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편지] 서울 곰달래길에 남은 옛 사람살이의 흔적을 간직한 큰 나무
사층에서 오층쯤 되는 낮은 다세대주택 건물이 숨막힐 듯 촘촘히 들어찬 주택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조붓한 골목이 있습니다. 그 골목 중간쯤에 마련한 작은 쉼터를 찾았습니다. ‘근린공원’이라기에는 비좁아, 뭐라 부를 무엇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 옹색한 자리입니다. 몇 가지 운동기구와 편히 쉴 수 있는 긴의자 몇 개가 놓인 쉼터입니다. 가장자리에는 낮은키나무들로 울타리를 했고 그 한켠의 입구에는 ‘측백나무가 반겨주는 지정 보호수 마을마당’이라는 예쁘장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여기가 땅값이 무척 높은 서울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 정도만으로도 고맙다고 해야 할 공간입니다. 지도로 측정하니 668평방미터, 옛 단위로 이백 평이 조금 넘는 공간입니다. 그야말로 다닥다닥 붙어 이어지는 이른바 다세대주택 건물들 사이에 이 정도의 공간이라도 남아있다는 게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합니다. 오래 전부터 이 마을에 살아온 옛 사람들이 아끼며 지켜온 한 그루의 큰 나무가 있는 때문에 이 공간이 지켜진 듯합니다. 오래 된 큰 나무, 〈서울 화곡동 측백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자리를 확보하기가 더 쉽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나무가 아니라 해도 이 정도의 공간은 사람살이에 꼭 필요한 공간이겠지요.
나무는 입구의 표지판에 드러낸 것처럼 측백나무입니다. 나무 곁에는 나무를 처음 심은 사람과 그 뒷사람들의 이야기를 촘촘히 새긴 〈측백나무 식수 유래비〉가 듬직한 크기로 놓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한 그루의 측백나무가 긴 세월을 살아온 역사를 살펴보려면 이곳에 원주김씨의 집성촌이 처음 형성된 육백 년 전쯤부터 돌아보아야 합니다. 처음은 조선 세종 때입니다. 그때에 원주김씨의 김을신(金乙辛)이라는 선조가 개성(開城) 송도에서 이곳으로 보금자리를 옮겨왔다고 합니다. 당시의 고을 이름은 양천현이었지요. 그 뒤 김을신의 손자인 김팽수(金彭壽)가 늙마에 원주김씨의 시조인 원성백의 탄신일인 삼월삼일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나무가 바로 〈서울 화곡동 측백나무〉입니다. 나무는 원주김씨의 조상이 오래도록 살아온 개성에서 가져온 나무라고 합니다.
조상의 음덕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자, 더불어 이곳에 자리잡고 살아가는 자손의 영원무궁한 번창을 바라는 기원의 표시입니다. 나무를 심은 김팽수는 “성품이 후덕하고 엄격하며 행동거지가 분명”하여 사람들은 그를 ‘도덕군자’로 칭송하며 매사의 귀감으로 삼았다고 〈측백나무 식수 유래비〉에 적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김팽수가 심은 그 측백나무를 ‘도덕군자가 심은 나무’여서 ‘군자수君子樹’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후손들이 그가 심은 나무를 소중히 여기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김팽수는 나무를 심고 이를 ‘식수기植樹記’라는 제목의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이 기록은 임진왜란 때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역사와 유래를 선명하게 간직한 군자수 〈서울 화곡동 측백나무〉가 서 있는 이 골목 주변의 길을 지금은 곰달래길이라고 부르지만 얼마 전까지 ‘용암길’로 불렸습니다. 용암길의 ‘용암龍巖’은 바로 김팽수의 아호입니다. 오랫동안 용암 김팽수의 숨결이 남아있고, 그의 후손인 원주김씨 일가에서 지켜온 유서깊은 마을이라는 거죠. 곰달래길로 이름이 바뀐 건 1984년입니다. 목동에서 신월동으로 이어지는 이 길을 곰달래길이라 한 것은 예전에 이 마을 이름이 ‘곰달래말’이었고, 여기에 마을을 흐르는 개울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곰달래말의 ‘곰달’은 ‘검은달’ 즉 초승달을 뜻하는 우리말이고, 뒤의 ‘래’는 개울을 뜻하는 ‘내’가 붙은 이름입니다. 지금은 복개한 신월동 신월천新月川이 옛 우리말로는 바로 ‘곰달래’라는 겁니다.
조상의 얼이 고스란히 담긴 〈서울 화곡동 측백나무〉는 주변의 다세대주택들이 촘촘히 이어지는 한가운데에서 높이 솟아올랐습니다. 첫눈에도 그의 큰 키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게다가 나무는 이 미터쯤 되는 둔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실제 높이보다 더 높아 보입니다. 빼곡이 들어선 건물들 사이에서 햇빛을 얻기 위해 더 높이 높이 솟아오른 것인지 모릅니다. 그게 아니라 해도 햇빛이 닿지 않는 줄기 아래쪽의 낮은 가지들을 탈락시키고 위쪽의 푸른 잎을 무성히 발달시킨 때문에 훌쩍 커 보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줄기 둘레나, 줄기 아래쪽의 성긴 모습에 비해 높지거니 솟아오른 나무에 담긴 풍채가 근사합니다.
짐작건대 김팽수가 나무를 처음 심던 사백 년 전에 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마을 뒷동산 비탈진 자리였을 겁니다. 그 자리에서 수백 년을 살아오던 뒤에 사람이 모여들여 살아야 할 집을 더 많이 짓고 그 사이에 여러 갈래의 길을 내야 했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땅을 고르면서 나무가 서 있는 자리만 불쑥 솟아올랐겠지요. 하릴없이 나무를 보호하려면 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둔덕이 된 것이지 싶습니다. 사람들은 나무를 더 잘 보호하기 위해 둔덕 가장자리에 돌 축대를 쌓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쩌는 수 없이 나무 뿌리 부분에 일정한 높이로 흙을 덮어야 했을 겁니다. 대략 일 미터쯤으로 보이는 복토는 그렇게 이루어진 듯합니다.
사람의 극진한 보호로 나무의 생육 상태는 매우 좋은 편입니다. 물론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무에게도 적잖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나무 줄기 아래쪽, 이른바 ‘지제부地際部’에는 오래 전에 공동이 생겼고, 그 부분을 충전재로 메워 보호했습니다. 또 줄기의 일부가 찢어지며 지어낸 약간의 공동도 있긴 하지만, 외과수술로 정성껏 메워 지금의 생육상태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위로 솟아오르며 동북쪽으로 넓게 펼친 나뭇가지가 바로 옆의 주택 건물에 닿아있다는 건 조금 거슬려 보입니다. 주택 건물과 나무와의 사이가 당장 문제가 될 만큼 좁은 건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전반적으로 매우 건강합니다.
〈서울 화곡동 측백나무〉는 높이가 17미터 가까이 됩니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의 모든 측백나무 가운데에 높이로는 가장 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줄기둘레는 비교적 작은 편입니다. 3미터가 채 안 되는 규모입니다. 나무는 사람 키 높이 쯤에서 줄기가 둘로 갈라지고 그 두 개의 나뉜줄기들은 다시 또 둘로 갈라지며 나뭇가지를 펼쳤습니다. 하나는 이 미터쯤에서 다시 갈라졌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자리에서 갈라지며 사방으로 나뭇가지를 펼쳤습니다.
나무보다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곳 서울 한복판에서, 사람살이의 길고 긴 이야기를 오래 간직하고, 사람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남은 한 그루의 큰 측백나무와 함께 보낸 봄날의 한낮이 달콤하고도 고맙게 흘러갑니다.
고맙습니다.
- 오월 십육일 아침에 …… 솔숲에서 고규홍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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