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장 속의 날지 못하는 새를 동정한 적이 있었다. 우리 밖을 나오지 못하는 동물원 생명을
불쌍하다 여긴 적이 있었다. 나는 자유라는 타이틀 안에 존재하고 그들은 억압의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만큼 나는 어리석었고 관조적이지 못했다.
내겐 자유가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 굳은 믿음이 한치의 의심도 허용하지 않았을 만큼.
스물 셋 여름, 내 인생 일대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던 그 때, 나는 열정의 소실과 무기력에
철저하게 지배당한 자아를 만났다. 무한하게 열린 가능성 앞에 오히려 새파랗게 겁에 질린
내 모습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때가 있었다. 목표와 꿈이라는 테두리 안에 ‘
the reason’ 이 아닌 ‘have to’ 만을 좇아왔던 때였다. 그 여름, 내겐 더 이상
‘the reason’ 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내게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새장 속 날지 못하는 새처럼 언젠가는 퇴화될지도 모르는
날개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하루 열 두 번의 헛 날개 짓에 그나마 자족 하며, 새장 밖
세상에서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는 미래의 희망을 노래하며 고통을 고통이라 여기지 않고
살아온 것이 내 인생이다. 교육과 관계, 욕심과 희망, 사회의 기준에 나를 맞춰가며 이
세상 누구도 열어줄 수 없는 새장 속 빗장을 걸어 잠그고 나는 언제부터 그 곳에
갇혀있었던 것일까? 탈출에 대한 생각과 고민은 언제나 분열을 낳았고,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버리는 일도 수 천 번. 굳게 닫힌 내 새장의 빗장을 걷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오랜 시간 갇혀있었기에 나가는 방법도, 문을 따는 방법도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탈출하고 싶다. 악을 쓰며 열심히 살아도 언제나 뒤가 시린 경험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내 심장은 순수에서 멀어졌고, 내 눈은 순진에서 멀어 진지 오래다.
좋은 옷은 뽐내기에 지나지 않았고, 좋은 차는 편리한 수단이 아닌 잘난 척에 지나지
않았다. 학벌은 내 기준이 아닌 남의 기준에서 이야기 된지 오래였다.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도 치료될 수 없는 내 심장과 눈이기에 ‘진짜’를 보기 위해
손바닥을 펴본다. 놓을 수 없다면 찾을 수 없을 것이고, ‘진짜’를 찾을 수 없다면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의미가 없는 셈이다.
쉽지 않다. 그러나 절박하다. 수년에 한 차례 쌓였던 감정에 못 이겨 폭발해 엉엉
울어대는 모습이 처량하다. 나는 그 모습이 죽기보다 더 싫다.
스무 살을 넘기고 세 차례나 그랬다. 이십 대 초반, 얼마 되지도 않은 나이에
나는 벌써 수 차례 내 열정을 불안과 욕심에 빼앗겨 버렸다.
나는 정말 편안하게 살고 싶다.
하여, 오늘도 나는 공부보다 몇 천 배는 더 어려운 내 모든 불안과
내 모든 희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연습을 한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걱정을 앞세우는
자아를 뒤로하고 오직 현재의 시간에만 집중할 수 있는 나로 태어나기 위해 굳은 살
박힌 듯 내 몸 안에 자리하고 있는 생각의 습관을 버리는 연습으로 나를 이끈다.
당장은 쉽지 않지만, 또 다시 불안에 휩싸이고 희망에 희죽 대는 나를 발견해가면서
과거와 미래를 버리는 연습을 통해 나는 분명 성장하리라 믿는다. 힘들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다.
‘네가 얼마나 변했길래?’라는 물음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변화하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기를 원하는 것이니까.
언제라도 그릇됨 없이 작용할 수 있는 내 마음의 중심만 남기도록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나를 이끌어 보련다.
그 심주만 세우면 ‘아니됨’ 없을 터이니 언젠가 나의 영원한 心 작대기는
세상을 초월하여 영원히 끝없이 존재할, 길고 짧음 없이 당당한 한 마음의 자유가 되리니.
나는 처세술을 다루거나 성공에 관한 테마를 다룬 책들을 즐겨보는 사람 중 하나였다.
대형 서점의 처세술 관련 서적 코너는 언제나 내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전부 같은 이야기, 틀에 박힌 중국집 메뉴 같았지만 그 책들을 읽고 있노라면
저 멀리 내 미래 언젠가의 모습이 뇌 속에서 꿈틀대는 듯 했기 때문이다.
특히, 가발 공장의 여공이 하버드 대학 박사과정을 밟기 까지의 과정을 그린 책이나
평범한 전업주부가 세계적인 마케팅 컨설턴트로서 성장한 성공기,
이혼이라는, 아직은 편견이 지배적인 그 높은 담벼락을 넘어 방송인으로서
당당하게 메세지를 건네는 한 아나운서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시선을 사로 잡았다.
같은 여자로서 닮고 싶은 지성인의 모습들이라 생각했기에 그들의 성공기는 미래
언젠가 나의 그것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고통과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목표를
이뤄낸 그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라 생각하며, 끊임없이 그와 그녀들을
모델링하기 바빴다.
그 많은 책들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혹은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단지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만큼은 내가 마치 그들인 양,
언제나 그들의 열정에 취해 있었다는 것 밖에는 어떤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는지 살피기 어렵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처세술 코너로 발을 돌리지 않는다.
준비하고 있는 어려운 시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 이상 그들의 성공기에서
어떠한 감흥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지난 주 취업 강의 시간이었다. 교수님께서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형용사나
명사 하나를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셨다. 그 딱 하나의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아름다운....'을 끄적대며 희망사항만 적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일 뿐.
아마도 수필 수업을 들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스스로에게 '아름다운'의 형용사를
붙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생각을 바꿔 가장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의 눈을 의식하는, 무관심한, 때론 비겁한, 은근히 뭐 있는 척 하고 싶어하는,
사실 아무 것도 없는, 무모한, 노력보다 더 큰 대가를 바라는, 변덕스러운..'
써놓고 보니 소름 돋을 만큼 싫은 자아가 보였다.
아름답기는 커녕, 아름다움 근처에도 갈 수 없는 내가 아닌가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그저 나오는 건 한숨 뿐이었다.
나는 왜 아름답지 못한 것일까.
24년의 삶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타성에 젖어 살아왔고, 남의 모습만을 모방하며 살기
바빴던 시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홀로서지 못했기에 나를 볼 수 없었고,
그렇기에 아름다움의 기준 역시 외적인 판단 요소가 언제나 개입 돼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따라서 나는 현재 아름다울 수 없었고,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내 열정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던가.
세상에는 세상을 밝게 하는 사람이, 자신의 열정에 취해 사는 사람이,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참 많이 있다.
그들이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완연히 홀로선 '나'를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서전을 내지 않아도, 성공기를 자랑하지 않아도 홀로선
자아를 가졌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바라봐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남에게 내 아름다움을 인정받고 싶어하지 않는,
진짜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5월 23일 #8
딸아, 연애를 해라
신문방송학과 200201325 박지선
오랜만에 내린 비는 그 경쾌한 소리로 내 마음을 공명한다.
날씨가 후덥지근해 지더니 이내 짧았던 봄은 가고 달갑지 않은 여름에 바짝 다가섰다.
스무 살을 넘기고, 스물 하나와 스물 둘 그리고 스물 셋을 지나 스물 넷이 되면서
나는 그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내 모든 감각과
신경을 통해 느끼고자 했다.
‘봄이 가는가 보다, 혹은 여름이 오는구나, 겨울이 왔구나.’
아마도 삶의 흐름을 느끼게 되었나 보다. 더불어 스무 살을 넘기면 어른이 될 것이라는,
무언가 더욱 뚜렷해질 것이란 열 여덟의 믿음과 달리 결국 언제나 같은 궤도를 돌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채게 되었나 보다.
‘불안이 청춘의 묘미라고?’
내가 살아온 인생은 보여주기-showing-에 길들여진 삶이었다.
그리고 승자가 되기 위한 삶이었다. 패자가 되어 본 적이 별로 없었을 만큼
치열했던 시간이었다. 욕심을 열정이라 믿어왔고, 바람을 희망이라 생각했으며,
경쟁을 자아 발전의 과정이라 여겨왔다.
그래서 20대가 되어도 여전히 불안한 삶을 스스로 위로하며,
그것이 곧 삶에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의 반증이라 믿어왔다.
마음이 원치 않아도 그 마음을 달래고 내키지 않는 길을 가게 하는 것이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이라 여기며 언제나 내 마음 깊은 곳의 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잘 지내다가도 그 척박한 삶에
염증을 느낄 때가 있었고, 그럴 때 마다 또다시 나는 내 욕망을 억누르는
길고 긴 연습에 열중해왔다.
터질 것 같은 불안을 청춘의 묘미라 여기면서 30대가 되면
이 같은 불안이 종식될 것이라는 아주 강한 믿음과 함께.
‘내가 열 여덟 살 땐, 대학만 가면 내 모든 불안이 사라질 줄 알았지.’
내가 지금 원하는 바를 이뤘을 30대가 되면 나는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적어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을까? 미쳐버릴 것 같은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긴 한 걸까?
확신이 서질 않았다. 나는 열 여덟, 선배들이 수능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공부 열심히 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대학만 가면 돼. 그러면 다 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지겹게 불안한 오늘은 상상도 못했던 날 아니었던가?
서른이 되면 마흔이 되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마흔이 되면 쉰이 되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그렇게 언제나 바람만으로 삶을 살아가고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은 아닐런지.
‘어른이 되자.’
언제나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동화 속 어린아이의 생각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겠다. 인생은 무모한 희망으로 바뀔 수 없음을 알겠다.
팽팽한 긴장감을 풀어나가는 방법이 나를 알아가는 과정, 사랑을 깨우쳐 가는 과정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을 것 같다. 스스로 만들어 둔 삶의 틀을 벗어나 통찰을 경험할 수 있다면,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고, 언제나 채찍질하는 자아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내 인생은 내일이 아닌 오늘도 행복할 수 있겠구나.
마음 속에 꿈틀대며 자라왔던 미움과 서러움도 결국엔
모두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 익숙함에서 탈피할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겠구나.
오롯이 홀로선 어른의 전 존재로서 내 길을 걸을 수 있다면
나는 10년 후 행복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구나.
‘딸아, 연애를 해라.’
어른이 되면 나는 꼭 한 번 연애를 해보고 싶다.
나는 아직까지 연애질도 한 번 안 해본 사람이다.
그렇기에 가짜 사랑 말고 진짜 사랑에 거는 기대가 상대적으로 크다.
관계에 자유로운 연애를 해보고 싶다. “난 니꺼, 넌 내꺼” 유치한 말놀음이 아닌
가슴이 공명할 사랑에 인생을 걸어보고 싶다. 규정된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
오롯이 마음만이 통하는 가운데 함께 숨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다.
그럴 수만 있다면, 척박하고 날카로웠던 내 삶에 마침내 여유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의 내 삶은 진짜 사랑을 알기 위해 나를 찾아가는 과정 안에 존재하기를 바란다.
진짜 사랑을 찾는다면, 내 모든 열정과 기운이 그 삶의 가운데 자리할 수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연애를 하게 될 때, 정말 이렇게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열정이 묻어난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딸아, 연애를 해라. 문정희.
딸아!
연애를 해라!
호랑이 눈썹을 빼고도 남을 그 아름다운 나이에
무엇보다도 연애를 해라.
네가 밤늦도록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두드리거나
음악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몹시 흐뭇하면서도 한편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단다.
그동안 너에게 수없이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마는,
또한 음악이 주는 그 고양된 영혼의 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마는,
그러나 책보다 음악보다 컴퓨터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역시 사람이 사람을 심혈을 기울여 사랑하는 연애가 아니겠느냐.
네가 허덕이는 엄마를 돕겠다는 갸륵한 마음으로
기꺼이 설거지를 하거나 분리된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갈 때면
나는 속으로 울컥 화를 내곤 한단다.
딸아!
제발 그 따위 착한 딸을 집어치워라.
그리고 정숙한 학생도 집어치워라.
너는 네 여학교 교실에 붙어 있던 신사임당의 그 우아한 팔자를
행여라도 부러워하거나 이상형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 테지.
혹은 장차 결혼을 생각하며 행여라도 어떤 조건을 염두에 두어
계산을 한다거나 뭔가를 두려워하며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은
아닐 테지.
딸아!
너는 결코 그 누구도 아닌 너로서 살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당당하게 필생의 연애에 빠지기 바란다.
연애를 한다고해서 누구를 카페에서 만나고 함께 극장에 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종류를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리라. 그런 것은 연애가 아니란다.
사람을 진실로 사귀는 것도 아니란다.
많은 경우의 결혼이 지루하고 불행한 것은
바로 그런 건성 연애를 사랑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딸아!
진실로 자기의 일을 누구에게도 기대거나 응석 떨지 않는
그 어른의 전 존재로서 먼저 연애를 하기를 바란다.
연애란 사람의 생명 속에 숨어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푸른 불꽃이 튀어나오는 강렬한 에너지를 말한다.
그 에너지의 힘을 만나보지 못하고 체험해보지 못하고 어떻게
학문에 심취할 것이며 어떻게 자기의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냐.
그러나 세상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깊고 뜨겁고 순수한
숨결을 내뿜는 야성의 생명성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솔직하게 말못할 것도 없다.
나는 아직도 제일의 소원의 하나로 연애를 꿈꾸고 있단다.
오랫동안 시를 써왔지만 그보다 더 오랫동안 수많은 덫과
타성에 걸려서 거짓 정숙성에 사로잡혀 무사하게 살아왔다.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 그런 범주였다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딸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제발 이제부턴 다이어트를 멈추어라.
자본주의 상인의 줄자나 저울에나 맞는 그 나약한 몸으로 21세기를
어떻게 살아내려고 몸무게를 줄이느냐.
날씬한 허리, 균형 잡힌 몸매를 원할 때가 있다면
그것은 건강을 생각을 할 때 딱 한 가지뿐이다.
땀 흘려 일하고 입을 쩍 벌려서 상추쌈을 먹고 늑대 같은
야성의 힘으로 아이를 낳고 또 사랑을 하는 그런 넘치는 에너지를
가진 여성이 되거라.
탐스럽고 비옥한 대지와 무한한 생산성이야말로
여성의 진정한 힘이요, 미의 원천이란다.
다가오는 세기의 진정 아름다운 여성은 그렇듯 넘치는 야성과
넓고 순수한 힘을 지닌 여성일 것이다.
20세기의 업적의 하나로 남녀 차별과 고정관념이 무너진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이제 말라깽이가 아름답다는 고정관념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얼굴이 검은 여자도 아름답고 뚱뚱한 여자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 보아라. 얼마나 시원하고 편하고 멋있느냐.
몸이란 원래 그 자체의 음악을 가지고 있다지 않니?
자신의 몸을 자본주의 상인들이 만든 유치한 옷걸이로
전락시키거나 짧은 수명의 유행 상품으로 변장시킨
줄도 모르고 끝없이 몰려다니는 가련한 미인군이나 막무가내의
소비의 인질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딸아!
지금 막 코앞에 다가오는 세기는 틀림없이
여성의 세기가 될 거라고 한다.
어서 네 가슴 속 깊이 숨쉬고 있는 야성의 불인
늑대(archetype)를 깨워라.
그리고 하늘이 흔들릴 정도로 포효하며 열정을 다해
연애를 하거라.
누구보다 바쁘게 열심히 대학 4학년을 보내고 있는 막역한 고등학교 친구들과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가볍게 전화통화하거나 혹은 시간을 내 마주 앉아 있을 때면
우리는 유난스레 학창시절을 되새기곤 한다.
학생회장이었던 180cm 장신의 해님이와 시끄러운 우리 틈에 그나마
조용하고 나직한 말투를 가졌던 성애, 글을 너무 예쁘게 섰던,
그러나 말뚝박기의 여왕이었던 서화. 학창시절 누구나 그랬을 테지만,
우리는 퍽 모범적인 학창시절을 보냈다. 학교임원자리는 모두 우리 차지였고,
학생회일도 무척이나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놀 때는 시원하게 놀았고, 모두 전교 10등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깍쟁이 같은 성격에 이상하게 혐오증이 있어서 성격은 다들 괄괄했다.
우린 정말 두려울 게 없었다. 그래서 일까? 만 22년 8개월의 삶 동안 가장 빛났던
우리 고등학교 학창시절은 대입이라는 험난한 산보다 더 험난한 산을 건너야 하는
지금의 우리에게 청량음료와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햇수로 4년이 흘렀고, 어느새 대학을 졸업할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생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머무는 순간은 찬란했던 내 고등학교 학창시절이라는
사실은 단 한 번도 의심의 대상이 되거나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엊그제부터 카페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또 예전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생각은 과거라고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면서 그 자연스러웠던 나와 내 친구들의 행동을
조금 빗겨 바라보기로 했다.
과거에 대한 단순한 회상을 넘어 우리는 언제부턴가 그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생각을 과거로 돌려 그 시절 학생회장으로, 반장으로, 모범생으로 자신을
안주시키는 일. 그러면서 버거운 현실을 탈피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과거에 대한 집착을 통해 나와 친구들의 시간을 2001년 인성여자고등학교 3학년 교실로
돌려놓고, 외대 4학년 박지선이 아니라 인성여고 3학년 박지선을 바라보면서
아직도 나는 신명 났던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현실과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켜
우리를 철저하게 현실에서 배제시켜 버린다. 우리는 과거를 이야기하고,
과거를 살아간 셈이다 적어도 그 시간에는.
흔히 사람들은 아프거나 힘들 때 자기 통제를 위한 방법으로 생각의 작용과 의식의 작용에
더 없이 의지하곤 한다. 아름다웠던 순간이나 혹은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을 떠올리면서
현재를 합리화시키고 무조건 더 좋게 보려 애쓰고 또 애쓴다.
생각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평소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또래보다 많다고
자만하는 나 역시 그렇다. 생각의 습관은 인간이 오롯이 현재에 존재할 수 있는
통찰의 능력을 빼앗고, 언제나 현재의 삶에 과거를 삽입시켜 버린다.
이는 결국 내 안의 분열을 일으키고, 종국엔 모든 것을 파해버릴 수 있는
무서운 힘을 가졌다.
이제 나는 이 무서운 힘을 어떻게 경계해 나가야만 하는 것일까?
일 년 전 부모님께서는 허물어져가는 빌라 한 동을 한 채씩 매입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6개월 후, 그 여섯 채짜리 빌라 한 동이 철거에 들어갔다.
코너라는 빌라의 위치는 상가가 들어서기에 좋은 목이었다.
주민들의 항의와 반대를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철거가 시작되자 옆 동 빌라 주민들은 안전을 문제 삼으며 보상을 요구해 오기 시작했다.
동 대표라는 사람이 아버지께 가구당 150만원씩을 지급해 줄 것을 요구해왔다.
여섯 가구, 900만원의 돈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그 정도의 보상을 각오하고 계셨기에
별 마찰 없이 그들의 요구에 응해주셨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건물이 완공되고 1층 입점 예정이었던 식당의 인테리어가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이번엔 코너 왼쪽 빌라의 사람들이 인테리어를 방해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세상은‘있는 놈이 더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있는 놈들’은
'없는 놈’의 가난을 노력의 부재와 게으름을 앞세워 비난하기에 바쁘다.
애초부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단은 암묵적으로 서로를 적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서로에게 이해는 용납되지 않는 무엇인 것 같다.
서로 간 똘레랑스만 있었다면 이웃간 기분 상하거나 시끄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똘레랑스란 아직 저 밖에 있는 고차원적 이야기인 것만 같다. 그 사실에 서글퍼졌다.
그들을 비난하고 꼬집기 전에 나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채면서
내 안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갈등도
해결될 수 없다는 강의를 생각했다.
나 역시 나와 반대되는 집단과 그룹에 대한 이해에 앞서 차이를 운운하지 않았던가?
‘내가 잘났다, 네가 잘났다’를 따지기에 앞서 ‘너는 나와 다르다.’는 지배적인 생각을
지우지 못했기에 지난 날 수많았던 갈등을 겪었고, 미처 그것들을 해결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모든 원인이 결국 내 안에 존재한 자기 분열의 결과라는 것도 모르고
갈등의 해결의 실마리를 밖에서만 찾으려 애쓰지 않았던가?
하루에 열 두 번도 더 넘게 작든 크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고,
그 안에서 언제나 부서지는 내적 갈등을 겪는 것이 사람이 아니던가.
자기 분열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는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갈등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내가 너고 네가 나다.’ 그것이 어렵다면 한 번쯤 ‘내가 너라면..’
30초만 생각해도 갈등과 분열을 줄여갈 수 있을 텐데.
우리 사회는 법과 제도, 규율과 규칙을 앞세워 집단과 집단을 나누고,
개인과 개인을 나누어 분열적일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법을 없애고 규율을 어기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언제나 최후의 보루라 여기는
‘법’ 역시 결국엔 두꺼운 법전, 빼곡한 글씨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체제임을
기억하자. 그리고 이제 우리 모두 자신의 내적 갈등을 바라보자.
그리고 변화하자. 그것만이 최후의 보루다.
거울을 들여다 보며 내 얼굴을 보는 일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지만,
그 일상적인 일조차 생각이 개입되면 골치 아파 지기도 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늦은 밤 세안 후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가끔 나는
‘넌 누구니?’ 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그러한 질문을 30번만 되새겨 보면
정말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이라면 이해가 될까?
처음에는 질문을 던진 자와 질문을 받은 자의 구분이 명확하다.
아니, 분명 내 속의 자아가 ‘나는 이런 이런 사람이야.’ 라고 말해줄 듯 하다.
혹은 스스로에 대한 자족감이나 그 날 상황에 따라 자괴감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러한 질문을 30번 혹은 5분만 계속 던져보면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그 상태는 공(空)과 비슷한데 생각의 꼬리를 무는
그 무언가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면서, 질문의 대상자도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 단계에 이르면 나는 대개 고요해지나 가끔은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하다.
관찰의 대상이 곧 관찰자임을 알아채는 일은 이론적으로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닌 듯 보인다. 조금은 충격적이고 억울한 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넌 누구니? 누구야?’ 쉼도 없이 무언가를 쫓아가게 되면서 마주하게
되는 현상은 지극히 단편적인 일이긴 해도 관찰의 대상이 곧 관찰자라는 사실을 가장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간단한 실험과 같다.
요즘 나는 학교와 학원, 도서관, 집을 오가는 단편적인 생활 반경 안에 삶의 사이클을
돌리고 있다. 관찰의 대상이 곧 관찰자라는 사실을 뇌로 인지한 지는 퍽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니 대개의 경우, 나는 그러한 퍽퍽하고 타이트한 삶 속에서도 쫓기고
있다거나 불안해 한다거나 하는 등의 일은 잘 하지 않는다.
이는 지나친 낙천도 아니요, 맹목적인 긍정적 마인드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지난 주 주말 연이어 받은 12시간의 수업과 거리의 자유로워 보이는 사람들
탓이었는지 일요일 늦은 밤 강남대로를 걷는 내 상태는 그야말로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힘들다. 뭐야 왜 이렇게 사니, 괜히 의전(의학전문대학원) 간다고 해서
생고생만 죽어라 하는구나. 솔직히 보장은 있는 거야? 이렇게 열심히 해도 원서
한 곳밖에 못 넣으니 떨어지면 1년 또 해야 하잖아.. 그 때 남들 눈은 어떨까?..’
언제나 알고 느끼고 있던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관계가 맥없이 무너져 버린 순간이었다.
그렇게 꼬리를 물고 물다 어느 순간 수업 시간에 들은 ‘쏠라당’이 떠올랐다.
아직 내겐 통찰의 내공이 쌓이지 못한 듯 하다.
이미 머리와 몸이 따로 놀고 있질 않는가. 관찰자가 곧 관찰대상임을 내 온 몸이
깨달아만 준다면, 몸이 피곤하다고 곧바로 쏠라당 빠져버리는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현각 스님은 육바라밀 중 최고의 덕목은 지혜라 말씀하셨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씀과 다를 바 없는 말씀이다.
‘-때문에’ 가 아닌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 상태에서 비롯되는 지혜를 지닐 수만 있다면,
매번 나를 쫓는 나에 또다시 쫓겨버리는 일은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텐데.
새벽 5시 30분 마치 비명 같은 알람이 날 깨운다.
“이젠 그만해도 돼. 이 아가씨야. 그만 좀 징징대라.”
나는 오늘 아침도 짹짹대는 알람 시계에게 한 소리를 해댄다.
아. 이 생활도 벌써 몇 달인가? 6시 30분, 집을 나선다.
나는 불과 지난 해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 까지만 해도 대학 입학 후 꼬박 3년 이상을
‘기자’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온 여느 신문방송학과 학생과 다를 바 없었다.
방송사 인턴과 그룹 스터디, 대학 연합뉴스 프로듀서.
내 대학생활의 3/4은 기자가 되고자 하는 열정 안에서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학 3학년 1학기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지던,
그러니까 작년 이 맘 때 나는 알 수 없는 침체 감에 빠져들었다.
꼬박 10년을 원했던 직업이었고, 학교 선택도, 학과 선택도 주저하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사생활과 연애보다는 언제나 방송이 우선이었고, 취재가 좋았다.
대학생 기자로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기사를 쓰고, 카메라 버튼을 눌렀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어느 순간 ‘기자, 숨막힌다.’ 라는 생각을 했다면 믿어질 노릇인가?
순간의 방황이고, 꿈의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라고 애써 자위(自慰)했다.
곧 나아질 것이란 막연한 생각을 앞세우고 그렇게 석 달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일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생각을 비우고 마음을 정리할 공간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기말고사가 끝난 바로 다음 날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다.
정확히 한 달을 여행했다.
철저한 혼자의 무방비 상태를 즐기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쌓이고 쌓여 언제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나 싶을 정도의 많은 것들을 버리고
주워 담으면서 나는 삶에 대해 그 어느 때 보다도 솔직하고 담담한 성찰을 할 수 있었다.
파편 조각을 하나로 맞추듯, 퍼즐을 완성하듯 나는 이제껏 숨기고 들추고 싶지 않았던
그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가 보고자 했다.
국경을 넘는 고요한 새벽에도, 관광객으로 시끌시끌한 스페인 광장에서도
나는 내 생각 속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과정은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 속에 혼자가 되어
이제까지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데서 시작한 첫 걸음이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모습들,
꿈과 목표를 이루는 과정이 어느새 생활로 이어져 열정은 배제된 채,
뛰어야 하는 이유도 잊은 채 맹목적으로 달려왔던 시간들.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중앙역 근처의 작은 모텔 방에서
마리화나와 환락의 거리를 바라보며 나는 내 대학생활 전부와 지난 10년의 내 삶을
결정해 왔던 내 목표와 결별하기로 마음먹었다.
못내 시원 섭섭하고 후련했다. 그 많았던 시간들과 노력을 단 번에 버린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열정이 사라진 길을 걷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의미한 일이었다.
목표가 없어진 셈이었다. 말하자면 내겐 부표도 사라졌고, 표지판도 사라진 것이다.
여행의 반을 넘긴 시점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다음 날 나는 ‘플란다스의 개’의 배경이 되었던 안트베르펜으로 향했다.
날은 잔뜩 흐렸지만 내 마음은 개운했다.
내 가슴과 발목을 죄고 있었던 그 무언가가 사라졌기에 몇 년 만에 느끼는
평온함 속에 안락하기까지 했다.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작은 모텔방에 놔 두고 온 내 꿈 덕에 며칠 동안 나는 걱정도,
근심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트베르펜의 고요한 길가를 거닐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뭘 하고 살아야 할까. 10년 전 내 삶의 방식과 삶의 의미에 대한 생각과
고민 없이 그저 재미있을 것 같아 목표를 설정했던 열 세 살의 내 모습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모든 열정을 소진하고도 남을 그런 일이 필요했다.
나는 본래 내 삶을 모두 타인을 위해 희생할 만큼의 그릇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교 입학 후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살고자 하는 작은 바람이 가슴에
일기 시작했다. 농활을 다녀오고, 취재를 다니면서 여러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마주했다. 그 때마다 나는 이 세상에는 도움과 나눔의 손길이 간절히 필요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작지만 그들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자 원했다.
어쩌면 그런 단편적인 생각들이 모여 지나치게 경쟁적인 ‘기자’라는 직업의 매력을
떨어뜨리고, 종국엔 암스테르담 모텔방에 내 소중했던 꿈을 버리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자를 꿈꿀 때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종군기자였다.
총성과 모래바람이 이는 그 곳에 서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그 곳에 선다고 해서
피 흘리고 눈물 흘리는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겠는가? 내가 아무리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사를 작성한다고 해도 그들의 아픔이 사그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은 여행의 반은 이와 같은 생각과 상념 그리고 고민 속에서 지나갔다.
그리고 유럽 여행의 마지막 날, 런던에서 나는 결심했다. 삶의 고통과 희망의 끝자락에
서 있는 많은 이들에게 가슴 따뜻한 커뮤니케이션 통로가 되어주겠노라고.
경쟁 속에서 내 것을 탐닉하기 위해 언제나 가슴 졸이며 살아가는 삶을 포기한 대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감으로써 나도 행복해 질 수 있는 삶을 선택하고자 했다.
한국에 돌아와 의학전문대학원 진학 준비에 들어갔다.
내가 선택한 길은 ‘의사’였다. 누군가는 직업의 안정성과 돈벌이를 이야기하며
내 선택을 칭찬했다. 그러나 내가 이 길을 택한 이유는 직업의 안정성 때문도 아니요,
돈벌이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가진 기술을 통해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치료해 줄 수 있다면, 그래서 전쟁의 포성과 총소리가 끊이지 않는 그 곳에
종군기자가 아닌 ‘국경 없는 의사모임’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다면,
혹은 1년에 두 번 농가를 방문해 옥수수순 제거하고 고추 따는 일이 아니라
당장 그들의 끊어질 듯한 허리와 하루 종일 쑤셔대는 무릎을 치료할 수 있다면
나는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든 것들도 내 욕심에 기반한 일들이지만, 내 삶의 만족을 위한 수단들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 길을 걷고 싶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내가 가진 모든 열정과 열의를 바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의사의 꿈을 이룬다고 해서 내 삶이 어느 순간 의미 있어 진다거나
그 자체가 완연한 열정의 소진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공부를 하다가도 이따금 케이의 말씀을 떠올릴 때면 가슴 한 구석이
공허해 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 나는 그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고,
단지 이해의 과정에 서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러리라.
그러나 나는 현재의 내 삶에 내 모든 열정을 태우리라 마음먹었다.
화난 마음으로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두려움으로 미래를 내다보지 말 것이며,
다만 깨어있는 눈으로 주위를 보라 했던 나폴레옹의 말처럼,
그리고 현재의 삶에 내 모든 열정을 토해내길 원하는 케이의 말씀처럼
나는 오늘도 130여 일 후의 시험 앞으로 담담하게 걸어간다.
한 이 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가을볕이 좋았던 날,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는 대대적인 서적 할인 판매 행사가 있었다.
워낙에 할인폭도 컸고, 정말 나른해 지기 쉬운 가을날 한 손에 책 한 권 끼고 있으면
좋겠단 심산에 여러 가지 책들을 뒤적였다.
내가 좋아하는 클림트와 에곤쉴레의 그림책이 퍽 합리적인 가격에 나와있길래
덥석 집어 들었다. 계산을 하러 가려다 이름이 확 띄는 책이 있어 생각도 않고
집어 들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그 책이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였다는 것을.
까마득한 옛날이 돼 버린 것 같지만, 그 당시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열 페이지 정도 읽다가 바로 에곤쉴레의 그림책을 펴 들었던 생각이 난다.
창피한 일이겠지만 혹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그 뒤로 케이의 책은 방 안 책꽂이 한 켠에서 내 관심 밖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년 전에도 삶에 진지하고자 하는 마음은 오늘과 같았을 텐데 왜 케이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걸까. 각설하고, 정말 매일이 뭐가 그리 바쁜지 조용히 앉아
책 읽을 여유도 없이 왔다 갔다 했던 탓에 나는 ‘지구별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꾸역 꾸역 머리와 가슴으로 느끼기 위해 일주일 내내 새벽 3시까지 뜬눈이어야 했다.
책을 읽어갈 때마다 함께 가자, 함께 느끼자 말씀하시는 교수님의 얼굴이 오버랩 됐다.
크리슈나무르티 역시 가르침과 교육이 아닌 공유를 원했다.
그래서 어쩌면 덜 두려웠는지 모르겠다. 만 22년 6개월의 삶 동안 배우고 습득하고
내 것이라 생각해 왔던 혹은 진리라 생각해 왔던 모든 것을 백지화하면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6살, 놀이공원에서 엄마를 잃어버렸던 그 때만큼이나 막막한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함께 느끼고 함께 가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달빛 벗삼듯 위안이 될 듯했다.
1부를 읽어 내려가고 난 후의 느낌은 사방에 깨진 맥주병 조각이 널려있는 듯 한
위태로움과 불안함이었고, 2부를 읽어 내려간 후의 느낌은 그 깨진 맥주병 조각을
밟아가는 느낌이었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교수님처럼 케이 역시 방향을 함께 고민할 뿐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어찌되었든 나는 깨진 채 흩어져 있는 병 조각을 애써 치우고
싶지 않았다. 오롯이 가능한 내 안의 통찰과 보이지는 않지만 단단히 연결 돼 있는
나와 타인의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아프지만 조용히 한 발을 내딛길 원한다.
크리슈나무르티를 마주한 지 이제 한 달이다.
직관적 이해와 즉각적 반응은 솔직한 말이지만 아직 숱하게 깨부술 게 많은 내게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 몸과 마음 그리고 뇌 속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함을 송구스럽지만 고백한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 나는 통찰과 이해 그리고 진지한 삶에 대해 고민한다.
그런 날 발견했다. 이내 고민하다가도 또 다시 생각의 늪에 발목 잡히는 자신을
발견하긴 하지만, 서두르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정말 한 학기 강의가 끝나고 나서 비로소 시작되는 이 강의의 참 의미를 깨달으며
함께 갈 수 있다면 좋겠다. 기분이 좋다. 이제 내겐 적어도 깨진 유리 조각을 밟아도 좋을
마음의 준비가 돼 있으니까.
그리고 책장에서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다시 찾게 되었으니까.
1996년 햇빛이 유난히 반짝이던 5월의 어느 날,
중학교라는 울타리 속에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생생한 폭력을 접했다.
화단 청소를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교실로 올라왔을 때였다.
미정이는 수연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찰싹-‘ 소리와 함께 수연이의 손바닥이 미정이의 뺨을 향했다.
열 다섯 소녀의 고사리 같은 손이 흉기로 변했던 순간이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한 마디의 대항도 하지 않는 미정이와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을 해대는 수연이, 그리고 수연이 옆에서 맞장구를 치고 있는 몇몇의 아이들.
“야 너희 왜 그래?” 당시 반장이었던 내 입에서 나온다는 소리가 고작
“야 너희 왜 그래?”였다. “아무 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마. 주제 모르고 까부는 애
혼 좀 내주고 있는 중이야.” 수연이는 씨익 웃으며 내게 말했다.
수연이는 그 당시 학교에서 소문난 무서운 아이였다.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이 고작 학교가 전부였던 우리에게 수연이는 건드려
좋을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아무 일도 아니란 수연이의 말을 뒤로한 채,
비겁하게 등을 돌려 집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수연이가 무섭고 나쁜 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 기분 나쁜 느낌이 꼭 수연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비겁한 나, 자신이었다. 수연이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나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친구를 모른 척 했다.
밤새 한 잠도 잘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미정이를 기다렸다.
단 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눈과 얼굴이 부어 오른 미정이가 교실로 들어왔다.
얼른 다가가 “괜찮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정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는 반장을 맡아왔던 학창시절 내내 누군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내가 속한 사회의 핵심권력 혹은 反 사회분자 세력들과 적당히 타협하고 줄타기를
해 왔던 것 같다. 적당히 눈감아주고 적당히 도움을 요청했으며,
적당히 합의를 도출해 내려 노력해왔다. 그것이 학생과 교사 혹은 학우와 학우 사이에
서 있는 반장의 역할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그 당시 내가 처했던 그 많았던 행동들이 실은 얼마나 잔인하고 심각한 폭력성을
내재한 것들이었는지. 대학에 입학 하고 더 넓은 사회에 속한 오늘날 까지도
그 심각한 폭력성은 비겁함의 존재를 감추고 너무나도 다양한 모습으로 내 안에
존재해왔을지 모른다. 실제로 나는 대학에 입학 후, 부쩍 나와 타인 사이 경계를
그어놓고 내가 관여해도 될 일과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책임의 경계 역시 확실해 지는 듯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황폐해지고 공허해 지는 것은 내 마음뿐이었음을 깨닫는다.
열 다섯 소녀의 가슴에 도사렸던 비겁함과 잔인한 폭력성은 스물 넷 청년의 가슴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는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지만,
이제 나는 천천히 그 폭력성 안으로 눈을 돌려 보려 한다.
아직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잔인함과 직접 마주해 본다면, 희미하게 나마 찾아낼 수도 있을 듯 하기에.
몇 번을 고치고 고치다 결국엔 마음에 들지 않아 또 다시 backspace 키를 누르고 말았다.
한 때 기자를 꿈꿨고 지난 몇 해 동안 수 십장의 기사도 작성했었는데
막상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니 시작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 혹은
무슨 이야기를 먼저 써 내려가야 할지, 부끄럽지만 망설임이 손가락 주변을 맴돈다.
20대는 누구에게나 한밤중 자다 일어나 통곡하고 싶은 시간이라 했던 황지우 시인의 말이
요즘처럼 가슴에 와 닿는 때가 없다. 며칠 전 고속도로에 진입하자마자 누군가
내 감정선을 건드린 것도 아니고,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하늘과 조우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차에서 즐겨 듣던 BGM이 그날따라 슬펐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가슴이 저려왔다. 지난 몇 년 동안 울어본 적이 없을 만큼 감정 정리에는 자신 있는 나였는데
차선을 볼 수 없어 갓길에 차를 세워야 했을 만큼 서럽게 울어댔다.
왜 그렇게 엉엉 울어댔는지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진로 선택에 있어서의 고민, 혹은 절절하게 가슴을 저미는
사랑. 이런 것 때문은 아니었다. 불확실한 미래야 지금 하고 있는 공부 열심히 하다 보면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이 분명하고 진로 선택이야 벌써 예전에 해 둔 터라 이리 저리
잴 필요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더구나 나에게는 가슴 아픈 사랑의
기억도 없다. 왜 울었을까 한참을 생각해봤지만, 역시나 이유는 확실하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했지만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유 없었던 그 서러움과 울음이
어쩌면 20대 황지우 시인의 그것과 닮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10대에는 대학에 입학하면 그 시절 내가 안고 있었던 불안함을 떨쳐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나는 내 학창시절 하루하루를 함부로 보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좋은 대학, 원하는 과에 진학하면 그 시절 나를 죄고 있었던 족쇄 같은
불안을 없앨 수 있단 생각에 목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스무 살 여름에 알았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풀지 못하면 불안함은
영원히 떨쳐낼 수 없는 그림자와 같을 것이라는 것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뉴욕으로 향했다. 누구에게도 침범 받지 않을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동안 나는 매일같이 센트럴 파크를 찾아 거닐며 불안의 이유를 찾고자 애썼다.
그러나 센트럴 파크의 평온함도, 허드슨 강의 고요함도,
다운 타운 재즈바의 그루부(groove)도 내게 이렇다 할 답을 제시해 주지는 않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 했던가, 고민의 기회를 훗날로 기약하며 뉴욕에서의 7개월의
생활을 정리하고 이듬해 초봄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귀국 후 나는 무조건 바쁘게 살려고 노력했다. 눈에 보이는 결과는 퍽 만족스러웠다.
연이어 장학금을 받았고, 대학 연합뉴스의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KBS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다. 하루하루에 충실하자는 생각이었고,
오늘이 아닌 어제와 내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와 목표를 찾는 일은 일단 접어 둔 채 뛰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지난 해 6월부터 내 심경에는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의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첫째로, 그토록 원하던 ‘기자’라는 직업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며
둘째로 직업이 아닌 삶과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앞섰다.
3년 전 풀지 못했던 그 문제를 풀어야 할 때가 온 듯 했다.
첫댓글 글쎄요. 우선 연애라도 그렇게 해 보세요.
정말 깨우친 사랑, 필생의 연애에 빠질 수 있다면 그때 바라보는 인생은 어떨까요? 그런 사랑에 빠져본 사람을 만나만 봐도 좋을텐데요.
케이 책 읽으면 되지, 뭐. 그건 참 아름다운 산이거든요.
'의지'가 아니라 '지성'으로 살 수 있어야, 그게 올바른 마음작대기일진대.. 그 길을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지..
24년 동안 의지만으로 살아와서 정말 주저앉아 펑펑울고 싶었던 때가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 있었어요. 지성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기위해 걷고, 찾고 또 해볼게요 교수님. 이젠 무엇보다 더없이 중요한 일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