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비워야만(空應) / 승한스님의 선시 산책

[修禪智]

우리는 지금 얼마나 익고 있는가

물병에 망망대해를 다 담듯
마음은 한없이 넓고도 좁아
지금 사는 바로 이 자리가
나의 달 도장을 찍을 자리

마땅히 비워야만 한 움큼도 담고
바다 역시 물병에 다 담는다.
평범하든 성스럽든 모든 물건은
이름 짓기 어렵고 형상도 없다.
空應皆納掬(공응개납국)
海亦盡盛瓶(해역진성병)
有物通凡聖(유물통범성)
難名又沒形(난명우몰형)
-월봉무주(月峯無住, 1623~?)

뜯어보지 않으면, 선시는 그게 다 그거다. 뜯어보아야 비로소 그 속뜻을 알 수 있다. 선시를 읽을 때 행간을 중요시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생각과 논리로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선시의 얼굴. 분명 구면인데, 볼 때마다 새로운 얼굴이다. 생면부지의 그 얼굴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그 얼굴 속으로 빠져들어 가야 한다. 이언절려(離言絶慮), 언어를 떠나고 생각마저 끊긴 자리, 거기까지 나가야 비로소 진짜 언어가 있고 진짜 생각(진리)이 있다.

새벽 종송에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 만리무운만리천(萬里無雲萬里天)’이라는 말이 나온다. ‘천강에 물 있으니 천강에 달이요 만리에 구름 없으니 만리가 하늘이다’는 뜻이다. 그렇다. 천 개의 강에 ‘달 도장’[월인(月印)]이 찍혔으니 같은 달이지만 다 저마다 다른 달빛이요, 꽃을 보고 빙그레 웃을 염화시중(拈花示衆)의 귀는 다 따로 있다. 월봉 선사의 이 선시 역시 행간의 사람을 찾아내지 못하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언절려의 관념적인 시이다. 천강의 달처럼 내가 시 속으로 풍덩 빠졌을 때 바로 자신의 ‘달 도장’을 찍을 수 있다.

그럼, 이제 월봉 선사의 선시 속으로 우리 함께 풍덩, 빠져 들어보자. 사실 이 선시는 웬만한 내공 없이는 해독하기 여간 힘든 시다. 우리 스스로가 그 행간 속에 빠져서 행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우선 ‘국’(掬)은 두 손으로 모아 담을 수 있을 만큼의 용량을 말한다. 따라서 ‘납국’(納掬)은 한 움큼의 적은 양도 넣는다는 말이다. 누구의 손에? 바로 나의 손이다. 어디에? 바로 내 마음이다. ‘성병(盛甁)’은 물병에 담는다는 말이다. 무엇을? 바다를. 망망대해를 물병 하나에 담는다는 의미다. 어떻게 해야? 물병을 비워야(내 몸과 마음을 비워야)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가장자리 하나 보이지 않는 묘합무은(妙合無垠)의 교묘한 이음새들이다.

그 이음새들은 계속 이어진다. ‘유물’(有物, 사물이라면), ‘통범성’(通凡聖, 평범함과 성스러움을 통틀어서), ‘난명’(難名, 이름 붙이기가 어렵다), ‘몰형’(沒形, 형상도 없다). 미망의 중생들로써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영각(靈覺)의 말씀들이다. 그러나 내 자신이 스스로 주인공이 돼 그 행간의 천강 속을 계속 헤엄치다 보면 조금씩 조금씩 내 마음에 ‘달 도장’이 찍히기 시작한다.

그렇다. 우선 채우려면(담으려면) 빈구석이 있어야 한다. 어디에? 내 마음에. 그런데 물병 같은 내 마음에 바닷물을 어떻게 다 담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근데 그것이 가능하다. 마음이란 놈은 좁아지면 한없이 좁아지고 좁아져 벼룩 간보다도 더 좁아지지만, 또한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팔만사천의 수미산이 바다도 다 담을 수 있을 만큼 넓어진다. 마음의 신비고 우리가 마음을 닦고 수행정진하는 까닭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않고 직접, 곧바로, 달만 보면 언제든지 가능하다.

세상일 머리로만 따지지 않으면 된다. 바로 직지(直指)하고 들어가면, 그리고 자비희사 대원의 마음으로 모두 안고 살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깨달음이 별것인가. 사량만 하지 않고 살면 된다. ‘몰형’(沒形, 형상도 없다)만 하고 살면 된다.

지금 전국 선방에선 수좌들이 그 경지를 찾아 백척간두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 수좌들, 지금 익을대로 익고 있다. 그럼 우리는 지금 얼마나 익고 있는가? 익는 자리는 선방이라는 부뚜막이 있는 곳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자리’가 바로 우리들도 ‘몰형’으로 익을 부뚜막 자리다. 천강에 나의 ‘달 도장’을 찍을 자리다. 월봉무주 선사 자신이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자심(自心)이 곧 부처이니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지 말고 자성불(自性佛)을 염”하고 살라고. 오늘은 필자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성불과 함께 뒹굴뒹굴 놀고 싶은 날이다.

승한 스님 빠리사선원장 omubuddh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