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 호그의 발라드
원제 : The Ballad of Cable Hogue
1970년 미국영화
TV 방영제 : 사막의 유랑자
감독 : 샘 페킨파
음악 : 제리 골드스미스
출연 : 제이슨 로바츠, 스텔라 스티븐스, 데이빗 워너
스트로더 마틴, 슬림 피켄스, L Q 존스
'폭력의 미학'으로 유명한 샘 페킨파 감독은 1970년대를 맞이하면서 본인의 장기인 폭력을 잠시 접고 '안폭력 영화' 두 편을 슬쩍 만들었는데 그 작품들이 바로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70)'와 '주니어 보너(72)' 입니다. 1961년 '죽음의 동반자' 로 데뷔한 이래 그는 1970년까지 계속 서부극만 연출한 감독입니다. 특히 4번째 연출작인 '와일드 번치'를 통해서 그는 폭력미학의 진수를 선보였습니다. 그의 폭력영화 행진은 이후 '스트로 독(71)' '겟어웨이(72)' '가르시아(74)' '17인의 프로페셔널(철십자 훈장, 77)'로 이어지면서 폭력도 예술적 영상으로 격상시킬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가 현대물인 '스트로 독'을 연출하기 직전 발표한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는 꽤 상징적인 영화입니다. 사라져가는 서부에 대한 쓸쓸하고 소박한 시편 같은 느낌을 준 영화인데 실제로 70년대 부터 서부극의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39년 '역마차' 이후로 인기가 부쩍 오른 서부극은 존 웨인, 게리 쿠퍼, 제임스 스튜어트, 리처드 위드마크, 랜돌프 스콧, 헨리 폰다 등의 배우들을 통해서 스튜디오 전성기 시절에 인기를 모은 장르였습니다. 아메리칸 웨스턴이라 불린 그 장르는 60년대 이탈리아에서 출몰한 '마카로니 웨스턴'에 의해서 낭만적 시대가 아닌 추악하고 더러운 무대로 설정되었습니다. 미국에서도 수정주의 서부극이라고 불리우는 영화들을 통해서 기존의 존 웨인 류의 영웅적 인물보다 인디언 학살이나 탐욕적 인간 등을 내세운 작품들이 등장했지요. 서부는 더 이상 낭만이나 영웅들의 무대가 아니었습니다.
샘 페킨파 감독은 애초에 기존 아메리칸 정통 웨스턴과는 다르게 출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서부영화에 대한 사랑을 보인 인물로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는 그가 진정 표현하고 싶던 서부의 모습, 낭만이나 영웅담이 아닌 '소박한 자연인'으로서의 서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인디언 학살과 기병대, 보안관, 무법자 대신에 사막과 자연을 벗삼아 자연친화적 낭만을 보여주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탐욕과 욕망 대신 투박함과 소박함을 가진 자연인의 모습, 그는 이렇게 소박한 서부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데뷔작부터 이어온 서부극 전문 연출과는 작별을 고하고 현대물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의 내용 자체가 그런 사라져가는 구서부의 낭만에 아듀를 고하는 상징적 내용입니다.
일종의 미국판 '나는 자연인이다' 입니다. 사막에서 가지고 있던 물과 말조차 빼앗기고 생사조차 불투명한 빈털털이가 된 케이블 호그(제이슨 로바츠), 그는 며칠을 헤매이다 극적으로 물을 발견합니다. 물을 발견한 곳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역마차가 지나는 노선 근처였고, 그는 역마차를 타고 떠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냥 그 사막에 눌러앉기로 하고 그곳을 지나던 자칭 목사인 조슈아(데이빗 워너)에게 물값으로 받은 동전으로 그 물이 있는 사막땅 2 에이커(약 2천5백평 정도 될겁니다.)를 국가로부터 정식 구입합니다. 그는 그 얼마 안되는 땅에 직접 집을 짓고, 야외공간을 케이블 호그의 간이 레스토랑으로 운영합니다. 사막을 지나는 역마차가 잠시 쉬어가면서 물도 마시고 식사도 하는 곳이지요. 덩그러이 아무것도 없던 이 사막에 이렇게 간이 휴게소가 생긴 것입니다.
사막에서 토끼, 뱀 등을 잡고 닭을 기르며 살아가는 자연인의 모습이 그려지는 영화인데 그 와중에 낭만적 사랑도 펼쳐집니다. 케이블 호그가 마을에 갔을때 만난 아름다운 매춘부 힐디(스텔라 스티븐스)와의 인연, 힐디는 동네에서 쫓겨나게 되자 케이블 호그를 찾아와 잠시 머물려고 합니다. 유일하게 자신을 숙녀로 대해준 케이블이었기에. 2-3일 머물려고 했지만 몇 주 머물게 되면서 그 친자연적 낭만을 만끽하게 되고 케이블 역시 힐디가 해준 요리도 먹고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힐디는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고 케이블과 어느덧 절친같은 관계가 된 조슈아 역시 떠나면서 케이블은 혼자 이 간이 휴게소를 조용히 운영합니다.
자연에서 살다가 자연에서 행복하게 죽어간 남자, 케이블 호그는 20세기를 시작하는 지점에서 서부의 자연친화적 환경을 지키며 살아간 인물입니다. 이 케이블 호그의 캐릭터는 말과 마차 대신 자동차가 등장하고 도시화되는 20세기에 사라져가는 과거 서부의 퇴장을 상징하는 역할입니다. 아울러 샘 페킨파 감독이 매달렸던 서부영화만을 연출하던 패턴과도 이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샘 페킨파 감독은 매우 절묘하게 이 케이블 호그 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여러가지 상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요. 영화의 후반부에 직접 자동차가 등장하고 행복하게 웃으면서 세상에서 퇴장한 케이블 호그의 모습, 약간은 코믹한듯 한 내용이지만 케이블 호그가 퇴장하는 부분은 숙연한 감동과 여운이 흐릅니다. 난데없이 영화에 자동차가 등장한 것은 케이블 호그의 역마차를 위한 간이 휴게소를 닫게 되는 것을 상징하며, 그건 케이블 호그의 퇴장을 통한 서부시대의 동반 퇴장을 의미합니다. 이걸 자동차와 연관시키며 처리하고 있습니다. 절묘한 상징적 설정이지요. 사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종의 운명 같은 엔딩이지요.
샘 페킨파 감독은 1972년 로데오 경기를 소재로 한 '주니어 보너'를 발표했는데 저는 이 영화와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 두 편을 일종의 연작처럼 느꺄집니다. 두 영화 모두 사라져가는 서부의 낭만에 대한 여운을 투박함과 소박함으로 담아낸 작품이고 두 영화속 주인공은 모두 현대인의 실리 보다는 외골수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소박한 서부남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막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케이블 호그, 때 지난 로데오 경기에 집착하는 주니어 보너, 아마도 이 두 편의 영화가 진짜로 샘 페킨파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며 흥행에 신경쓰지 않고 만들고 싶었던 영화가 아닐끼 싶습니다. 그는 박진감있는 폭력 영화로 이름을 높였고, '와일드 번치' 이후 슬슬 서부극 외에도 현대물들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상업성을 위한 폭력과 액션 대신 이렇게 친자연적인 남자의 정취가 깊이있게 드리워진 두 편의 영화에서 진짜 연출의 깊이와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두 편 모두 상업성이 높지 않고 액션 영화도 아니었기 때문에 흥행결과는 형편없었고, 더구나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는 톱 스타가 출연하지도 않았지요. 그럼에도 가장 드라마 연출의 완성도가 높았던 작품이 이 두 작품이었습니다. 샘 페킨파가 폭력 액션에만 능한게 아니라 이렇게 걸죽하고 깊이있는 휴먼드라마의 연출이 진짜 실력이다 라는 것을 보여준 두 편이었지요.
자연속의 투박함과 소박함, 삶과 죽음, 잠깐이었지만 낭만적인 사랑, 케이블 호그라는 괴짜 인간의 '나는 자연인이다'로서의 3년여 간의 삶을 보여준 작품으로 코미디로 볼 수도 있고, 슬픈 비극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서부시대의 종말, 서부영화의 몰락 등을 케이블 호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상징하고 있습니다. 보내야 할 것은 미련없이 보내고 새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인다 뭐 그런 의미처럼.
많은 영화가 개봉되었지만 샘 페킨파의 연출적 깊이가 정말 잘 발휘된 이 비폭력 두 편, '주니어 보너'와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는 모두 우리나라에 개봉되지 않았습니다. TV에서 '주니어 보너'는 '로데로 맨'으로,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는 '사막의 유랑자' 라는 제목으로 각각 방영되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두 편을 놓친다면 샘 페킨파의 진짜배기 진국을 빼먹은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이름난 히트작들도 제법 있는 샘 페킨파의 이력에서 이 두 편이 '연출가'로서 가장 진가를 보여준 진솔한 작품이었습니다. 미국판 '나는 자연인이다' 라는 것을 보여준 영화입니다.
평점 : ★★★☆ (4개 만점)
ps1 : 케이블 호그의 연인으로 등장한 스텔라 스티븐스는 딘 마틴 주연의 007 아류 오락물 '사일렌서'에서 우리나라 관객에게 이름을 알린 배우입니다.
ps2 :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나는 자연인이다' 버전의 미국영화는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제레미아 존슨' 이 있지요. 하지만 그 영화는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 만큼 순수하진 않았습니다. 흉폭한 인디언에게 복수하는 내용이었으니까요. 그 영화도 샘 페킨파가 연출할 뻔도 했다고 합니다.
ps3 : 샘 페킨파가 이 영화를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ps4 : 찰톤 헤스톤과 제임스 스튜어트가 거절해서 제이슨 로바츠에게 배역이 돌아갔는데 너무 어울리게 잘 연기했습니다. 찰톤 헤스톤이 이 영화와 분위기가 좀 비슷한 '윌 페니'라는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평소와는 좀 다른 역할이었지만 굉장한 수작이었습니다. 샘 페킨파의 다른 영화에는 비교적 꽤 유명한 배우들이 많이 출연했는데 제이슨 로바츠만 상업성이 덜 높은 배우였습니다. 하지만 너무 적역이었습니다.
ps5 : 사막에서 인간은 살 수 없는데 도마뱀, 토끼, 뱀 등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ps6 : 샘 페킨파는 이후에도 '관계의 종말' 이라는 서부극을 만들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다음 작품이 '스트로 독'으로 현대물이었고 폭력성이 정말 짙었지요.
[출처]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The Ballad of Cable Hogue, 70년) 미국판 자연인|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