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주는 시 (외 1편)
류 근
우산을 접어버리듯
잊기로 한다
밤새 내린 비가
마을의 모든 나무들을 깨우고 간 뒤
과수밭 찔레울 언덕을 넘어오는 우편배달부
자전거 바퀴에 부서져 내리던 햇살처럼
비로소 환하게 잊기로 한다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한 깊이만큼
사랑의 날들이 오래 머물러주지는 않는 거다
다만 사랑 아닌 것으로
사랑을 견디고자 했던 날들이 아프고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그러므로 이제
잊기로 한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먼 길을 바라보는
가을 새처럼
한꺼번에
한꺼번에 잊기로 한다
시인들
이상하지
시깨나 쓴다는 시인들 얼굴을 보면
눈매들이 조금씩 일그러져 있다
잔칫날 울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심하게 얻어맞으면서도
어떤 이유에서든 이 악물고 버티는 여자처럼
얼굴의 능선이 조금씩 비틀려 있다
아직도 일렬횡대가 아니고선 절대로 사진 찍히는 법 없는
시인들과 어울려 어쩌다 술을 마시면
독립군과 빨치산과 선생과 정치꾼이
실업자가 슬픔이 과거가 영수증이
탁자 하나를 마주한 채 끄덕이고 있는 것 같아
천장에 매달린 전구 알조차 비현실적으로 흔들리고
빨리 어떻게든 사막으로 돌아가
뼈를 말려야 할 것 같다 이게 뭐냐고
물어야 할 것 같다
울어야 할 것 같다
—시집『어떻게든 이별』(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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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1966년 경북 문경 출생, 충북 충주에서 성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1992년〈문화일보〉신춘문예에 시 당선. 시집 『상처적 체질』『어떻게든 이별』, 산문집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