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침실로
이상화
-가장 아름답고 오랜 것은 오직 꿈속에만 있어라 : 내말 -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둔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전으로,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眞珠)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 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 –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촛불을 봐라.
양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窒息)이 되어, 얄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느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소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매 몸에 피란 피 – 가슴의 샘이, 말라버린 득,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 내 침실이 부활(復活)의 동굴(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백조』 3호, 1923.9)
♣어휘풀이
-목거지 : ‘모꼬지’의 방언, 놀이나 잦치 또는 그 밖의 일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일.
-수밀도 : 껍질이 얇고 살과 물이 많으며 밧이 단 복숭아
-더우잡고 : 더위잡고, ‘더우잡다’는 높은 데 오르려고 무엇을 끌어 잡다.
-그리매 : ‘그림자’의 방언
-궁구는 : ‘뒹구는’의 방언
♣작품해설
이상화의 초기 시 세계를 대표하는 이 시는 『백조』 동인들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18세에 창작했다고 알려진 이 작품에는 식민지 치하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사춘기 소년의 낭만적 정열로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한 젊은이로서 순수하고 자유로우며 아름다운 삶의 세계를 추구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고통스러운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역설적으로 죽음의 세계를 동경하고 예찬하는 것으로 굴절되고 만다.
이 작품은 ‘마돈나’, ‘침실’, ‘수밀도의 네 가슴’, ‘나의 아씨여’ 등의 감각적 시어들로 말미암아 간단히 남녀간의 정욕을 노래한 애정시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적 자아가 ‘마돈나’와 함께 가고 싶어 하는 ‘침실’은 육체적, 쾌락적, 본능적인 일반적 의미의 침실이아니라, 영원한 안식과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는 재생의 장소를 상징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 시는 남녀간의 애정을 소재로 하여 관능적, 감상적, 낭만적 표현 방법에 의해 아름답고 영원한 꿈과 같은 안식처(安息處)를 갈수하는 내용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1연부터 마지막 12연까지 시적 화자는 연속적으로 ‘마돈나’를 부름으로써 급박한 상황을 부여한다. 시적 화자는 ‘구석지고 어두운 마음의 거리에서’ 밝음이 오기 전에 ‘마돈나’가 오기를 간절히 애원하고 호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침실’의 상징 의미는 무엇일까? ‘침실’의 의미 체계를 해명할 수 있는 열쇠는 부제(副題)로 되어 있는 ‘가장 아름답고 오랜 것은 오직 꿈속에만 있어라’라는 에피그람(epigram:가절한 경구(警句)나 짧은 풍자 시구)에 있다. 이상화는 아름답고 오랜 것은 꿈속에서만 존재할 뿐 아니라 꿈 그 자체로,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믿고 있다.
물론 ‘꿈’은 ‘밤’을 시간적 배경으로 ‘침실’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잠’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낮 시간의 활동을 ‘삶’이라 한다면, 밤 시간의 잠은 일종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잠’은 영원한 죽음이 아닌, 아침의 ‘부활’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므로 밤은 ‘부활의 시간’이요, ‘침실’은 ‘부활의 동굴’이 되며 잠[꿈]은 곧 ‘부활’ 그 자체가 된다. 그러므로 침실의 의미는 밀실(密室), 현실의 도피처, 안식처, 조국의 광복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 될 수 있지만, 뉘우침과 두려움의 결단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꿈과 부활의 동굴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작품 전편에서 침실은 ‘지난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핌실로, 다시 ‘뉘우침과 두러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침실과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아름답고 오랜 나라’로 다양하게 변주(變奏)되면서 정신적 안식과 활력을 주는 재생의 장소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또한 ‘마돈나’는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일 수도 있고, 시적 화자가 사랑하는 어느 젊은 여인의 애칭일 수도 있으나, 이들의 공통된 상징 의미는 ‘구원의 영성’으로 표상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6연까지의 전반부에서 강하게 나타나던 관능적 어조는 후반부에 이르러 어느 정도 완화될 뿐 아니라, ‘침실’의 상징 의미도 ‘부활의 동굴’로 가시화 되어 관능적 쾌락의 측면도 희석된다. 번민과 집착, 고뇌로 가득한 것이 지상의 낮 세계라면, 그 일체의 번민과 집착, 고뇌를 감싸 주는 것은 비실제적인 밤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11연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구는 목숨의 꿈’이 동이랗다고 하는 것이다. 시적 화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상을 벗어난 환상의 세계, 바로 꿈의 세계이다. 그 꿈이 ‘잠 속에서 꾸는 것[밤이 주는 꿈]’이건, ‘관념 속에서 일어나는 이상[우리가 얽는 꿈]’이건, 아니면 ‘죽음[사람이 안고 궁구는 목숨의 꿈]’이건 간에 참된 의미에서의 부활은 오직 꿈속에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침실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그의 침실은 마돈나를 불러 사랑의 완성을 위해 꿈을 꾸는 장소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안고 궁구는 목숨의 꿈’, 바로 죽음의 꿈이다. 왜냐하면 그의 꿈이 실현되는 공간은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침실이며,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라는 표현처럼, 두렵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가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은 매우 정교하고 치밀한 구성 형태를 갖추고 있다. 마돈나를 기다리고 갈망하는 사랑의 애절함과 안타까움이 유기적인 형태 구조를 이루어 효과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첫째 단락인 1~3연의 기다림은 ‘달려오너라’, ‘몸만 오너라’, ‘기다리노라’라는 애원과 간청이 시간의 경과와 기다림의 지속적인 심리변화와 상징체계를 이루면서 시적 정서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둘째 단락인 4~6연에서는 ‘지난 밤이 새도록’,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와 같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초조함과, ‘짧은 심지를 더우잡’는 동작과, 그리고 ‘얄푸른 연기로 꺼지려는’것과 같은 절망에서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라는 극적인 갈등을 보여 준다. 셋째 단락인 7~9연은 앞의 두 단락의 시간 진행과 시적 화자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기다림’이라는 소극적인 자세를 넘어 육체적인 결합을 환청과 환상으로 체험하면서 ‘내 몸에 피란 피- 가슴 샘이 말라버린 듯 마음과 목이 타려는’ 화자의 고뇌가 잘 나타나 있다.
마지막 단락인 10~12연에서는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라며 마냥 기다리는 자세에서부터 ‘자자’라는 적극적인 행위로 전환되는 시간의 연속성을 통해 ‘기다림’에 대한 절실함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기)1단락-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3연 2행]와 같이 기·승·전·결 형대에 적절하게 배치된 돈호법의 활용은 이 작품의 구조적인 면에서 뼈대 구실을 한다. 이렇게 의문형 → 서술형 → 의문형 → 서술형의 형식으로 연계시킨 것은 바로 ‘마돈나’에 대해 미약한 존재인 ‘나’의 사랑의 호소로 그것은 결단의 의지가 아닌, ‘듣느냐’ · ‘오느냐’와 같은 간곡한 하소연으로서의 정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환상적이고 애절한 사랑 체험은 형태적인 구조의 안정감을 뒷받침으로 하여 더욱 애절하고 심도 있는 사라으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작가소개]
이상화(李相和), 상화(尙火, 想華), 무뉘, 무성(無星), 백아(白啞)
1901년 대구 출생
1915년 중앙학교 입학
1919년 3.1운동 때 대구에서 거사하려다 실패
1922년 문학 동인지 『백조』 동인
1925년 KAPF에 참여
1927년 의열단 이종암(李鐘岩) 사건으로 구금
1935년 중국으로 건너감
1936년 귀국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1943년 사망
시집 : 『상화와 고월』(1951), 『늪의 우화』(1969), 『나의침실로』(1977), 『석인상』(1984),
이상화시집(1985),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86)
첫댓글
너를 부른다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쉬임없이 무한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