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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 우리는 다만 님께서 오로지. 등 )
김찬선 신부님 : 아직 / 05:23 추가
조명언 신부님 : 아직 / 06:4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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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다만 님께서 오로지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31)
우리는 다만
밝힐 뿐입니다
빛께서 오로지
비추시게 하려고
우리는 다만
걸을 뿐입니다
길께서 오로지
이끄시게 하려고
우리는 다만
외칠 뿐입니다
말씀께서 오로지
말씀하시게 하려고
우리는 다만
믿을 뿐입니다
믿음께서 오로지
보듬으시게 하려고
우리는 다만
희망할 뿐입니다
희망께서 오로지
여시게 하려고
우리는 다만
사랑할 뿐입니다
사랑께서 오로지
북돋우시게 하려고
우리는 다만
살릴 뿐입니다
생명께서 오로지
가득하시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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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03 05:11
- 성령을 영접한 겸손이어야
1월 3일-2020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세례자 요한이 두 번이나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부분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였다는 말은 알고 난 뒤에 하는 얘기이고,
제대로 알고 난 뒤에나 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알기 전에는 오히려 안다고 생각하고,
알지 못하면서도 알지 못하였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의 앎이란 것이 보통 이렇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는데
알지 못하는 자신을 알지 못해 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세례자 요한처럼 알지 못하였다고,
자기의 모름을 겸손하게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하며,
마찬가지 이유로 알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교만을 부끄러워해야겠지요.
왜냐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더 배우려고 할 것이고,
알지 못함을 겸손히 인정할 때 우리는 알려달라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우리의 모범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너희 가운데 너희가 모르는 분이 계신다고 했는데
오늘 복음에서 너희만 모르는 것이 아니고 나도 몰랐었다고 하며
하느님께서 알려 주셔서 알게 되었다고 겸손하게 인정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뵙는 것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의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눈은 보이는 것밖에 볼 수 없기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보여주시지 않으며 볼 수 없는 법인데
감사하게도 볼 수 있는 분으로 오셔서 뵙게 되었지요.
그렇지만 볼 수 있는 분으로 오셨어도 그분을 알아 뵙지 못했음은
사도들의 경우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가까이서 뵙고 그 많은 기적을 봤음에도 예수님을
사람이 되신 하느님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데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눈이 있어도 보여주시지 않으면 볼 수 없고,
보여주셔도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거지요.
그렇다면 어떤 눈이 볼 수 있는 눈입니까?
앞서 봤듯이 겸손의 눈은 보기 위해 기본입니다.
그러나 겸손도 영적인 겸손이어야 합니다.
그저 교만하지 않은 것만으로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비롯하여 있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것이 겸손이지만
하느님을 비롯하여 영적인 것들은 영이 아니면 볼 수 없고,
그러므로 성령을 영접한 겸손이어야만 하느님을 볼 수 있고,
성령이 머무시는 예수를 볼 수 있음을 오늘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요한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뵐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자기 소유의 것들이 다 없어지고 ,
자기 능력이라고 하던 것들도 다 무용지물이 되고, 마침내
철저히 자기마저 무화되어 자신이 성령의 궁전이 되기에
합당한 겸손이 되었을 때 성령도 임하시고 주님도 알아뵙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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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1.03 05:39
작년에 새영세자 첫 고해성사가 생각납니다. 세례받은 뒤 한 달이 지났을 때, 보통 첫 고백을 합니다. 열 분 넘는 분을 1시간에 걸쳐 고해소에서 만났습니다. 수녀님께서 잘 준비시켰는지 자기 죄를 성실하게 고백하셨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신 분들도 의무감에 억지로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이런 고백에는 당연히 어떤 감동도 없고 그냥 무미건조한 대화로 성사에 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새영세자들은 달랐습니다. 긴장이 묻어나는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해성사를 모두 마치고 수녀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께서 고해성사를 잘 주셨나 봐요?”
“왜요?”
“고해소에서 나오는 분들이 다들 눈물을 훔치면서 나와서요.”
수녀님의 이 말씀이 오랫동안 제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고해소에서 특별한 훈화를 한 것도 아니고, 신앙적으로 꾸짖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성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물에, 저는 성사 잘 주는 신부가 되었습니다. 고해성사 잘 주는 신부는 고해성사를 잘 준비한 신자가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해성사의 은총이 사제인 저에게도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연결됩니다. 나의 진심이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곧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게 연결됨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진심이 주님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이 좋으신 분임을, 사랑 그 자체인 분임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진심을 담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거짓된 삶, 가식적인 삶, 위선의 삶을 통해 주님과도 연결되지 못하고, 나의 이웃들과도 연결되지 못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철저하게 주님과 연결된 삶을 사셨습니다. 진심을 담아 주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삶으로 주님과 우리의 연결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하는 그의 힘찬 목소리가 지금 이 자리에도 울려 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렇지 못한 우리 자신을 반성합니다.
진심을 담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삶이 아닌, 진심을 담아 주님과 연결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과 주님이 연결될 수 있도록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라. 그들이 걸어온 길은 고난과 자기희생의 길이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위대해질 수 있는 법이다(G.E. 레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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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이 세례자 요한의 신원과 사명에 대한 말씀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한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말해줍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예수님의 언어인 아람어로 ‘양’(탈리야)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곧 ‘유월절의 어린 양’과 ‘주님의 종인 어린 양’입니다.
<첫째>로, ‘어린 양’(하말), ‘새끼 양’, ‘아기’(아들)을 의미하는데, ‘지고 가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곧 나무, 과일 또는 임신한 여인이 아이를 ‘지고 간다.’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시 ‘양’은 물건을 실어 나르는 동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어린 양’이란 ‘속죄양’으로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해방절 양’을 상징합니다(탈출 12,1-13).
<둘째>로, ‘어린 양’이란 ‘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라고 하듯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는 ‘종인 메시아’를 상징합니다(이사야 53장).
그러니 ‘어린 양’이란 표징에는 인류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고 있으며, 동시에 세상의 죄를 없애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 ‘메시아’로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체험한 환시를 통해, 보고 들은 바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3)
성령께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신 것은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그에게 돌아와 새 시대를 알렸듯이, 이제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시작되는 ‘새 시대’를 알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어린 양의 흰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분께서 성령을 통하여 입히신 옷입니다. 속죄양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깨끗이 빨아 입히신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어린 양’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은 대속으로 자신을 내어놓기에 억울함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향이 있는 ‘봉헌’의 삶이요, ‘향하여’ 바치는 삶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내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피어나고 있고, 그분을 향하여 바치고 있는 봉헌된 삶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되새겨 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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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주님, 그리스도, 메시아,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어린양 등등 다양하게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가 저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어느 이름도 예수님의 모든 의미를 다 포함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29)하며 예수님을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상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질 희생양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를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종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서 뽑아 세운 종이며 하느님의 영을 받고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줄 종이며…그는 부러진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성실하게 공정을 세우도록 선택된 사람이며...민족들의 빛이 될 자입니다(이사42장). 그러나 그는 고난을 받을 주님의 종입니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입 한 번 열지도 않고 참으며 온갖 굴욕을 받을 종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깍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 양처럼...백성의 악행 때문에 억울한 재판을 받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질 주님의 종입니다(이사53장).
이렇게 ‘하느님의 어린양’은 고통을 받다가 죽임을 당하는 억울한 모습과, 세상에 새 활력을 일으킬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은 뭇사람들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세상에 있는 악의 세력을 꺾고 승리자로 오신 것입니다. 묵시록 7장17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또한 머리 일곱에 뿔이 열 개 달린 짐승은 “어린양과 전투를 벌이지만, 어린양이 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임금들의 임금이시다.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충실한 이들도 그분과 함께 승리할 것이다”(묵시17,14).
따라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증언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희망과 기쁨이 될 것이며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신경을 건드리는 빌미가 될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우리가 미사 때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하고 선언하는 것은, 곧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요,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좀 더 진중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우리는 온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나으리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외아들을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어린양,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1,29)
주님!
죄를 탓하기보다 스스로 짊어질 줄을 알게 하소서.
허물을 뒤집어쓰고 하늘을 여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기꺼이 바치는 삶이기에, 그 어떤 억울함도 원망도 없게 하소서.
위하여 내어놓는 삶이기에,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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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유발 하라리의 신작 ‘넥서스’를 읽고 있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파에톤의 신화와 마법사의 빗자루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파에톤은 자신의 욕망으로 태양을 끄는 마차를 움직이겠다고 합니다. 태양을 끄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고, 성실해야 합니다. 파에톤은 성실하지 않았습니다. 정해진 규칙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태양이 지나치게 지구에 가까우면 화재가 발생했고, 지나치게 지구와 멀어지면 지독한 추위가 생겼습니다. 결국 제우스는 파에톤을 끌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태양을 끄는 마차는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괴테는 마법사의 빗자루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빗자루 마법을 하는 스승이 제자에게 항아리에 물을 담아 놓으라고 명령하고, 여행을 떠납니다. 제자는 꾀를 내서 빗자루에 마법을 걸었습니다. 빗자루는 강에서 물을 길어서 항아리에 옮겨 담았습니다. 마법을 걸 수는 있지만 푸는 방법을 몰랐던 제자는 겁이 났습니다. 빗자루가 계속 물을 길어오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이 빗자루를 둘로 잘랐습니다. 그런데 둘로 잘려진 빗자루는 더 많은 물을 길러왔습니다. 동네가 물바다가 될 즈음에 스승이 돌아왔습니다. 스승은 마법을 풀어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한민국의 현실이 떠올랐습니다. 파에톤은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며 태양 마차를 몰았지만, 그 결과는 세계적 파괴였습니다. 이는 리더가 자기의 능력과 권한의 한계를 인지하지 못할 때 어떤 위험이 초래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지도자가 권력의 도구(마차)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음을 드러냅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위기를 명분으로 과도한 권력을 행사할 때, 이는 국민과 사회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아직도 비상계엄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에는 매우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겁니다. 마법사의 빗자루는 힘을 제어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혼란과 재앙을 상징합니다. 비상계엄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남용될 때, 경우 헌정 질서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이미 45년 전에 경험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삼청 교육대는 인간의 권리와 인간의 품위를 짓밟은 사건이었고, 그 이면에는 비상계엄이 있었습니다. 제우스가 파에톤의 직무를 정지하였듯이, 대한민국의 국회는 탄핵을 통해서 윤석열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켰습니다.
파에톤은 자신의 자격과 책임에 대한 숙고 없이 태양 마차를 몰겠다는 자만으로 인해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이는 권력을 책임 없이 사용하는 태도의 위험성을 상징합니다. 반대로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철저히 인식하고 겸손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역할을 제한했습니다. 마법사의 빗자루는 통제되지 않은 욕망과 무분별한 힘 사용의 상징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인정하며,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한다."라는 고백으로 힘과 영향력을 욕망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비상계엄은 지도자의 권력 사용에 있어 신중함과 책임을 요구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이를 무분별하게 실행한다면, 이는 파에톤처럼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권위를 오직 하느님의 뜻에 두었고, 자신의 역할을 넘어서지 않았습니다. 이는 지도자가 자신에게 맡겨진 권한을 책임감 있게 사용해야 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지나친 욕망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가진 걸 기쁜 마음으로 나누었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한 몸을 이루어 성장하듯이, 초대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여유가 있는 공동체는 어려운 공동체를 기쁜 마음으로 도왔습니다. 굶주린 형제에게는 먹을 걸 나누어 주었습니다. 옷이 없는 형제에게는 입을 옷을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사회복지는 초대교회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공동체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된다면 분열과 갈등은 사라질 겁니다. 지금 교회에 당면한 문제가 있다면, 지금 교회가 익숙함에 젖어있다면, 지금 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늙어가고 있다면 초대교회가 성장했던 이유를 다시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교회가 가고 있는 방향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인지 알고 싶다면 역시 초대교회의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과연 나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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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요한이 말합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는 것 말입니다. 이런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이미 우리에게 다가오셨는데 우리 눈이 가려져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라고 말입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첫 관문입니다. 동시에 새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이전의 모든 어둠을 벗어던지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로 태어나는 것을 우리는 세례라고 말합니다.
세례 후 우리는 신앙의 길을 걷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아름다운 풍경과 산들바람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만나기도 하지만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 즉 비바람과 추위와 어둠을 만나기도 합니다.
기쁨이 가득 차 있을 때는 다른 도움 없이도 이 신앙의 길을 가볍게 걷겠지만 비바람과 추위와 어둠이 몰아치면 길을 잃고 그 걸음 또한 더디게 됩니다.
세례는 이런 어둠 속을 걸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중한 선물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세례, 즉 성령으로 주시는 세례는 바로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그리스도의 선물이 성령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선물을 품고 있습니다. 평시에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둠에 있을 때 고난 속에 있을 때 이 선물은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되어줄 것입니다.
⭐ 순두부찌개
오랜만에 순두부찌개를 먹었습니다.
두부로 만든 음식을 다 좋아하는 저입니다만
유독 순두부찌개는 거리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처음 만든 음식이 순두부찌개였기 때문입니다.
군대 말년 군종병으로 불려 갔습니다.
군종 신부님을 위해 첫 음식 ‘순두부찌개’를 했는데
혹평에 혹평을 들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석 달 군종병 역할을 하고 다시 자대로 돌아와 군대 생활을 마쳤습니다.
순두부찌개~ 어쩌면 지금의 저를 있게 만든 실패작일지도 모릅니다.
혹평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마음은 아프겠지만 그 혹평은 그대를 발전시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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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고 존엄한 품위의 삶”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계명을 큰 낙으로 삼는 이!”(시편112,1)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정파를 초월하여 존경받는 참 자랑스런 세계적 정치 지도자가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대통령입니다. 다시 배우는 마음으로 ‘김대중 육성 회고록’을 구입했습니다.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 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지녀야 합니다. 둘 중 하나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분의 말씀에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분 삶은 1.학습, 2.고난, 3.아내, 4.기도, 5.꽃과 동물, 다섯 요소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맨먼저 “학습”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배움에 충실했던 분이었습니다. 평생 배움의 학인으로 사셨던 분입니다. 평생 주님의 전사이자 주님의 학인으로 사셨던 분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진정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다시 사람이 되기를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은 수도자의 자질일 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필수적 자질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선물이요, 세례 받았다 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과제 수행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수십년전 신학교 시절 지금은 고인이 된 문세화 교수 신부님의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 '인간답게' 너무 추상적이다. '자녀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구체적이다. 예수님이, 성인들이 자녀답게의 삶의 모범이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위해 평생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산”은 제 좌우명 시입니다. 불암산 배경의 수도원을 볼 때 마다 저절로 되뇌이는 제 소망을 반영한 기도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
하느님과 우리간의 상호관계를 상징하는 시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날로 깊어지기를 소망하며 쓴 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요한1,12). 참 좋은 선물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서간도 하느님의 자녀됨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고 존엄한 품위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주님의 평생학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도 우리의 시선을 평생 보고 배워야 할 하느님의 어린양 예수님께 집중시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말씀에 근거하는 영성체전 고백후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이어지는 요한의 고백도 고무적입니다.
“저분은 내 뒤에 한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바로 이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답게”의 삶의 영원한 모델이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이요, 믿음의 눈이 활짝 열려 예수님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 본 세례자 요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난히 '본다'라는 동사가 많이 나옵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들을뿐 아니라 주님을 잘 볼 수 있도록 늘 열린 눈을 지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요한의 시공을 초월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거듭된 당부가 큰 울림을 줍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원을 확인시키며 더욱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우리를 고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닮아 그분처럼 됨으로 참내가 되는 것, 바로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세례 받았다 하여 저절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완성은 주님의 은총과 더불어 우리의 끊임없는, 한결같은 수행의 노력을 전제로 합니다. 요한의 결론 말씀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순결입니다. 죄가 없어 순결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할수록 순결한 삶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자, “사랑의 여정”, “순결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아 참나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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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그리스도는 어린양이신 동시에 숫양이시다
그리스도는 숫양으로 표현되시기도 하고, 어린양으로, 송아지로, 염소로 표현되시기도 합니다. 이 모든 짐승이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숫양으로 표현되시는 것은 그분께서 양 떼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숫양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을 해치지 말고 희생 제물을 바치라는 명을 들었을 때 덤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사악은 그리스도였으며 숫양도 그리스도였습니다. 이사악은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장작을 지고 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숫양은 이사악을 대신하였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사악 안에도, 숫양 안에도 계셨습니다. 숫양은 가시덤불에 뿔이 걸렸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때 주님의 머리에 무엇을 씌웠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분은 어린양이십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아우구스티누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이런 식의 삶과 사랑과 일을 버릴 때만, 우리는 우리의 영이 만든 소용돌이의 심연에서 나올 수 있고, 하느님을 나타나게 할 수 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위하여 여러분 자신에게서 벗어난다면, 하느님도 여러분을 위하여 스스로에게서 벗어날 것이다. 이 두 존재가 빠져 나오면, 단일한 하나만이 남을 것이다. 이 “단일한 하나”야말로 우리와 하느님이 함께 낳는 사랑이다. 그리고 성령이 거기에서 꽃을 피운다. 삶이 이유가 없을 만큼 깊다면. 그러한 삶이야말로 궁극적인 기도가 될 것이고, 하느님을 경험하고 낳는 궁극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이러한 형편에서만 우리는 하느님을 그대로 둘 수 있고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하느님 되게 할 수 있고, 하느님을 조작하지 않고, 하느님을 “끓어오르게” 할 수 있다. 창조주 하느님이 옛적에 그랬듯이 하느님은 자신의 모든 행복이 거기에 달려 있다는 듯이 지금도 그렇게 끓어오르기를 간절히 바란다.(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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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일 성인의 날✝️
5. 교황 프란치스코의 찬미받으소서 218-219항
218. 우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을 기억하며 피조물과 맺는 건전한 관계가 인간의 온전한 회개의 한 차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또한 자신의 잘못이나 죄, 악습, 태만의 인정, 그리고 참된 회개와 내적 변화를 요청합니다. 호주 주교님들은 피조물들과의 화해라는 의미에서 회개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화해를 이루려면 우리의 삶을 성찰하며 우리의 행위와 방관으로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에 해를 끼쳐 왔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회개, 곧 마음을 바꾸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219. 그러나 개인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현대 세계가 직면한 매우 복잡한 상황의 해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개인은 도구적 이성의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상실하여 결국 윤리, 그리고 사회와 환경에 대한 의식 없이 소비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사회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적 선행의 총합이 아니라 공동체의 협력망을 통하여 해결해야 합니다. 이 임무는 “인간에게 엄청난 과제이기에 개인적 노력이나 개인주의적으로 자란 인간들이 연합하여 노력을 기울여도 완수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결집된 힘과 일치된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인 변화를 이루는 데에 필요한 생태적 회개는 공동체의 회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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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증언자 /
박윤식 [big-llight] 2025-01-02 ㅣNo.179004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라고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께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께서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도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요한은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말한다. 이 예언대로 죄 없으신 그분께서 우리 죄를 없애시려고 속죄의 양이 되셨다. 우리는 죄가 없는 인간의 모습을 예수님을 통해 찾는다. 과연 그분은 우리 희망과 기쁨의 원천이시다.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에 이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이처럼 우리 구원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은, 그분만을 믿고 따르려는 우리에게는 커다란 희망과 기쁨을 일으킨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이다. 하나는 고통 받다 억울한 죽임 당한 거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 생명의 활력을 준 모습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이를 다 갖춘 것일 게다. 요한은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어린양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긴다. 자신의 죽음으로 타인을 살리는 어린양의 겸손과 희생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자, 예수님의 삶 자체였다. 예수님의 이러한 희생을 사랑이라나. 서로가 서로를 위해 낮은 곳에 먼저 찾아드는, 그래서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사랑이다.
사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인간 모습을 지녔다는 건 큰 걸림돌이다. 이 어린양은 우리들 죄로 억울하게 죽으셨다. 그로써 그분 운명이 끝났다면 그들은 하느님 선하심을 믿을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분께서는 부활로 그 선하심이 세상에 드러났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사랑이 악을 이기는 유일한 힘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셨다.
그러기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한다. 이 말은 예수님만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희망과 기쁨의 원천일 게다. 그러나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그분을 수난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빌미가 되었다. 믿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들 모습을 통하여, 그나마 우리가 믿는 예수님 모습을 어렴풋이 그린다. 그러기에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참 삶을 살지 못할 때에, 세상 사람들은 이를 빌미 삼아 예수님을 또다시 더 큰 죽음의 길로 몰아갈 게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에,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이심을 알게 되리라.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기다렸던 메시아를 만났다는 확신을 가졌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이 예수님에 의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가 현세에 살면서 죄짓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 세상은 한순간도 우리 욕망을 잠들게 하지 않기에. 그러나 하느님만을 믿는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의 삶에 젖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어린양’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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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앞뒤로 하는 성탄 시기에 우리는 독서 말씀으로 요한의 첫째 서간을 계속해서 듣습니다.
요한 서간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외아드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확고하게 가르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부인하고 거절하는 완고한 세상에 휩쓸려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1,33)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1,31)라고 거듭해서 증언합니다.
‘전에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다.’는 말이 제게는 무엇보다 강렬한 증언으로 다가옵니다.
‘전에는 알지 못하였다.’는 이 말이 ‘지금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뜻을 품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신학교 입학을 위한 교리 시험을 치르는데 이런 문제가 나왔습니다.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한참을 고민한 뒤 ‘진리의 길로 나를 부르시는 완고한 스승’이라는 요지로 답안을 적었습니다.
다행히 신학교에 합격하였지만 저는 분명히 압니다.
그때 저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때인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턱없이 부족함을 고백하며
도와줄 이 예수님밖에 없노라 매달렸더니 그 비참에서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더 이상 스승이 아닌 주님이셨습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하고 또렷하게 말하는 이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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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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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말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고 정해줍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라는 단어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이름은
구원자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심은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천사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죄에서 구원한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구원이라는 단어는
해방이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즉 구원은
죄와 관련된 모든 것과 상관 없게 되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인데
그 이유는
인간의 보편적인 생각인 상선벌악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한 행위의 결과를 내가 책임져야한다고
우리는 생각하는데
그래서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하느님께서 벌을 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말씀하시는 것은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벌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마음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것도
마음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책감이나 죄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기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를 살기 시작하는 사람은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죄에서 멀어지려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구원을 위해 다가오십니다.
자유를 주시려고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나약함만 보면
죄책감이나 죄의식으로 빠져들기 쉽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함께 보면
우리의 부족함에도 우리는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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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과연 나는 보았다."(요한 1, 34)
셀 수 없는
사랑을 보며
깨끗한
희망을
만나는 체험의
시간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없으시면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십니다.
우리는 모두
보았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길을 내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가장 큰 사랑은
어린양
그 자신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사람의 아들을
봅니다.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우리를 깨끗이
하시는 종이
되십니다.
종이 되시어
하느님의
어린양은
자신을 바치며
십자가를
세우십니다.
어린양은
어린양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통해
우리의 영혼에
새겨진
십자가 인호를
기억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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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완전히 죽는 순간, 새 하늘 새 땅이 열리고, 참삶의 길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너무나 두렵고 경외로운 이름, 절대 신성시되는 이름, 그래서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는 이름이 하느님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공개적으로 외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변방 나자렛 출신, 목수 요셉의 아들을 향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외쳤으니, 유다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분노와 혼돈이 일어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한마디로 목숨을 건 증언이자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세례자 요한의 이 간략한 증언 한 마디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과
운명에 대해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놀랍지 않습니까? 광대무변한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느님, 그분으로부터 이 세상 구원이라는 엄청난 사명을 부여받은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세례자 요한은 그분을 향한 표지이자 상징으로 ‘어린양’이란 호칭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음 사가들의 상징조차 사자, 독수리, 황소등으로 표상되는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위해 붙인 칭호가, 공룡이나 호랑이가 아니라, 고작 어린양이라니요!
양은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초식동물입니다.
힘없고 빽없는, 그래서 틈만 나면 맹수들에게 쉽사리 잡혀 먹히는 약한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그런 양들 가운데서도 갓 태어난 어린 양에다 예수님을 갖다 붙이니, 참으로 특별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비하신 하느님,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생각하니,
어린양보다 더 잘 들어맞는 호칭은 다시 또 없는듯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 여정을 쭉 따라 가보니, 단 한 마디로 표현해서, 더도 덜도 말고, 딱!
어린양의 삶을 철저히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생에 걸쳐 철저하게도 고수하셨던 기본 노선은 비폭력 평화주의였습니다.
한 마리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모두를 향해 외치고 계십니다.
올라서지 말고 내려서라고! 움켜쥐지 말고 손을 펴라고! 이기려고 기를 쓰지 말고 한번 져보라고!
살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한번 죽어 보라고!...완전히 죽는 순간, 새 하늘 새 땅이 열리고, 참삶의 길이 시작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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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29절), 희생적인 구원자이시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32절) 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33절)으로 증언한다. 예수께서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은 사람들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오늘 1요한 3,5에 근거해서 하느님의 어린양을 하느님의 영을 당신 자신이 가지고 계시면서, 사람들이 더는 죄를 짓지 않도록 세례로 사람들에게 성령을 가득히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종으로 이해한다면, 요한의 증언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것은 전 인류의 죄를 의미하며,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이다. 없앤다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을 자신에게 지우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하느님의 고통받는 종이다. 요한은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이신 어린양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증언한다. 거룩하시고 먼저 계셨던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메시아께서 당신의 참혹한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신 분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탁월하게 구원의 선물, 즉, 성령을 인간들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34절).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시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희생 제사로 세상의 죄를 없애주신 분이다.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항상 일치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심으로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분 안에 머무를 때 우리도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분 안에 머물면서 죄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려고 결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는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으로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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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불의 세례 받는 법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물의 세례와 불의 세례에 관해 말을 합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물의 세례를 거치지 않고서는 불의 세례로 건너갈 수 없습니다.
요한이 불의 세례를 받은 이유는 바로 물의 세례를 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안중근 의사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하얼빈’입니다.
주인공 현빈은 처음에 안중근 역을 맡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칫 현빈이 일본에서 인기가 높아서 그 인기를 잃게 될까 봐 거부하려 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빈은 그런 이유 때문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안중근 의사의 무게감을 자기가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워낙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처럼 근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혹시나 자신의 부족한 연기가 그분의 위대함을 저해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안중근을 표현하기 위해 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영하의 추위에서
관객을 속이지 않는 현실감을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생해서인지, 현빈은 마지막 장면을 다 찍고 나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그 무거운 압박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안중근의 무게가 컸으면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우리가 현빈처럼 안중근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 수 있을까요? 현빈은 그를 표현하기 위해 많은 책을 읽고 연구하고 실제로 추위와 전투 장면 속에서 그를 체험해냈습니다.
그만큼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고뇌와 인생을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그가 흘린 눈물이 ‘불의 세례’와 비견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웅’이나 ‘하얼빈’과 같은 안중근 의사의 삶에 대해 알기 위해 뮤지컬이나 영화를 본다면
이는 물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는 새로 태어남인데 그분으로부터 직접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분을 알리려는 누군가에 의해 알게 되는 지식입니다.
이것으로 그분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물의 세례를 주기 위해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리려고 할 때 불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요한은 이어서 말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제가 신학교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그건 불의 세례였습니다.
눈물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제가 되어 그분의 증거가 되겠다는 물의 세례를 주는 존재가 되겠다는 결심 다음에 온 것입니다.
불의 세례를 받아야 그분으로부터 직접 새로 태어납니다.
이것까지 가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2019)에서 유관순 역을 맡았던 고아성 배우도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유관순 열사는 입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의 고문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음식을 먹이지 않는 것은 고문도 아니었을 정도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죽을 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 없다.”
고아성 배우는 유관순 열사의 강렬한 눈빛을 갖기 위해 실제로 닷새 동안 음식을 먹지 않으며 유관순을 자신처럼 느껴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3·1운동 1주년을 맞아 감옥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는 장면에서는 자기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무선 마이크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 달아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 심장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 불의 세례인 것입니다.
물의 세례를 주려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새로 태어남의 축복입니다.
이 장면을 8호실 안에 있던 25명과 아이컨택을 하면서 낭독했고 컷이 되자마자 다들 약속한 듯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뜻깊은 기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주연 짐 카비젤은 이 영화를 찍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그 이후에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짐 카비젤은 십자가에 매달리는 장면을 찍기 직전
의사로부터 심장이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멜 깁슨 감독은 계속 찍을 것이냐고 짐에게 물어봅니다. 짐은 대답합니다.
“이것은 저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십자가에 매달렸던 그는 자신에게서 탈혼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린 자기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곧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할 때,
곧 물의 세례를 주려고 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십니다.
이에 관하여 짐 카비젤은 말합니다.
“놀라운 것은, 모두들 부활은 원하지만, 고통은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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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29-34)”
1) 31절의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줄을 몰랐다는 뜻이고, 하느님께서 알려 주셔서 그것을 알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친척이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는 서로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알려 주셔야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만, 또는 하느님의 계시와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에 대해서,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되었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엘리사벳이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카 1,43-44).”
이 증언만 놓고 보면,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부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고 기뻐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증언은 엘리사벳의 기쁨을 강조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내렸을 때”(루카 3,2), 그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2) 33절의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일의 의미를 몰랐다는 뜻인데, 이 말도 “하느님께서 알려 주셔서 그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9-11)”
성령이 예수님께 내려오신 것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이라고, 하느님께서 알려 주셨다는 것이 요한의 증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다시 정리하면, “나는 인간적인 지식으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계시를 받고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메시아이시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은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쳐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이고,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는, “나보다 높으신 분이 오시는데”입니다.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는, 요한복음 1장 1절,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라는 증언과 ‘같은 증언’입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내가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준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사람들이 잘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킨 것이었다.”입니다.
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을 만나고, 알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인간적인 학문 연구 같은 방법으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지식을 쌓으려고 공부하는 생활이 아니라, ‘믿는 생활’이고,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한다고 해도,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도 없고,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먼저 믿으면, 그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평생 공부를 하고, 수련을 하고, 수행을 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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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29-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주간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주님을 ‘보라’고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자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제대로 보는 법을 익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고 자기가 눈으로 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양 착각하며 안주하고 있으면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또한 주님을 보겠다고 생각만 할 뿐 정작 그분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한 노력들을 하지 않으면, 주님을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한 채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매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말지요.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예수님의 참모습을 ‘보았다’고, 그래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본 사람들은 많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알아본 것은 아니지요. 별 관심 없이 대충 훑어본 사람은 예수님을 그냥 지나쳤고, 질투심에 눈이 멀어 도끼눈으로 노려본 사람은 예수님을 자기 기득권을 위협하는 ‘적’으로 보았으며,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했던 사람은 그분을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던 겁니다. 오직 요한만이, 그리고 그의 인도를 받은 소수의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아보고 믿으며 따를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저 눈으로 구경하듯 보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 머물러봐야만 하지요. 요한은 예수님 ‘안에’ 머물러 보았습니다. 성령을 자기 안에 모시고 그분의 이끄심에 따라 살면서,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전해주시는 예수님에 관한 말씀들을 천천히 묵상해 본 겁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 하느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음을,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이 그 뜻을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이 땅 위에 실현될 것임을 깨닫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런 구원의 진리를 그저 머리로 깨닫게 된다고 해서 당연히 주님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믿음과 희망이 필요합니다. 시메온과 한나가 하느님을 믿고 구원을 희망했기에 주님을 만나기까지 그 오랜 시간을 성전에서 머무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그리고 그분께서 이루실 선한 일들에 대한 희망을 지녀야만 하느님 안에 머무르며 그분의 참모습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제대로 보는 ‘관상’은 우리를 하느님과 닮아가게 만듭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상대방을 향하고 바라봄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니까요. 선 자체이신 분,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보고 닮아 인간이 되셨으니, 우리도 순명으로 주님을 보고 내 안에 그분 뜻을 담으면 조금씩 그분을 닮아갈 겁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참모습을 보여주시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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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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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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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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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두려움에서 승리하는 용기있는 삶
<2025.1.3> 아침을 여는 묵상 (수 2:1~24절)
❝두려움에서 승리하는 용기 있는 삶❞
❚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 사명을 위해 어떤 삶이 필요합니까?
➲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7절).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싯딤에 진을 구축한 여호수아는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사건을 직접 경험했던 여호수아는 그래서 더욱 신중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탐꾼들이 유숙한 곳은 여리고에 있는 기생 라합의 집이었습니다. 그곳은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성에 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을 것이고,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고 머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정체가 여리고 왕에게까지 보고가 되어, 기생 라합의 집에 군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2~3절). 이미 라합이 정탐꾼들을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 사이에 숨긴 뒤였고, 그들을 찾는 군인들에게 라합은 거짓으로 답변함으로써 그들의 추적을 따돌리게 됩니다(4~7절).
기생 라합은 비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용기 있는 믿음의 행동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민족을 배신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탐꾼들이 발각이라도 되었다면 그녀는 그 즉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라합의 행동은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었습니다. 두 정탐꾼 역시나 여리고 성에서 발각되면 처형될지 아니면 무사히 돌아올지 아무러 보장도 없는 가운데 적지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뜻밖에 조력자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상식과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진짜 믿음은 아는 것을 목숨을 걸고라도 실천하는 일사각오의 신앙입니다. 더불어 신중하고, 용의주도하게 행동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나타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삶이 사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모든 두려움에서 승리하는 용기 있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명령에 결단하는 삶이어야 합니다(8~14절).
라합은 단순히 이스라엘 군대가 강했기 때문에 그들을 도왔던 것이 아닙니다. 라합의 행동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결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가나안 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했습니다(9절).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가나안 족속이 “...너희로 말미암아...정신을 잃었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11절) 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라합은 비천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금 같은 믿음을 소유한 여인이었습니다. 신약은 라합의 이러한 행동을 언급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히 11:31절),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약 2:25절)... 그녀의 믿음과 행동을 칭찬하고, 인정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방인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남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자기 가족들의 생명을 구원해 달라는 라합의 요청에 정탐꾼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했습니다(12~14절).
라합은 이스라엘의 군대가 두려워서 정탐꾼들을 감춰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고, 하나님을 희망과 구원의 주로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라합의 인생이 바뀌었고,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의 구원 또한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선택의 순간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선택의 순간일수록 더더욱 하나님의 편에서 결정하고, 믿음 안에서 바른 선택과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와 각종 성경 공부 그리고 신앙 세미나등의 홍수를 이루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이 교회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비난의 강도가 더욱 강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제는 결단해야 합니다. 라합의 믿음의 고백은 하나님을 철저히 반역하고 죄로 관영한 가나안을 과감히 등지고 참 살 길을 찾는 의로운 결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사는 길,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결단해야 합니다. 한탄과 원망과 정죄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기회를 준비하는 중요한 시기임을 모두가 인식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겠노라 결단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5~24절).
정탐꾼들은 라합의 지혜로움으로 인하여 위기의 순간을 모면했습니다. 그리고 라합과의 약속을 재차 확인한 후에 라합의 집 창문을 통해 여리고 성을 탈출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병사들의 동선까지 추측하면서 정탐꾼이 무사히 여리고를 빠져 나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15~16절).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앞에서 맹세한 언약을 차질 없이 이행할 것을 한 번 더 다짐을 합니다. 라합과 맺은 언약에 대한 첫 번째 조건은 자신들을 달아 내린 창문에 붉은 줄을 매고, 가족들은 다 집에 모으라는 것(18절)이었습니다. 두 번째 조건은 정탐꾼들과 관련된 일을 누설하지 않는 것(20절)입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이 제시한 조건을 흔쾌히 받아 들였습니다. 그들을 보내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았습니다(21절). 정탐꾼들은 산에서 내려와 요단강을 건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진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여리고에서 겪었던 일들을 여호수아에게 상세하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의 보고의 핵심은 ‘주께서 그 땅 전체를 우리 손에 넘겨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곳 가나안 사람들은 우리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24절,쉬운성경)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는 것입니다. 진짜 금덩어리가 내 눈 앞에 있어도 금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돌멩이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가치를 알아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자만이 구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아는 만큼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믿음을 지키고, 믿음의 행동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라합의 믿음이 그녀와 그 가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선택하므로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목숨을 구했던 라합과 같은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울러 믿지 않는 가족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 한 사람의 바른 신앙관과 긍정적인 믿음의 삶은 곧 함께하는 공동체에게도 놀라운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비록 우리 자신이 메뚜기와 같이 연약한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근거한다는 확신만 있다며 그 어떤 세력과 상황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상황들을 믿음의 눈으로, 신앙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황을 우리는 분명 역전 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신앙생활을 할 때에 우리는 두려움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여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 내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모든 일에 신중하고, 용의주도한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삶의 자리에 나타내는 용기 있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판단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수 2장 1~2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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