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에 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바로 사마천의 <사기>다. BC 194년 전의 기록으로 알려진 사마천의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위만이 연나라에서 들어올 때 를 기록하였는데 "상투머리를 하고 남쪽오랑캐 옷을 입었다.(魋結蠻夷服)"라는 기록이 있다.
상투는 우리 동이족의 상징적인 머리 형태로 알려져 있으나 많은 종족에서 상투 머리를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의 한족을 비롯한 소수민족과 일본, 아메리칸 인디안, 인도서북부 암리차르에 황금사원 본부를 두고 있는 시크교도, 그리고 홍산문화 흑피옥, 유럽을 호령했던 훈족 즉, 흉노에서도 등장한다.
수메르의 쇄기문자에서도 ‘머리를 세운다’는 문구가 있다고 하니 상투를 틀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진시황의 무덤이라던 병마용갱의 토용들이 모두 상투를 틀고 있는 모습은 우리 민족 즉, 동이족의 상징인 것이다.
조상들은 상투를 단순히 머리를 장식하는 풍습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원초적인 신앙인 칠성신앙의 사상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본래 상투는 상두上斗라고 하였다. 두斗는 북두칠성을 나타내는 한자다. 상투를 틀 때 앞으로 4번 뒤로 3번 꼬아서 트는데, 이것을 두고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이기 때문에 칠성신을 머리에 받들고 다닌다는 의미도 된다. 즉, 칠성신의 정기를 받겠다는 뜻이다. 우리 민족은 생명은 삼신에게 받지만 수명은 칠성신이 정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죽으면 다시 칠성판에 일곱마디로 묶여 북두칠성으로 돌아간다는 천손사상이 담겨 있다. 또한 상투는 머리기둥으로 삼신의 가르침인 천부의 소리를 듣기 위한 안테나 역할도 한다고 생각된다.
<부도지>에 오미의 변으로 오금이 사라져 천부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자 귀엣고리를 만들어 천부를 소리를 듣기를 원했던 것처럼, 상투를 틀어 천부의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조상들의 몸부림은 아닐까 한다.
그리고 <부도지> 기록을 보면 마고성에서 살 때 소巢를 세우는 풍습이 있었다. 이 소巢는 피라미드와 지구라트의 기원이다. 피라미드와 지구라트는 천부의 소리를 듣기 위하여 하늘로 가까이 가기위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듯이 상투도 역시 천부의 소리를 듣기를 간절히 원했던 조상들이 머리에 피라미드를 쌓은 것이 아닐까 한다.
상투는 반드시 장가를 간 어른들만 하는 머리 형태다. 그러나 단순히 장가를 든 어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연유로 구한말 단발령이 내렸을 때 목숨걸고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상투의 백과사전 기록]
머리카락을 모두 올려 빗어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맨 머리 모양.
혼인한 남자의 전통적인 머리모양이다. 한자어로는 ‘추계(推髻)’ 또는 ‘수계(竪髻)’라고 한다.
중국의 『사기(史記)』에 위만(衛滿)이 조선에 들어올 때 ‘추결(魋結)’을 하고 왔다는 기록과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한조(韓條)에 ‘괴두노계(魁頭露紒)’, 즉 관모를 쓰지 않는 날상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상투의 역사가 매우 오램을 알 수 있으며, 그 확실한 모습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다. 벽화에 나타나는 상투의 모양은 커다랗고 둥근 것, 작고 둥근 것, 쌍상투[雙髻]가 있는데, 큰 상투는 관모를 쓰지 않은 장사도(壯士圖)나 역사상(力士像)에 많고, 작은 상투는 관모를 쓰는 귀인층에서 볼 수 있다.
신라에 있어서도 경주 금령총(金鈴塚) 출토의 도기로 만들어진 기마인물에 상투가 잘 나타나고 있다. 백제에서는 아직 뚜렷한 자료가 발견되고 있지는 않지만, 삼국 공통의 풍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는 『고려도경』에 “왕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冠)·건(巾)·복두(幞頭)를 썼다”는 기록과 ‘속발(束髮)’의 기록이 보인다.
이들 관모는 모두 상투 위에 쓰기에 적합한 모양이며, 속발도 상투를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278년(충렬왕 4) 왕의 명에 의하여 모든 관료층에서는 정수리부분의 머리카락만 남기고 뒤통수에서 묶어 길게 땋아 내린 몽고식 개체변발을 하였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까지 그에 따랐다고는 볼 수 없다.
공민왕의 복구적인 중흥정책 이후에는 다시 상투를 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초상화나 풍속화를 통하여 계층을 막론하고 상투 튼 모습을 볼 수 있다.
상투를 틀 때는 ‘백호친다’고 하여 정수리부분의 머리를 깎아내고 나머지 머리만을 빗어 올려 틀게 된다. 이는 많은 머리가 정수리에 모이게 되면 열의 발산이 어려워 견디기 힘들게 되므로, 열을 발산시키기 위한 것이다.
상투는 하나만 트는 것이 보통이지만, 머리숱이 많은 사람은 쌍상투를 하기도 하였다. 전통사회에서는 혼인한 사람과 혼인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엄격한 차별을 두어, 어린아이라도 장가들면 상투를 틀고 성인 대접을 받았고, 나이가 많아도 혼인하지 않은 자에게는 하댓말을 썼다.
집이 가난하거나 신체적 조건의 결함 등으로 나이가 많아도 혼인하지 못한 사람은 늘 남으로부터 하댓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를 면하기 위하여 이미 혼인한 것처럼 보이려고 상투를 틀었는데, 이처럼 혼인 절차를 밟지 않고 상투를 트는 것을 건상투라고 하였다. 건상투를 틀었다고 하여도 사정을 잘 아는 한 동네 사람은 여전히 하댓말로 대하였다.
그러나 다른 동네 사람이나 외지 사람은 이미 혼인한 사람으로 대우하고 하댓말로 대응하지 않았다. 상투 꼭지의 정상에는 장식을 위하여 금·은·동 등으로 만든 동곳을 꽂았고, 머리카락이 얼굴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마 둘레에 망건(網巾)을 썼다.
망건 앞이마 부분에는 갓을 고정시키기 위한 풍잠(風簪)을 달고, 그 위에 여러 가지 관모를 썼다. 상민(常民)의 경우는 망건 대신 수건을 동이기도 하였다.
1895년 을미개혁 때에 내린 단발령(斷髮令)에 의하여 상투머리는 금지되고, 대신 중머리· 하이칼라머리가 나왔으나, 지금도 일부 사람들의 상투 틀고 갓 쓴 모습을 볼 수 있다.
첫댓글 어떤 역사강의에서 들었어요..상투를 하는 이유는 하늘의 기운을 받기 위해서라고..
모자의 나라가 된 이유는 머리마다 신과 소통하는 안테나를 가지고 있어 덮개가 필요했건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