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論介)의 애인(愛人)이 되어서 그의 묘(廟)에
한용운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南江)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矗石樓)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라서 달음질 칩니다.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同時)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그대은 어디 있느뇨.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어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當年)을 회상(回想)한다.
술 향기에 목맺힌 고요한 노래는 옥(獄)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귀신 나라의 꽃수풀을 거쳐 떨어지는 해를
열렸다.
가냘핀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였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무독(無毒)한 그대이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게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조운(朝雲)이냐 울음의 모우(暮雨)이냐 새벽달의 비밀이냐 이슬꽃의 상징(象徵)이냐.
빠비같은 그대의 손에 꺾이우지 못한 낙화대(落花臺)의 남은 꽃은 부끄럼이 취(醉)하여
얼굴이 붉었다.
옥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밟히운 강 언덕의 묵은 이끼는 교긍(驕矜)에 넘쳐서 루른 사롱
(紗籠)으로 자기의 제명(題名)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 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으려면 나의 창자가 먼저 꺾어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금석(金石)같은 굳은 언약을 져버린 것은 그대가 아이요 나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누워서 끼친 한(恨)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에 기념비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노래에 ‘눈물’의 곡조를 낙인(烙印)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際鐘)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세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는 신에게 참회를 아니 한 대도 사라지겠습니다.
천추(千秋)에 죽지 않는 논개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시집 『님의 침묵』, 1926)
♣어휘풀이
-묘(廟) : ‘종묘’와 ‘문묘’를 두루 이르는 말. ‘종묘’는 역대 왕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祠堂)이며, ‘문묘’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여기서는 이와 달리 일반적인
‘사당’의 뜻으로 쓰였다.
-살 : 화살
-광음(光陰) : 햇빛과 그늘, 즉 낮과 밤이라는 뜻으로, 시간이나 세월을 이르는 말.
-당년(當年) : 그 때, 그 당시
-목맺힌 : 목 메인
-가냘핀 : 가냘픈
-빠비 : 수정(水晶)을 뜻하는 ‘파리(玻璃)’로 파리는 불교의 칠보(七寶)의 하나임. 한편 이를
‘벨기’(띠와 같은 풀의 어린 순)로 보기도 한다.
-교긍(驕矜) :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스스로 믿어 잘난 체하면 뽐내는 것.
-사롱(紗籠) : 사등롱(紗燈籠)의 준말로 ‘사초롱’이라고도 함. 여러 가지 빛깔의 깁(비단)으로
거죽을 바른 등롱을 가리킨다.
-천추(千秋) : 오래고 긴 세월, 또는 먼 미래.
♣작품해설
이 시는 일제 강점기의 부끄러운 현실 상황 속에서 ‘논개’라는 역사적 인물을 끌어들여 논개의 충혼을 현재적 의미를 부각시킨 작품이다. 만해는 이 시를 통해 임진왜란 당시 적장을 껴안고 진주 남상에 투신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자 했던 논개의 충혼을 기리면서, 자신이 처한 국권 상실의 민족적 비극과 치욕을 극복할 수 있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논개의 거룩하고 숭고한 희생을 역설적인 표현으로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현재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살아 있는 역사 인식이란 어떤 것인지를 시사하고 있다.
이 시의 감상의 초점은 ‘역설’에 대한 이해에 있다. 이 시에 적용하고 있는 핵심적 표현 원리가, 서로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시어를 병렬시킴으로써 시적 의미를 강화하는 ‘역설’이기 때문이다. 정(靜)과 동(動)이 모순(가지 않는다 ↔ 흐른다, 선다 ↔달음질 친다), ‘존재(存在)와 부재(不在)의 모순(있다 ↔ 없다, 죽지 않는다 ↔ 살 수 없다), ’기쁨과 슬픔의 모순(웃음↔울음[눈물], 즐거움↔슬픔)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이 시에서는 ‘논개’를 애인으로 노래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화자는 논개를 단순한 과거의 역사적 인물로 간주하지 않고, 자신에게 즐거움과 슬픔,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특별하고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화자가 논개의 애인이 된다는 것은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신적이고 역사적 차원에서 그녀의 거룩하고 숭고한 희생정신을 ‘애인’처럼 사모하면서 그것을 영원히 마음속에 간직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슴을 버린 논개의 정신적 아름다움을 흠모하고 따르겠다는 다짐이나, 논개를 기리고 예찬함으로써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의지돠 정신을 영원히 간직하겠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그로므로 이 시에서 ‘논개’가 갖고 있는 의미는 시대적 비극을 일깨워주는 존재에서부터 삶의 지표를 제시해 주는 존재, 추모와 예찬 및 정신적 교감의 대상, 조국애와 민족애를 실천으로 보여 준 존재로 점차 확대됨으로써 결국 ‘님의 침묵’에서의 ‘님(당시)’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
이 시는 4음조의 율격적 특성이 가미된 유장한 산문적 리듬을 바탕으로 추모와 예찬의 비장한 어조로 논개의 충혼을 추모하는 한편 조국 독립을 위한 헌신적 의지를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 만해는 감각적이미지와 비유적 이미지를 적절하게 조화시켜, 역사적 인물을 관념 속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생생하게 현실속으로 다가오게 하는 표현 방법을 사용한다. 또한 불교적 깨달음을 전제로 한 역설법과 실천적 의미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인과적 서술, 그리고 폭넓은 감정을 드러내는 여러 형태의 졸결어미의 구사 등 다양한 표현 방법을 활용한다.
이 시의 짜임은 기·승·전·결의 4단 구성으로 기[1~6행]는 시상의 단계로 ‘논개의 애국심에 대한 추모의 정’을, 승[7~14행]은 시상의 전개 단계로 ‘논개에 대한 회상’을, 전[15~26행]은 시상의 심화 단계로 ‘논개에 대한 연민과 속죄 의식’을 결[27~31행]은 시상의 정리 단계로 ‘논개에 대한 영원한 사랑과 추모의 정’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소개]
한용운(韓龍雲)
본명 : 한정옥(韓貞玉)
1879년 충남 음성 출생
1896년 동학에 가입하였으나 운동이 실패하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감.
1919년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1927년 신간회(新幹會) 중앙 집행위원
1930년 월간지 『불교』 발행인
1944년 사망
첫댓글
논개를 사랑하며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무한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
한용운 선생님의 위대함은 어떻게 표현이 안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