서라도 “내 책으로”
‘미암일기’에 수집 경로 상세히 기술…임진왜란 등 거치며 장서 사라져 아쉬움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미암 유희춘의 유물이 보관돼 있는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 내부. 유희춘의 후손인 유근영 담양군 대덕면 부면장이 목판을 살펴보고 있다.
책모으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거저 받는 것이다. 나 역시 명색이 공부를 한다 하여, 학계 선후배에게서 귀중한 연구물을 종종 거저 받는다. 출판사에서도 가끔 책을 보내준다. 이렇게 해서 서재에 쌓인 책이 제법 된다. 하기야 엄밀히 말해 거저는 아니다. 언젠가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들이다.
각설하고 지난 호에서 미암 유희춘이 교서관과 지방의 책판에서 책을 다시 인쇄해 장서를 구축했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는 이 방법 외에도 다양한 경로로 책을 모으고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앞서 말했다시피 거저 얻는 것이다. ‘미암일기’에는 선물로 받은 책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1) 이산(尼山) 김판윤(金判尹) 수문(秀文)의 편지와 ‘강목(綱目)’ 150책이 선물로 왔다. 백 년에 한 번 있을 큰 은혜라 할 만하다.(1567년 11월9일)
‘미암일기’에는 이런 대가 없는 책의 기증 사례가 허다하다. 물론 서적을 선물한 사람이 어떻게 해당 서적을 마련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친교가 있는 지방관이 유희춘이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맡고 있는 고을에서 제작한 목판본을 그에게 기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또 자신에게 필요 없는 책을 유희춘에게 증정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기증 방식은 사대부 사회 내부에서 서적을 유통시키는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방법의 하나로 상정할 수 있다.
중개인 통해 책 팔 사람 수소문
모현관 인근에 있는 미암사당.
한데 기증 역시 유희춘이 서적을 손에 넣었던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기증은 타인의 호의에 기대는 불확실한 방법이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서적을 구입하려 한다면 공짜가 아닌, 즉 일정한 대가를 치르고 구입하는 방법이 가장 유력한 것이다. 다시 말해 매매다. 그는 상당한 양의 책을 매매하고 있다. 책의 매매라면 즉각 서점을 떠올리겠지만, 유희춘의 시대에는 서점이란 것이 없었다. 유희춘의 서적 구입은 개인과 개인 간에 이루어지는 물물교환에 가깝다. 다음 예를 보자.
(1) 교서 저작(著作) 정염(丁焰) 군회(君晦)가 찾아와 함께 ‘예기(禮記)’를 화매(和賣)하여 사는 일과 ‘본초(本草)’의 빠진 권(卷)을 인출(印出)하고, ‘서하집(西河集)’을 인출하는 등의 일을 의논하였다.(1568년 6월13일)
‘미암일기’의 한 부분. 허준을 내의원 의관으로 추천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빨간 줄 친 부분).
(2) 고 참판 김안정(金安鼎)의 얼자(孼子)로 관상감 참봉을 맡고 있는 상(祥)이 나첨정(羅僉正)을 통해 내알(內謁)하였는데, 나는 그에게 ‘두시(杜詩)’를 팔 사람을 찾아보게 하였다.(1568년 7월28일)
(3) 박원(朴元)이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자치통감(資治通鑑)’ 12권을 가지고 와서 매매(賣買)를 의논하고 갔다.(1570년 10월5일)
(4) 박원(朴元)이 또 ‘자치통감’ 2권을 갖고 왔다. 전에 가져온 것과 합치면 13권이다. 나는 녹미(祿米) 3두(斗)와 콩 3두를 주었다.(1570년 10월10일)
(5) 이조원(李調元)이 와서 ‘주역’ ‘맹자’를 화매할 것을 청하였다. 나는 허락하였다.(1573년 4월10일)
(6) 이여근(李汝謹)이 와서 인삼 8량을 받아 갔다. 곧 ‘사서집석(四書輯釋)’ ‘구본구공집(具本歐公集)’ ‘십일가소설(十一家小說)’ 중 1건을 화매할 요량이었다.(1573년 5월12일)
(7) 국봉범(鞠奉範)이 ‘옥기미의(玉機微義)’를 가지고 와서 값을 의논하였다. 또 ‘여지승람’은 장악원 하인(下人)에게 있다고 하였다.(1573년 7월1일)
서적 매매의 사례다. 이런 방식의 매매에는 반드시 중개인이 있다. (2)의 김상, (7)의 국봉범 등이 중개인에 해당하는데, (2)에서는 김상을 시켜 ‘두시’를 팔 의사가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고 있고, (7)은 유희춘의 요구에 따라 국봉범이 ‘여지승람’의 소재처를 알아냈다고 보고하고 있다.
모현관에 보관 중인 목판.
중국 사신단에 수차례 책 구입 부탁
‘미암일기’의 자료에 의하면 중개인은 유희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 중에는 양반도 있으나, 대개의 경우 신분이 낮거나 아니면 유희춘보다 여러 모로 아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중개인은 양자 사이에서 가격을 절충한다. 이것이 ‘화매’다. 화매는 ‘파는 사람이 사는 사람과 값을 합의해서 파는 행위’로 두 사람 사이의 가격 절충이다. 가격 절충이 이루어지면 책값이 지급된다. (5) (6) (7)은 서적 대금을 지급한 사례다. 물론 중개인에게도 일정한 수수료를 지급했다.
국내에서 구입할 수 없는 책도 있다. 이런 책은 중국에서 수입했다. 중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한정돼 있으므로 유희춘은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단(使臣團)에 책의 구입을 부탁하기도 했다.
군기(軍器) 이원록(李元祿) 정서(廷瑞)가 내가 불러서 찾아왔다. 악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사문유취(事文類聚)’의 값을 그에게 맡겼으면 했다. 이때 정서가 사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베이징에 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서는 허락하였다.
무진년(1568) 2월11일의 일기인데, 서장관으로 베이징으로 떠날 예정인 이정서에게 ‘사문유취’를 사올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는 이튿날 서책의 구입가로 녹포(祿布) 2필, 백첩선(白帖扇) 10자루를 보냈고, 이정서는 그것을 받고 책을 구입해오기로 약속하고 있다. 이것도 불안했던지 유희춘은 3월3일 다시 이정서를 찾아갔던 바, 그는 ‘사문유취’를 사오겠다고 ‘깊이’ 약속하고 있다.
베이징에 갔던 사신단이 돌아왔다는 것을 유희춘이 안 때는 9월6일이었고,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정서를 찾아갔다. 이때 그는 강섬(姜暹)도 방문하는데, 강섬은 그를 위해 원래 ‘거가필용(居家必用)’이라는 책을 사오기로 약속했다. 그는 이튿날인 9월7일 이정서에게서 ‘사문유취’ 60책을 받고 9월8일에 ‘거가필용’ 10책을 받았다. ‘사문유취’의 경우 책을 구입해달라고 부탁한 날로부터 거의 5개월이 지난 뒤였다.
담양군 대덕면 비차리에 있는 유희춘 묘소.
소유 불가능한 책들은 빌린 뒤 필사
이처럼 중국 서적을 구입하는 방법이란 사신단에 포함되는 친지를 통해, 책의 비용을 미리 지불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일 뿐이었다. 이것은 역으로 사신단에 포함되는 사람과 모종의 친근한 관계가 없다면 서적의 구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쨌든 유희춘은 사신단에 여러 차례 중국 서적의 구입을 요청한다. 이런 사례는 상당히 자주 발견된다. 물론 유희춘처럼 사신단에 중국 서적의 구입을 요청하는 것은, 서울의 고급 관료들이 중국 서적을 구입하기 위해 이용하는 주요 루트였을 것이다.
교서관과 지방의 책판에서 책을 찍어내거나, 기증을 받거나, 구입하거나, 중국에서 수입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는 없는가. 지금은 희귀한 책을 구입할 수 없으면, 복사기에 의한 복제의 방법이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로 말하면 필사다. 즉, 책을 베끼는 것이다. 유희춘 역시 필사본을 만들고 있다. 물론 스스로 필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혼자 힘으로는 거대한 장서를 구축할 수 없다. 당연히 많은 책의 필사를 남에게 의뢰한다. 그 예를 보자.
(1) 책색서리(冊色書吏) 경용(景鏞)이 나를 위해 베껴주었고, 서사관(書寫官) 이정(李精)이 나를 위해 ‘논어석(論語釋)’을 베껴주었다.(1568년 2월22일)
(2) 오대립(吳大立)이 필사한 ‘국조보감(國朝寶鑑)’과 ‘역석(易釋)’을 가지고 내알(內謁)하였다. 나는 황모필(黃毛筆)과 부채를 주어 사례하였다.(1568년 3월28일)
(3) 조수복(趙壽福)이 내알(內謁)하였다. 나는 백지 1권을 그에게 주고, ‘소문쇄록(聞錄)’을 필사하도록 부탁하였다.(1568년 6월23일)
(4) 서사관과 책색서리 최언국(崔彦國)을 통해 ‘천해록(川海錄)’을 필사하였다.(1568년 6월23일)
(5) 서사관 문서린(文瑞麟)이 외조부의 ‘동감론(東鑑論)’을 다 썼다. 정말 기쁘다. 또 ‘상서방통(尙書旁通)’ 2책의 재료를 문서린과 정치(鄭致) 등 4명에게 주었다.(1568년 6월28일)
(6) 봉상시(奉常寺) 하전(下典) 복룡(福龍)이 와서 ‘금낭집(錦囊集)’을 필사할 재료를 받아 갔다.(1568년 9월12일)
모두 1568년의 것이다. 위 필사의 예는 그야말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미암일기’에는 필사본을 의뢰하는 수많은 자료가 나온다. 필사의 원본은 홍문관과 같은 국가 도서관이나 친지에게서 빌린 희귀본, 또는 간본을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경우다. 필사는 거의 타인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필사자는 일반화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자신 주변의 친지, 혹은 글씨를 잘 쓰는 양반, 서사관과 같은 관청의 전문 필사자, 서리 등이 있다. 필사자에게는 대개 종이를 주고, 필사가 끝나면 필사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했다.
중앙과 지방의 목판에서 책을 찍어내고, 기증을 받고, 사들이고, 교환하고, 중국에서 수입하고, 필사하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유희춘은 거대한 장서를 마련했다. 아마도 그는 이름이 알려진 조선시대 최초의 장서가일 것이다. 그가 장서를 구축한 방법을 검토하면 조선 전기 사대부 사회의 서적 유통과 집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서적 유통과 집적의 흥미로운 사례인 것이다.
유희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년 전에 죽었다. 그의 장서는 조선 전기 사대부 문화를 압축한 것일 터다. 유희춘의 경우를 통해 우리는 조선 전기 사대부 사회의 지적 활동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의 장서는 오유(烏有)로 돌아가고 말았다. 너무나도 아쉽다. 유희춘과 서적은 나에게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쓸 거리는 많은데, 이것으로 그쳐 더더욱 아쉽다. (끝)
2006.08.08 547 호 (p 82 ~ 84)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이수광과 '지봉유설']
우물 안 조선, 세계로 안내하다
광범위한 독서와 메모 통해 이룬 수작…성리학 뛰어넘어 열린 지식의 땅 서양 인식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곤여만국전도팔폭병풍(坤輿萬國全圖八幅屛風). 이수광은 ‘곤여만국전도’를 인용해 조선에 세계 지리를 알렸다.
책한 권을 소개하자. 지봉(芝峰) 이수광(李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이다. 중·고등학교에서 암기식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지봉’ 하면 ‘이수광’, ‘이수광’ 하면 ‘지봉유설’이 절로 떠오를 것이다. 물론 읽어보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를 편히 하기 위해, 번거롭겠지만 이 책의 목차나마 잠시 훑어보자.
‘지봉유설’은 모두 20권이다. 1권은 천문·시령(時令)·재이(災異), 2권은 지리·제국(諸國), 3권은 군도(君道)·병정(兵政), 4권은 관직, 5권은 유도(儒道)·경서(經書)1이다. 6권은 경서2, 7권은 경서3·문자(文字), 8권에서 14권까지는 문장(文章)1에서 문장7까지다. 15권은 인물·성행(性行)·신형(身形), 16권은 언어, 17권은 인사(人事)·잡사(雜事), 18권은 기예(技藝)·외도(外道), 19권은 궁실(宮室)·복용(服用)·식물(食物), 20권은 훼목(卉木)·금충(禽蟲)이다. 중세인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이 중 8권에서 14권까지 모두 7권, 즉 3분의 1 이상이 문장(문학)이다. 조선이 문인의 나라였던 것을 이런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봉유설’ 이전의 한국 역사에서 이와 유사한 저작은 없었다. ‘지봉유설’은 이런 방면의 최초의 저작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 책의 탄생 과정이 너무나도 흥미롭다. 나는 이렇게 상상한다. 독서광들은 책을 읽으면서 메모의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다음 내용이 너무 궁금하기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다. 또는 대다수의 인간이 그렇듯 게으름을 타고난 탓에 실천은 충동을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드물게 부지런한 독서가도 있다. 중요 부분을 옮겨 적는가 하면, 요약도 하고 비평을 곁들이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 메모는 더미를 이루고, 그 더미는 스스로 질서를 갖는다. 그 질서에는 독서가의 독서 취향이 자연스럽게 반영돼 있다. 어느 날 메모를 뒤적이면, 자연적으로 생겨난 그 질서는 이제 독서가에게 독서와 메모의 방향을 권유한다. 세월이 더 흘러가면 메모는 쌓이고, 산이 된 메모는 자연히 책으로 변신한다. 성실한 독서의 결과는 새로운 저술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지봉유설’이 이런 과정을 거쳤으리라 상상한다. 따라서 ‘지봉유설’은 특별한 책이라고 할 수 없다. 지봉의 독서와 메모의 결과일 뿐이다. 다만 그 독서와 메모는 너무나 광범위하다.
등장인물만 2265명 방대한 내용
이수광은 1614년 52세 때 이 책을 탈고한다. 자신이 작성한 범례에 의하면, 이 책은 3435조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등장하는 인명은 2265명에 달한다. 방대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인용한 서적의 저작자는 무려 348명이다. 생각해보라. 348명의 저작자가 얼마나 거창한 규모인지는 책을 써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왼쪽)과 지봉유설을 쓰는 데 인용한 ‘오학편’.
이 책은 한마디로 가치를 규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부분이 눈에 먼저 뜨이는가. 이 책의 2권 제국부(諸國部)를 보자. 제국부에서 소개하고 있는 ‘외국’은 먼저 베트남, 라오스, 유구(琉球), 타일랜드, 자바,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의 30개 아시아 국가이며, 이어 포르투갈, 영국, 구라파국(유럽) 등에 관한 소개가 이어진다. 21세기의 입장에서 보면, ‘지봉유설’의 지리 지식은 정보량이 박약하고 오류로 점철된 것이지만, 그래도 이런 지식들은 당시 조선인의 지리 인식을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궁금한 것은 이수광이 이런 지식을 얻은 경로다. ‘지봉유설’은 마테오 리치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문헌으로도 유명한데, 해당 부분을 읽어보자.
구라파국(歐羅巴國)은 일명 대서국(大西國)이라고도 한다. 이마두(利瑪竇·마테오 리치)란 사람이 바람과 파도를 헤치고 바닷길 8만 리를 8년을 항해한 끝에 동월(東)에 도착해 거기서 10여 년을 살았다. 그의 저술 ‘천주실의’ 2권은 첫머리에 천주(天主)가 천지를 창조하고 안양(安養)을 주재하는 도리에 대해 논하고, 그 다음으로 사람의 영혼이 불멸하여 금수와 크게 다름을 논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육도(六道)를 윤회한다는 설의 오류와 천당과 지옥이 선악의 과보(果報)임을 논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사람의 본성은 본디 선함과 천주를 공경히 섬기는 뜻을 논하였다. 그에 의하면 구라파의 풍속은 임금을 ‘교화황(敎化皇)’이라고 하는데 결혼을 하지 않으므로 후손이 없고 어진 이를 선택하여 임금으로 세운다고 하며, 또 그 풍속은 우의(友誼)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재산을 축적하지 않는다 하였다. 그는 또 ‘중우론(重友論)’이라는 책을 지었다고 한다. 초횡(焦)은 “서역(西域)의 이군(利君·마테오 리치)이 ‘벗이란 제2의 나’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관한 자세한 것은 ‘속이담(續耳譚)’에 보인다.
이것이 마테오 리치와 ‘천주실의’, 기독교, 교황 등 서양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한국 학계의 통설은 이 기록에 등장하는 ‘천주실의’와 ‘중우론’ 등의 서적을 이수광이 직접 수입해 본 것처럼 여기고 있지만, 믿기 어렵다. 위의 인용 끝에 자세한 내용은 ‘속이담’이라는 책에 나온다고 했으니, 이수광은 ‘속이담’을 축약해 실었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지봉유설’ 19권 복용부(服用部)의 ‘금보(金寶)’란 조목에서 다시 ‘속이담’을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마테오 리치가 8년을 항해하여 중국에 왔고, 올 때 가지고 온 물건 중 가장 기이한 것이 자명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 보아 이수광의 ‘천주실의’와 ‘중우론’은 그가 구입해 읽은 것이 아니라 ‘속이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안 것일 따름이다. ‘속이담’은 명(明)의 유변(劉)이 지은 책이라 하지만, 더 이상은 알 길이 없다.
앞의 동남아시아 제국에 관한 그의 기록 역시 다른 책에서 인용된 것이다. 그는 동남아시아 제국에 대한 정보는 ‘오학편(吾學編)’에서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는 바, ‘오학편’은 명나라 사람 정효(鄭曉)의 1599년 저작이다.
서양 이야기가 나왔으니, 약간 첨가하자. 이수광이 1603년 홍문관 부제학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중국에 사신(使臣)으로 파견됐다가 돌아온 이광정(李光庭)과 권희(權憘) 두 사람은 6폭짜리 세계지도를 홍문관으로 보낸다.
원래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은 베이징에서 서적을 구입할 경우 통상 2부를 구입해 1부는 국가 도서관인 홍문관에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1부를 구입해도 국가에 소용이 닿는 것은 역시 홍문관에 기증했다. 이때 홍문관에 기증된 세계지도는 마테오 리치의 것으로 1584년 광둥에서 다시 인쇄되어 중국 지식인의 지리관에 큰 충격을 준다. 그 뒤 마테오 리치로 인해 천주교 신자가 되었던 이지조(李之藻)에 의해 1602년 베이징에서 판각되는데, 이것이 바로 홍문관에 수장(收藏)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6폭이다. 이 지도는 이수광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듯, 중국과 아시아, 서역에 국한돼 있던 조선인의 세계 지리관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다. 지도는 시각적으로 서양의 존재를 확인케 하는 최초의 경험이었던 것이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에 있는 이수광의 가족묘. 맨 위가 이수광과 부인 안동 김씨의 합장묘다.
이수광은 책을 통해 서양을 인식했다. 이 책들은 이수광 당대에 간행된 최신의 것이었다. 서양 지식만이 아니라, 20권 중 7권을 차지하는 문장, 곧 문학비평에서도 그는 당시 명의 문단을 지배하고 있던 왕세정(王世貞, 1526~1590)의 저작을 적극 인용하고 있다. 요컨대 ‘지봉유설’은 인용과 그에 대한 해설로 이루어진 책이되 그 책의 절대다수는 중국산이었던 것이고, 또 중국의 최신 책을 다량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3차례 사행 통해 신간 서적 구입
이수광은 어떻게 이 많은 책들을 볼 수 있었던가. 구간(舊刊)은 조선에 있을 수도 있지만 신간이라면 중국에서 구입하는 수밖에 없다. 유희춘(柳希春)의 장서 축적을 다루면서 언급한 바 있지만, 중국의 책은 오로지 사신 편에 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수광은 이런 점에서 유리했다. 그는 선조 23년(1590)에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선조 30년(1597)에 진위사(進慰使)로, 광해군 3년(1611)에는 주청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그가 3차례의 사행에서 서적을 구입해왔으리라는 것은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지봉유설’과 같은 형태의 책은 조선에서 최초의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최초가 아니다. 이런 저작을 유서(類書)라고 하는 바, 유서는 여러 서적에서 발췌한 유사한 내용을 분류해 묶은 책을 뜻한다. 당(唐)나라 구양순(歐陽詢)의 ‘예문유취(藝文類聚)’, 송(宋)나라 축목(祝穆)의 ‘사문유취(事文類聚)’가 모두 그런 예다. 그리고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완성된 1만 권이란 무시무시한 규모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도 빠질 수 없다. 조선에서는 드디어 17세기 초반 이수광에 의해 최초의 유서가 탄생했던 것이다.
‘지봉유설’은 학술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이수광이 살았던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지식인의 최대 관심사는 성리학 연구였다. 퇴계(退溪)가 1543년 ‘주자대전’을 정밀하게 읽기 시작하면서 본격화된 성리학 연구는 율곡(栗谷)에 이르러 경전과 성리학 이외의 서적은 읽을 필요가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지식 탐구의 범위를 축소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학문의 편협화를 두고 급기야 장유(張維, 1587~1638)가 “조선에서는 오로지 성리학만 공부할 뿐 다른 학문이 있는 줄을 모른다”고 탄식했음은 전에 언급한 바 있다.
‘지봉유설’은 이런 점에서 빛을 발한다. 성리학이 성(性)과 리(理), 기(氣)와 같은 고도로 추상화된 언어를 도구로 삼아 오직 관념의 조작에 몰두한다면, ‘지봉유설’은 지시대상이 분명한 현실의 구체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성’과 ‘리’와 ‘기’를 가지고 아무리 사고한들, ‘곤여만국전도’에 나타난 서양의 존재를 설명할 수는 없다. ‘지봉유설’의 세계는 성리학과는 대척적 공간에 놓인 지식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성리학에 대한 반발로서 탄생한 것은 아니다. 재래의 해석은 ‘지봉유설’을 성리학에 대한 반발로 나온 실학의 비조쯤으로 여기지만, 사실 이 책은 조선 전기 사대부들의 지식 문화의 축적에서 나온 것으로 성리학과는 다른 지식 공간에 속할 뿐이다. 그리고 이 지식 공간에서 뒷날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宋南雜識)’,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 등이 탄생한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지식 공간에서 최초로 탄생한 ‘지봉유설’로 조선은 좁은 틈으로나마 세계사의 변화를 어렴풋하게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