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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묵상글 (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 아닌 이와 더불어. 등 )
* 김찬선 신부님 : 아직 / 05:5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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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닌 이와 더불어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요한 1,25)
오직 빛만
비추는 것 아니니
빛 스민 이
비록 빛은 아니어도
담은 빛
홀로 가두지 않으며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건네기 때문입니다
오직 샘만
솟구치는 것 아니니
샘 깃든 이
비록 샘은 아니어도
머금은 샘
홀로 들이키지 않으며
모든 이에게 남김없이
나누기 때문입니다
오직 길만
이끄는 것 아니니
길 부른 이
비록 길은 아니어도
따르는 길
홀로 걷지 않으며
모든 이에게 두렴없이
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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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02 05:43
- 머물되 안주하지 않는
1월 2일-2023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누군지 묻는 사람들에게
서슴지 않고 답하고, 프란치스코도 이 면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결별하며 이제부터 나는 하느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자유롭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한 뒤 길을 가던 중 강도로부터
너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프란치스코도 서슴지 않고 답하였지요.
자기는 위대한 왕의 사신이라고.
아마 성인들은 다 서슴지 않고 이렇게 답할 수 있는 분들일 것입니다.
이런 성인들이 저는 오늘 부럽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저는 부럽습니다.’라고 한 것은
전에는 안 그랬는데 오늘 부럽다는 느낌이 다분히 있지요.
그러니까 전엔 저도 제가 누군지 서슴지 않고 답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해 부끄러운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옛날의 제가 지금보다 낫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지금 부끄러우면서도 부러운 것인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런데도 지금이 더 마음 편합니다.
그것은 옛날의 제가 서슴지 않았던 것은, 성인들의 서슴지 않음과 같지 않고,
어떻게 보면 섣부른 자신감이었거나 교만한 자기 정체 의식이었고
지금의 제가 오히려 겸손한 자기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어 옛날의 저는 ‘나는 프란치스칸이다.’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습니다.
망설이지 않았고,
그런 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프란치스칸 정체성에서 의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제가 프란치스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게 아닌 것은 아니지만
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 하는 면에서 부끄럽고
그래서 지금은 서슴지 않을 수 없고 망설입니다.
서슴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모호함이 없고,
꿀리는 것이 없고,
켕기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저는 저의 정체성에 대해 모호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꿀리는 게 있고, 켕기는 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금의 이런 제가 마음 편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의 편함의 한 자락은 이런 저에 안주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 자락은 겸손이 주는 편안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까치발을 하고 서 있던 제가 바닥에 편안히 앉아 있는 것과 같고,
적어도 더 이상 까치발은 하고 있지 않은 그런 편안함일 것입니다.
지금의 저의 겸손은 저의 바닥을 보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 바닥에 편안히 머무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저의 편안함은 오늘 서간의 당부대로
하느님 안에 제가 편안히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떠나 여기저기 표류하지 않고,
하느님께 단단히 정박하고 있는 배와 같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기웃거리지도 않고,
주님의 가르침과 다른 이설들에 이리저리 현혹되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서간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적’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편안함은 좋은 것이지만
편안함에의 안주는 나쁜 거지요.
그러니 하느님 안에 머문다고 하며 하느님께 나아가지 않는 안주와
특히 죄에의 안주를 경계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경각심을 갖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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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이석원 작가의 ‘나를 위한 노래’에서 세상의 행복을 어른의 행복과 아이의 행복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신나고 재미있으면 행복하지만, 어른은 고통이 없어야 행복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공감 가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린이가 더 행복한가 봅니다.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른은 고통을 피하면 행복할 텐데, 고통의 이유를 계속해서 만들기에 불행을 더 쉽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가진 것이 적고, 능력과 재주가 없는 것도 고통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가지고 있지 않은 것만을 바라보니 고통이 떠나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작은 기쁨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아이의 마음이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물면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기쁘게만 살라고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절제하는 것’ 등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는 사랑이 있음을 말합니다.
러셀 로버츠의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이라는 책에서는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소유하지 않고 절제하면서도 사랑해야 우리는 가짜 행복에서 벗어나 진짜 행복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더불어 나의 희생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면서 자기 삶이 풍성해지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서 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자기희생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는 유다인들의 기대에 맞춰서, 메시아, 엘리야, 예언자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기대를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기대를 따릅니다. 즉,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는 것을 기쁘게 따릅니다. 오실 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면서, 세상의 높은 자리보다 낮은 자리를 선택하십니다.
광야에서의 삶이 결코 고통 없는 삶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큰 고통이 동반되는 힘든 삶입니다. 그러나 고통 없는 삶에서 행복을 찾지 않는 그였습니다. 자기희생을 기꺼이 선택하면서 진짜 행복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고통 없는 삶, 세상에서 인정받는 삶에서만 행복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하느님의 기대를 따르는 사람만이 진짜 행복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진실이 신발을 신고 있는 동안, 거짓말은 지구의 반 바퀴를 돌 수 있다(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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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은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고,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나 자신을 외치는 이인가? 아니면 내 안에서 외치는 이를 드러내는 소리인가?
사실,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곧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있는 화살표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피리를 부는 이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를 담아내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는 진정 비워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은 참으로 비워진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 말입니다. 그러기에 비워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추하게 보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이들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것처럼 추한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을 보십시오! 요한은 자신의 발밑에 다른 이를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발밑에 내려갈 자격마저 없는 몸이라 고백합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운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도 요한이 받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21.22)
이 질문에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나는 어떤 이인가요?’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닌 존재로 살고 있는 이인가요?’ ‘예수님과는 어떤 결속을 맺고 살아가고 있는 이인가?’
저는 이렇게 대답해 봅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새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벗이요.’ 라고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한 1,23)
주님!
화살표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붓이 되어 당신의 말씀을 삶으로 쓰게 하소서.
피리가 되어 당신의 노래를 온몸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생명의 춤이 되고, 당신 축복의 강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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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전하는 이의 태도
가끔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을 씁니다. 경중이나 선후가 서로 바뀌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서슴지 않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메시아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엘리야인지 묻습니다. 이 질문에 역시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시 ’예언자‘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 곧 메시아가 계시는데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자신을 한껏 낮추며 곧 다가오실 예수님의 신원을 알립니다. 만약 요한이 인기에 영합하여 자신을 내세웠다면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고 있었기에 항상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도 요한의 모범은 감동을 줍니다. 겸손으로 자신을 인정하는 가운데 주님께 대한 갈망과 사랑이 커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분, 전해야 할 분은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면서도 내심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모습들을 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이니 그것으로 만족하여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오늘 기억하는 바실리오 성인은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십시오.”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않고 주님을 자랑할 수 있는 겸손함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십시오. 너무도 어렵고 힘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남보다 내가 낫다는 생각으로는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겸손함이 없는 지식은 한껏 부풀어 오른 풍선이 터지는 것과 같은 사태를 빚어내고 말 것입니다. 겸손의 그림자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 덕을 가진 이들이 이 나라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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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대림 특강 때 예수님의 탄생을, 구약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강사 신부님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이야기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 속에서 드러난다.(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Vetus in Novo patet)" 구약과 신약은 서로 독립된 책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중심으로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임을 강조합니다. 아담은 인류의 첫 번째 사람이며, 원죄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아담으로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신 분입니다. 원죄를 가져온 아담과 구원을 가져오신 예수님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이 사랑이 드러납니다. 노아의 방주는 홍수를 통해 악에서 구원받는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세례 성사는 물로 죄를 씻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성사입니다. 방주는 구원을 위한 예표이며, 세례는 그 예표가 성취된 사건임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르단강에서 세례받으셨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게 높은 자리를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겸손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았고, 그 일을 충실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성서는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극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톨스토이는 3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라고 합니다. 지나간 과거 때문에 상처받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잡은 핸들이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듯이, 사람의 몸은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누군가를 위한 삶을, 본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깊이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미워했던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면 좋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멈추면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들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영광과 찬미는 하느님께 돌리면 좋겠습니다. 수고와 노력은 나의 몫으로 알면 좋겠습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2025년에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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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지난 대림 특강 때 예수님의 탄생을, 구약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강사 신부님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이야기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 속에서 드러난다.(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Vetus in Novo patet)" 구약과 신약은 서로 독립된 책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중심으로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임을 강조합니다. 아담은 인류의 첫 번째 사람이며, 원죄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아담으로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신 분입니다. 원죄를 가져온 아담과 구원을 가져오신 예수님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이 사랑이 드러납니다. 노아의 방주는 홍수를 통해 악에서 구원받는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세례 성사는 물로 죄를 씻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성사입니다. 방주는 구원을 위한 예표이며, 세례는 그 예표가 성취된 사건임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르단강에서 세례받으셨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게 높은 자리를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겸손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았고, 그 일을 충실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성서는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극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톨스토이는 3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라고 합니다. 지나간 과거 때문에 상처받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잡은 핸들이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듯이, 사람의 몸은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누군가를 위한 삶을, 본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깊이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미워했던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면 좋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멈추면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들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영광과 찬미는 하느님께 돌리면 좋겠습니다. 수고와 노력은 나의 몫으로 알면 좋겠습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2025년에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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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사람, 참된 우정
<진리이자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진리이자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늘 머물 때 참 사람, 참된 우정이요 무지의 어둠에서 해방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진리 안에 머물러 참 사람, 참된 우정을 살았던 이라면 모두 익명의 크리스찬이라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늘 감동하는 것은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조선시대의 이이 율곡과 우계 성혼,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형제, 그리고 엊그제 12월31일 선종 2주기 기일을 맞이했던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 교황과 절친들과의 우정입니다. 세상을 떠났어도 얼마나 깊은 참된 우정의 향기를 남기는지 참 많이 깨닫고 배웁니다.
“Being a Chtistan means learning to be human again”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다시 사람이 됨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절친이자 한참 후배인 스위스의 추기경 쿠르트 코흐가 교황의 기일미사후 인터뷰 한 대목을 어제 하루 종일 마음에 담고 살았습니다. 참된 크리스찬은 참된 사람에 참된 우정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평생 하루하루 다시 “사람이 되기 위해” 다시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는 평생 공부보다 더 중요하고 힘든 공부는 없습니다. 이 대목이 들어있는 인터뷰 전문입니다.
“그분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말하는 것을 경청했던 아주 겸허한 분이었고, 아주 친절한 분이었다. 여러분이 그분의 눈을 들여다본다면, 거기에는 많은 ‘내적 빛(inner light)’이 반짝임을 볼것이다.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인간됨의 기반위에서 이뤄진다는 것은 그분께 언제나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둘은 그분께 언제나 함께 갔다.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다시 사람이 됨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가 이의 탁월한 모범이다.”
무엇이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는 말씀은 역시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인정머리 없는 놈, 싹아지 없는 놈” 소리 들을 정도의 불손하고 무례한 무지무식의 사람이라면 그 인성은 볼 것도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역시 참사람, 참된 우정의 본보기가 됩니다. 성 아타나시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더불어 동방의 4대 교부에 속하는 두분간의 우정입니다.
두 분의 출생연도는 같으나 성 대 바실리오는 49세,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60세까지 약 10년 정도 오래 사셨습니다. 성 바실리오는 “대大” 자가 붙을 정도로 동방교회에서는 최고로 숭앙받는 분이었으며 그분의 많은 업적들도 놀랍고, 강론들도 그 깊이의 해박함에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두분은 참 좋은 보완관계의 절친이었습니다. 바실리오가 아리안 이단에 대해 싸웠던 조직적이고 활동적인 분이었다면 그레고리오는 많이 관상적이고 시적인 분이었습니다. 성 그레고리오의 다음 강론을 통해 그분들의 깊고 아름다운 우정을 엿볼수 있습니다.
“아테네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나의 위대한 친구인 위대한 바실리오의 신중한 행동과 말하는데 있어서 슬기와 완숙함을 보고 그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느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서로의 친애감을 고백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 다 같인 지혜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각자가 서로에게 모든 것이 되어, 같은 지붕 아래서 살게 되고, 식탁을 함께 하며, 마음까지 함께 했습니다.
우리 둘의 눈은 한 목적에 고정되고 우리의 친애감은 더욱 깊어져 힘차게 자라났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질투심이 없었고 경쟁을 좋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 경쟁은 누가 일등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그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경쟁이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고결한 인품의 성인들인지요! 깊이 들여다보면 하느님의 지혜이자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참 사람되기와 참된 우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두분의 삶과 영성은 평생을 공부해도 끝이 없이 풍부하고 깊으리라 생각됩니다. 조선시대 우계 성혼이 절친인 이이 율곡이 작고했을 때 쓴 제문도 감동적입니다. 두분 다 우리나라 선비로서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에 배향된 동국18대명현으로 불릴정도로 존경과 신뢰를 한몸에 받았던 “진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 형과 나의 정은 형제 사이와 같고, 의리는 사우(師友;스승으로 삼을 만한 벗) 처럼 무거웠습니다. 약관부터 벗하여 이제 35년이 되었는데, 형은 몸이 건강하여 세도의 무거운 책임을 맡았고 나는 늘 병을 앓아 죽음과 이웃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형은 별세하고 나는 살아있어 나로 하여금 목놓아 울부짖어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어지는 제문도 진실하고 절절하기가 단숨에 읽히는 감동적인 명문입니다. 손암 정약전 둘째 형의 별세 소식에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의 큰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우정의 깊이를 엿볼수 있습니다. 다산의 큰형은 정약현, 셋째 형은 정약종입니다. 정약현의 사위가 순교자 황사영이고 순교성인 정하상 바오로의 아버지가 순교성인 정약종입니다.
“오호라, 어질면서도 곤궁함이 이와같을 수 있는가. 원통하여 무너지는 가슴을 호소하니 목석도 눈물을 흘리는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 외로운 처지에 손암만이 나의 지기였는데, 이제는 그분마저 잃고 말았다. 앞으로는 비록 깨달은 바가 있다 하더라도 누구에게 입을 열어보이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죽느니만 못하다. 나를 알아주던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슬프지 않으랴. 경집 240책을 새로 장정하여 책상 위에 두었는데 나는 이 저술을 불살라야 한단 말인가.”
역시 진리 안에서의 참 사람이요 참된 우정임을 절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과의 보이지 않는 깊은 신뢰와 우정을 감지합니다. 예수님 없는 요한은 상상할 없듯이 예수님 없는 우리 또한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 “당신은 누구요?”에 대답할 수 없는 요한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요한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 자기를 아는 지혜가 바로 겸손이요 이의 좋은 본보기가 요한입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인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심전심 서로를 알아보는 우정의 깊이가 놀랍습니다. 주님과 우정의 깊이와 함께 가는 이웃들과의 참된 겸손에 참된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참사람이, 참된 우정이 되기 위해 늘 진리이신 주님 안에 머물러 우정을 깊이하는 것이 필수 전제조건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진리를 깨달은 사도 요한의 권고가 참 적절하고 고맙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정의 깊이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주님의 애제자 요한이기에 그의 고백을 더욱 신뢰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니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 받음으로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머물러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함은 물론 참 사람이, 참된 우정의 사람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날마다 성령의 기름부음과도 같은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고, 참사람, 참된 우정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해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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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요한 1,19-20)
사제들이 사제 집안의 사람을 찾아오다 자, 그러면 이제 요한의 두 번째 증언을 살펴봅시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어 요한이 누구인지 묻게 합니다. 그들은 세례자와 마찬가지로 사제 가문에 속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5 참조). 두 부류의 심부름꾼이 세례자에게 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한 부류는 유대인들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보라고 보낸 ‘사제들과 레위인들’입니다.
다른 부류는 바리사이들이 보낸 이들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사람들을 보낸 이유 또한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들은 답변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자신들의 특성에 맞게 부드러움과 호기심을 보이며 묻는 것을 잘 보십시오. … 그들의 질문에는 억지나 경솔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려 깊은 종들답게 질문을 합니다 ...
이 특별한 심부름꾼들은 온 세상에서 선택된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이들입니다 ... 그들은 지극히 정중하게 요한에게 묻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게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취한 태도를 그리스도께 보인 이는 요한 자신입니다. 그는 자기 제자들을 시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하고 정중하게 물어보게 합니다.
-오리게네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선하신 하느님의 본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나에게 벗이 하나 있어서, 내가 바라는 모든 좋은 것을 그가 주었다고 합시다. 이런 이유로 내가 벗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벗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벗을 사랑할 때는 벗의 선을 위하고, 벗의 덕을 위하고, 벗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위하여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 곧 하느님이나 자신이나 어떠한 사물에게서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을 위해서만, 그분의 본성과, 그분께서 품으신 모든 것의 선을 위해서만 그분을 사량합니다.
이러한 사랑만이 제대로 된 사랑입니다.
엑카르트는 이유 없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마리의 암소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암소를 사랑하는 것은, 암소에게서 추출해 내는 우유와 치즈와 이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외적인 부유함이나 내적인 위안을 얻기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와 동일한 원리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물은 하느님을 바르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랑할 따름입니다.(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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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요일 성모님의 날✝️
4. 교황 프란치스코의 찬미받으소서 91-92항
91. 인간에 대한 온유, 연민, 배려의 마음이 없다면 자연의 다른 피조물과도 깊은 친교를 올바로 느낄 수 없습니다. 인신매매에 완전히 무관심하며,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지 않고, 맘에 들지 않는 이들을 해치려는 마음을 지니면서, 멸종 위기에 놓여 있는 생물종들의 매매와 맞서 싸우는 것은 분명히 모순입니다. 이는 환경 보호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피조물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용서하는 이들로 찬미받으소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 보호는 인간에 대한 참된 사량과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92. 또한 보편적 친교에 마음을 열면 이러한 형제애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잔혹함은 언제나 어느 모로든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여서 동물을 학대하도록 이끄는 비열함은 곧 다른사람과의 관계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 어떤 피조물에 대한 것이든 모든 학대는 “인간의 존엄성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그 어떤 측면이라도 소홀히 한다면 우리가 큰 사랑을 한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평화와 정의, 그리고 피조물 보호는 서로 철저하게 연결된 주제입니다. 이를 분리하여 개별 주제로 다루면 결국 환원주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관련됩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사랑으로 서로 엮여서 형제자매로 일치되어 멋진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으로, 우리를 형제인 태양, 자매인 달, 형제인 강, 어머니인 대지와 온유한 애정으로 하나가 되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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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그분 말씀을 실천하는 믿음의 삶을 / 성
박윤식 [big-llight] 2025-01-01 ㅣNo.178977
오늘은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미사다. 바실리오 성인은 3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 지방 카이사리아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은수 생활을 한 그는 학문과 덕행에서 뛰어났다. 370년 무렵 그곳의 주교가 되어 아리우스파에 맞서 싸웠다. 또 그의 많은 저서 가운데 ‘수도 규칙’은 동방 교회에서 오늘날까지도 참고한다.
그는 초대 교회의 큰 거인이었다. 비잔틴 제국에서 아리우스파를 몰아낸 것이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한 배경에는 성인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또한 그는 훌륭한 성직자 양성을 위해 엄격한 성직자 법규를 만들고, 과감하게 악습을 끊어버리려고 그들을 파문도 하였다. 그는 학식이 깊고 정치력도 있으며 성덕이 뛰어난 사람으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해박한 저서들과 4백여 통의 편지들은 신학과 전례 등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인은 379년경 세상을 떠났다.
그레고리오 성인 또한 330년 무렵 바실리오 성인과 같은 지역의 나지안조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료 바실리오를 따라 은수 생활을 하다가 381년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었다. 그도 바실리오 주교처럼 교리와 설교에 탁월하여 신학자로 불렸다. 후에 그는 그곳의 총대주교가 되었지만, 교구 정리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안티오키아와 이집트의 교회가 주교좌 이전에 격렬히 반대하자, 성인은 모든 논쟁의 마무리와 교회 갈등의 평화를 위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하여 그는 저술 활동과 수도 생활에 전념하고자 아리안주스로 가 생애를 그곳서 보냈다. 그는 신학자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해 정통교회를 수호하는데 큰 공적을 남긴 연설문으로, 니케아 신앙 고백을 해설하고 성령 신성 부인론자들을 반박하며 삼위일체 교리를 변호한 것이다. 성인은 390년 무렵에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예수님 시대나 그 후의 교회사에도 이단이나 율법 주위에 빠져 교리의 편법 운용이 많은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이에 당당하게 대응하시면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셨다. 특히 예루살렘에 내리는 꾸지람은 물론 그들에게 닥칠 준엄한 심판의 예고는 가히 직설적이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아예 따라 하지 마라.”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그러니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처럼 힘겨웠던 박해 시기나 신앙의 불꽃이 시들어 극단적인 염세주의와 엘리트주의로 분리될 즈음,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들은 신앙의 혜안을 가져, 차분히 교리의 정립을 수도 생활을 통해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도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믿음에서, 말씀을 몸소 실천하는 신앙의 길로 나서야만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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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대 바실리오 성인과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카파도키아의 교부로, 우정과 신앙 안에서 어려움과 즐거움을 같이한 평생지기입니다.
바실리오는 당대 최고의 교육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아테네에서 공부한 뒤 수사학 교사로 크게 성공합니다.
세상의 명성에 취하였던 그는, 누이 마크리나의 도움으로 깨우침을 얻고 회심하여 금욕적인 이상에 삶을 바칩니다.
그리고 수도승 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주교로 서임되어 사목자로 하느님과 교회에 봉사하게 됩니다.
이때 이미 생전에 ‘대 바실리오’라 불리며 사람들의 존경을 한껏 받습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의 영향을 받아 한동안 수도 생활에 자신을 바칩니다.
그러다가 나지안조의 주교였던 아버지의 권유에 못 이겨 사제품을 받습니다.
사제품을 받은 뒤 갑자기 몸을 숨겨 버린 그는 뒷날 자신의 저서 「연설」에서 당시의 심경을 밝힙니다.
“우리를 위하여 끝까지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깨닫지 못한 채, 누가 감히 사제직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와 참된 친교를 맺지 못한 채 누가 감히 사제직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레고리오는 사제나 주교로 봉사하기보다는 은수 생활로 돌아가기를 끊임없이 바라던 성인이었습니다.
힘겨웠던 박해 시기가 지나 신자들과 성직자들에게 신앙의 불꽃이 시들고, 수도승들은 극단적 엄격주의와 영적 엘리트주의로 치닫던 시절에 대 바실리오 성인은 이 모든 것 뒤에 ‘하느님 말씀에 대한 복종의 결핍’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성경 말씀이 수도자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말과 행실의 토대요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혜안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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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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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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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 20)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릇된
신앙을
바로잡는
기준점은
다름 아닌
우리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겸손입니다.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겸손하고도
힘찬 고백의
새날입니다.
우리의
세례를 믿고
정성껏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풀리지 않던
우리 마음을
풀어주십니다.
그리스도의
깊은 뜻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문제의 빠른
해결과
해답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만나는
겸손은 언제나
깊은
깨달음이 됩니다.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의
교만을 버려야
깨달음은
현실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겉모양만
보시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하시는
그리스도십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앞에
자명하게
드러납니다.
짊어진
고민들을
그리스도께
내려놓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마음은
따듯합니다.
교만하지
않기위해
겸손하기 위해
늘 그리스도께
기도드립니다.
겸손이
은총입니다.
낮추면
듣게되고
낮추면
그리스도께
속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스도의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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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위해 연기처럼 사라지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
종종 교우들을 통해 이런저런 정보를 듣게 됩니다.
기분 좋은 내용도 참 많습니다.
“새로 부임하신 주임 신부님이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판박이입니다.
자상하고 편안하며, 늘 격려하고 칭찬하십니다.
강론도 교우들 눈높이에 맞춰 정성껏 준비하시니, 성당 가는 것이 너무나 행복해졌습니다.
쥐구멍에도 해뜰 날이 있다더니, 언제나 상처투성이였던 우리 본당에도 이런 신부님이 오시다니 꿈만 같습니다.” 듣고 있는 제가 다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그런데 걱정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어디 가면 치유나 예언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분이 계신다.
한번 같이 가보시겠느냐? 많은 환자들이 치유되고 은혜를 입는다.
너무 위험한 것 같아, 조금 알아보니, 우리 교회가 가장 경계하고 우려해야 할 그런 케이스였습니다.
은밀히 홍보를 하고, 사람들을 끌어가고, 교묘히 뭔가를 요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거짓 목자, 거짓 예언자들은 마치 독버섯처럼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잘못 빠져들어 갔다가는 독버섯 먹고 즉사하듯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니, 언제나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크게 돋보이는 인물이 있었으니,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당시 그가 벌인 세례 동은 당시 범국민적인 호응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다른 거짓 예언자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시원시원 거침없었으며 쌍날칼보다 더 날카로웠습니다.
때로 그 칼끝이 부패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할 때면 사람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뒤가 구린 지도자들과는 달리 세례자 요한은 아무리 뒷조사를 해봐도 티끌 한 점 구린 구석이 없었습니다.
청렴결백했고 그로 인해 당당했으며 부패한 권력자들 앞에서 꿇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혹시나 세례자 요한이 오시기로 한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등장과 세례를 통한 전 국민적인 정화 운동에 겁을 집어 먹은 유다 최고 의회는
세례자 요한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 세례자 요한을 취조합니다.
취조 과정에서 놀랄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조사관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요?”라고 묻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데, 세례자 요한은 펄쩍 뛰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메시아가 아닐까, 의혹은 품는 것조차 송구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도 꺼내기 전에, 비교 자체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기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며 서둘러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향한 종으로서의 충실함과 충직함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을 누구요?”라는 거듭된 질문에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게 자신의 신원을 밝힙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너무나 겸손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의 위엄과 영광에 비하면 자신은 정녕 아무것도 아니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만왕의 왕,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할 때 나란 존재는 그저 허공을 맴돌다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벌써 모든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다하기 시작합니다.
무대의 진정한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좀 더 각광받고 구세사의 무대 위에 완전히 자리 잡도록
철저하게도 자신을 감춥니다.
선구자로서, 예언자로서, 종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너무나 잘 수행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거칠지만 소박하고 꾸밈없고 거짓 없는 세례자 요한의 삶 앞에 갖은 겉꾸밈으로 요란한 우리들의 모습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참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위해 연기처럼 사라지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 앞에 어떻게 해서든 한번 드러내 보이려고, 있어 보이려고 애를 쓰는 우리들의 가식적인 삶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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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19-28: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 세례자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요한은 즈카르야의 아들로 제사장직을 이을 수 있는 혈통이었음에도 그 직분과는 거리가 먼 광야에서 생활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말과 행동을 보고 혹시나 그가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묻는 말에 그는 솔직하게 “아니다.”라고 했다(20절). “엘리야요?” 하였을 때, 아니라고 대답하였다(21절). 엘리야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와서 반대자들을 처리해 주고, 물건이건 사람이건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을 가려주고, 흩어져있던 유다인들을 한데 모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인데,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21절) 물었을 때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 예언자는 신명 18,15에서 모세가 한 말에 있는 예언자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요?”(22절) 세례자 요한은 이사 40,3에 나오는 대로, 왕이 오실 때 그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다(23절). 그러면서 자기를 그렇게 보지 말고 오직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며, 이미 와 계신 분을 바라보라고 하였다(26-27절).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작고 크고 간에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과대포장을 하여 드러내려고 하지나 않는지! 우리는 백마병 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백마병이란 백마가 자기가 등에 태운 임금에게 모든 사람이 절을 하니까 자기에게 절을 하는 줄 착각하고 으스대며 거들먹거리는 것이다. 자신이 말이라는 것을 잊고 마치 임금인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왜 행복한지를 드러내는 삶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다. 우리의 삶이 주님을 드러내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하느님 자녀의 몫이다. 요한 세례자의 삶이 이러하였다. 자신의 삶을 오로지 백성들이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가르치고 주님과 만날 수 있도록 살아갔던 분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요한과 같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그분을 증언하고,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삶을 갖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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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요한은 기본기이고 그리스도는 목표다
오늘 복음인 요한 1장 19-28절은 요한 세례자가 자신을 메시아가 아니라,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겸손히 밝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자신이 길이며 기본이며, 예수님이 궁극적 목표임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기본과 목표의 관계는 우리의 신앙과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기본이 없다면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신앙에서 기본은 회개이고 목표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현대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녀 체력』의 저자인 이영미 작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그녀는 건강을 돌보지 않아 삶이 무너졌던 경험을 공유합니다.
가족과 일의 부담으로 인해 체력이 떨어지면서 어느 것도 제대로 관리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깨닫고 체력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실천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마라톤과 사이클, 수영 등 철인 삼종 경기에서 보통 남성들을 이길 정도입니다.
그녀에게 체력을 키우는 것은 기본이었고, 가족과 일에서 성공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녀는 “몸을 강화하니 마음도 따라오고, 목표가 달성 가능해졌다.”라고 말합니다.
이 교훈은 성경의 중요한 원칙과도 일치합니다. 코헬렛 3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제때가 있고,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준비의 시기가 필요합니다. 준비하는 과정이 바로 기본입니다.
요한 세례자가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삶의 기본을 다져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노아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6장 9-22절에서 노아는 홍수가 오기 전에
방주를 만들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의 임무는 막대했지만, 그는 기본에 충실했습니다.
하느님의 지시를 따라 하나하나 방주의 구조를 완성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준비 덕분에 방주는 폭풍을 견뎌내고 가족과 생명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왕이 되기 전에는 목자로서 기본을 다졌습니다.
사무엘기 상권 17장에서 골리앗과 맞설 때 다윗은 최신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어린 시절 길렀던 용기와 기술,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활용했습니다.
이러한 기본기를 통해 그는 불가능해 보였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마태오 복음 7장 24-27절의 예수님 비유에서 현명한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가 나옵니다.
현명한 건축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폭풍이 몰아쳐도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는 영적, 육체적, 정서적 모든 영역에서 기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다시 이영미 작가의 이야기를 돌아보면, 그녀는 기본을 간과했을 때 삶이 얼마나 어려워졌는지
깨달았습니다.
건강, 신앙, 관계 등에서 기본을 무시하면 불균형과 좌절을 겪게 됩니다.
세속의 지혜도 이 진리를 가르칩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노자) 또는 “한 번의 예방은 열 번의 치료보다 낫다.”
(벤저민 프랭클린)라는 말처럼, 기본적인 노력이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우리의 영적 삶에서도 이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성사를 실천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기본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거나
목표인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요한 세례자의 삶은 이러한 훈련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예언자로 존경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본적인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말이다”(요한 1,23)라고
선언하며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과거에 축구를 하면서 기본의 중요성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축구의 기본은 같은 팀과 협력하고, 공을 잃지 않고 패스하며 경기를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축구의 목표는 골을 넣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막상 경기에 들어서면 기본기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골을 넣으려는 생각만 합니다.
그러면 경기당 한두 골은 넣을 수 있습니다. 실수하려 하지 않는다면 경기가 잘 풀리지 않습니다.
기본기는 평소에 매일 다지는 것이고 실전에는 목표에 집중해서 사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라는 말을 자주 되풀이합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랑이 되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막상 사람을 만날 때는 온유하고 겸손한 훈련된 마음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아직은 멀었지만, 이렇게 사랑에 조금씩 프로가 되어 갑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이해합시다. 신앙의 기본에 충실하고 건강, 신앙, 관계의 기반을 다시 세우며 하느님의 계획을 위한 길을 준비합시다.
“기본을 알면 이미 전문가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표를 모르고 기본에만 집중하거나, 아니면 기본이 없는데 목표만 바라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을 마스터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 두신 목표를 향해 나아갑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길도 준비하며 그들을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이끄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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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구원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요한 1,19-28).”
1) 여기서 “당신은 누구요?” 라는 질문은 “당신은
무엇이오?” 라는 뜻이고, 무슨 권한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느냐고 묻는 25절의 질문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 엘리야, 그 예언자’는 모두 메시아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 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마태 17,10-13; 마르 9,11-13), 그 말씀에서 엘리야는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예언자”를 뜻하고, 여기서 유대인들이 말한 엘리야는 ‘메시아’를 뜻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유대인들이 “당신은 엘리야인가?” 라고 물었을 때 “아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예언자’는 모세가 말한 예언자인데(신명 18,15-19), 유대인들은 ‘그 예언자’를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은, “나는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예언자다.” 라는 뜻입니다.
2)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라는 말은, “나는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을 할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세주(메시아)가 아니라, 사람들을 메시아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안내자일 뿐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이 말에는, “메시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라는 말은, “너희는 모르고 있지만, 메시아는 이미 와 계신다.” 라는 뜻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는 “나보다 더 높으신 분이신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보다 훨씬 더 높으신 분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은, “나는 그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나타내는 말인데,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서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무조건 자기를 낮추기만 하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무턱대고 낮은 자리로 가서 앉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제대로 알아서 그 자리에 앉는 것이 겸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3) 세례자 요한이 한 말에는, “나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일 뿐이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해도, 구원이 완전히
확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들이 연상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3).”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5-27).”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또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이 실격자가 되는 것을, 즉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위대한 선교사도 그것을 두려워할 정도이니, 보통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도 “나는 구원받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
나는 틀림없이 구원받는다.” 라고 큰소리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교만일 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큰소리친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다 끊임없이 회개하고, 또 회개하면서, 구원받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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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19-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양심’이라는 내비게이션에 따라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식별해가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올바른 식별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만나게 되기에 참 어렵지요. 그 장애물들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먼저 ‘교만’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그분 자리를 차지하려는 교만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욕심’이 있습니다. 아합 왕은 이미 드넓은 정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봇의 포도밭 마저 빼앗으려는 탐욕에 빠져 죄를 지었지요. ‘게으름’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게으름과 안일함 때문에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지 않았다가 신랑을 마중나가지 못했고 혼인잔치에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인색’이 있습니다.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있는 라자로에게 빵 부스러기 조차 베풀지 않은 인색함 때문에 부자는 죽어 지옥에서 불타는 고통을 받아야 했지요. ‘질투’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질투에 눈이 멀어 다윗이라는 충신은 물론 왕권까지 잃었습니다. ‘음욕’이 있습니다. 다윗 왕은 성적 욕망에 휘둘려 부하 장수의 아내와 부정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부하의 목숨까지 빼앗았지요.
만약 이들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식별했다면 그런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올바른 식별을 하지 못한 것은 귀로 들은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마음에 간직한 하느님 뜻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심판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움에 고개도 들지 못할 큰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마음에 담아주신 말씀을 고스란히 마음에 담아 간직했고, 마음에 간직한 말씀들은 철저히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랬기에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자신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며 구약에서 예고한 참된 예언자도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있지 않았다면 자신을 드높이고 싶은 교만에 휘둘려 “내가 그리스도다”라는 거짓 증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에 비추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았기에, 자신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그분의 ‘소리’일 뿐이라고, 자신은 구세주로 오실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에도 합당치 않은 비천한 존재일 뿐이라고 담담하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도 세례자 요한의 그런 점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내세울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존재가 아니며, 당연히 그리스도도 아닙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굳게 믿으며 그분 뒤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일 뿐이지요. 이 점을 마음에 분명히 새기고 하느님 말씀을 내 삶의 참된 기준으로 삼으며 따라야 엉뚱한 길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성찰해봐야겠습니다. 혹시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 자신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며 따르기보다 그분을 등에 업고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지 찬찬히 돌아보며, 겸손과 순명의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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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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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행복을 준비하는 주제 파악
오늘복음에서 당시 유다 백성의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사이들이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한다. 그들의 질문에 요한은 서슴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라고 사실대로 고백하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거짓말쟁이”(1요한 2,22)가 아니었다. 계속 누구인지 묻는 그들에게 그는 “나는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한 1,23)이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1,27) 라고 한다. 어느 날 그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눈여겨보다가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1,36) 하고 말하자 그의 두 제자가 자신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갔다(1,37). 이렇게 그는 계속 사람들의 관심을 자신이 아닌 ‘예수님께로’ 돌렸다.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며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도구일 뿐임을 고백한다. 사실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이 많아 두려움을 느낀 헤로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그에게는 상당한 지지 세력이 있어 얼마든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요 길을 닦는 자임을 분명히 인식하였고, 그 인식의 바탕 위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였다. 그는 평생을 그렇게 자기 위치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철저히 살았다.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서 자신의 생명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 즉 ‘자신의 영혼의 어두운 밤’과 대면한다. 그래서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1-19) 하고 물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식으로 오신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우리에게도 언제든 이런 상황은 일어날 수 있다. 이른바 영혼의 어둔 밤을 몰고 오는 것들, 예컨대 내가 기대하는 하느님의 모습과 성령의 활동과는 다를 때, 위기와 고통의 순간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원하는 식의 응답이 없을 때, 온갖 영적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듯 느껴질 때 우리는 깊은 어둠에 빠질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마태 3,11)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하느님과 이웃을 귀한 손님이요 왕으로 모시며, 자신을 심부름꾼으로 뚜렷이 인식하였다. 그의 이런 겸손과 더욱 작아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자세야말로 우리가 걸어야 할 행복의 길이다! 에릭슨이 말하는 자아정체감은 비단 청소년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 여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광속(光速)으로 흘러가는 일상사 속에서 많은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주어진 세상의 현실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갈 수 있을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곧 기도 안에서 그분과 일치함으로써 그분이 주인이시고 자신은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과 눈으로 자신을 보지 않고서는 자기 주제파악을 할 수 없다.
하느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올바로 깨닫게 된 사람의 삶의 방향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철저히 이타적(利他的)으로 바뀐다. 무엇을 하든 자신의 뜻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하느님 안에서 의미 없는 것은 바라지도 행하지도 않게 된다. 이것이 참된 영적 성숙을 위한 기본자세요 지름길이다.
또한 인간학과 심리학 등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깊이 이해할 필요도 있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수용이 있을 때에야 자신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을 진정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의 말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원하고 사랑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삶의 어려움과 영혼의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주제파악을 하여 겸손되이 사랑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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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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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말씀에 대한 신뢰와 확신으로 사는 삶
<2025.1.2> 아침을 여는 묵상 (수 1:10~18절)
❝말씀에 대한 신뢰와 확신으로 사는 삶❞
❚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말씀에 대한 신뢰와 확신으로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해 나아가야 합니다.
✔ 말씀에 대하여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 말씀에 대한 신뢰와 확신으로 행동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0~11절).
위대한 영적 지도자였던 모세를 이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엄청난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위로하고 격려하셨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요단을 건너...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이다...’(11절)라고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합니다. ‘사흘’은 문자적인 의미라기보다 시점이 임박했음을 강조하는 관용적인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3일이 지난 시점에도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기 때문(3:2)입니다. 당장 눈앞의 현실은 암담하고, 기가 막히지만 말씀에 대한 확신과 믿음의 용기가 그로 하여금 담대한 행동으로 나타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때를 잠잠히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또한 주먹구구식이 아닌 주도면밀한 계획을 통해 그 때에 과감하게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약속의 명령을 확신하고 그 확신을 신뢰하고 행동으로 옮겼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 더 이상 머뭇머뭇 주저하지 말고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삶이어야 합니다. 지금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생각 그리고 그 계획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감사함으로 행동하길 결단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가 적극적으로 행동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개인적으로 올 한 해 교회의 실천 주제인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자”(고전 9:22)... 이 일을 이루기 위하여 멈췄던 ‘버스킹 예배’를 다시금 행동으로 옮겨 나아가는 한 해가 되도록 결단해 봅니다. 말씀에 대한 신뢰와 확신으로 행동하는 믿음의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말씀에 대한 신뢰와 확신으로 안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2~15절).
르우벤 지판,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는 이미 요단 동편의 땅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까지는 그들에게 진정한 안식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 정복 전쟁에 담대히 동참할 것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13절)는 말씀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통하여 가나안 땅의 모든 지경을 차지하여 각 지파가 기업을 얻게 될 때 갖게 되는 안식을 말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감으로 비로소 안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는 참 안식, 영원한 안식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사기에서 그들은 안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8절에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뒤에 다른 날이 있으리라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 정복이 이루어졌지만 완성된 안식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는 여전히 죄악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참된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불순종할 때 평안과 안식을 잃어버립니다. 극상품 포도를 하나님은 원하시지만 우리는 늘 들 포도만 맺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아직 안식의 날에 대한 소망이 남아 있습니다..’(히 4:9,쉬운성경)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사단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제안에 대해 동편의 지파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면 여리고 성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공동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말씀에 대한 신뢰와 확신으로 참된 안식을 누리는 삶이 되도록 함께 노력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말씀에 대한 신뢰와 확신으로 순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6~18절).
여호수아로부터 가나안 정복 전쟁에 동참할 것을 지시받은 세 지파는 기꺼이 순종할 것을 맹세합니다.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우리가 가리이다..’(16절) 내 목표는 충분히 이루었는데, 다른 사람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선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편의 세 지파는 기꺼이 자신들의 생명을 내걸고 가나안 정복 전쟁에 동참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강하고 담대하소서’(17~18절)라며 오히려 새로운 지도자로 세움을 입은 여호수아를 격려합니다.
자칫 분열 될 수도 있었던 이스라엘 공동체였지만 ‘나... 나만’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우리... 가족...’이라는 한 공동체 의식이 아름다운 동역의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지도자는 분명하고 확신에 찬 리더십을 발휘하고, 공동체는 그런 리더십에 순종할 때, 공동체는 아름답게 성장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적극적으로 행동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신뢰와 확신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리더십에게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더욱 든든하게 세워가는 일에 쓰임 받는 삶을 살아가는 2025년 한 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여호수아처럼 삶의 자리에서 용기 있는 행동과 결단력으로 영향력을 끼치도록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즉시 행하고 사람들을 말씀으로 잘 설득하며 하나님의 팔로워들로 만드는 지도력을 나타내 보일 수 있기를(수 1장 10~1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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