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 오전 11시 마지막 통화 후
핸드폰을 일시중시 신청하여 배웅나온 친구에게 맡기고
비행기에 올랐다.
말레이시아의 작은 도시를 잠시 경유하여
수도 콸라룸프르에 도착하니 저녁7시를 넘기고 있었다.
항공사에서 숙소를 예약했다는데 어느 호텔인지 확인하질 못해
공항 여기저기를 수소문한 끝에 겨우 알아내어
셔틀버스를 타고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하니 식권을 네 장이나 준다.
출발시간이 내일 자정을 넘어서니까 그동안은 다 먹여주나 보다.
늦었지만 저녁식사를 간단히 한 후,
야외수영장으로 갔다.
야자수가 둘러선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달빛 아래 물살을 가르자니,
햐 ... 좋구나... 무슨 콘도 광고사진 찍는 기분이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수중발레까지 몇가지 선보이니
그동안 쌓여있던 고깃덩어리 기내식들이 모두 소화되는 듯하다.
밤에도 수영이 가능할 정도이니 내일 낮기온이 기대가 된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시내로 나가니 적도 가까운 곳이지만
돌아다닐만한 더위다.
하긴 사람이 사는 곳이니까.
콸라룸프르의 관광포인트는 시내 여기저기에 자리잡고 있는
회교사원과 자연공원들.
하루종일 돌아다니다 숙소로 돌아와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자정 가까이 출국심사대를 거쳐 게이트로 오니
인종 구성이 달라져 있다.
그동안 익숙했던 가무잡잡한 얼굴대신 흰색과 검은색 만이 가득하다.
새벽 1시 말레이시아를 출발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를 거쳐
아프리카 최남단 케이프타운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리니
바로 땅이다.
야, 아프리카 땅 한번 밟아보고 가는구나.
사자라도 한 마리 보였으면 좋으련만
휑한 공항풍경은 어디나 다 똑같다.
그나마 공항면세점에서 아프리카를 구경하다 비행기에 오르니
이젠 흰 얼굴들만 보인다.
드디어 부에노스 아이레스 도착 ... !
조금 걱정했던 입국심사대를 간단히 통과하고
다음은 세관.
한국 사람들 보면 한건 한다는
여기 세관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는지라 제일 값나가는 물건,
캠코더를 꺼내서 촬영하는 양 일부러 들이미니 집어넣으라더니
몇번 흘깃거린 후 통과!
최소 $50은 예상하라던데
똑똑한 세관은 가난한 여행자를 알아볼 줄도 아는구나.
짐을 들고 나가려니 이번엔 흰 가운 입은 방역관이 부른다.
혹시 음식을 가져오지 않았냐며
가방을 열고 이것저것 꺼내려고 하길래
아예 내가 나서서 비닐 봉지들을 왕창 꺼내줄려니까
그냥 집어 넣고 가랜다.
의기양양하게 바깥으로 나오니
늘어선 사람들 중에 바로 눈에 띄는 한국남자 둘.
'맞죠?'
하는 눈빛교환 후 다가가서 인사를 나누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차를 타고 40여분 후 도착한 숙소는
넓은 공원 앞에 있다.
옛날 영화에 나오는 엘리베이터의 수동문을 여닫으며 7층D호,
앞으로 석달 동안 묵을 숙소에 들어섰다.
잠깐 설명.
서울에서 메일을 주고받으며 숙소를 제공해주마던 분은
부에노스에서 400km 떨어진 로사리오에 계시는 세사르 님이며
부에노스에 살고있는 안셀모 님의 집을 주선해 주셨다.
그래서 안셀모 님과 차가 있는 그의 친구 마르꼬스 님이 마중나온 것.
집안을 둘러보고 씻고 짐을 정리할 즈음,
마르꼬스 왈
"출출한데 라면 없나?"
서울서부터 꿈꿔오던 라면으로부터의 해방이
무참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하기사.
한국사람 있는 곳에 라면이 없을소냐.
부에노스의 첫끼를 시작으로 라면은
그후에도 계속 중요한 양식이 되었다.
서울에서처럼 지긋지긋한 끼니때우기용이 아니라,
아끼고아껴서 이틀에 하나씩 소중히 먹어야했던...
(참고로 라면 한 봉지는 $1로 피자 한 조각과 같은 값.)
라면을 배불리 먹고 늘어져 있다 밤이 으슥해지자,
이대로 있을 순 없지.
첫날을 장식할 뭔가를 위해 차를 몰고 나 도착한 곳은
부에노스에서 가장 크다는 한국식당으로 과연 넓다.
결혼식 피로연이 막 끝난 후라
테이블에는 접시가 가득하고 종업원들이 치우느라 정신이 없다.
그 와중에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뭐 좀 가져와"
라는 마르꼬스의 큰 소리.
알고보니 이 식당주인과 절친한 친구사이다.
일단 맥주와 간단한 안주거리가 나오고 자정이 되어
식당 문을 닫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불고기와 포도주.
아르헨티나 포도주는 프랑스 다음가는 수준으로,
끌라우디오 님에 의하면 물갈이에는 최고란다.
주거니 받거니,
3시까지 다섯 병을 비우고 일어서려니
반 병이 남았다며 결국 집으로 향했다.
술마시고 어떻게 운전하냐는 나에게
여기서는 맨정신으로 운전 안한다며 가뿐하게 운전대를 잡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