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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1. 그리스와 폴리스
1)
손에서 입으로 가는 생활 → 농경 시대: 加工 → 손이 한가해짐 → 손의 발달(操作的), 민첩성, 두뇌 사용 → 삶의 여유
학문(知)은 삶의 여유에서 온다.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을 향유하는 것이다. 주관적 편협성은 잘못 본 데서 생긴다.
그리스 이전의 문명으로는, 미케네, 미노스, 페니키아, 애굽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문명을 철학이라고 안 한다.
철학 정신이란, 필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 정신을 일컫는다.
철학의 탄생(=과학의 탄생)은 감성적 접근으로부터 logos的 사고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2)
지중해의 기후와 풍토을 보면, 그리스 본토는 본래 척박한 땅이다.(올리브와 포도넝쿨 등을 재배)
바다는 파랗다. 플랑크톤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중해는 생존의 터전이 아니라 교통 수단으로서의 기능밖에 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리스의 생활의 안정은 본토로부터가 아닌 식민지를 통해서이다.
하늘이 맑다. 1년이 건계(4월부터)와 우계(9월부터)로 나뉜다. 따라서 잡초가 없다.
풀은 인간에 대한 공격이며, 이 풀을 뽑는 것은 이에 대한 수동적 태도이다. 그러나 풀이 없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작용을 필요로 한다.
바람이 약하다. 따라서 나무는 좌우 대칭을 이룬다. 즉, 합리적(rational : 比로 나눌 수 있다)이다.
공기는 건조하고 바람이 없다. 시야가 뚜렷하게 보인다. 시각은 모양에 영향을 준다. 여기서 이데아idea와 형상eidos이 나온 것 같다.
“히브리인은 귀로 듣고, 그리스인은 눈으로 본다”는 말이 나온 이유도 여기에 기인하는 것 같다.
자연과 진리[truth = aleteia(lete: 레테강)]는, 숨기지 않는 것, 감추지 않는 것이다.
또한, 철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주체적 측면이 있어야 한다.
polis 형성되면서 이주민이 생겼다. 그러나 모두 뜨내기다.
따라서 농토의 기반도 없고, 씨족이나 부족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주로 청장년들은 바다로 나갔다. 여기서 democratia가 싹튼다.
점령 - 승리 - 원주민 반발 - 삭힘
결사대(개척대) - 행동 통일 - 공동 정신 - 새로운 종교 - 올림푸스신 - 원주민들 넋 달램
3)
富의 증가 - 전쟁 포로의 노예화
- 그 자체로서 보고 알려함(theoria이론)
* praxis실제
2. 알렉산더와 코스모폴리스
알렉산더의 12년 통치 후 세 장군의 가문으로 분할된다. 그리고 마호멧교에서는 알렉산더가 전설적 영웅으로 남는다.
세 가문
1. 서유럽 - 안티고누스의 후손이 차지
2. 아프리카 - 프톨레미가 이집트 차지( 수도: 알렉산드리아)
3. 아시아 - 셀루카스(안티옥에 도읍) → 로마인에 정복당함
* 프톨레미와 셀루카스는, 희랍인과 야만인과의 융합을 포기하고, 희랍 용병으로 강화된 마케도니아 군대의 軍政 실시.
2세기 동안 페르시아는 팔티아인에게 정복됨.
- 박트리아 지방의 희랍인들은 점점 고립됨.
- B.C. 2세기경 메난더왕 - 인도제국(불교)
바빌론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훨씬 더 받음.
희랍어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하여, 더욱이 서쪽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문학과 문화의 통상어가 되고 이 상태는 마호멧의 정복 때까지 지속된다.
유태를 포함한 수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언어와 문학에 대해서도 Hellenism化 되었음.
헬레니즘과 유태인 사이의 첫 충돌 - ‘매커비 제2서’
* 알렉산드리아 - B.C. 3세기경 상업도시로 발전.
- 수학 숭상
- 프톨레미 가문은 학문의 수호자 역할 담당
- 아르키메데스(시실리아인)
- 에라토스테네스(도서관 관장)
- 유클릿, 아리스탈코스,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뉴우스 등은 수학자로 만족
- 分化는 이 시대의 특징
※ 古代, 희랍어 사용한 지역
1. 자유와 무질서 : 자유 도시 국가 시대
2. 굴종과 무질서 : 마케도니아 통치 시대 - 크레오파트라死後(B.C. 30), 로마의 이집트 합병
3. 굴종과 질서 : 로마 제국 시대
굴종과 무질서로 표현될 수 있는 헬레니즘 시대에, 스토아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기초 성립
B.C. 3세기 이후, 희랍 철학에서 새로운 것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A.D. 3세기에 新플라톤주의가 배출했을 뿐이다.
이 기간에 로마 세계가 기독교에게 정복되도록 준비하는 중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짧은 생애는, 희랍 세계를 돌변시킴.
B.C. 334~324(10년간), 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바빌론, 페르시아, 사마르칸드, 박트리아, 판쟈보까지 정복함.
바빌론의 고대 신화는 희랍인의 호기심을 만족시킴.
조로아스터교의 二元論, 인도의 불교에 익숙해짐.
알렉산더 정복지에 희랍 도시 세우고 자치 제도 실시.
알렉산더의 군대는 마케도니아인이었다. 여기에 희랍인들은 복종했다.
정복의 확대 → 희랍인과 야만인들 사이의 융화 도모 정책 씀.
희랍인들은 야만인들에 대한 강한 우월감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 우월감을 타파하려 했다. 그는 몸소 야만인의 두 공주와 결혼하였으며, 신하들도 그에 따랐다.
人類一般(세계주의적 견해 → 스토아 철학)이라는 개념 생겨나, 도시 국가나 희랍 민족에 대한 충성심이 소멸되었으며, 희랍 문명의 순수성을 잃게 되었다.
희랍인 -(과학)→ 야만인
희랍인 ←(미신)- 야만인
이 시대는 돈만 있고 권력을 탐내지 않으면 즐겁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군대의 약탈이 수시로 있었다.
이 시대(B.C. 3세기)는 어디서나 안정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환경으로부터, ‘행운의 여신’이나 요행수를 존중하게 되었으며, 합리적 요소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마치 ‘밀톤의 사탄’처럼, “마음의 유일한 고향이다. 이곳에서는 지옥에서 천국을, 천국에서 지옥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알렉산더 정복 이후, 헬레니즘 세계는, 혼돈에 빠져든다.
로마인은 희랍인에 비하면 둔하고 야성적이었다.
자유 시대의 무질서는 그나마 견딜만 했다. 그러나 새로운 마케도니아인의 무질서는 무능한 통치자가 신하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무질서이므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차라리 뒤에 오는 로마에게 굴종하는 편이 더 견디기 쉬운 편이었다.
이 시대는 대체로 사회적인 불만과 혁명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神殿이 은행일을 대신하였다. 금을 보유하고 신용 대부 했다.
B.C. 3세기 초, 델로스의 아폴로 신전에서는 10% 이자로 돈을 꾸어 주었다.
자유 노동자들은 노임이 줄자(생활 필수품 가격 폭등), 傭兵의 길을 선택한다.
지휘관의 군대 해산(이것이 전쟁의 지속 원인이 되었다)은 위태스러웠다.
유태인이나 페르시아인 불교도는 희랍의 대중적 多神敎보다 훨씬 훌륭한 종교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희랍인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바빌론이나 갈데아인들의 종교였다. 그들에게 받아들인 것은 주로 占星術, 魔術이었다. 이 신앙(점성술) 중에는 자연히(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필연성 혹은 숙명에 관한 신앙이 포함되게 마련. 행운에 관한 신앙과도 모순 없이 그리고 의심 없이 수용되었다.
이 혼란은 지적 능력의 약화와 도덕적 부패 초래하였으며, 대다수 시민들의 그날그날의 德과는 상치된 것이었다. 절약해 모아둔 것이 내일 흩어질지 모를 경우 검약은 무용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삶의 목적은 어떤 적극적인 善을 행하기 보다 불행을 피하는 것으로 되었다.
3. 르네상스
나침반, 화약, 인쇄술, 이 세 가지 발명품은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 되었다.
한편 문화와 경제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현물 경제에서 화폐 경제로의 이행이 그 변화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또한 스페인의 이슬람 문화, 동방의 비찬틴 문화와의 밀접한 교류를 통해 그리스의 문화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고대 문화에서 나온 세 개의 강줄기가 하나의 큰 물줄기로 합쳐진 것이다.
르네상스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었다. 사고의 출발점을 신이 아닌 인간 자신에게 두었다. 이런 생각은 거의 무제한적인 천재 숭배로 이어졌다. 모든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 이제 인간의 목표였다. 자제력을 잃게 되었다.
시대 구분의 의식도 생겨났다. ‘중세’라는 말이 고대와 르네상스 시대 사이의 모든 세기를 표현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고대 로마에 대해서 ‘도시 중의 도시’와 ‘세계의 중심’같은 별칭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중세에 점점 쇠락하여, 백만을 헤아리던 인구가 1417년에 이르러 만칠천명으로 줄어들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시대에는 문화 정책의 목표가 로마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은 힘’이라고 말했다. 이는 지식의 효용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제 인간은 자연에 손을 대고,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선과 악의 개념은 무척 복잡하게 엉켜 있다. 이 시대의 새로운 발전에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들어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일어난 기술 혁신은 방적 기계를 만든 대신 실업자를 만들어 냈고, 의약품을 만든 동시에 새로운 질병을 퍼뜨렸으며, 농업 생산성의 증대를 가져왔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즉, 낙관론과 비관론이 교차하는 것이다.
※ 세 가지 세계상
지구 중심의 세계관 :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
태양 중심의 세계관 : 폴란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 1543년 「천체 운행에 관한 6경」- 17세기 초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 궤도를 운행한다는 사실을 증명.
오늘날의 세계관 : 태양은 수많은 별들 중의 하나, 모든 별들도 수십억 개 은하들 중의 하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해 낸 제일 중요한 발견은 '관성의 법칙’이다. 뒷날 이를 아이작 뉴턴이 공식화.
4. 17세기 바로크 시대
17세기의 문화를 흔히 Baropue라고 표현한다. 바로크라는 명칭은 원래 ‘불규칙한 형태의 진주’를 뜻하는 ‘barroco’라는 포르투갈 말에서 유래하였다.
바로크 예술은 비교적 단순하고 조화로운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과 달리 화려하고 대비가 풍부한 형식을 갖추었다.
17세기의 일반적 특징은 화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모순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는 것이었다.
한편에는 삶을 긍정하는 르네상스의 세계관이 남아 있었으나, 다른 한편에는 세계를 부정하고 종교적 은둔 생활을 고집하는 정반대의 극단적 경향이 싹텄다.
예술에서나 실제 생활에서 화려한 삶의 전개 양상을 볼 수 있는가 하면 동시에 속세를 멀리하는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다.
바로크 시대의 구호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라틴어 속담이 있었는데, 이 말은 ‘오늘을 즐기라’는 뜻이다. 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은 ‘죽음을 기억하라’를 뜻한다.
미술에서도 하나의 그림이 한편에는 향락적인 생활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아래쪽 구석에는 해골을 그려 넣기도 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바로크는 허영과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동전의 뒷면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 때문에 우리 주변의 아름다운 것은 언젠가 모두 죽거나 소멸한다는 만물의 무상함도 이들에게 중요했다.
정치적으로 볼 때도 바로크 시대는 엄청난 대립의 시대였다.
유럽은 당시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처참했던 것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전유럽을 휩쓸었던 개신교와 카톨릭 사이에 벌어졌던 30년 전쟁이다. 실제로 이 전쟁은 많은 작은 전쟁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나라는 독일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의 결과로 특히 프랑스가 점차 유럽의 지배적인 강대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17세기의 특징은 엄청난 사회 계급의 격차였다. 당시 프랑스 귀족과 베르사이유 궁전은 민중의 빈곤과 비교된다.
바로크의 정치 상황은 동시대의 예술, 건축 양식과 비교될 수 있다. 바로크 건축물의 네 귀퉁이가 소용돌이 무늬로 장식된 것이 많듯, 정치도 암살, 음모, 책략의 소용돌이였다.
오페라 극장 가면 무도회에서 일어난 스웨덴 왕 구스타프 3세 암살 사건(1792)과 함께 스웨덴의 바로크 시대는 끝났다.
바로크 시대의 연극은 예술 형식 이상이었다. 바로 인생 그 자체였다.
17세기에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
그리고 바로크 시대에 모든 종류의 무대와 기계 장치를 갖춘 근대적 극장도 생겼다. 극장에서는 하나의 환상이 무대 위에 올려졌다. 그것은 무대 위의 장면이 한갓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하여 연극은 인간의 삶의 상징이 되었다. 연극은 교만한 권세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은 인간의 삶의 비참함을 냉정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희곡들은 1600년경에 나왔다. 즉, 셰익스피어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양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여자와 남자는 배우일 뿐이다. 그들은 등장했다가 다시 퇴장한다. 어떤 이는 일생 동안 7막에 걸쳐 여러 역을 연기한다.
ㅡ <뜻대로 하세요>에서
인생은 변하는 환영일 뿐
짧은 순간 무대 위에 있다 사라지는
이를 갈며 두 팔을 벌린, 가엾은 희극 배우.
들려오는 소리는, 바로 목청 드높여 분노에 찬
웬 바보가 이야기하는 동화다.
아무 뜻도 없는 … .
ㅡ <맥베드>에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ㅡ <햄릿>에서
바로크 시대의 시인들은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지 않으면, 꿈에 비유했다.
셰익스피어는, “우리는 꿈과 질적으로 같다. 그리고 이 짧은 인생은 한 순간의 잠일 뿐.”이라고 말한다.
바로크 시대의 철학도 역시 상반되는 사고 방식들이 서로 격렬하게 맞부딛치고 있는 특징을 가진다. 즉,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다.
유물론에서는 토마스 홉스가 있다. 또한 뉴턴은 세계를 거대한 기계로 생각했다. 그러나 홉스도 뉴턴도 기계론적 세계상과 신에 대한 믿음 사이의 모순을 헤아리지는 못했다.(이 점은 18, 19세기의 유물론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라메트리는 18세기 중반 「기계적 인간」에서, 그 후 프랑스의 수학자 라플라스는 더 극단적인 기계론적 견해를 밝히고 있다. 즉, “만일 오성이 일정한 시점에 있는 모든 물질 입자의 위치를 안다면, 불확실한 것은 없을 것이며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가 눈 앞에 훤히 열릴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일어날 일은 손 안에 있는 카드패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여, 결정론적 세계상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관념론적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다.
5. 18세기 계몽주의와 19세기 낭만주의
"칸트가 살았던 18세기는 ‘이성의 세기’라고도 불린다. 사물을 조리있게 합리적,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성의 작용이다. 이것에 의해서 세상의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가 고조되고, 이러한 이성 신앙(理性信仰)이 절정에 달한 것이 프랑스 혁명이다. 혁명정부는 종교와 같은 이성에 반하는 것을 폐지하고, 이성에 의거한 ‘합리적인’ 달력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혁명이 점차 공포정치로 이행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ㅡ <철학으로부터의 메시지>, 기하라 부이치, 정신세계사. p. 29
계몽주의 :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 합리주의, 계몽 운동, 문화 낙관주의, 자연으로 돌아가라!, 인본주의적 기독교 사상, 인간의 권리(프랑스 혁명의 표어: 자유, 평등, 박애
칸트 "이성의 헛수고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는가?"
ㅡ> 정언적 명령, 직관의 두 형식
"낭만주의는 유럽의 마지막 문화 시대이다. 그 이유는 (문학), (철학), (예술), (과학), 그리고 (음악)을 거의 동일하게 포괄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칸트의 이성 철학)에서 (이성)만을 편파적으로 찬미하는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이성)을 대신하여 (감정), (환상), (체험), (동경)같은 개념이 등장했다. 낭만적 인격의 총괄 개념은 (예술적 천재)이다. 음악에서는 (베토벤)을 대표적 인물로 꼽을 수 있다. 그의 음악에는 자신의 고유한 (감정)과 (동경)을 표현해 내는 개인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낭만적)이였다. (신의 영광)을 위해 (엄격한 규칙)에 따라 작품을 작곡한 바로크의 거장들과는 달랐다. 예술은 르네상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에 커다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ㅡ <소피의 세계> pp. 501-514
6. 조로아스터교 (챗GPT)
조로아스터교는 흔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일신교 전통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 창시자는 조로아스터(Zoroaster, 자라투스트라) 이며, 한국어로는 배화교(拜火敎) 라고도 부름.
세계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긴장 속에 있으며 인간은 그 사이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존재라고 봄.
좋은 생각 — 좋은 말 — 좋은 행동
(Good Thoughts — Good Words — Good Deeds)
흔히 '배화교'라고 해서 불 자체를 신으로 숭배한다고 생각하지만, 불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빛·진리·순수함을 상징.
조로아스터교에서 중요한 개념, 아샤(Asha) 와 드루즈(Druj)
아샤 → 진리, 질서, 올바름
드루즈 → 거짓, 혼돈, 기만
인간은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맡길 것인지 선택. 상당히 윤리적이고 능동적인 종교.
"세상이 원래 이렇다"라고 체념하기보다는,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가 세상의 방향에 영향을 준다는 관점이 강함.
조로아스터교에는 최후의 심판과 부활에 가까운 사상이 있음. 사람이 죽으면 자신의 삶이 평가되고, 궁극적으로 선이 악을 이기며 세상이 완전히 정화·회복되는 최후의 때가 온다고 봄. 이 때문에 이후의 여러 종교에 영향.
인간의 선택 자체가 우주적인 선과 악의 싸움에 참여하는 행위가 됨.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서 중요한 종교적 전통. 역사적으로 매우 큰 종교. 아케메네스 왕조·사산 왕조 시대와 깊은 관계. 7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이 페르시아를 지배하면서 신자가 크게 줄어듬. 오늘날 이란과 인도 등을 중심으로 소수 공동체가 남아 있음. 인도의 조로아스터교도들은 특히 파르시(Parsi) 라고 불리움.
정리하면, 조로아스터교는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며, 궁극적으로 선이 세상을 회복한다"는 종교적 세계관.
기독교와 비교해서 아주 거칠게 압축하면,
조로아스터교 → 선과 악 사이에서 인간의 선택
기독교 → 죄와 은총 사이에서 인간의 구원
알렉산더 대왕: 기원전 356~323년
예수: 기원전 4년경~서기 30년경
기독교의 탄생: 예수 사후인 1세기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던 기원전 4세기에는 아직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았음. 그때 실제로 벌어진 것은, [그리스 세계 ↔ 페르시아 세계]의 충돌.
알렉산더가 기원전 334년 아시아 원정을 시작해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면서, 조로아스터교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페르시아 세계'와 '그리스 문화'가 대규모로 접촉.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인과 그리스인의 융합을 추진. 그래서 알렉산더 이후에, 헬레니즘 문화와 페르시아 전통이 서로 섞이는 거대한 문화적 공간이 만들어지고, 헬레니즘 시대가 훗날 기독교가 등장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됨.
“조로아스터교를 야만인 종교라고 부른 사람이 누구냐”와 “페르시아인을 야만인(barbarian)이라고 부른 사람이 누구냐”를 구분해야.
고대 그리스에서 barbaros는 원래 단순히 “그리스어를 하지 않는 외국인”이라는 뜻에 가까웠음.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 점차 문화적으로 열등하고 미개한 사람이라는 부정적 의미까지 갖게 됨. 페르시아인은 그 대표적인 '바르바로이'. 따라서 알렉산더 시대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이 페르시아인과 그들의 종교를 그리스 문명과 대비되는 '야만인의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충분히 역사적인 맥락이 있음.
BC 5세기부터 그리스 문헌에 조로아스터(Zoroaster) 가 등장.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를 고대의 위대한 동방 현자·철학자처럼 다루는 전통도 생겼습니다. 특히 마고스(Magos, Magi), 즉 페르시아의 사제 계층에 대해서도 그리스인들은 단순한 미개인으로만 보지 않았고, 일부 문헌에 이들을 “barbarian philosophers”, 즉 '야만인 철학자'라는 상당히 흥미로운 표현으로 다룸. 이 표현 자체가 역설적. "야만인이지만 철학적 지혜를 가진 사람들"
기독교가 등장한 뒤에는 페르시아 종교에 대한 종교적 비판이 훨씬 강해졌음. 여기서 중요한 역사적 반전.
[알렉산더 → 헬레니즘 → 기독교]의 흐름을 생각하면,
그리스인은 처음에는 페르시아를 '야만인의 세계'라고 보았지만, 동시에 그 세계의 마고이와 조로아스터의 지혜를 흥미롭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훗날 기독교가 등장하면서 다시 페르시아 종교를 이교·마술·우상숭배의 범주로 밀어내는 경향이 강해짐. 즉, [그리스 문명 ↔ 페르시아 문명]이라는 문화적 대립이 먼저 있었고, 그 뒤에 [기독교 ↔ 페르시아 종교]라는 종교적 대립이 겹쳐진 것.
Magi: 고대 페르시아의 사제 계층을 가리키는 말. 단수형은 magus이고, 영어 magic도 이 말에서 비롯.
MAGA: Make America Great Again의 약자로, 현대 미국 정치 구호.
Magi가 성경에서는 동방박사(The Magi)로 등장하기 때문에, 기독교 문명권에서 상당히 강한 문화적 이미지를 가진 단어. 더 깊이 들어가면 재미있는 지점이 하나. Magi → magic → magician이라는 어원적 계보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magic이라고 부르는 말의 먼 뿌리에 고대 페르시아의 마고스(Magos) 가 있고, 따라서 Magi와 MAGA의 직접적인 어원 관계는 없지만, 'MAGA'라는 현대적 약어를 'Magi'와 겹쳐 읽어보는 것은 하나의 언어적·상징적 연상으로는 충분히 가능.
MAGA가 조로아스터교나 Magi와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는 없음. 하지만 MAGA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문화적 자기정체성과, 트럼프 행정부가 말하는 '미국의 헌정공화국이 서 있는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 사이에는 분명히 연결되는 정치철학적 문제가 있음. 행정명령 자체가 그 표현을 사용.
따라서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은 경제적 보호주의인가, 아니면 미국이라는 문명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문화적·문명적 방어인가?"라는 질문에서, 현재의 정책 문구만 놓고 보면 둘 다 들어 있음. 경제·노동시장·불법입국 문제와 함께 국가 정체성, 문화, 이념, 종교적 극단주의, 국가안보가 하나의 묶음으로 다뤄지고 있음.
바로 이 지점에서 알렉산더 시대의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인을 '바르바로이'라고 부르던 문제와 비교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역사적 질문이 생김. '외부인'을 단순한 외국인이 아니라 자기 문명과 다른 가치체계를 가진 사람으로 보는 순간, 이민 문제는 경제 문제가 아니라 문명·정체성의 문제가 되기 때문.
"미국 영화 중 '바바리안'이란 7080 영화가 있는데 야만인들로 묘사. 서부극에서도 원주민인 인디어들을 야만인으로 묘사. 배제 배척주의가 우월주의와 같이 대대로 미국에서 작동하는 건 아닌가?"라는 문제의식은 역사적으로 상당한 근거가 있음. 다만 “미국인에게 대대로 하나의 배척주의가 유전됐다”기보다는, ‘우리(문명인) / 그들(야만인)’이라는 구분 방식이 시대와 대상만 바꾸면서 반복되어 왔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
서부극의 '야만인 인디언' 문제는 실제로 매우 중요. '야만인'이라는 말은 단순한 욕이 아니었음. 유럽인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바라볼 때, [문명인 ↔ 야만인]이라는 틀이 작동했었음. 원주민을 한편으로는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적이고 짐승 같은 야만인으로 묘사하는 이중적 이미지가 오랫동안 존재했다고 연구자들은 설명합니다. 특히 미국의 서부극에서는 후자의 이미지, [백인 정착민 = 문명 / 인디언 = 위험·폭력·야만]이라는 구도가 반복적으로 사용됐었음.
단순히 영화의 재미를 위한 장치만은 아니었음. 원주민의 토지를 차지하고 서쪽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문명을 가져간다'는 자기정당화와 결합할 수 있었기 때문. 미국의 법과 정치에서도 원주민을 'uncivilized', 'savage'로 규정하는 언어가 오랫동안 사용됐다는 연구가 있음.
대략 이런 구조로 작동.
① 타자를 발견 ㅡ> ② '우리와 다르다'고 규정 ㅡ> ③ 다름을 열등함으로 바꿈 ㅡ> ④ 열등함을 위험성으로 바꿈 ㅡ> ⑤ 배제·정복·동화를 정당화 ㅡ> ⑥ 그 과정이 영화·교육·역사서·대중문화에 반복ㅡ> ⑦ 다음 세대가 그것을 '상식'처럼 받아들임
바로 이 지점에서 'barbarian'이라는 단어의 역사가 흥미로워짐. 고대 그리스의 barbaros는 처음에는 기본적으로 '그리스어를 하지 않는 외국인'이라는 의미였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외부인 → 야만인 → 열등한 인간]이라는 의미가 붙음. 그 틀이 페르시아인에게 적용되고, 뒤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도 적용.
연구에서는 이런 '야만인'의 언어가 고대 그리스·로마의 이미지와 성서적 야생인 관념에서 이어져 유럽의 식민지적 상상력 속에서 원주민에게 적용되었다고 분석
조로아스터교와 페르시아인도 이 틀 안에서 볼 수 있음. [그리스인 → 페르시아인을 'barbaroi'로 규정] 그리고 수세기가 지나 [유럽계 미국인 → 원주민을 'savage/barbarian'으로 규정] 대상이 달라졌을 뿐, ["우리의 질서 = 문명 / 너희의 질서 = 야만"]이라는 인지적 틀은 놀랍도록 비슷.
이 틀이 종교와 결합하면, [우리의 신앙 = 진리 / 너희의 신앙 = 미신] 경제와 결합하면, [우리의 경제활동 = 개발 / 너희의 생활방식 = 미개] 정치와 결합하면, [우리의 국가질서 = 자유 / 너희의 질서 = 위협]이라는 식으로 확장될 수 있음.
"트럼프의 이민정책을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사상·종교·문명에 대한 경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과도 연결. 현대 미국의 특정 정책을 고대 'barbarian' 개념과 곧바로 동일시할 수는 없음.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타자를 위험하고 열등한 외부인으로 구성함으로써 배제를 정당화하는 문화적 장치'가 반복되어 왔다는 점은 충분히 검토할 만. 오히려 이 문제의 핵심을 '우월주의'보다 한 단계 앞선 곳, 즉 '타자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서 찾아야 한다고 봄. "타자를 '다른 사람'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볼 것인가?" 후자로 넘어가는 순간 배척은 아주 쉽게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차라투스트라’는 바로 조로아스터(Zoroaster), 즉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로 전해지는 인물을 가리킴. 그러나 상당히 흥미로운 뒤집기.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 → 선과 악의 구별, 진리, 도덕적 질서를 가르친 고대의 종교적 사상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 기존의 선악·도덕·가치 체계를 넘어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말하는 인물
니체가 굳이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 자체가 역설적. 마치 “선과 악이라는 도덕의 역사를 시작한 사람이 이제 와서 그 도덕을 넘어서는 말을 한다”는 형식으로 만든 셈.
조로아스터교 → 그리스·기독교 → ‘문명/야만’의 구분이라는 흐름과도 연결해 볼 만.
니체에게서는 ‘선악의 대립’ 자체를 의심하는 단계가 등장. 이 부분이 ‘우리와 그들,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오래된 이분법’과도 꽤 깊게 연결.
"악은 선의 대립인가 선의 결핍인가?"라는 오래된 철학적 질문. 조로아스터교 → 기독교 → 니체를 이어 보면 흥미로운 갈림이 나타남.
조로아스터교: 악은 선과 맞서는 힘. 선과 악의 대립이 우주적 구조로 강하게 나타남.
아후라 마즈다 → 진리·질서·선
앙그라 마이뉴 → 거짓·혼돈·악
즉, 악은 선에 맞서는 적극적인 힘에 가까움.
기독교·아우구스티누스: 악은 '선의 결핍'.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남. 악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 보지 않고, 악은 privatio boni, 즉 선의 결핍(privation of good) 이라는 것. 비유하면, 어둠이 빛과 동등한 실체가 아니라 빛이 없는 상태인 것처럼 악도 선과 동등한 실체가 아니라 선이 결여된 상태라는 것.
그런데 니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대체 누가 무엇을 선이라고 정했는가?”라고 질문. 문제를 [선 ↔ 악]에서 '누가 선과 악의 기준을 만들었는가'로 옮겨버림.
‘문명과 야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음. "야만은 문명의 대립인가? 아니면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결핍인가? 아니면 더 근본적으로 누가 그것을 문명과 야만으로 규정했는가?"
이 질문을 조로아스터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선과 악을 처음부터 둘로 나누는 사고가 인류의 세계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라는 큰 철학적 주제가 열림.
kjm _ 2026.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