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태어나, 세상에 이런 해는 또 없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런 느낌을 가질 것이다.
산악회를 시작한 지 16년이 됐지만 이런 송년 산행도 없었다. 회장님이 일찍이 송년 산행에 10명 이상이 참가하지 않게 제한을 두자고 했다. 뭐 그럴 필요 있겠느냐, 자연스럽게 한 자리수가 될 것 같다고 난 말했다. 실제로 그리 됐다.
19일 오전 7시 30분 조금 넘어 집을 나섰는데 4호선 성신여대 입구역에 내리니 8시 10분도 안 됐다.아무 생각 없이 맨 뒤쪽 출구로 나왔더니 공지한 버스 정류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좌회전을 준비하는 162번 버스가 눈에 띈다. 아차, 버스가 좌회전한 뒤 정류장에 멈춰서겠구나 싶었다. 6번 출구였다. 서둘러 카페에 공지했더니 호랭이는 4호선 동대문운동장역에서 환승하지 못해 되돌아온다고 했다. 메가 커피를 홀짝이는데 산바람 형이 나타난다. 형수가 유부초밥에 곰탕 끓여주더라고 했다. 난 곰탕만 들이키고 나왔는데 부러웠다.
희망과용기 형은 늦는다고 했다. 뜬구름 총무와 아톰 형은 따로 또 같이 정신을 실행에 옮겨 산 능선에서 만나기로 했다. 회장님이 거의 제 시간에 버스에 탄 채로 정릉탐방센터가 있는 종점으로 향했다. 약속시간에 7분 늦게 호랭이가 나타나 셋이 함께 버스에 올라 종점에서 회장님 만나 9시 조금 넘어 산행을 시작했다.
지도를 보며 상의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형제봉~성북동~구포 국수 루트는 접기로 했다. 형제봉 바위가 미끄러울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보국문 올라 대성문으로 이동한 뒤 대남문과 문수사 거쳐 구기동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그런데 산행 초입에 계곡이 갈라지는데 오른쪽 보국문 오르는 길과 왼쪽 대성문으로 곧장 오르는 길이 나오는 것이었다. 이거 뭐지? 싶었다. 하지만 이내 송년 산행이니 무리하지 말고 가급적 간편하게 오르내리자는 데 다시 한번 의견이 모아졌다. 해서 희망과용기, 아톰 형과 통화해 루트를 바꿨다고 얘기했다.
중간쯤은 가야 희망과용기 형이 따라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형이 얼마나 서둘렀는지 앞의 갈림길 지나 얼마 안돼 만날 수 있었다. 늦어서 얼마나 잰 걸음을 옮겼을까 짐작됐다. 이제 다섯이 됐다. 그제야 마음이 놓으니 풍경이 제대로 들어온다. 하늘이 더할 나위 없이 맑다. 간밤에 강풍이 불었는지 대기가 말갛다. 간간이 눈이 보이지만 미끄럽지는 않다. 좋다.
조금 더 오르니 형제봉 능선이 지척인 일선사다. 영취사 근처에 이르니 오른쪽 칼바위와 뒤 돌아 뽈데(롯데타워)가 시야에 들어온다. 늘 산행 30분쯤만 되면 산바람 형은 환복한다. 덩달아 한숨 돌리며 쉬엄쉬엄 오르니 11시 못 돼 대성문에 이르렀다. 아톰 형은 대동문 돌아오느라 조금 늦어진다고 했다. 나 혼자 마중을 나갔다. 사실은 대성문에서 보국문 향하는 산비탈에 올라서면 멀리 도봉산까지 장쾌한 조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산비탈 아래 집 두 채(정체를 여즉 파악하지 못했다)를 조망할 수 있는 재미도 덤이다.
아톰 형 만나 여섯이 됐다. 대성문을 떠나며 뜬구름에게 전화했더니 막 대남문을 출발할 참이라고 해 그냥 거기 있으라고 했다. 300m다. 눈이 제법 있지만 살짝만 미끄러운 내리막을 거쳐 오르막을 내처 걸으니 대성문이다. 이제야 완전체 일곱이 됐다.
12시를 20분 정도 남긴 상태에서 문수사의 훌륭한 쉼터에 들어갔다. 두 남자가 점심을 먹을 참이었고, 한 어르신이 난로에 나무를 던지며 따스이 계시라고 한다. 고맙다. 그런데 일행이 떠든다고 두 남자가 화를 내듯이 내뱉는다. 착하기만 한 우리 일행은 군소리가 없다. 근데 생각할수록 두 남자가 괘씸하다. 밉다. 밥을 뜨는 뒤에서 머리를 쥐어박아버리고 싶다. 산예절이란 관점에서도 상대가 아무리 잘못했더라도 그렇게 정색을 하고 말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보아하니, 본인도 그렇게 말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밥 뜨는 동작이 매끄럽지 못하다. 그러게, 왜 그랬어 인간들아.
희망과용기 형이 주는 레몬차 마시고 아톰 형이 건넨 보온병의 뜨거운 물로 몸을 덥힌 뒤 그대로 나왔다. 아톰 형은 “우리 아직 컵라면도 먹어야 하는데” 어쩌구 하는데 나왔다. 같은 하늘을 그 사내들과 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문수사 위 삼성각 오르는 계단에 서 보현봉과 문수봉 능선을 감상했다. 물론 앞에는 평창동 언저리가 눈에 들어온다. 좋다. 10분쯤 볕바라기를 하니 일행이 나와 하산을 시작했다. 회장님의 발이 불편하단다.
난 플로깅을 위해 전날 집게를 4000원씩 둘 구입해 가져왔다. 하지만 웬일인지 하산길에 쓰레기가 보이지 않는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 깨끗하게 치우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일까? 아니면 눈에 덮여 그러는 것일까 궁금했다. 12시 40분쯤 산행을 마치고 오랜만에 머루 산장 들어 도토리묵에 굴전, 콩국수(겨울에도 이 집은 한다)를 먹고 경복궁역 체부동 골목에서 2차를 했다. 중간에 마포나루 형 합류해 여덟이 됐다. 오후 4시에 희망과용기 형은 며느리 될 분과 약속 있다며 자리를 떴고 난 재미도 없는 이야기 한다는 뜬구름의 비아냥에 기분 상한 듯 짐을 챙겨 떠났다.
1차부터 돌아가며 일년 산행 소감을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이 뭐라 했는지 기억도 안 나고 내가 한 얘기만 기억난다. “올 한해 코로나 확진자 한 명 없이, 다친 사람 없이 그래도 꼬박꼬박 산행을 갔다. 그러면 다 아니겠는가?”
총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듯이 우리의 2020년 산행은 큰 산 대신 근교의 산 위주로 꾸려졌다. 물론 제주나 창원 같은 원거리 산행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렇다.
2021년 산행 계획을 조금만 생각한다면 광주 무등산과 장성 축령산을 1월이나 2월 눈 많을 때 갔으면 하는 생각, 6월에 설악산, 가을에 지리산을 가고 중간에 돼지엄마 있는 충청남도 산, 가상이가 있는 양양이나 강릉 한번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코로나 기사를 주목하는 편인데 내년 가을까지는 코로나 확산세가 꺾이지 않을 것이다. 해서 겨울이나 내년 봄쯤 중국 황산을 다녀오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2020년 회원 여러분이 있어 어지럽고 고단한 한 해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모두 감사하고 격려하며 한 해를 마무리했으면 싶고, 별로 희망을 걸 것 없는 2021년이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새해를 맞이했으면 한다. 아자!
첫댓글 오랜 시간을 지나 20 송년 산행의 멋진 마무리까지 대장님의 의연함이 가득합니다
대성문 쪽으로 가다가 처음 만난 절은 영취사. 일선사는 형제능선과 합류하자마자 왼편에 있는 절. 뽈데가 보이기 시작한 절은 일선사가 아닌 영취사.
수정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알대장이 예민해진 듯. 이제 좀 넉넉한 마음으로 살자. 쥐어박고 싶은 마음 품은들 뭐하나. 쥐어박지도 않을 거면서. 쥐어박으면 골치 아픈 일이 빚어질 수 있지. 그러니 쥐어박고 싶은 마음 자체를 버리는 게 속편하지. 말은 이리 하지만 나도 그게 쉽지 않다. 그런데 난 두 사내가 하는 얘기를 못 들었다. 그래서 알대장이 삐친 것처럼 일찍 점심 장소에서 자리를 뜬 까닭을 알지 못했다. 알았다면 나도 신경이 곤두섰을 것이다. 귀가 어두우니 좋은 점도 있다. 알 대장! 올 한 해도 수고 많았는데 산행기로 마지막 마무리까지 하느라 애썼다. 앞으로도 10년만 더 수고해다오.
산행기 첵오입니다. 읽고 또 읽고 닳아 없을 질 지경입니다.너무 재미있습니다. 역시 책임진 이의 무게를 느껴 알겠습니다. 지난 창원산행을 기획하면서 일정을 짜기가 얼마나 힘든지, 우리 대장님의 역할에 감복하였습니다. 그간 수고하셨어요!!
<경자년 회장님 유머펀치1>
경자년 송년 산행일 아침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 회장님, 아침 일어나자 마자 택시 잡아타고 한성대로 갑시다!
오늘의 출발지가 한성대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고서 한성대 도착하고서 요금을 물으니 5,200원이라 했다.
아직 10분 남았다.
요금을 계산하고서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했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이상하다. 왜 아무도 안보이지.
마침 그때 카톡방이 딩동 울린다.
알대장의 성신여대 6번출구로 오라는 멘트다.
아, 그렇구나, 성신여대구나. 왜 한성대로 알았지, 해서 부리나케 162번 버스를 타고 162번 종점으로 향합니다. 그곳서 그리운 동지들을 만나 산행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산길 구기계곡 끝날 어느 지점에서 드뎌 일이 터졌네요. 회장님, 아침일을 쭉 얘기하시고요.
요금이 5,200원 나왔다면서, 남은 돈을 기사분에게 기부하셨다네요.
세상에, 기사분에게 고생했다고 남은 돈을 기부하기 쉽지 않은데 말이지요. 회장님의 천성이 절절이 묻어나네요.
순간 기부라는 말이 떨어지자 마자 희망과용기형 아닌 평소 은인자중의 대명사 산바람(만석)
형이 한마디 하네요.(2편으로)
그 5,000원이란 말을 산바람이 했기에 내가얼척없다는 표정으로 지적질한 것.
<경자년 회장님 유머펀치2>
5,000원 내셨어요?
어 이게 무슨 말?
회장님 일그러지며 뭐 5,000원?
희망과용기형, 뭔 말이여?
그러나 저러나, 어쟀거나 요쨌거나,
순간 다들 배꼽을 잡아 빼네요.
뒤집어지고 넘어지고 자빠지네요.
5,000원의 파급은 엄청 컸습니다!
아, 이를 어째?
이를 우짠디야,
회장님의 인품이 날아가는 순간이고요.
다들 머리를 엄청 굴리기 시작합니다.
정말 5,000원을 내었을까
그럴 수도 있지
회장님이 200원 없는데요, 하면
기사가 그냥 5,000원만 주세요,
할 수는 있지,
5,000원 내고서 기부라고 했을 회장님,
설마 그랬을까,
아니죠, 그랬을수도 있지요, 요즘 회장님의 배포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대동강 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 생각나고요,
그런 상상으로 한참을 자빠지고 넘어지고 다들 빠진 배꼽 도로 집어 넣고 있는데,
회장님 일갈하셔요.
야, 내가 아무리 그래도 5,000원 내고 기부했다고 하겠냐, 10,000원 냈다. 이것들아
어휴,
정말로 5,000원내고 기부했다면?
만석형 말대로 그랬다면 뭐 어떤가요,
회장님 유머가 대단하신 거이고,
수완이 대단하신 겁니다 ㅎㅎ
회장님! 신축년에도 화이팅입니다.
알 대장, 산행기 재미지네~~
한해 동안 애쓰셨고, 내년엔 더 재밌게 즐기세나^^
알 대장. 수고했다. 산행기도 쓰면서 마감도 잘했고...내 나름의 소회는 좀 있다 쓸게.
호랭이야. 당근 1만 원 냈지. 설마 5000원 냈겠냐. 근데 집에서 택시 타고 성신여대 간다는 게 한성대를 갔지. 다행히 버스가 거기 있어서 실수를 자각하고 162번을 탈 수 있었지. 새해에는 진짜 치매에 조심해야 할 듯...ㅎㅎ
함께 들은 말도 이렇게 달리 기억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네요. 한성대입구에서 성신여대입구까지라면 택시비가 5천원 넘게 나올 턱이 없고, 회장님이 "이미 162번 타고 가고 있다"는 카톡 메시지를 남겼을 리도 없었을 텐데요. 호랭이의 무딘 기억력과 추리력을 탓하려는 게 아니라 저도 제 기억을 성급하게 믿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재삼 해봅니다.
난 왜 162번을 타고 오시지 궁금해 했음. 허나 묻지 않았음. 나도 벌써 가끔 그러니까.
항상 수고 많아요^^
개콘 보다 조금 더 재밌는 신행기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