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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 : 30. 실족하게 하거든 31.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32.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마 5 : 30.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
이 말씀은 범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보여준다. 건강한 몸보다 더 복된 것은 깨끗한 인격이다. 건강한 몸을 지녔어도 범죄하는 자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가 있어도 범죄하지 않는 자는 지옥에 던져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며 범죄치 않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의 몸은 죄를 짓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 롬 6: 13 -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의 눈은 성경을 읽는 눈이 되고, 우리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되며, 우리의 손은 선한 봉사를 하는 손이 되고, 우리의 입은 주를 찬송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입이 되고, 우리의 발은 전도와 봉사의 선한 일을 하는 발이 되어야 한다.
1]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이 구절도 죄를 범하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를 보인다. 범죄자는 지옥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 지옥은 실재한다. 주께서는 지옥의 형벌을 단언하셨다.
그러므로 장애인으로 성결하게 살 수 있다면 온전한 몸으로 죄를 범하며 사는 것보다 낫다.
눈으로 죄를 범하면 한 눈만으로 보는 자나 시각장애인이 더 낫고, 손으로 죄를 범하면 한 손이 없거나 못 쓰는 자가 더 낫다. 눈이 있고 없고, 손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고, 죄를 범하는 자냐? 죄를 범치 않는 자냐? 가 중요한 문제이다.
2]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본 절의 의미는 죄를 범치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게 한다. 건강한 몸보다 더 복된 것은 깨끗한 인격이다. 물질적, 육신적으로 모든 것을 갖추었어도 죄를 범하는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죄를 범치 않는 자는 복되며 천국 백성답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범치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 몸의 지체들이 죄를 범하는 도구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도구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 롬 6: 13 -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3] 간음하지 말라 ( 마 5: 27-30 )
어느 젊은 부부가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는 부부였다. 그런데 그만 아내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 아내는 죽기 전에 남편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 "여보, 나는 지금까지 세 남자를 사랑했다. 나는 그 세 남자 모두 내 생명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면서 사랑했다." 아내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된 남편은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아내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첫 번째로 사랑했던 남자는 내가 어릴 적에 옆집에 살던 오빠였다. 내가 두 번째로 사랑했던 남자는 대학 다닐 때 같은 과에서 공부하던 선배였다. 그리고 내가 세 번째로 사랑한 남자는 남편인 바로 당신이다. 나는 이 세 남자 모두를 지극히 사랑했고 그랬기에 내가 비록 짧은 삶을 살다가지만 누구 못지않게 행복했다."
아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아내의 말을 듣고서 서럽게 울었다. 왜냐하면 아내가 사랑했던 세 남자는 모두가 남편인 자기를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입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가정이 화목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사람에게 계명을 주셨다. 그 계명이 바로 7이다. 오늘 본문은 제 7계명에 대한 주님의 해석이다.
(1)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잘못된 해석입니다.
27절은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간음하지 말라"는 제 7계명을 잘못 해석하고 있음을 지적하셨다. 이 말씀에 무엇이 잘못되었나? 전후 문맥을 참고했을 때 그들은 마음으로 품는 죄는 상관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제 7계명을 내신 본래 의도는 마음의 간음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애써 육신으로만 국한했다. 하나님의 의도는 마음까지였다. 그래서 욥은 마음까지 지켰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지킬 수 없는 계명이 7계명이다.
당시 악한 사람들은 마음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혼 사유를 많이 만들었다. 아들을 낳지 못할 경우, 사람 앞에서 무안을 주었을 경우, 요리를 하다가 음식을 태웠을 경우, 음식을 너무 짜게 만든 경우도 이혼의 사유가 되었다. 하여튼 남자들 편의대로 이유를 붙여 이혼 증서를 써주면 그것으로 끝나버렸다. 그런 뒤에 또 다른 대상과 결혼하는 누를 반복했다. 그 당시 사회가 얼마나 문란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을 가리켜서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여"라고 탄식하셨다.
한 예로 요 4장의 수가성 여인을 들 수 있다.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즉 남자로부터 다섯 번씩이나 버림을 받았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결혼도 포기하고 남의 첩으로 얹혀살았다.
예수님의 제 7계명 해석은 그것이 아니다. 마 19장에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하셨다. 음행한 연고 외에는 아내를 버릴 수 없다. 음행하면 반드시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음행하면 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그 외에는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하면서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한 번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자 그들은 양심의 가책으로 한 사람씩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2) 간음하지 말라는 의미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마음에 품은 그 자체도 간음이라고 하셨다. 마음으로라도 품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는 가능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면 지킬 수 있다. 그러면 마음으로 범죄하지 않는다고 7계명을 다 지킨 것일까? 제 7계명의 진정한 의미는 범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아가 가정의 화목을 말씀하셨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므로 돕는 배필을 주실 때 한 사람만 주셨지 여러 명을 만들어 주시지 않았다. 한 사람만 사랑하라는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말 2: 15에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그러니까 제 7계명을 주신 것은 내 양심을 보호하고 가정을 지키시기 위해서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장기려 박사의 이야기다. 그는 1950년 12월, 625 동란 중 평양 의과대학 부속병원 2층 수술실에서 밤새워 부상당한 국군장병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때 그곳에 폭격이 있어 국군 버스를 타고서 황급히 피난 오는 바람에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자녀와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재혼을 권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다." 그러던 1990년 초 그는 미국에 있는 어느 친척을 통해서 북한에 있는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무사히 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3) 죄의 관념을 확실히 가져야 한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문자대로 하라는 말씀은 아니다. 눈을 뽑았다고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그만큼 죄를 무서워하라는 교훈이다. 두 눈을 가지고 지옥 가는 것보다 눈이 없이 살다가 천국 가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손도 발도 마찬가지다.
우리 주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기를 원하신다. 자기 욕망을 위한 법으로 이리저리 피해 가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되지 말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한 배우자만 사랑하며 예수님을 따라 몸과 마음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마 5 : 31.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
주께서는 또 이혼에 관해 음행이 이혼의 정당한 이유가 됨을 보인다.
음행의 이유 외에도, 신앙적 이유로 상대가 분리하기를 원하는 경우(고전 7: 15)나 고의적으로 배우자를 버린 경우도 불가피한 이혼의 경우라고 보이며, 또 구타나 학대 등 심히 비인간적인 고통을 당하는 경우나 전쟁으로 인해 오랫동안 분리된 경우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이혼은 극히 삼가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2: 16에서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1] 또 일렀으되
이 도입 공식문은 본 장에 나오는 다른 표현들보다 짧으며, 특히 접속사 '데'(*, 또)로 앞부분과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31, 32절은 원래 대구절의 형식을 갖고는 있지만, 앞에 나오는 짤막한 가르침이 내용을 더 진전시키고 있다.
2]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아내의 '수치스러운 일'에 관계된 이혼 법령인 신 24: 1에서 확립된 조치를 요약한 것이다. 이 말은 28절의 예수의 말씀이 겨냥하고 있는 것, 즉 여인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정확히 가지고 있었다.
* 신 24: 1 -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모세 당시의 이혼 증서는 순전히 매사에 피동적일 수밖에 없는 여인의 지위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안전 보장책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혼법은 차츰 남자의 손안에서 편리한 도구가 되었다.
남자들에게 일시적인 결혼을 허용하게 했고 때에 따라서는 단 하루만의 결혼도 허용함으로써 성적(性的)인 방종이 실제적으로 허용되는 악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여성은 남자가 버리거나 취할 수 있는 남자의 소유물로 전락했다.
이러한 시류에 대한 보완으로써 바리새인 그룹 가운데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School of Shammai)는 오직 이혼 조건이 부정(不貞)과 율법적인 위반에 국한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힐렐 학파(the Hillel school)는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어느 한쪽에서 이혼 의사가 있을 때는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 마 19: 3 -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각 파는 여자들의 인권(人權)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 같은 법조문을 만들었다. 그러나 자기네들이 내세운 법조문의 고수와 당위성 수립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샴마이 학파의 견해에 가까운 교훈을 주셨지만 실제로는 샴마이 학파보다 더 신중하게 여자들의 인격과 권위를 옹호하셨다.
마 5 : 32.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
주께서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부당한 이혼이 옳지 않듯이, 부당한 재혼, 예컨대 부당한 이혼자와의 결혼도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부당한 이혼이나 부당한 재혼을 다 인정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교회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보다 더 너그러워서는 안 될 것이다.
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예수께서는 음욕이 간음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할 뿐 아니라(27-30절) 무고한 이혼은 간음의 가능성을 낳는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이혼한 여자의 대부분이 재혼하게 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초대 교회 당시는 결혼이 여자들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방편이었다.
그러한 결혼은 이혼당한 여자의 관점에서나 그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의 관점에서 틀림없는 간음이다.
'음행한 연고 없이'란 다른 말로 '부정한 일을 저지른 확실한 사실이 없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본 조건문이 나타나지 않는다.
* 막 10: 11-12 –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 눅 16: 18 -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혹자는(McNail, De Wette, Bruce 등) 이 부분을 초대 교회 당시의 복잡한 교회내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후기 편집자의 첨가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지나친 비평적 입장이고 이 주장이 19: 8-9의 교훈과 그 맥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분명 예수의 직접적인 교훈이라 확신할 수 있다.
본 조건문을 역으로 이해하게 되면 '음행'(*, 포르네이아)을 한 자와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결혼을 파기할 수 있다는 묵시적 교훈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기독교 윤리의 한 단계 더 높은 요구를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Meyer).
예수께서는 당시 인습적으로 이혼의 권한을 거의 전적으로 가지고 있던 남편들이 보호받아 마땅한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는 큰 사랑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을 것이다(Augustine). 예수께서는 샴마이 학파의 가르침보다 초월한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셨다.
2] 아내를 버리면(*, 아폴뤼온)
'버리면'(*, 아폴뤼온)은 '가게하다', '이혼하다'의 현재 분사로 한 번 이혼한 후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고 평생 버려두는, 그리하여 그 이혼당한 여인이 스스로 재혼(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간음죄에 해당)하게 만드는 악의적인 유기(遺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3]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모이큐데나이)
이는 좀 더 육체적이고 적극적인 죄악의 면모를 나타내는 '포르네이아'(*) 보다 약한 뜻으로 어떤 법 규정을 위반했다는 일반적인 범법 행위로서의 간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로 보건대 이혼당하여 다시 재혼함으로써 간음하는 여인의 허물보다 고의로 아내를 버린 남편의 죄과가 더욱 크고 심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혼은 극히 삼가야 할 일이다. 정당한 이혼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간음했을 경우이다.
이것이 '음행한 연고 없이'라는 말씀의 뜻이다. 그 외의 어떤 이유도 성경은 인정치 않는다.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신다. 이혼은 불가능하지만, 부득이 한 경우 별거는 가능하다. 특히 믿지 않는 자가 요청할 때는 가능하다.
* 말 2: 16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 잠 21: 9 -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 고전 7: 10-11, 15 – 10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간음 외의 이혼이 부정당하듯이, 부정당한 이혼자와의 재혼 또한 부정당하다. 하나님께서는 그 둘을 다 인정치 않으신다.
세상은 이유들을 들어 이혼과 재혼을 정당화 하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을 교회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
물론 교회는 누구나 나올 수 있으나, 그런 죄인들은 회개하고 그 죄를 청산해야만 교회의 참 회원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인정치 않으시는 것을 교회가 인정할 수 없다. 교회가 하나님보다 더 너그러워서는 안 된다. 이혼은 극히 삼가야 할 일이다.
* 말 2: 16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5] 결혼과 이혼
예수께서는 누구보다도 가정과 결혼의 중요성을 아셨다. 그래서 이혼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우리에게 제시하셨다. 그는 이혼 증서만 써 주면 이혼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던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1) 결혼의 축복
①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셔서 그를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셨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 하와를 보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 23)고 증언하였다. 아담의 이 말은 인류가 처음으로 이성에게 바친 사랑의 고백이다. 이들의 사랑을 흐뭇하게 바라보신 하나님께서는 결혼식의 주례가 되셨다.
에덴동산의 수많은 동물이 하객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인류 최초의 가정이 탄생하였다. 이때는 아직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아니한 시기로 이러한 때에 결혼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결혼이 하나님의 관심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결혼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위해 제정하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지만 결혼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쉽게 결혼한 만큼 포기도 빨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혼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제도라는 사실을 깨닫고 가정을 중하게 여기며 남편과 아내로서의 의무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② 결혼은 두 사람의 연합이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성인이 되어 하나로 결합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 창 2: 24 -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남편과 아내의 육체적 결합은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공고히 하며 생산의 기쁨을 부여해 준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성'이라 할지라도 남편과 아내 이외의 모든 성관계는 간음이다. 성의 참된 의미를 잊은채 성을 쾌락의 도구로 전락시켰고, 결혼을 조건과 계약에 의한 일종의 거래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결혼의 근본적인 의미는 육체적인 것뿐 아니라 영적인 연합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연합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부부가 같은 신앙을 소유했다면 두말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그러나 남편이나 아내 중 한 사람만이 믿음을 가졌다면 그는 다른 한쪽의 영혼을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2) 이혼을 금하신 예수
① 이혼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다.
* 신 24: 2-5 –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5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후세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남자가 여자를 함부로 대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 증서만 써 주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핑계로 많은 사람이 아내를 버리고 자기의 정욕을 채웠다. 특별한 사유란 '수치되는 일'로서 아내가 자기의 정절과 신분을 포기한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경우에만 이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정욕과 쾌락과 욕심 때문에 이혼을 하였다.
② 예수님은 이혼을 금하셨다.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는 단호한 부정이다. '음행한 연고' 이외의 이혼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음행은 결혼생활의 적이다. 자신의 배우자 말고 다른 사람과의 음란한 행위는 이미 지금의 결혼생활을 포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상태의 결혼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혼은 한 인격과 인격의 전체적인 만남이며 책임이다. 이러한 약속을 저버린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한 모든 이혼의 이유를 예수님은 금하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사랑과 이해와 용서가 메마른 오늘의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결혼의 소중함과 이혼에 대한 분별력을 가져다주었다.
6] 이혼하지 말라 ( 마 5: 31-32 )
우리나라의 2016년도의 통계를 보면 아래와 같다.
총 혼인건수 및 조혼인율 추이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총혼인건수(천건) | 327.1 | 322.8 | 305.5 | 302.8 | 281.6 |
증감건수(천건) | -2.0 | -4.3 | -17.3 | -2.7 | -21.2 |
증감률(%) | -0.6 | -1.3 | -5.4 | -0.9 | -7.0 |
조혼인율(인구1천명당 건) | 6.5 | 6.4 | -6.0 | 5.9 | 5.5 |
■조혼인율의 개념 - 조혼인율이란 특정 1년간 신고한 총 혼인건수를 당해 연도의 연앙인구로 나눈 수치를 1,000분율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지표해석]
■ 혼인 건수 변화 추이 - 2016년 혼인은 28만 1천 6백 건으로 전년보다 7.0%(2만 1천 2백 건) 감소
- 조혼인율은 5.5건으로 1970년 통계 작성 이후 최저임
(갈수록 혼인을 안한다는 의미 또는 동거, 즉 사실혼 비율이 늘어나고 있음을 반증할 수도..)
[출처]대한민국 이혼율에 대해|작성자 최한겨레 변호사
(1) 이혼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이혼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 신 24: 1-2 –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여기 수치 되는 일은 음행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것을 음행이라고 해석하셨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혼 사유는 한 가지다. 남편이나 아내가 음행했다면 이혼 사유가 될 수 있다. 언약을 파기할 수 있는 조건은 음행밖에 없다. 그런데 음행했다고 해서 꼭 이혼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이란 말씀 속에 있다. 이 말씀은 비록 아내에게 수치 되는 일이 발견될지라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여 얼마든지 관용으로 그 허물을 덮어준다면 함께 살 수 있음이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못마땅하여 부득이 내보내야 할 경우는 바로 이혼 증서를 써주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여자에게 경제력이 없었다. 그래서 이혼을 당하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혼 증서를 주라는 목적은 무엇일까?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경제력도 없고 시집도 못 가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그런데 남자가 일단 아내를 내보내면 율법은 두 번 다시 그 여자를 자기 집으로 들여오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한 것은 가급적 이혼하지 말도록 막고자 하는 것이 율법의 본래 취지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혼율을 낮추어 보고자 숙려기간을 두고 있다. 그 결과 이혼율이 낮아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감정도 가라앉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말 2: 16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예수님도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깊은 뜻이 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원래의 혼인 관계는 이혼했다 할지라도 음행한 연고가 아니라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세상 법정에서는 이혼으로 기록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혼 된 것이 아니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당히 이혼하여 다른 여자와 재혼한다면 남의 여자와 동침한 것이 되고, 그렇게 이혼당한 여인과 결혼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남의 아내와 간음한 것이 되는 것이다.
(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성경을 가감하는 죄를 저질렀다. 사욕 때문이다. 요즘도 사람들이 악해서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찾고 그런 종교를 찾는다. 적당히 술도 마시고 우상 숭배도 하면서 믿을 수 있는 종교는 없나 기웃거린다. 이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음행한 연고 외에도 이러저러한 이유를 첨가하여 점차 확대해석하더니 나중에는 이것조차도 아예 빼버렸다. 그래서 그저 살기 싫으면 아내를 내버릴 수가 있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에 쓰인 이혼 증서를 보면 이혼 사유를 기록하는 난이 없다. 단지 이혼 당사자들의 이름과 두 증인의 이름을 기록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혼 증서를 받은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 결혼해도 좋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오늘날 사람들도 사랑 없다면 이혼하라. 성격이 맞지 않다면 이혼하라 등등 온갖 이혼조항을 쏟아냅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격 차이가 32%로 제일 많고, 다음이 시댁과의 관계로서 18%, 세 번째가 배우자의 외도로 17%를 차지하고 있다. 요즘 와서는 여자가 남자들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당시 유대인들의 이런 생각은 신앙이 없음을 증명해 준다. 호세아서를 보면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얼마나 음란한 여인이었습니까? 고멜은 남편과 아이들까지 내버리고 달아났다. 데려다 놓아도 또 달아나버렸다. 이런 경우 이혼해도 호세아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런 아내일지라도 용서하고 데리고 와서 살라고 말씀하셨다.
이걸 볼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가르침으로서 많은 백성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죄를 지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혼 증서를 주었으니 율법대로 산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외식적인 의를 가지고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이 천국의 시민이 될 수 있다. 이 의는 바로 덮는 의요 변화시켜 주는 의다. 예수님의 의로 용서받고 예수님의 의로 변화 받고 예수님의 공로로 아버지 보좌 앞에까지 나아가는 수준에 이른다. 깨끗하게 씻음 받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족한 영혼을 위한 카페가 되시길...
귀한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의 흠집을 용서하는 카페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