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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자 바울이었음을 고백하다
행 26:1-12
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행 26:1-12 / [바울의 자기 변론] 아그립바왕이 바울에게 `자, 그대에게 할말이 있거든 해보아라.' 하고 명하였다. 바울은 왕에게 경의를 표한 후에 해명을 하였다. 2) `아그립바 전하, 제가 전하 앞에서 이렇게 해명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3) 전하께서는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에 정통하시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끝까지 제 해명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4) 유대인들도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만, 저는 다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그곳에서, 그리고 커서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도로서 철저하게 교육을 받고 그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왔습니다. 5) 또 유대의 율법과 관습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저는 언제나 엄격한 바리새파의 한 사람으로서 행동하였습니다. 그 사실은 만일 그들이 마음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도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그러나 그들이 고소하고 있는 것은 그게 아니라 다른 이유입니다. 제가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비위에 거슬린다는 것입니다. 7)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저와 똑같은 희망을 가지고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그것이 유독 제게만 죄가 된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8)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것이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시 살리신다는 것이 그렇게도 믿을 수 없는 일입니까? 9) 한때 저도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는 일이라면 서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10) 그래서 대제사장들의 앞잡이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처넣었으며 그들을 사형에 처하려고 판결할 때는 그 일에 찬성하는 표를 던졌습니다. 11) 저는 각지의 회당을 돌아다니며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저주하도록 모진 고문을 가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 심지어는 이방 여러 도시에까지 박해의 손을 뻗치게 되었습니다. 12) [개종 과정을 설명하는 바울] 제가 바로 그런 임무를 띠고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과 지령을 받아가지고 다메섹으로 갈 때였습니다.
본문은 바울의 마지막 변론의 시작 부분입니다. 자신의 무죄함과 예수의 복음을 아그립바 왕과 모인 사람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1-4)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변론할 기회를 주자 바울의 변론이 시작됩니다. 먼저 자신이 겪는 어려움은 법적인 범죄행위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의 풍속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아그리바왕은 이해할 것이라고 그를 추켜세웁니다. 이러한 칭찬을 통하여 자신을 향한 아그립바의 심리적인 방어벽을 허뭅니다. 아마도 아그립바 왕이 회심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작심하고 복음의 진수를 전합니다.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5-8) 바울 자신의 간증으로부터 복음을 전합니다. 자기를 고소했던 유대인들은 오래 전부터 자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바울 자신이 유대의 율법과 관습을 지키는 일에 엄격한 바리새파였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변하여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실현되었다고 증거한 것이 저들의 비위에 거리는 일이었고 그 결과 자신을 고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것이 죄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9-12) 바울이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산 소망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나사렛 예수를 반대하여 온갖 박해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9). 그래서 먼저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 찬성했고 회당마다 찾아다니면서 여러 번 그들을 처벌했으며 강제로 예수님을 저주하게 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한 분노가 극에 달해 다른 도시에까지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박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다메섹까지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과거의 회상은 바울의 부끄러운 과거사이기도 하고 자신을 변하게 만든 은혜에 대한 간증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적용: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한 까닭이 무엇이라고 했나요? 바울과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가 무엇이었나요? 이 소망이 지금 우리에게도 왜 이토록 바라야할 주제인가요?
예수를 믿는다고 말만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에서 단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만 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옛 모습을 완전히 십자가에 내려놓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설 교 >
아그립바 왕 앞에서의 바울
사도행전 26:1-18 / 서금석 목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특징을 말한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모든 것이 선택 가능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과거에도 선택가능한 것이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옛날보다 선택 가능성의 폭이 훨씬 넓어졌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베스킨 라빈스31(Baskin Rabins thirty one)"이라는 아이스크림 전문 체임점 아시지요? 종류대로 모두 다 먹어본 사람 있으세요? 얼마나 종류가 다양합니까? 그런데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은 먹는 것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의식주뿐만 아니라 성(成)도 선택하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트랜스젠더(transgender)-성전환수술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성을 거부하고 다른 성을 선택합니다. "하리수"라고 아십니까? 요즘 매스컴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지요? 성전환 수술자입니다. 얼마 전에는 영화를 찍었는데, 이제 안방 드라마에도 출현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묘한 것은 성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드러낼 수 없었는데, 이제는 떳떳하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 되기까지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전환 수술에 대해서 더 나은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이를 용납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이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역행하는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는 극도의 교만이며, 자기 기만입니다. 모든 것이 선택 가능하며,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면 기꺼이 받아드릴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性)도 선택할 수 있으니, 뭐든지 다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우리 인생에 선택될 수 없는 것,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사명은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사명은 선택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명은 반드시 감당해야 합니다. 100주년 성전 봉헌 예배를 내일 드리게 됩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축복 속에 주어지는 사명" 그것은 바로 영혼 구원의 사명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 남은 것은 전도의 사명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하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고 그 부르심에 헌신하고자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먼저) 바울 변론의 특색(에 대해 함께 생각합니다)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 총독에게 인사차 오자, 베스도 총독은 유대 문제에 능통한 유대의 아그립바 왕에게 조언을 청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아그립바 왕과 바울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바울이 몇 번째 재판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다섯 번째입니다. 참 오래 동안 끌고 있는 재판입니다. 같은 내용으로 고소되어 같은 말을 반복한 것도 벌써 다섯 번째를 맞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바울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성전을 모독했으며, 더 나아가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을 꾸몄다고 고소함으로써 죽이려 했고 이에 대해 바울은 분명한 논리와 증거로 자신이 무죄임을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석방되지 못하고 이제 아그립바 왕 앞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바울의 입장에서는 석방되지 못하면서도 같은 변론만 되풀이 하는 것이 울화가 치밀수도 있고 몹시 짜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억울하다고 스스로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변론하는 것을 지겹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바울의 태도를 보세요.
"2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3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뭐라구요? 바울은 자신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아그립바 왕의 장점도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처한 상황이 이렇게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니지 않습니까? "왜 자꾸 죄없는 사람을 괴롭히느냐? 분명히 무죄가 아니냐? 빨리 석방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잘 보여서 목숨을 구걸하려구요? 자신이 분명하게 변론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워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바울에게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명입니까?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할 사명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마다, 무죄를 입증하려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천부장에게 붙잡혀 갔을 때에도, 잔인했던 벨릭스 총독 앞에서도, 베스도 총독 앞에서도, 재판을 받을 때마다 바울은 무죄를 입증하려하기 보다는 그 순간을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오늘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고, 베스도 총독은 로마 황제에게 재판받을 수 있는 바울의 항소를 이미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 섰다구요? 바로,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생각 중에 잘못된 생각이 한 가지 있는데, '전도는 기회를 살펴서 해야 한다'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여건이 될 때에만 복음을 증거 했습니까? 아니지요.
바울은 말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항상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은 이러니깐, 이때 해야지!', '저 사람은 바쁘니까, 나중에 와서 전도해야지', '지금 나는 시장 가야 하니까, 돌아오면서 해야지!', '지금 상사가 일을 시켰으니까, 끝마친 다음에 전도해야지' 이렇게 핑계되기 시작하면, 평생가도 전도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일이 사명보다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2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아그립바 왕이여, 나에게 무죄임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4절부터 계속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한 바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변론 시간을 통해서 아그립바 왕과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금 바울이 서 있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바울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 도 있는 자리입니다. 말 한마디가 자신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 변론 시간을 충분히 이용하여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 석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사명이 먼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깨닫게 된 사명이 먼저였습니다. 사명이라 여겼기에 지겹다고 생각지 않고 계속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명을 깊이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사명 깨달아야만 합니다. 사명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2. 예수 부활 - 왜 못 믿느냐?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은 예의를 갖추고 정중하게, 그리고 아그립바 왕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전도하는 핵심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예수 부활 왜 못 믿느냐?" 바로 이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무슨 말입니까? "대제사장들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나를 지금 송사하고 있는데, 그들에게도 부활 신앙이 있지 않느냐? 그리고, 나는 저들이 믿는 바와 같이 부활신앙에 근거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왜 그것을 믿지 못하느냐" 이런 뜻입니다.
9절부터는 바울의 간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바울이 어떤 사람이 사람이었습니까? 그도 한 때는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열정이 어떠했습니까? 단순히 예루살렘에서만 핍박했습니까? 아니지요. 10절을 봅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데 있어서는 제1인자였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함에 있어 옥에 가두는 것은 일수이고, 죽이는 일에도 찬성하였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11절 말씀을 보니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했다는 것" 무슨 뜻입니까? 예수를 부인하거나 저주하게 하여 성도들을 배교자(背敎者)가 되게 유도하려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에게 권세를 부여받고 다메섹까지 갑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려는 바울의 열정이 얼마나 컸으면, 그 먼길을 선뜻 가려고 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바울의 열정은 11절의 "핍박하였고"라는 말의 뜻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핍박하다"라는 말은 헬라어 '에디오콘(?δ?ωκον)'으로써, '사냥감을 쫓다', '적을 쫓다'의 뜻을 갖고 있는데,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은 마치 사냥감을 쫓는 자와 적을 섬멸하기 위하여 뒤쫓는 자와 같이 지독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핍박하는 열심으로 말하면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보다 더 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만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변화됐습니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누가 바울이 예수를 만나 변화될 것이라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분명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만나니까, 예수 믿으니까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난 후, 삶의 목적과 비전이 바뀌었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활약하고 있는 미국 LA Dodgers에는 강타자 셰필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가장 불행한 야구선수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혼에 두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한 여인은 아기를 안고 운동장에 찾아와 셰필드를 괴롭히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셰필드는 요즈음 '실력'과 '인격'을 겸비한 모범 선수로 불립니다. 그는 화려한 플레이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는 2년 전 독실한 크리스천이며 가스펠 가수인 아내 디레온을 만났습니다. 그는 아내의 내조와 기도에 힘입어 마음의 안정을 찾아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변화의 모든 공로를 아내에게 돌립니다. "디레온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녀를 만난 후 비로소 삶의 의미와 목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수 믿는 한 여인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가능했던 것입니까? 예수 믿는 믿음이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믿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은 돈에 좌우되는 인생이 아닙니다. 권력에 좌우되는 인생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육신은 매어 놓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믿음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참된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만나고자 힘쓰시길 바랍니다. 만나야 합니다. 매일 만나야 합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매일 매일 예수님 만나는 은혜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3. 바울의 간증 - 주께 포로된 바울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몇 가지 살펴 볼 내용이 있습니다.
먼저, 13절을 봅니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를 만났을 때의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때는 정오였습니다. 팔레스틴의 정오는 매우 무덥기 때문에 이때쯤이면 일손을 놓고 휴식을 취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을 위해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는 바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 주지요? 또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를 만나 시점이 '정오'라는 사실은 그의 체험이 비몽사몽간에 일어난 일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실, 밤에 만났다고 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아마도 "꿈꿨겠지"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나는 한 낮에 예수를 만났습니다." 더 나아가 "햇빛보다 더 강한 빛이 비췄다"라고 말합니다. 장렬하게 내리쬐는 대낮에 그 햇빛 보다 더 강한 빛이 비췄다는 것 역시 바울이 체험이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정오'라든가 '햇빛 보다 더 강한 빛이 비췄다'라는 사실은 어쩌면 객관적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체험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 빛이 자신에게만 보인 것이 아니라 동행들에게도 비추었다고 사실입니다.
14절을 봅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가시채'라는 것은 끝에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채찍을 가리킵니다. 이 가시채는 밭을 갈 때 소가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매를 맞은 소가 반항하여 뒷발질을 하면 할수록 더욱 심하게 찌르고 상하여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간단히 말하면, "네가 지금 나를 핍박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네게 더 고통스럽게 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박해하다가 도리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主權的)인 역사에 의한 것임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 되기를 원했겠습니까? 아닙니다. 바울 역시 자신이 예수의 사도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예수의 부르심을 받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역사는 보다 강권적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토록 자신을 핍박하는 자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6절 봅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우선 '일어나 네 발로 서라'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도록 불러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바울로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게끔 주님께서 불러 당신의 일을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을 부르실 때도,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왜 잣니을 불렀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고" 한 마디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고.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이유는 그를 일꾼으로 삼아, 보고 들은 바를 증거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일을 증거하는 일이기는 할터인데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17-18절 말씀을 봅니다. "17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로 하여금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과,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빛으로, 하나님께로 인도하게 하여 그들도 죄 사함과 나의 축복을 누리게 하겠다" 바울의 사명이 이것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어둠 속에 헤매는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사단의 권세에 매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만의 사명입니까? 우리의 사명은 아닙니까? 바울처럼 공부도 많이 하고 가문도 좋고 열심있는 사람만 사명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으십니까? '나 같은 사람이 어찌 바울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책하며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비켜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믿습니까? 믿으세요. 지금 이 자리에 예배드리기 위해 오신 모든 분들은 분명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무엇이 있습니까? 사명이 있습니다. 어떠한 사명입니까? 영혼 구원의 사명입니다. 어두움 속에 있는 세상의 많은 영혼들을 보면서,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많은 신음하는 영혼들을 보면서 아직도 "예수 믿으세요" 한번 전하지 못했다면, (안 된 일이긴 하지만) 신앙생활이 말도 못하게 부실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사명,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이방인에게 복음 증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음전하다가 맞는 것에도 이골이 났던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핍박받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런 일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까? 사명이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하고 싶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사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다섯 번째 재판을 받는 바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체험 -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 증거는 사명입니다. 사명은 명령입니다. 명령에는 순종해야 하지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먹을 것은 거부할 수 있습니다. 입을 것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살 곳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곳에 살면 됩니다. 그러나, 복음 증거의 사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싫다고, 부끄럽다고, 어색하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왜 부르셨다구요? 복음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 전하기 위해서.
내일은 100주년 기념 교회 봉헌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누구에게 드립니까? 하나님께 드립니다.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물질만 드리겠습니까? 시간만 드리겠습니까?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에만 만족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영혼 구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겠다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로님들 먼저 앞장서시기 바랍니다.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들 우리 모두에게 남은 사명은 전도입니다. 영혼구원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던 바울과 같이 일평생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사시길 간곡하게 권면합니다. 그런 사명을 감당하려고 애쓰는 성도 여러분께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인도하심과 축복이 늘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이준원 목사
판사나 검사 혹은 변호사가 되려면 사법고시만 합격하거나, 요즘은 사법고시가 폐지되었으니까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자격시험을 패스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법연수원을 거쳐야 하고, 판사나 검사 보조 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받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되려면 일반대학교 4년에 신학대학원 3년을 거치면서, 그 사이 전도사도 하고 최소 몇 년 동안의 수습목회자 생활을 하며 훈련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후반부, 특히 유대인들에게 고발을 당한 후에 잡힌 바울의 삶을 보면, 마치 요즘 변호사 훈련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입니다. 당시에는 국선변호사를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바울은 법정에 서면 스스로를 변호해야 했습니다. 동시에 기회만 되면 변호의 기회를 살려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미 25장(8-11절)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베스도 총독 앞에서도 논리정연하게 자신을 잘 변호했고, 총독이 유대인 고위직들의 눈치를 보느라 위험한 상황이 될 것 같으면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해서 로마법에 따른 보호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했던 것은 이방인 로마 행정관 앞에서 자신은 로마법에 저촉되는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기에 무죄라는 사실에 대한 변호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26장에서는 유대 통치자인 아그립바 2세 앞에서 자기가 로마법뿐 아니라 유대 종교법에 의해서도, 즉 종교적으로도 무죄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점에서, 주장의 핵심은 같지만 그 전개하는 방식이 약간은 다릅니다. 그래서 그것을 오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바울의 자기변호 서론 (1~3절)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1절)
“네게 허락하노라”라는 이 말만 보면 저는 저희 집에 있는 개가 생각납니다. 저희 집 개가 ‘네가 나를 만지기를 허락하노라’ 하는 뜻으로 앞발을 척 내밉니다. 그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라고 합니다. 허락을 안 하면 말을 못합니까? 아그립바는 자기의 권위를 드러내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 총독 베스도로부터 재판권을 넘겨받은 유대 왕 헤롯 아그립바 2세는, 마치 여기서 자기가 주심 판사가 된 것처럼 행동하여 바울에게 변호권을 허락하는 모습이 본문의 시작입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유대인들로부터 바울이 고발되어 자신의 재판권 하에 들어왔으면 총독은 법에 따라 소신껏 재판하면 됩니다. 그리고 피고가 황제에게 상소한다고 했으니까 로마의 황제 법정으로 보내면 됩니다. 그런데 베스도 총독은 유대 통치자 아그립바 왕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려고 하다가, 아주 잠시이긴 하지만 자신의 로마 총독으로서의 권한을 권한이 없는 아그립바에게 넘겨주는 형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아그립바는 로마와 유대인 지도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여서 그랬는지, 그래도 바울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아주 훌륭한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사회나 교회도 어떤 사람에게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 반드시 이렇게 당사자에게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고발하고 모함하는 것을 듣다 보면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기도 전에 그냥 죄인이라고 취급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합당한 증거를 요구하고 또 자기변호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도 살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와서 B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할 때 보면 칭찬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그 사람이 형편없다, 못됐다, 잘못했다고 합니다. 정도는 조금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노골적으로 욕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은근히 비꼬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다른 사람 앞에서 그 자리에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할 때는 대부분 칭찬보다는 안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A라는 사람에게서 B의 이야기를 들으면 B라는 사람의 설명을 들어보기도 전에 이미 A에게 동조해버립니다. ‘아, B는 못된 사람이구나. 어울리면 안 되겠네.’ 하고 판단을 바로 해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집니까? 그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아니라 보통 사회의 시민으로서도 그런 태도를 배격하고, 이것이 정말 사실인지를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만약 내 앞에 와서 여기 있지 않은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보다 더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남 앞에 와서 왜 쓸데없이 거기 있지도 않은 사람의 험담을 합니까? 칭찬을 하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험담을 한다면, 사실은 A가 B보다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다른 사람 욕을 했다면, 그 사람이 정말 못된 것이 아니라 내게 말해주는 이 사람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B에게 가면 또 그 앞에서 내 욕을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 잘 알면서도 거기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전혀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우리 개인의 삶에도 있고 정치계에도 있고 아주 많습니다.
다행히 이렇게 결정권자 앞에서 자기 입장을 말할 기회가 있어서 그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면, “어디서 변명이야?”라고 하면서 기회도 안 주며 몰아붙이는 것은 비민주적일 일이고, 억울한 모함을 받아서 힘든 사람에게 두 번 상처를 주는 행위가 됩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생명의 삶>이나 <말씀의 삶>이 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셔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고 그 뜻대로 실천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직하라고 하셨고, 무엇보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런 태도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잘 헤아릴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들어보지도 않고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거나, 설명을 해도 무시하며 안 듣겠다고 하면, 여기 나오는 헤롯 아그립바 2세만도 못한 사람은 아닌가 스스로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아그립바 2세가 휴머니즘에 의해서 뭔가 정의롭게 해보려 시도는 하지만, 그가 평소에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면 그가 정의로운 판정을 내릴 것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그래도 그런 재판관 앞이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피의자인 바울이 어떤 자세를 보입니까?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2-3절)
바울은 이처럼 유대인들의 고발에 대해 자기를 변호하는 기회를 준 것에 대해 아그립바에게 감사를 표시합니다. 또 아그립바 왕을 유대의 풍속과 여러 문제와 쟁점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라고 인정해주는 예의 바른 자세로 자기변호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전에 더둘로가 벨릭스 앞에서 아부한 것과 같이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아그립바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종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긴다’, 즉 굉장히 좋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판사가 아주 힘들다고 합니다. 판결을 내려도 불복하며 소리 지르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신문을 보아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판사가 판결을 내리면 훌륭한 판사라고 칭찬하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판결을 내리면 과거에 이상한 판결을 내렸다고 파헤치면서 형편없는 판사라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사실은 판사 앞에서 그렇게 불신하는 태도는 어리석은 자세입니다. 물론 인간 판사는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정의롭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서 판사에게 겸손한 자세와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판사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가끔 비행기를 탈 때 딜레이 되거나 항공편이 취소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날씨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는데, 취소되면 다음 항공편으로 가야 하니까 줄을 엄청나게 길게 섭니다. 전화도 하고, 어떤 때는 그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불평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 막 소리 질러서 원하는 것을 얻어낸 경험이 있으십니까? 소리를 질러서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요즘은 점점 더 낮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승객으로서 권리는 찾아야 합니다. 항공사가 잘못했으면 그것에 대해 받아낼 필요는 있습니다. 오래 전에 누구를 배웅할 때 뉴욕에서 항공편이 결항되었는데, 항공사에서 잘 안 해주려 하고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집으로 가라는 식으로 권유했더니, 그 중 한 사람이 막 소리를 치며 이래서 되겠느냐고 야단쳤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조금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건 괜찮습니다. 그러나 항공사가 잘 해주려고 하는데 거기서 막 소리를 지르고 그러면, 거기서 일을 보는 사람이 자기 잘못도 아니지만 항공사를 대표해서 일하다가 자기도 인간이라 기분이 나빠집니다. 기분이 나빠지면 또 어떻게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공손하고 친절하게 하는 사람에게 끌리게 됩니다. 공손하면서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면 분명히 들어줄 겁니다.
특히 그런 경우가 생길 때 가장 중요한 자세가 뭔가 하면 바로 불쌍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힘듭니다. 봐주십시오.’라는 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상을 받았다 아닙니까? 기체 결함이면 보상해주지만 날씨 때문이면 보상을 안 해줍니다.
전에 아들과 같이 여행을 가려 하는데 날씨 때문에 계속 연기되다가 결국 취소되고 다음 날 가게 되었습니다. 몇 시간을 공항에 있었기에 하도 기가 막혀서 그냥 전화를 했습니다. 보상을 받을 수도 없지만 그냥 고객서비스에 전화를 해서 하소연했습니다. “내가 어린 아들과 모처럼 휴가를 내서 뉴욕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몇 시간씩 기다리다 이렇게 되어 너무 힘듭니다.” 그랬더니 “규정에 의하면 원래 안 되는데 사정이 딱하군요. 저희가 어떻게 해드릴 수는 없지만 certificate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불쌍하게 보인 덕분에 보상도 받았습니다. 받든 못 받든, 어떤 경우이든, 우리는 공손하고 친절한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바울의 과거 시절에 대한 회상
1) 젊은 시절 (4~5절)
바울이 로마법을 위반한 범죄 사실이 없음은 이미 총독 베스도가 확인해주었습니다(25:25). 그래서 다시 그 문제를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바울은 이제 자기를 고발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주장에 따라 종교 문제에만 집중합니다. 그의 논증의 출발점은 자신을 고발한 유대인들도 바울 자신이 젊었을 때부터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다 안다는 것입니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4-5절)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부터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들이 다 안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에 대해서, 고발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반박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꽤 알려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처음부터 내 민족과 힘께 예루살렘 생활을 했다’는 것은, 21장 39절에 나오듯이, 바울은 자신이 로마의 또 다른 속주 길리기아의 다소 시에서 태어났지만, 예루살렘 성에서 십대 소년 시절부터 자라며 유대교에서 율법적으로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의 생활을 했다고 말합니다(5). 그것은 22장 3절에서 “이 성(예루살렘)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라고 했던 자신에 대한 소개를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언급한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 유학을 온 해외 유학파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가장 유명한 랍비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엄격한 바리새파 율법을 따라 교육받고 자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5절 앞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이들도 일찍이 다 알고 있던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유대교 신앙에 문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지적하며 시작합니다.
2) 전통에 충성했던 시절 (6~8절)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6-7절)
이제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신앙 문제에 대해 고발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를 한 걸음 더 파고 들어가며 변론을 이어갑니다. 여기서 자신이 심문 받는 문제의 핵심을 그는 약속에 대한 해석과 기대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유대인들의 조상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 약속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던 우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모두가 그 약속의 성취를 기대하고 산 것이 아니냐?’ 하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만이 유대 민족을 구성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울은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실패한 이스라엘 민족 대신 새 이스라엘로서 시작된 교회를 보여주는 사도행전 1장과 2장이 그랬던 것처럼, 바울은 굳이 “우리 열두 지파”의 소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물론 모든 민족을 포함한 새로운 열두 지파로 구성된 새 이스라엘,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된 새 이스라엘의 시작이 자신의 사역의 목표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고 섬김으로 얻기 바라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라고 7절에서 강조합니다.
이들은 그렇게 간절히 바라는 것 때문에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왜 교회에 나오시고 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물론 예수님을 아직 안 믿는 분들은 그냥 다니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하는 경우, 왜 교회에 나오고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만약 우리가 소망하는 바와 신앙생활을 통해 이루기를 원하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것과 다르다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 내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 내가 왜 하나님을 믿고, 왜 교회에 다니고, 왜 성경을 읽고, 왜 기도하고, 왜 예배하는가?’ 이것을 잘 생각하면서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바로 이 소망, 즉 구약 때부터 예언된 약속의 성취에 대한 기대와 믿음 때문에 고소를 당했다고 재판관으로 앉아 있는 아그립바에게 호소합니다. 그러면 그 소망의 핵심이 무엇인가?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8절)
자신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변호하면서 바울은 앞에서 이스라엘의 소망의 핵심인 부활(23:6; 24:15) 문제를 다시 한 번 언급합니다. 왜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을 못 믿을 것으로 여기느냐고 합니다. 단순히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릴 능력이 있으신 것을 왜 못 믿느냐고 오히려 반문하고 있습니다.
당시 자신을 줄곧 고발해왔던 이스라엘 최종 결정기구인 산헤드린 공회는 크게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율법 훈련을 받아서 속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에 철저했을 뿐 아니라 부활과 내세와 영과 천사를 다 믿었습니다. 그런데 23장 68절에서 본 것처럼,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당시 제사장들이 대부분 사두개파였는데,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들이 부활을 믿지 않고 영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처럼 바울은 다시 아그립바를 비롯하여 로마 당국에 빌붙어서 특권을 누리던 사두개파를 향해서 “당신들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믿을 수 없는 으로 여기느냐?”라고 하며, 오히려 그들의 신앙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 예수님의 부활이고, 그것 때문에 이렇게 로마 총독 법정에 고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믿고 복 받고, 사회에서 높이 올라가고, 돈 많이 벌고, 성공하고 번영을 이루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에서 알려주는 여러 가지 복잡한 신앙의 체계나 교리 같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죄 때문에 이 땅에 어린 아기로 오셔서 인간으로 사시다가 대신 심판받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그리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의 부활을 통해 모든 죄와 죽음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이 부활 사건이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성탄절도 핵심이 부활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사도들이 성령 받고 변화된 후에 나가서 전할 때, 그들과 초대교회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나 ‘예수 천당’이 아니었습니다. ‘이 예수가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야(구원자)이시고, 여러분이 죽였지만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가 증인이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부활하셨다. 우리가 증인이다.’ 이것이 핵심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가 증인이다.’ 이것을 전한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 삶이 변화되고, 그래서 우리는 이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3) 교회를 박해하던 시절 (9~12절)
물론 바울도 자기가 처음부터 이것을 이해했던 것은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이전에 이것을 모를 때 어떻게 살았는지 다시 설명합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투표를 하였고” (9-10절)
바울의 자기변호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사실 바울 자신도 예수와 그분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자기가 바리새파 신앙의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는데, 나중에 뒷부분에 나오지만, 그러다 그 예수를 자기가 만나서 회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분도 바로 그 예수를 만나면 부활의 문제가 해결되고 무엇이 정말 진리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때 바울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도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를 막론하고 유대인들의 유일신 사상과 하나님에 대한 맹목적 열심, 즉 하나님 신앙을 빙자한 종교주의와 형식주의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열심히 했지만, 그것은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하는데, 만약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신앙생활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이곳의 연합부흥성회에 유일하게 두 번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김동호 목사님이신데, 첫 번째 오셨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유명한 목사님이시라 여기저기 집회에 불려 다니십니다. 한 번은 우리처럼 한국에서 연합 집회에 강사로 초청을 받으셨습니다. 초청받아 갔는데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지역 연합집회였는데 한 목사님이 “오늘은 제가 냅니다.” 하고 강사님을 모시고 다른 목사님들도 함께 어느 식당으로 갔습니다.
강사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가니까 강사님이 물었습니다. “어디로 갑니까?” “좋은 데 갑니다. 목사님, 가보시면 압니다.”라고 했는데, 도착해서 보니까 영양탕(보신탕) 집이었습니다. 개고기를 먹는 데였습니다. 그런데 강사 목사님은 안 드시는 분입니다. 안에 들어가니까 다른 목사님들도 다 있고, 음식이 나오니까 다들 정신없이 막 먹었습니다. 강사님이 드시는지 안 드시는지도 모르고 다들 마구 먹었습니다. 다 먹고 나서 “목사님, 잘 드셨죠?”라고 하니까, 먹는 시늉만 했던 강사 목사님은 “예, 예”라고 했습니다. 그날 대접한 목사님은 교회로 영수증을 들고 가서 청구를 합니다. 청구 제목이 무엇이겠습니까? ‘강사접대’입니다. 그런데 강사가 접대를 받았습니까? 전혀 못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강사님은 개고기를 안 드시는 분인데, 본인들이 좋아하니까 막 시켜서 다 먹어놓고 ‘강사님도 당연히 좋아하시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강사님은 좋아하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 음식이었기 때문에 쫄쫄 굶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강사를 잘 대접했다.’라고 했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이런 신앙생활이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겠지?’라고 하며 사실은 내가 원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데, 정작 주님은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닌데’라고 하신다면, 우리 신앙생활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바로 그런 생활을 바울이 했던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며 마구 달렸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반대로 갔었다는 것을 깨닫고, 엄청난 충격 속에 3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눈을 뜨고 세례를 받고 나서 완전히 사람이 변화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문제가 지금도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겪었던 바로 그런 문제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내가 열심히 많은 일을 감당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잘못 가르쳤고 그것을 잘못 배워서 생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지금도 바로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일 하나가 벌어졌을 때, 그것을 보는 나의 시각은 어떤 시각입니까?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은 크리스천으로서 성경적 시각으로 지금 돌아가는 이 일을 보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내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왜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못 믿느냐고 했는데, 사실은 못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살리실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도 신이 없다고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안 믿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다 자기의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성경을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받아들이며 믿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주님을 안 믿는 게 아니고 예수를 안 믿기로 결정을 한 겁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하는 무신론자라면, 안 계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믿음입니다.
바울도 오래 전 자기가 유대교에 열심을 가졌을 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게 아니라, 예수와 그 추종자들은 틀렸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한다”(요 6: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바로 “자신에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요 6:59)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잃어버린 영혼이 회심하고 마지막 날에 부활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부활을 믿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종교적 의를 행하는 종교적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안 믿는 게 문제가 아니고, 잘못된 것을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안 믿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뭔가를 믿고 있습니다. 그 믿는 것이 진리인가 아닌가의 차이입니다.
지금 기독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잘못된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강요할 때 문제가 됩니다. 요즘 안타까운 것은, 한국교회가 굉장히 비난을 많이 받는다는 점입니다. 잘못된 점들을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잘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잘하는 것은 뉴스에 잘 안 나오고, 잘못하는 것만 자꾸 나오니까 더 욕을 먹는 계기가 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잘못된 주장들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확신이고 주장인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위한 어떤 종교적 열심, 즉 ‘내가 뭔가를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잘 보이려는 태도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11-12절)
바울에게는 그 열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당시에는 나사렛 도당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사형시켰고, 그것도 모지라 외국에까지 나가서 그들을 열심히 잡아 처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자신만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같이 한 겁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0절과 12절에서 ‘대제사장들의 권한을 위임받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 지도자들이 자기가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던 일에 함께 했던 증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증인 아니냐?’라고 반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유대교에 열심을 가지고 마구 교회를 핍박하던 내가 왜 바뀌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고 생각해보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은 사랑하는 삶이다
결국 나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배우고 그대로 순종하여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데, 내 생각, 내 주장, 내가 원하는 성향으로 나갈 때,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뒤의 14절에 나오지만,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신앙생활이 오히려 주님을 박해하는 것이 되고 소위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고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이미 17장 25절에서 하나님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시기 때문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위해 많은 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을 가지고 그 바른 믿음이 삶에서 드러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 전체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관계’인데, 그 관계가 결국은 ‘사랑’입니다. 결국은 사랑입니다. 성경 전체를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 크리스천의 신앙생활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만약 내 삶에 사랑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냉랭할 수가 없습니다. 냉랭한 사람, 옆에만 가도 찬 기운이 뿜어 나오는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일 핵심이 사랑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 뭔가 열심히 하겠다는 것보다, 하나님이 정말 사랑을 원하시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내 주변의 이웃들에게 사랑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신앙의 핵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이 희생하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바로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오늘 예배당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다음 주 돌아올 때까지 일주일 동안 최선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