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때는 박정인 장군이 1961년 전방 연대장을 할 때였습니다.
군사분계선을 적이 멋대로 오가며 아군과 물물교환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그가 중대장에게 “적이 넘어오는데 왜 그냥 두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중대장은 “건드리면 보복하기 때문에 그대로 둔다”고 답했고 대대장에게도 물었지만 대답은 같았습니다. 그는 고함을 버럭 질렀습니다.
“대대장의 총과 무기는 목숨을 걸고 조국의 땅을 지키라고 준 것이다. 적의 손가락이 넘어오면 손가락을 자르고, 발가락이 넘어오면 발가락을 잘라라. 그게 대한민국이 당신을 무장시킨 유일한 이유다. 우리 지역에 침투하는 적은 즉각 사살하거나 포로로 하라!”
그는 후속조치로 연대 내에 특공소대를 편성했고 인민군은 군사분계선을 또 넘었습니다.
사단 수색중대가 사격을 실시했는데, 현장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사단장의 명령이 떨어졌고, 그는 특공소대를 현장에 투입해 적 부상병 5명을 생포했습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인민군이 추가 도발을 해 왔습니다.
그는 확성기를 들고 “전차로 증강한 1개 연대가 대기하고 있으니 올 테면 오라”고 외쳤고 주춤한 적은 별다른 공격 없이 돌아갔습니다.
▲ 1973년 3월 13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북한군 총격 기사.
백골부대 사단장이었던 1973년 3월 7일 오후 1시20분, 긴급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철원 비무장지대 내에서 표지판 정기 보수작업을 마치고 귀대하던 백골부대원을 향해 북한이 기습총격을 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공격으로 황정복 대위, 김윤복 중사, 서휘수 병장 등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박 장군은 즉시 북한군에 대한 응징책을 준비시키고 현장에 가서 마이크로 적군의 사격중지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부상자와 소대병력은 여전히 위험지역에 있었고, 적의 사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박 장군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사단 포병대대를 총동원해 포를 발사했습니다.
백골 포병부대의 105mm와 155mm 곡사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고 그날 박 장군은 6·25 전쟁 휴전 이후 북한 지역에 처음으로 포격을 가한 지휘관이 됐습니다.
부상자를 구출하기 위해 백린 연막탄도 동시에 발사했고 이에 놀란 북한군은 사격을 멈추고 부랴부랴 도망하기 시작했습니다.
◆ KH- 179 155mm 곡사포
그날 밤, 박 장군은 먼저 휴전협정을 위반하고 부대원에게 총격을 가한 북한군과 김일성을 제대로 혼내주기로 작정했습니다.
사단내 모든 군차량을 동원해 헤드라이트를 켜고 DMZ 남방한계선 바로 앞까지 돌진하게 했습니다. 우리 군의 야간기습으로 오해한 김일성은 즉각 전군 비상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1975년 귀순한 인민군 유대윤 소위의 증언을 통해 그날의 공격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밝혀졌습니다.
유 소위는 “그날 백골 포병부대의 포탄 1발이 정확히 막사에 명중해 인민군 36명이 사망했다”며 “지금도 백골부대는 북한군이 가장 겁내는 부대”라고 증언했습니다.
박 장군은 회고록에서 “북한 공산당은 약한 자에게는 강하지만 강한 자에게는 더없이 약하다”며 “내가 포격을 퍼붓는 동안 그들은 단 한 발의 포도 우리 쪽에 발사하지 못한 게 그 근거”라고 했습니다.
아군이 강력하게 응징하면 북한은 꼬리를 내린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3·7 작전 한참 후인 1985년, 이산가족 평양방문단원의 일원으로 평양에 방문한 함경남도 도민회 회장에게 북한 정치보위부 고위간부가 찾아왔는데 그는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의 박가 성을 가진 요란한 사단장 요즘 뭘 하오?”라며 원한이 서린 표정으로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북측은 박 장군을 두려워하고 의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박 장군은 상부의 지시를 받지도 않고 북한군을 포격했다는 이유로 보직 해임됐고 같은 해 전역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2016년 2월 별세하셨습니다.
그의 외아들인 홍건(63) 씨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육사를 나와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고 박 장군의 손자 선욱(31) 씨도 육사 출신 현역 대위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