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LO(켈로. Korea Liaison Office)는 미 극동군사령부 산하에서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비밀 특수부대
였다. 그들은 6‧25전쟁 때 수많은 비밀작전을 수행하면서 무수히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부대의 특수
성상 지금까지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다. 그들에게는 별도의 명단도 없었고 군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군인신분이 인정되지 않아 지금껏 어떠한 보상이나
혜택도 받지 못했다. 나는 1993년 실록 대하소설 「비밀결사 白衣社」(전3권)를 집필할 때, 白衣社
단원 상당수가 KLO부대에 자원한 뒤 적의 후방에 침투하여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는 내용을 기록으
로 남겼다. KLO부대에 자원입대한 白衣社 단원들은 현대판 의병들이었다. 국군에 계속 남아있던 KL
O 요원들은 1958년 제1공수특전단 창설의 주축을 이뤘다가 훗날 육군 특수전사령부의 근간이 되었
다. 그러나 KLO 소속으로 6‧25전쟁 때 전사한 대원들에 대해서는 상굿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
1950년 8월,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교착상태에 빠진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적의 허리를 끊어 전력을 분산시키고 낙동강전선으로 연결되는 보급로를 차단하여
일거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성공확률이 5천분의 1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
다. 해안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크기 때문에 무기와 병력을 실은 대형 함선이 접안할 수 없었던 것
이다. 그 사실은 인민군 수뇌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천에는 2천명의 병력만 주둔했고, 해안포대
1개 대대와 월미도에 대함포 4문을 설치한 게 방어 전력의 전부였다. 이때 유엔군의 군수물자를 독점
공급하고 있던 왜놈들이 전쟁을 오래 끌게 하여 돈을 더 벌기 위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언론에
폭로했다. 김일성은 이 보도를 유엔군의 성동격서작전으로 해석하여 인천 대신 원산항에 방어 병력
을 집중 배치했다.
맥아더는 9월 15일을 D-Day로 결정했다. 조수간만의 차에 의해 인천항의 수심이 가장 깊어지는 날이
었다. 9월 13일, 맥아더는 전함 5척을 보내 월미도 해안포대를 집중공격했다. 동시에 원산과 삼척에
도 함포사격을 실시했고, 진남포에는 전투기를 보내 기총소사를 실시했다. 한국 해병대는 영덕, 포항
및 군산을 동시에 공격하여 상륙을 시도하다 퇴각했다. 모두가 인천상륙작전을 호도하기 위한 연막
작전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인천상륙작전은 계속 추진되고 있었다. 그런데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는 팔미도등대를 점등시켜야 했다. 그래야 수심이 얕고 수로
가 복잡한 해역에서 방향을 잡고 상륙을 감행할 수 있었다.
이때 팔미도 점령의 선봉에 선 부대가 최규봉 대장이 이끄는 KLO부대였다. 바로 영화 《인천상륙작
전》에서 이정재가 이끄는 부대다. KLO는 미국 해군대위 유진 클라크가 이끄는 미 해군 특공대와 함
께 상륙작전 개시 2시간 전에 팔미도등대를 점등하기 위해 출동했다. 이들 ‘팔미도특공대’는 먼저 영
흥도에 거점을 설치하고 인천 앞바다의 조수‧수로‧암초‧해안조건 등을 면밀히 조사하여 유엔군사령
부로 보내는 한편, 수시로 인민군의 동태를 살폈다. 9월 9일 팔미도에 잠입한 특공대는 등대 안으로
숨어들어가 재원과 연료 등을 조사했다. 등대에는 석유도 충분히 남아있었고 점등 상태도 양호했다.
조사를 마친 특공대는 마지막으로 유엔군사령부에 점등시각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사령부는 9월 1
5일 0시 30분에 등대를 점등하라고 하명했다.
최규봉 대장이 이끄는 KLO 대원 25명은 9월 10일부터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는 팔미도를 점거하기 위
해 목숨을 걸고 공격을 감행했다. 치열한 격전 끝에 KLO는 9월 14일 23시 30분 팔미도등대를 장악했
다. D-Day, H-Hour 1시간 전이었다. 그러나 9월 9일에 몰래 들어와 점검할 때와 달리 등대에는 점등
이 쉽지 않았다. 나사못이 하나 빠져 점등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자칫 연합군 함대 261척과 총병력 7
만여 명이 투입될 대규모 상륙작전이 나사못 한 개 때문에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천신만고 끝
에 나사못을 찾아 팔미도등대에 불을 밝힌 것은 H-Hour보다 1시간 50분 늦은 9월 15일 오전 2시 20분
이었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맥아더 사령관은 등대 불빛을 확인하고 상륙 명령을 내렸고, 격전
끝에 상륙에 성공한 연합군은 그날 중 인천 전역을 탈환하여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한 직후, 영흥도 거점에 잔류해 있던 KLO 대원 20명은 인민군 1개 대대의 습격
을 받아 전멸했다. 2012년 국방부 戰史편찬연구소 *남보람 소령은 미국 워싱턴 D. C.에 있는 미 국방
부 <한국전쟁史 사료실>에서 비밀이 해제된 인천상륙작전 관련 문서를 찾아냈다 미국 해군대위 유
진 클라크가 극동군사령부 정보국장에게 보낸 보고서였다. 여기에는 인천상륙작전 때 전사한 KLO
대원들의 인적사항도 기록되어 있었다. 남 소령은 이를 번역하여 국방부에 제출했고, 국방부는 보훈
처와 협의하여 이들에게 훈장을 추서하고 유족들에게 법정 보상금을 지급했다. 남 소령은 영화 《인
천상륙작전》을 촬영할 때도 KLO 대원들과 관련된 작전에 관해 자문과 고증에 응하여 영화 제작에
도움을 준 적이 있다. 그는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장사리》에도 고증과 자문에 응해 사실성을 높이
는 데 일조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남보람 소령은 남성원님의 장남임
첫댓글 동우회 회원님들도 그러하고 스포츠센터의 회원역시 많이도 동참한 집회, 거리 의 함성으로 민심을 대변 하였지만 이미 무디진 집권당, 5일 서초동 동원 집회로 맞서겠다는 여론몰이가 고작 입니다. 나라 의 갈등, 겁잡을수 없이 깊어만 갑니다. 해맑은 가을하늘은 예전 그대로 입니다. 많이 걸으시며 건강관리에 최선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