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은 민주공화정 수립에 버금가는 치적으로 이 나라 민주주의 정착의 토대가
되었다. 빨갱이들은 상굿도 이승만 정부의 유상몰수 유상분배는 잘못되었고 김일성의 무상몰수 무상
분배가 진정한 농지개혁이라고 게거품을 물지만, 무상몰수는 왕정과 진배없는 폭거로서 공산주의 정
권이나 저지를 수 있는 만행이다. 어떤 경로로든 소유권을 취득한 지주의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이다. 오늘날 빨갱이들의 주장과 달리 당시 야당 지도자들도 이승
만의 농지개혁을 적극 지지했다. 야당의 정신적 지주인 유진오 박사는 농지개혁을 ‘공산주의를 예방
하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극찬했으며, 김대중에 까마득히 앞선 호남의 맹주 김성수는 ‘농지개혁은 민
주주의의 출발점’이라며 이승만을 지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헌헌법에 농지개혁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헌법 제86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
배하며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도는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해놓았다. 이승만
은 조봉암을 농지개혁 적임자로 보고 초대 농림부장관에 임명했다. 조봉암은 공산주의자였다가 전향
한 좌파 지식인이었다. 이승만은 국유지와 왜정으로부터 몰수한 적산토지 외에, 과다하게 보유하고
있는 민유지를 사들여 농민들에게 장기 무이자로 유상분배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로써 5천년 역사상
한 번도 토지를 소유해본 적이 없던 농민들이 비로소 지주가 될 수 있었다. 빨갱이들이 말하는 무상
분배는 허울뿐 북한에서는 토지 소유권이 상굿도 공산당에 있고 농민들은 경작권만 가지고 있다. 김
일성이 왕과 진배없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경험한 민주주의의 핵심 이념은 사유재산 제도였다. 사유재산이란 개념은 왕정과
민주공화정을 가르는 분수령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승만은 정부 수립 직후 행정부 직제가 정해지기
도 전에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부터 발족시켰다. 최단기간 안에 농지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조치였
다. 난생처음 사유재산 제도라는 개념에 맞닥뜨린 국회의원들은 물론 행정부 관료들도 쉬 적응하지
못하고 논란만 거듭했다. 논란은 국회에서 <농지개혁법>을 제정한 1949년 6월 15일에 가서야 가라
앉기 시작했다. 물론 빨갱이들은 상굿도 시비하고 있지만. 법에 따라 농민들은 5년에 걸쳐 농산물로
땅값을 보상하는 특전을 받았다.
<농지개혁법> 및 그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공포된 뒤 농지 분배에 대한 세부규정과 요령이 공포된 것
은1950년 6월 23일이었다. 정부는 1949년 6월 <농지개혁법> 제정계획을 수립한 즉시 농촌실태조사
에 착수하여, 법률 공포 이전에 각 면사무소별로 이미 구체적인 분배계획을 수립해두고 있었다. 그러
나 6‧25전쟁으로 인해 <농지개혁법>에 따른 농지분배는 훨씬 늦어졌지만, 만약 이 정도의 법적 조치
와 준비도 없이 6‧25전쟁을 맞았더라면 이후 토지와 관련된 혼란은 자칫 국민 분열의 또 다른 원인으
로 작용했을 터였다.

김일성이 당초 계획보다 앞당겨 남침을 감행한 데는 남한에서 농지개혁이 완료되고 나면 농민들이
이승만 편으로 돌아서 남침할 경우 호응이 부진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자료가 있다. 미국은 평
양을 점령했을 때 가장 먼저 모든 행정문서를 수거하여 미국으로 이송한 뒤 보관해왔는데, 몇 년 전
우리나라의 6‧25戰史 담당 육군장교가 미국이 보관하고 있는 6‧25전쟁 관련 각종 문서를 조사하다가
남한의 농지개혁과 관련된 김일성 정권의 기밀문서를 입수하여 국내에 공개한 적이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북한의 전문가들은 남북 양측의 농지개혁 실태를 분석하고 장단점을 비교‧연구하여 김일성에
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여러 이유로 남침을 앞당겨야 한다고 스탈
린을 설득하여 승인을 받았다.
북한은 남한의 농지개혁 계획도 수립해놓았다. 그들은 6‧25전쟁 이전에 남한이 이미 농지개혁을 거의
마무리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남침 후 1주일 이내에 부산까지 점령하고 나면 가장 먼저 농
지개혁을 단행하여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남한의 농지개혁
을 실시하기 위해 1949년에 결성된 ‘토지개혁법령 준비위원회’에는 홍명희 등 21명이 선정되어 있었
다. 홍명희는 대하소설 「임꺽정」을 쓴 공산주의자로, 1948년 월북하여 북한에서 부수상 등을 역임
했다. 북한은 남한 점령 중 전체 면적의 78.5%에 해당하는 농지개혁을 달성했다고 선전했지만, 그 전
에 농지개혁은 이미 끝나 있었다.

남한의 발 빠른 농지개혁은 6‧25전쟁 때 농민들이 북한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지 않은 원인으로 작용하
기도 했지만, 전쟁 후 단위면적 당 소출을 획기적으로 증대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대규모 지주들의
소작농으로 농사를 지을 때는 최고 90%까지 지주에게 수탈당하는 분배구조였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소출을 늘리려고 노력하지 않았지만, 농지개혁으로 모든 소출을 독차지하는 구조로 바뀌자 한 톨이
라도 더 생산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생산성 증가는 농민의 자녀들에게 교
육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으며, 구매력 증대로 신생 기업이 빠르게 정착하는 선순환 구조 창출에도 크
게 기여했다. 빨갱이들은 지금도 무상몰수‧무상분배로 진행된 북한식 농지개혁의 당위성을 주장하지
만, 북한에서는 사실상 농민들에게 토지가 분배되지 않고 협동농장체제로 농업을 운영함으로써 남북
소득격차의 주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검찰의 특수부는 전 정권 적폐를 수사하는 곳으로 정부의 입김이 끝없이 상관되어 오다가 특수부가 조국을 수사하게 되자 돌연 특수부를 줄이하고 하는게 이 정권의 내로 남불 행태 입니다. 몇해전 안철수 후보자의 말처럼 문정권 임기내내 보수.진보의 양분된 당파싸움으로 이어질 것 이라 여겨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