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고독사
대통령을 구한 남자 올리버 시플 Oliver Sipple (November 20, 1941 – February 2, 1989), San Francisco,
한 인간이 타인의 생명을 구하고 그로 하여 스스로 파멸의 길로 갔으나 역사는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리버 웰링턴 "빌리" 시플(영어: Oliver Wellington "Billy" Sipple)은 미국의 남성으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암살 시도를 막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해병대로 복무한 전쟁영웅이었다. 1975년 9월 22일, 샌프란 시스코 유니언 스퀘어 광장에서 산책 중이었다. 사라 제인 무어라는 정신병자가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려는 것을 베테랑 군인인 그가 알아차렸다.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총알은 빗나갔다. 숨은 정의감이 발화한 순간이었다. 0.01초의 망설임만 있었어도! 이 무모한 행동으로 영웅의 탄생과 인간의 몰락이 동시에 일어났다. 인생이 그렇다. 운명은 그렇게 비정하다. 기자들이 이름을 묻자 그는 황급히 사라졌다. 그는 자신을 은닉하기를 원했다. 세상은 그것을 참지 못하고 그를 철저하게 파헤치다 못해 해부하기 시작했다.
제럴드 루돌프 포드 주니어(영어: Gerald Rudolph Ford Jr. 1913년~2006년)는 1974년부터 1977년까지 37대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 선거 없이 대통령이 된 유일한 인물이다. 그 또한 건강 악화로 895일 만에 대통령직에서 사임했지만 93세 넘게 오래 살았다. 취임 직후, 1974년 흑인과 백인 차별을 금지시켰다. 정직하고 친절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적으로 침체했던 시기라 대통령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1975년 뉴욕시가 파산지경에 이르고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기 록하고 실업률이 상승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의인을 외면했다. 집요한 아집과 경제난을 인정하지 않아 악성 스태그플레이션이 계속되었다. 변화와 혁신을 원했던 미국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2년의 재임 기간 동안 두 번의 암살 시도를 당했다.
대통령을 구한 서른세 살 젊은 영웅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아비투스 Habitus( 개인의 취향은 배경과 환경, 가치관, 분위기, 종교, 사상, 권력이나 계층과 같은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의 문제였다. 권력의 최상위 포식자인 정치인에 의해 모든 것이 지배되는 세상이다. 사람이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기득권이 그를 휘젓고 뒤흔든다. 우리 모두는 어쩌면 아비투스에 의해 아비규환이 될 수도 있다. 언론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휘두르는 권력의 메커니즘이 그를 궁지로 몰고 갔다. 그가 게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고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신상을 샅샅이 밝힌 언론사를 고소했으나 전부 다 기각되었다.
그의 정의감은 달랐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사회를 위해 봉사할 것처럼 떠드는 정치인들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단 한 사람도 정의로운 정치가가 없는 요즘 올리버 시플이 그리워진다. 정의감이란 스스로 떠드는 게 아니다. 혈액형처럼 본능 속에 숨어있다. 그는 언론사에 전화를 해 자제를 부탁했으나 그들은 그가 게이라는 사실을 천하에 공개했다. 그의 부모에게 찾아가 아들의 게 이 사실을 알리게 되고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님은 영원히 아들과 의절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다 외롭게 죽었다.
그의 죄명은 정의감, 시대를 앞서 태어난 죄이다. 물론 현재에 태어났어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공로는 무시되고 소외된 채 숨어 지네야 했다. 포드 대통령조차도 자신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에 냉대했다. 그와의 만남을 취소하고 감사편지 한 장 보내고 끝났다. 그 무엇도 원하지 않았던 정의감에 불타는 남자는 그렇게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카스트로 거리가 있다. 아름다운 무지개 빛깔이 곳곳에 널려있다. 무지개의 의미는 레즈비언·바이섹슈얼·게이·트랜스젠더의 존엄과 성소수자 운동을 상징하는 것이다. 각종 무지개색의 깃발로 자신이 LGBT 임을 알리는 매장들도 곳곳에 있다. 첫 동성애자 시의원인 하비 버드 밀크는 올리버 시플의 애인이었다. 그의 요청에 퀴어 인권 운동가인 길버트 베이커가 1978년도 <샌프란시스코 동성애자 자유의 날>을 위해 제작한 것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할 수 있는 그날이 올까? 언론이 훈훈한 미담과 정의를 위해 펜을 드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언론이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모든 것들에 회의가 든다. 아! 그리고 이젠 잊힌 변희수 하사가 떠오른다. 양볼에 도홧빛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는 인생의 봄만 보내고 스스로 떠났다. 복사꽃처럼 사라졌다. 동정과 미안함은 언론엔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은 사과를 하지 않는 절대 괴물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왜 그렇게 당당한 것일까? 언론이 무엇이길래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인지? 누군가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글이 아니라면 고민해 봐야 한다. 특종이라는 석청의 달달함에 물든 대중도 문제이다. 부자, 권력가, 불운한 자들과 자극적인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이 가장 신명 나는 일이 되어버렸다.
죽어야 겨우 동정심을 받을 뿐이다. 그게 다다. 특종에 굶주린 하이에나들은 여기저기 똬리를 틀고 도사리고 있다. 내 행복이나 의향 따위는 개뼈다귀 수준도 안된다.
파렴치한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이유 없이 당당하다. 언론의 집요함에 구토가 난다. 그는 제발 좀 그만해 달라고 신문사와 언론과 소송을 벌렸지만 결국 언론의 자유란 명목 아래 패소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불안감이 몰려온다. 이 감정은 죽음을 우습게 만든다. 불안의 친구는 죽음이다. 47살에 요절하자 갑자기 일어난 동정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이미 그는 떠나고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인간의 극악무도함은 집단이 형성되면 괴물이 되기 쉽다. 차라리 그럴 땐 무관심이 무분별보다 낫다.
언론의 냉혈한 보도가 차라리 냉철함이었더라면 한 명이라도 정의감에 불타는 기자가 있었기를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는 대통령을 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영웅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독실한 침례교 도인 그의 부모는 장례식장에 아들이 오는 것을 반대했다. 가족도 친구도 직장도 잃었다. 그 당시 동성애자로 살아간다는 건 고난도의 전투를 치르는 것과 같았다. 우리 모두는 완벽하지 않다. 편견이 얼마나 악령의 편견 언론의 무분별한 보도의 힘이 점점 더 커져가는 요즘, 힘없는 약자들은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다.
자극에 끌리는 인간들도 문제이다. 언론의 배후엔 언제나 타인의 파국과 비극을 기다리는 스캐빈저 (Scavenger 사체를 먹는 청소부 또는 주로 생존주의 상황에서 방어자가 없는 남의 물건을 훔쳐 가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우리가 아는 독수리들은 사냥 기술이 사실 좋지 않다. 죽은 동물의 사체를 먹기를 좋아하고 다른 동물의 사냥감을 뺏기를 좋아한다. 언론의 하이에나들이 인광을 발하며 주변을 맴돌았다. 시대는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맹수나 맹금들은 기회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죽음으로 값을 치러도 싸구려 동정만을 겨우 받을 뿐이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난 어디까지 파고 내려가야 할까? 갱도를 파고 내려가면 거기 답이 있을까? 언론의 폭력을 맛본 지금, 궁극의 힘을 쥐고 흔드는 언론의 폭력을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지? 모든 것이 답답해진다.
정의로운 기자가 몇이나 될까? 요즘 떼 지어 특종에만 매달리는 그들이 역겹다. 위대한 언론인이 그리워진다. 정의란 무엇이고 나로 인해 누군가의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명심해야 한다. 특종이 한 사람의 인생보다 중요한 것일까? 내가 그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돈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돈의 노예가 되고 권력을 얻기 위해 사이비 정의(pseudo justice)를 만들어낸다. 자신의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떠들어댄다. 진정한 정의감이란 첫째 바라는 게 없어야 한다. 둘째 스스로가 돌아보고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물론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니까 해당되지 않는다. 셋째, 정의감이란 기본 도덕률에 기반해야 한다. 명분 없이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들이 아니어도 우린 잘 살 수 있다.
포드가 죽었더라면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었더라면 그의 인생은 순탄한 항해를 했을 것이다. 1989년 2월 2일 사후 10일 만에 발견되었다. 고독하게 죽은 그의 방엔 TV가 켜져 있었고 잭 다니엘스(Jack Daniel's 아메리칸 위스키)가 놓여 있었다. 대통령을 구한 후 조현병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47세에 죽은 시플의 지인들에게 포드 대통령은 짧은 편지를 보냈다. 정신이 무너지는 순간 육체는 허물어진다. 포드가 정직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을까? 자신의 생명을 지켜준 의인을 보호해 주지 못한 무능력한 대통령이 과연 좋은 사람이었을까?
정의감으로 모든 것을 잃은 시플은 현재 샌프란시스코 남쪽에 위치한 골든 게이트 국립묘지에 안장 "되어 있다. 많은 희생자들이 세상에 다녀갔지만 인권친화적인 삶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우리는 또 어떤 제물을 신께 바치고 삶을 배워야 하는 것일까?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머리 위를 돌아다녀도 우리의 이성과 도덕적 관념은 발전하기 어렵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키튼을 걸치고 자유롭게 거리를 배회했던 그 순간이 오히려 나았으리라! 인권이 없는 세상에 인권사무소만 존재하고 있다.
하루하루 독사가 머리카락처럼 뇌를 감싸고 날 집어삼켰다. 삶과 죽음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하루에도 수차례 동반자살하자는 말을 누군가가 꺼내길 기다렸다. 정말 그렇게 힘들었다. 삶의 욕구가 강한 당신은 진정 잘 살아온 사람이다. 세상의 독화살을 다 온몸에 맞고 휘청거리며 걸어가는 밤들이 수년간 계속되었다. 언론의 악랄함을 생각하면 지구의 핵을 꺼내 터뜨리고 싶다. 나의 수많은 동지들, 그들을 향한 안타까움은 겪어본 자 만이 알 것이다. 언론과 정치의 극적인 이기주의에 처절하게 짓밟힌 지난 시간들이여 영원히 안녕!
그들은 권력의 하수인들이었으며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는 스캐빈저 같은 존재일 뿐이다. 내가 없는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주의 끝을 기다리는 게 차라리 합리적인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개(dog) 만들어준 인권위원회가 새삼 존경스러워진다. 난 동성애를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 난 그냥 그런 사람들도 있을 수 있구나 일뿐이다. 오른쪽 왼쪽도 내겐 의미 없다. 세상의 옳고 그름의 잣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옳다 그름을 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군자의 첫걸음이다.
"포드 부인과 저는 당신 친구의 죽음에 대한 슬픔에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 전 대통령 제럴드 포드, 1989년 2월"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랑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