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학교엔 교내 방송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다녔던 캠퍼스에도 작은 방송국이 하나 있었다.
넓은 캠퍼스 도처에 잔잔한 음악과 유용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파했던 고마운 방송이었다.
그 학내 방송의 이름은 V.O.U, 즉 VOICE OF UNIVERSITY였다.
학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대학의 소리 방송'
군대 전역 후 복교했던 1988년 봄, 어느 날 오후.
본관 앞 잔디밭에 앉아 친구들과 한참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때 긴급한 방송이 들렸다.
병원에서 RH (-) 혈액이 급히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학교 정문 옆에 큰 종합병원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수술중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대여섯 차례 도움을 호소하는 멘트가 연이어 들렸다.
만명 이상이 공부하고 있는 드넓은 캠퍼스여서 해당 혈액형을 가진 어떤 젊은이가 달려갔을 거라 믿었다.
내 혈액형이 맞았다면 자리를 박차고 단박에 뛰어갔을 게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리곤 이내 잊어버렸다.
십여일 후 어느 모임에서 의대 선배를 만났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 방송의 주인공은 수술이 잘 되었느냐고 물었다.
선배는 대답했다.
"혈액이 없어 그 환자는 끝내 하늘나라로 갔다"고 했다.
피가 없어서 그리 되었단다.
나는 갑자기 머리가 띵했다.
그리고 적잖은 충격으로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리 RH (-) 라고 해도 피가 부족해 수술 중에 사람이 죽다니...."
당시에 나는 가슴 뜨겁던 20대 중반이었다.
백 걸음 천 걸음 양보한다 해도 피가 부족해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째 나의 가슴속에선 이 문제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몇날 며칠을 혼자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누가 뭐라고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확고한 다짐과 결심이 뜨거운 내 가슴판에 확실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우리 사회를 위해, 우리 이웃을 위해, 아무 조건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죽는 날까지 흔들림 없이 실천해 보자."
나는 스스로 그렇게 결심했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내가 받았던 수많은 혜택과 감사에 대한 작은 보답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있었던 바로 그 해였다.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26년간 매년 3번씩 묵묵하게 헌혈을 실천했다.
빨리 가거나 느리게 가지도 않았다.
가다가 중단하지도 않았고, 꾀를 부리거나 돌아가지도 않았다.
남자 가슴에 한번 뜻이 섰으면 비가오나 눈이오나 정해진 그 길을 조용히 가면 된다.
그것 뿐이었다.
실제로는 26년이란 세월을 계속했던 건 아니었다.
3년간은 헌혈을 하지 못했다.
안 한 게 아니라 하지 못했다.
IMF 사태가 터졌을 때, 나는 어느 회사의 책임자로 있었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가적으로 엄청난 비바람이 몰아쳤다.
구조조정이란 큰 책무을 짊어진 채 망망대해를 항해한다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를 수반했다.
30대 중반 나이, 5개 사업부의 1000억에 육박하는 회사의 선장으로서 거친 파도를 헤치며 전진한다는 건 무지 힘겹고 혹독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도 정해진 시기가 도래하면 예외 없이 바쁜 시간을 할애해 헌혈의 집에 갔었다.
그러나 과도한 스트레스로 영육간의 밸런스가 심각하게 깨진 상태였기에 매번 혈액의 비중이 맞지 않았다.
헌혈 부적격 판정.
그렇게 3년 이상 번번이 발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구조조정이 마무리 될 즈음 나는 끝내 병원으로 실려갔다.
스트레스는 모든 병마와 불행의 근원이었다.
정들었던 회사를 떠나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몸 상태가 회복되었고 다시 헌혈을 재개했다.
어느새 누적으로 50회를 돌파했다.
대한적십자사로부터 값진 표창과 상패를 받았다.
박수를 받기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나의 행동을 기억해 주고 축하를 보내준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2013년. 금년 들어 또다시 3번, 이번까지 총 63회를 돌파했다.
매번 400cc씩 나의 건강한 혈액을 공여했으니 총 25,200cc를 뽑은 것이다.
500cc 호프잔으로 50개가 넘는 분량이니 만만찮은 양이었다.
그동안 건강한 내 피가 여러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여졌기를 기도하는 마음 뿐이다.
모여진 헌혈증은 묶음으로 투병중인 사람들을 위해 경향각지로 보내졌다.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조금이라도 순수한 온정이 그 분들과 연결되어지기를 기대했다.
보낼 때마다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부디 힘내시라고, 그리고 이 헌혈증서들이 강력한 플라시보 효과를 불러일으켜 주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인생사 일체유심조라 했다.
세상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지 말고 낮은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누고 섬기며 살면 되지 않을까.
거대담론이나 심오한 철학이 필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뜻한 바를 묵묵하게 차근차근 실천하면 된다고 본다.
지금까지 아들에게 헌혈을 권유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아들은 고교시절부터 꾸준하게 자신의 일정대로 나눔을 실천했다.
아마도 아들은 아빠가 받았던 헌혈 유공자 표창에 뭔가 느낀 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10대 후반부터 헌혈을 시작한 아들, 지금의 내 나이인 지천명이 될 때 쯤이면 현재의 나보다 훨씬 더 다양한 섬김과 나눔의 삶을 엮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지금도 가끔씩 그립다.
파릇파릇 싱그럽기 그지 없었던 봄날의 아름다운 모교 캠퍼스와 V.O.U.
살다보면 누구나 경험하게 된다.
때때로 우연찮게 접한 한 줄의 글이나 한 마디의 멘트가, 각자의 영혼에 그대로 들어와 박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시금석이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내 건강을 허락해 주시는 그 순간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헌혈의 집으로 가는 가벼운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리라.
오늘 새벽 Q.T 시간에도 그렇게 기도했다.
세상은 참 아름답다.
그리고 감사하기 그지 없다.
사랑과 감사를 전하며.
DEC,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