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가 : 구우면 귀덕리 719번지
현주소 : 한림읍 귀덕리 719번지(귀덕로 67-4)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생가 터)
홍원표(洪元杓. 1909∼1939) 지사는 본관은 남양이며 홍순옥(洪淳玉)의 장남이다. 1926년 한림공립보통학교를 2회로 졸업하고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진학하였다. 1926년 3월 야나기다 교유 배척 동맹휴교에 참가하였으나 그 일로 제재를 받지는 않았다. 제주농업학교 19회로 졸업한 후 1929년 광주공립농업학교 4학년 편입하여 성진회 후신 독서회중앙본부 하부조직인 광농독서회에 가입하였다. 광농독서회에 가입한 제주 출신으로는 송두현 외 2명이 있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가 퇴학당하고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1년형을 받았다.
1934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목수로 일하면서 전협(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에 가입하였고, 전협 일본 금속노조 西지부 책임자 및 오르그로 활동하며 일본공산당 문서를 배포하고 있었다. 전협이란 1928년 12월 결성된 일본 노동조합의 전국 조직이다. 1925년 2월 22일 동경도(東京都)에서 결성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①하루 8시간 노동 및 1주간 48시간제 실시 ②최저임금 설정 ③악법 철폐 ④메이데이의 일치적 휴업 ⑤경제적 행동의 일치적 협력을 주장으로 채택 ; 일상적 경제투쟁 및 반일반제투쟁. 조합원수 최다 33,000명)이 1929년 9월부터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도방침 변화에 따라 해체가 논의되고 1930년 2월 이후 해체되자 재일조선인들이 전협에 대거 합류하였다. 1932년 전반기 즈음에는 전체 조합원 중 조선인 노동자가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합법 조합 내에서 혁명적 반대파를 조직하고, 산업별 노동조합에 기초한 혁명적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32년 전반기에 전성기를 이루다가 9월 ‘천황제 타도’를 내세운 후 연이은 탄압으로 급속히 쇠퇴하였다. 1934년 1월 조합 재건 조직 방침 등을 둘러싸고 일본공산당과 대립하였는데 이후 사실상 괴멸 상태에 빠졌다. 1936년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재건위원회가 검거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세계한민족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34년 11월 일본공산당 간사이(關西)지방위원회가 공산당 재건을 위하여 오사카에 있는 교포 20만명을 조직화할 때 그는 잔존 조직을 결집시켜 공산당과 전협 재건에 힘썼다. 1935년 2월에는 제주 출신 정문봉, 김행동 등을 포섭하여 금속노조 東지구를 확립하고 동년 5월에 오사카 히가시나리꾸(東城區)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로 조직된 셋방살림하는 자의 모임 구성원 이영복, 김만선, 김경숙 등을 조직원으로 포섭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동년 12월 검거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오사카재판소에서 징역2년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고문과 옥중생활의 여독으로 1939년 타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묘 :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355
《작성 22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