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uritas
의심의
먹구름이
걷힐 때의
상쾌함
『레배카』
대프니 듀 모리에
의심한다는 것. 그것은 불행일 수도 있고 행복일 수도 있다. 아무나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과의 사이에 의심이 생길 수 있는데, 이것은 불행한 의심이다. 반면에 사랑하는 이가 아니라면 생길 수조차 없는 의심과 맞닥뜨릴 수도 있는데, 이건 부럽기까지 한 행복한 의심이다. 그래서 나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 사람도 강자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강자로서 다가온다. 아무리 가녀리고 약한 여인이라도 그녀와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는 어쩔 수 없는 강자일 수밖에 없다. 하긴,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 아닌가. 그래서 모든 의심은 강자에 대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강자의 조그만 변덕도 약자에게는 치명적인 생채기를 남길 수 있다. 그러니 약자는 항상 강자의 내면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던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하물며 부유한 귀족이면서 매력적이기까지 한 남자를 사랑하여 결혼에 이른 여인에게 사랑의 위력은 얼마나 대단할지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렇지만 동시에 이 어린 여인은 부유하고 멋진 남편을 항상 의심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던져진 것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남편을 따라 들어간 대저택 생활은 그녀에게 더 커다란 유혹을 갖도록 만든다. 맨덜리 성은 아직도 그 유명한 남편의 전부인 레베카의 흔적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비운의 사고로 죽고 사라졌겠지만, 레베카의 흔적은 여전히 저택의 모든 공간, 모든 식솔들, 심지어는 남편가지 지배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아무리 소중한 남편의 집이라지만, 레베카와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이 어떻게 유쾌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왜 나랑 결혼한 거지? 나를 사랑하기라도 한 걸까?”
대저택의 새로운 안주인이 된 ‘나’는 결혼 생활에 적응하기는커녕 너무나 불안하다. 물론 이런 불안감의 핵심에는 남편 맥심의 사랑에 대한 깊은 의심이 깔려 있다. 엘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로도 더 유명한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Rcbecca)』는 ‘나’라는 화자, 즉 젊은 드 윈터 부인이 아름다운 전 부인 레베카를 잊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의심과 불안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맥심은 ‘나’에게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레베카는 모든 사람에게 현모양처의 연기를 했을 뿐, 사실 악녀의 화신과도 같은 여자였다는 사실을, 심지어 맥심은 그걸 못 견디고 끝내 레베카를 총으로 쏴 죽이고는 보트 사고로 위장해 버린 사실을.
“레베카, 당신은 나를 경멸하겠지? 내가 당한 치욕과 자기혐오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맥심의 두 손을 내 가슴에 끌어당겨 쥐었다. 난 그의 치욕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말한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생각만 계속 메아리쳤다. 맥심은 레베카를 사랑하지 않았다.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 함께 행복했던 순간도 없었다. 맥심은 계속 말하고 나는 계속 들었지만, 그 외의 다른 말은 의미가 없었다. 내겐 중요하지 않았다.
(……)
“여보, 맥심, 내 사랑.”
나는 그의 손을 가져다 내 얼굴 위에 놓았다. 그리고 거기 입술에 댔다.
“당신은 이해할 수 있소?”
“그래요, 이해해요.”
하지만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얼굴을 돌렸다. 내가 그를 이해하고 말고가 어찌 중요한가? 내 마음은 깃털처럼 공중을 날았다. 맥심은 레베카를 사랑하지 않았다.(p.415)
두 사람 사이에서 의심과 불안이라는 암울한 분위기를 조장했던 레베카라는 유령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남편은 던 부인을 사랑했던 적이 없고, 심지어 증오까지 했다. 더군다나 남편은 마치 나이 어린 자신이 마리아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 앞에서 모든 죄를 고해성사하기까지 한다. 철저하게 자신의 속내를 보이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 아닌가. 모든 의심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자, 드 윈터 부인의 마음은
‘깃털처럼 공중을 나는’것처럼 가벼워졌다. 이제야 그녀는 남편이 지금까지 사랑한 사람은 오직 자기뿐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이때 드 윈터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감정이 ‘확신’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확신(securitas)의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기쁨이다.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말대로 확신은 의심이 없다면 발생할 수도 없는 감정이다. 의심을 충분히 일으킬 만한 원인이 사라져야만 확신의 기쁨이 찾아오니까 말이다. 낯선 여행길을 지도에 의지해 가고 있다고 하자. 교차로에서 호텔로 가는 길이 이쪽인지 저쪽인지 알 수가 없다. 지도를 몇 번이나 꼼꼼히 보아도 의혹은 풀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이쪽이든 저쪽이든 선택은 해야 한다. 그렇게 선택한 길을 갈 때 시간이 지날수록 의구심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가지 않은 길이 목적지로 가는 진짜 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더 들 테니까. 그럴 때 갑자기 저 멀리 호텔이 보인다면, 우리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 만일 그동안 의심이 작았다면 확신이 가져다주는 기쁨의 강도도 보잘것없을 테지만, 의심이 크고 깊었다면 확신은 그 어떤 감정보다 더 강한 희열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렇지만 확신에서는 어떤 흉터, 그러니까 의심을 품었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언제든지 이 상처는 다시 드러날 수도 있고, 확신은 다시 저 멀리 물러나고 의심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확신과 의심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비극적 숙명에 서로 묶여 있는 셈이다. 앞면이 보이면 뒷면은 보이지 않고, 뒷면이 보이면 앞면이 보이지 않는 모양새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에 대한 확신과 의심은 동시에 존재하는 법이다. “이제 나는 당신을 확실히 믿어요.” 사실 이것은 사랑하는 사이에서 발화되어서는 안 될 말이다. 애당초 의심이 없었다면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이제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이 말에도 상대방에 대한 어떤 확신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확신과 의심의 동전 굴리기는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정신을 분열시키고, 끝내 사랑을 비극으로 물들이기 쉬운 법이다.
드 윈터 부인의 확신에는 무언가 비극적인 결말, 혹은 새롭게 중복되는 의심이 예감되어 있는 건 아닐까? 더군다나 레베카가 악녀였다는 사실은 오직 그의 남편 맥심만이 아는 것이었다, 레베카가 유혹했다는 남자들을 제외하고는, 대저택의 모든 식솔들이 레베카를 완벽한 현모양처로 기억한다. 게다가 레베카가 유혹했던 남자들 얘기도 남편 맥심의 입에서만 나온 것 아닌가. 그러니까 맥심만 죽는다면, 레베카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완전한 현모양처였던 셈이다. 한 점의 의혹이 일지 않겠는가? 어떻게 그토록 완벽하게 허점 하나 남기지 않고 연기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어느 폭풍우 몰아치는 날 우연하게 바다 속에서 레베카의 시체와 보트가 발견되면서 사고가 종결이 났던 사건은 다시 맥심을 위기에 몰아넣는다. 바로 이런 위기 속에서 맥심은 아내에게 레베카의 전모를 고백했던 것이다.
혹시 맥심은 나약한 악마가 아니었을까? 아내를 죽인 자신의 죄를 변명하기 위해 레베카를 악녀로 만든 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이제 남편의 사랑을 확신하던 드 윈터 부인이 악마의 두 번째 희생양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의심과 확신의 드라마를 펼쳤던『레배카』가 끝날 즈음, 남편의 자랑이었던 대저택은 화염에 휩싸인다. 레베카의 저주일까, 아니면 그녀를 숭배하던 하녀가 저지른 복수였을까? 아니면 대저택을 불태워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도모하려는 맥심의 흉계였을까? 어쨌든 대저택과 함께 레베카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그녀는 과연 평안할까? 새로운 의심, 과거보다 더 깊은 의심을 던지며 소설은 이렇게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