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반역인가
원제 : The Counterfeit Traitor
1962년 미국영화
감독, 각본 : 조지 시튼
음악 : 알프레드 뉴만
출연 : 윌리암 홀덴, 릴리 팔머, 휴 그리피스
칼 라다츠, 에른스트 슈뢰더, 찰스 레니어
잉그리드 반 베르겐, 볼프강 프라이스, 베르너 페터스
클라우스 킨스키, 에리카 베어, 스테판 슈나벨
'누구를 위한 반역인가'는 윌리암 홀덴이 주연한 1962년 작품입니다. 2차대전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전쟁영화가 아니라 첩보 스파이 영화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첩보영화의 고전 중에서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이 영화보다 더 흥미롭고 짜임새 있는 첩보 영화는 거의 찾아내기 어려울 겁니다.
미국계 스웨덴인이 겪는 스파이로서의 모험을 긴박감있게 다룬 내용입니다. 에릭슨(윌리암 홀덴)은 스웨덴의 사업가인데 원래 미국사람이었다가 스웨덴으로 귀화한 것입니다. 스웨덴은 중립국이었으므로 에릭슨은 독일과도 거래를 했는데 어느날 자신이 연합군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을 알게 됩니다. 이후 그는 콜린스(휴 그리피스)라는 영국 요원에게 연락을 받는데 콜린스는 에릭슨을 블랙리스트에서 삭제해주는 댓가로 친나치주의자로 가장하여 스파이 노릇을 하라고 권유합니다. 사명감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마지 못해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된 에릭슨, 그는 스웨덴에 독일의 석유공장을 짓는다는 가짜 프로젝트를 들고 독일에 가서 신임을 얻고 독일의 정유공장 등을 시찰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받습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게 되는 법, 에릭슨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나치들이 있었고, 에릭슨은 끊임없는 감시를 받습니다.
윌리암 홀덴
부리부리한 눈이 인상적인 배우 휴 그리피스
외통수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된 에릭슨
미모의 귀부인 마리안을 소개받은 에릭슨
스파이 영화에 미모의 여간첩이 등장하면 또 묘미가 다른데 이 영화에서 그 역할을 하는 배우는 독일계 여배우 릴리 팔머 입니다. 릴리 팔머가 연기한 마리안은 남편을 전장에 보낸 중년 귀부인으로 반나치주의자이며 연합군을 위해서 스파이 활동을 벌입니다. 에릭슨은 마리안을 통해서 정보를 입수하는데 둘은 들키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불륜관계처럼 꾸미고 밀회를 가장하여 정보를 주고 받습니다. 물론 윌리암 홀덴 이라는 배우의 특징을 아는 분이라면 이들의 관계가 당연히 '공적업무'를 위한 만남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윌리암 홀덴은 '여심'을 끄는 역할을 많이 했고, 이 영화에서도 나이가 좀 들어보이긴 했지만 중년의 은은한 매력을 풍기는 젊잖은 신사입니다. 에릭슨과 마리안은 임무를 수행하면서 진짜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로맨스가 곁들여진 첩보 영화이기도 한데 두 사람이 깊은 로맨스에 빠지게 되는 계기는 마리안이 일종의 심경의 변화가 그 역할을 합니다. 자신이 제공한 정보때문에 연합군의 공습이 벌어지고 그로 인하여 무고한 아이들까지 희생된 것에 대해서 마리안은 흔들리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위기를 넘기는 과정도 겪고....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늘상 만나는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요. 물론 둘다 기혼자이긴 했지만 마리안은 남편과 10년간 거의 만나지 못한 '무늬만 유부녀'이고 에릭슨은 나치와 한통속으로 오해한 아내가 냉랭해졌고... 물론 영화에서 생각보다 로맨스의 비중이 크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릴리 팔머는 아주 많이 등장하지는 않고 조연비중 정도인데, 그 대신 로맨스의 강도는 굉장히 절절하고 애틋합니다.
마리안은 알고 보니 에릭슨을 돕는 역할을 하는
독일 내부의 비밀 정보원이었다.
석유 공장 프로젝트를 미끼로 독일 내부에
성공적으로 잠임한 에릭슨
에릭슨에게 위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지만....
스파이로 활동하려면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비밀 정보를 다 외우고 폐기시켜야 하니.
굉장히 흥미진진한 영화인데 초반부 20여분 정도의 지루함만 잘 견디면 그것을 몇십배 보상해주는 재미가 보장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오히려 2시간 20분이나 되는 긴 영화가 오히려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중반까지는 그럭저럭 들키지 않고 스파이 노릇을 잘 하면서 로맨스까지 곁들이는 이야기, 후반부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톤 커튼'을 연상하게 하는 필사의 탈출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기고 들킬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과연 위기를 어떻게 모면하는지를 보는 묘미도 뛰어납니다. 특히 007 제임스 본드나 미션 임파서블의 이산과 달리 에릭슨은 사업가 출신의 민간인이었다는 점이 더 흥미롭습니다. 007 같이 알아서 총알이 피해가는 허구적 인물보다 현실적 인물이 겪는 모험이니까요.
에릭슨은 연합국의 마수(?)에 걸려서 얼떨결에 내키지 않는 스파이 활동을 한 것이고 그가 포섭한 몇 명도 같은 이유에서 걸려든 것이지만 그 일을 하면서 차츰 진짜로 사명감을 갖게 되는 설정이 흥미롭습니다. 독일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여러 나치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그는 독일의 잔혹함과 만행을 겪게 되고 나중에는 스스로 자원해서 위험한 임무를 기꺼이 수행합니다.
2차대전때 실제로 존재했던 스파이에 대한 실화입니다. 물론 영화는 극적인 재미를 가미하기 위해서 많은 각색을 했겠죠. 그렇지만 에릭슨이 연합군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를 준 것은 사실이고, 릴리 팔머가 연기한 여간첩과 실제 사랑에 빠진 것도 사실이라고 합니다. 2차 대전이 단지 무기와 병력만을 갖고 전투력 대 전투력으로 충돌한 것만이 아닌, 정말 치열한 스파이전이 전개되었고 거기서 얻어내는 정보전의 중요성도 높았을 것입니다. 이중간첩도 분명 존재했을테고. 에릭슨도 이중간첩이 될 뻔한 상황을 몇 번 맞이합니다. 그리고 스파이 활동은 비밀리에 도와주는 동료들이 여기저기 심어져 있어서 그들에게 도움도 받는데 그 중 누군가 배신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무리 조심해도 위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 붙들려 가도 심한 고문에 못이겨 둉료를 밀고할 수도 있고. 이 영화처럼 스파이 활동에 대한 디테일한 내용이 등장하는 영화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자살용 독약을 지니는 것도 그렇고.
나치의 만행을 경험하고 비로소 실제로
스파이 노릇에 사명감을 느끼는 에릭슨과 동료
위장 불륜 커플 역할이었지만 실제로
사랑에 빠지는 에릭슨과 마리안
이렇게 매혹적이고 아련한 표정연기는
릴리 팔머가 아니라면 잉그리드 버그만 정도가 가능할듯.
중년의 나이에도 이런 로맨스 연기가 가능한 것은
릴리 팔머의 높은 역량이다.
오히려 연합군 요원의 반대에도 위험을
무릅쓰는 에릭슨
윌리암 홀덴은 비슷한 동년배 배우보다 영화출연을 꽤 일찍 한 배우이고 20대 초반에 이미 주연배우로 활동한 잘 풀린 케이스입니다. 한창 유망한 20대 초반 배우였던 그는 2차대전 시기 군복무로 인하여 몇년간 공백기를 가지는 바람에 40년대 후반 잠시 주춤했지만 1950년 '선셋대로'와 '본 예스터데이'라는 두 수작을 탄생시키며 1급 배우로 올라섰습니다. 이후 탄탄한 50년대를 거치며 톱 배우 노릇을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배우들인 그레고리 펙, 커크 더글러스, 율 브리너, 버트 랭커스터 등이 60년대 중반 이후 다소 내리막길에 들어선 것과는 달리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비교적 괜찮은 영화들을 꾸준히 남겼습니다. '코만도 전략(68)' '와일드 번치(69)' '타워링(74)' '네트워크(76)' '페도라(78)' 등은 그가 후기에 남긴 볼만한 영화들이지요. 나이보다 다소 노안이지만 기품있는 신사적 풍모는 여심을 자극했는데 '누구를 위한 반역인가'는 그의 중년기의 멋을 가장 잘 보여준 영화일 것입니다.
그런 윌리암 홀덴이었지만 의외로 이 영화에서 상대역으로 나온 여배우는 4살이나 연상인 독일계 릴리 팔머인데 40-60년대 영화계가 나이든 여배우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았던 시기였음에도 릴리 팔머는 중년이 되면서 더욱 기품있고 우아한 여배우로 거듭난 느낌입니다. 일찌감치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했지만 50년대에는 본국인 독일영화들에 출연하며 '제복의 처녀' 같은 인상적인 작품을 남겼는데 이 당시 이미 40대 중반이었지만 10대 소녀의 동경의 대상이 되는 기품있는 여교사역을 훌륭히 잘 해냈습니다. '누구를 위한 반역인가'는 이보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 출연한 작품인데 여심 사냥꾼 윌리암 홀덴보다 더 연상이면서도 애틋한 로맨스의 상대역으로 등장하여 중년여성의 매력과 품위를 과시합니다. 비중이 생각보다 적은게 아쉬운 부분이지요.
흥분하지 않는 젊잖은 연기를 평생 했던
윌리암 홀덴이 이런 절규어린 연기를 드물게 보여준다.
매우 아슬아슬했던 장면 중 하나
에릭슨은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기는데...
그는 007 제임스 본드가 아닌 현실적인 민간인이다.
원톱 주인공으로 수준급 연기와 매력을 보여준
윌리암 홀덴
독일의 베를린과 함부르크, 덴마크의 코펜하겐, 스웨덴의 스톡홀름 등 유럽 주요 도시에서 실제 로케이션을 하며 현장감을 잘 묘사하였고, 이렇게 유럽 각국이 장소 뿐만 아니라 배우들까지 대거 제공하면서 협조한 영화입니다. 조지 시튼 감독의 빼어난 연출이 완성도를 높였는데 시나리오 작가 출신의 조지 시튼은 존 포드, 윌리암 와일러, 빌리 와일더, 엘리아 카잔 보다는 명망을 얻은 감독은 아니었지만 아카데미 각본상을 두 번 수상할 정도로 유능한 작가였고, '갈채' '에어포트' '사회부장' 같은 은근 볼만한 영화들을 제법 감독했습니다. 특히 '34번가의 기적'은 그의 대표걸작이지요.
고전 스파이 영화의 가장 표본이 될만한 걸작이며 스파이 영화로는 역대급이라고 할만한 수준입니다. 재미와 완성도, 그리고 짜임새가 탄탄한 영화이고 원톱 주연인 윌리암 홀덴의 매력도 볼거리입니다. 50년대에 '선셋대로' '제 17 포로수용소' '콰이강의 다리'를 남긴 배우지만 60년대에도 '누구를 위한 반역인가'와 '와일드 번치' 등 꾸준히 걸작을 남긴 것입니다. 매우 흥미롭고 낭만적인 스파이 영화의 고전입니다.
평점 : ★★★☆ (4개 만점)
ps1 : '벤허'에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휴 그리피스가 윌리암 홀덴을 스파이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요원으로 비중있게 등장합니다.
ps2 : 에릭슨이 친나치주의자로 가장하여 행동할때 가장 친한 유대인 친구와 아내에게까지 철저히 비밀로 하는데 그로 인하여 괴로움을 겪는 장면들이 인상적입니다. 사실 그런 위험한 일을 할때는 정말 가장 가까운 사람도 속여야지요. 비밀이란 무조건 새어나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ps3 : 베르너 헤어조크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몇 번 등장하게 되는 클라우스 킨스키가 대사 한마디 없는 단역으로 후반부에 등장합니다. 비중으로 따지면 '닥터 지바고' 수준이지요. 그 영화에서는 그나마 대사가 있었지만.
ps4 : 원제 The Counterfeit Traitor 는 '가짜 배신자' '위장된 반역자' 같은 의미입니다. 우라나라 개봉제목은 적당히 의역해서 만든 것인데 영화의 내용에 더 부합하게 만든다면 '누구를 위한 스파이 활동인가' 가 맞겠죠.
[출처] 누구를 위한 반역인가(The Counterfeit Traitor, 62년) 고전 스파이영화의 걸작|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