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이 젊은이들의 피와 땀을 팔아 사리사욕을 채웠다’ - 좌파들이 광부와 간호부들의 독
일 파견을 두고 박정희 대통령을 폄하할 때 단골로 들고나오는 모함이다. 1963년부터 정부는 세 차례
에 걸쳐 파독 광부를 모집했다. 자격조건은 ‘35세 이상의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으로 병역을 필
한 광부 경력자’였다. 그러나 광부 경력이 없는 자들도 뇌물을 주고 경력증명서를 발부받아 대거 지
원했다. 대졸자‧교사‧예비역 장교‧국회의원 비서관‧실패한 사업가‧건달 등 직업도 다양했다. 출국 전
에 받는 합숙교육장에는 이 기회에 반드시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겠다는 열기가 뜨거웠다. 제1진 1
23명에 이어 제2진을 모집할 때는 모집인원 500명에 무려 4만 6천여 명이 몰려 90대 1이 넘는 경쟁률
을 보였다. 박정희 정권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젊은이들을 강제로 보낸 것이 아니라 너도나도 잘
살아보기 위해 자발적으로 몰려온 것이다. 광부 파견은 1965년 제3진 2000명을 끝으로 잠시 중단했
다가, 1970년에는 한 번에 2만 명을 파견했다.
권이종(귀국 후 한국교원대 교수 역임) 씨는 서독 아헨 지역에 있는 아돌프광산에 배정되었다. 광부
들이 한 일은 지하로 굴을 뚫으면서 갱목으로 받치고, 광맥이 나타나면 탄을 캐서 지상으로 올려 보
내는 작업이었다. 그는 독일인을 비롯하여 주변 여러 나라에서 몰려든 노동자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일과는 새벽 4시에 시작됐는데, 그는 노동경험이 전혀 없어 전날 쌓인 피로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가장 큰 고역이었다. 그래도 다른 나라 노동자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기를
쓰고 일어나 국수를 삶아 먹고 작업장으로 향했다. 독일인들은 자동차나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지
만, 한국인들은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모두 걸어서 오갔다. 작업장에 도착하면 광산 측에서 제공
하는 안전장비와 음료수 및 식사를 짊어지고 지하 500~1000m의 작업장으로 내려가 일과를 시작했
다. 안전장비를 착용한 채 36℃ 이상의 막장에서 하루 8시간씩 중노동을 하고 나면 몸이 녹초가 되었
다. 땀과 탄가루로 범벅이 된 몸은 잘 씻기지도 않았다.
광부들은 각자의 작업장으로 가기 위해 동료와 헤어질 때면 늘 ‘글릭 아우프’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독일어로 살아서 돌아오라는 뜻이다. 수시로 들것에 실려 죽어나가는 사람이 발생하기 때문에 생겨
난 인사였다. 그래서 왜정시대 때 국내 광산에서 ‘막장 인생’이란 말이 생겨났다. 막장의 폭은 겨우 3
~4m, 그나마 절반은 석탄을 밖으로 운반하는 거대한 기계가 차지한 채 톱니바퀴가 사납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칫 한눈을 팔았다가는 톱니바퀴에 휘감겨 몸이 갈가리 찢기기 십상이었다. 낙반사고도 예
고 없이 찾아왔다. 막장 전체가 주저앉아 한꺼번에 여러 명의 광부가 매몰되는 사고도 심심찮게 일어
났다. 동료가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계속 일을 해야 하는 게 광부들의 숙명이었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연장근무를 신청하는 광부는 한국인들뿐이었다.
간호부들도 독일 간호부들보다 헐썩 더 성실하게 일하고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여 크게 신뢰를 받
았다. 그때 간호부 자격증을 가지고 문경면사무소에서 모자보건요원으로 근무하던 여직원도 독일로
건너가 근무했는데, 자리를 잡자마자 내게 무슨 수를 써서든 독일로 오라고 연신 편지를 보냈다. 오
기만 하면 책임지고 대학에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단력이 없는 나는 끝내 용기
를 내지 못했고, 1년쯤 지나자 지친 그녀도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요즘도 가끔 ‘그때 만약 그
녀의 권고를 받아들여 독일로 갔더라면 다른 인생이 펼쳐졌겠지?’ 하는 미련이 일기도 하지만, 인생
에서 과거가정법은 항상 허망한 법.
광부와 간호부들이 한창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던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서독을 방문한
다는 소식에 그들은 열광했다. 고향 까마귀도 반가운 판에 대통령 내외가 직접 오신다니! 각 광산에
서는 함보른에서 열리는 대통령 내외 환영식에 광부 45명을 태운 버스 한 대씩을 보내기로 결정되었
다. 권이종 씨가 탄 버스가 12월 10일 새벽 아헨을 출발하여 400㎞ 떨어져 있는 함보른의 체육관에
도착하자 각지에서 모여든 광부와 간호부들이 이미 체육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곧 도착한 박 대통
령 내외는 격려사에 이어 일일이 광부들과 간호부들의 손을 잡으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육영
수 여사의 품에 안겨 ‘어머니!’ 하고 외치며 또 울었다. 애국가 제창이 끝나갈 즈음에는 체육관 전체가
떠나갈 듯 통곡의 바다가 되어버렸다.
당시 통역관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했던 백영훈(중앙대 교수 역임) 씨는 ‘그때 박 대통령 내외가
광부와 간호부들을 얼싸안고 흘렸던 눈물은 조국 근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취재하기
위해 동행했던 이자헌(체신부장관 역임) <조선일보> 기자는 ‘대통령 내외와 광부 및 간호부들이 눈
물을 흘리자 기자석도 눈물바다가 됐다. 그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고 회상했
다. 수십 명의 서독 기자들도 함께 눈물을 훔쳤다. 그날 이후 광부와 간호부들은 더욱 큰 자부심과 사
명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은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박대통령은 뤼프케 서독 대통령의 전
용차를 타고 함께 함보른을 방문했는데,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박 대통령이 계속 눈물을 흘리자 ‘각
하. 꼭 잘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독일이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했듯이, 한국도
반드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십시오.’ 하고 격려했다. ‘한강의 기적’이란 말은 이때 처음 등장했다. 박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한 목적은 광부 및 간호부 위문 외에 경제개발 자금을 빌리는 역할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함보른을 방문하기 전까지 서독 정부는 한국의 차관 요청을 수락하지 않고 있었다. 한국은
상굿도 차관자금의 성공적인 운용을 보장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박 대통령과 광
부 및 간호부들의 눈물을 보고 서독은 한국인들의 진정성과 열의를 믿게 되어 한국이 요구한 차관을
제공했고, 우리는 온 국민이 힘을 합쳐 그 차관자금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던 것이다.
당시 파독 광부 및 간호부 가운데 귀국한 사람은 3분의 1에 불과했다. 나머지 인원 중 3분의 1은 서독
에 자리를 잡았고, 나머지 3분의 1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독일에 남은 자들은 독
일인과 혼인도 하고 공부를 더 하여 교수‧의사‧기술자‧예술인‧사업가‧자영업자‧태권도 사범 등 다양한
영역에 종사했다. 가장 성공적인 이민을 간 셈이었다. 1965년 서독 광부들이 송금한 외화는 우리나라
전체 상품 수출액의 10.5%를 차지했다. 현재 경남 남해군에는 경남에서 가장 부유한 독일마을이 조
성되어 있다. 독일에 거주하던 광부 및 간호부 출신 동포들이 귀국하여 조성한 독일마을에는 독일에
서 수입한 자재로 지은 전통 독일식 주택 15채가 들어서 아늑하고 살기 좋은 풍광을 이루고 있다. 독
일마을 주민들은 ‘박정희 정권이 젊은이들의 피와 땀을 팔아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빨갱이들의 주장
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산 증인들이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몇해전 친구들과 남해여행시 독일마을을 일부러 찾아 그날 의 역경을 되새겨 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 이만큼 의 풍요를 느끼는 삶은 실로 정당 하며 노후 의 즐거움이 충만 하기를 기원 하였습니다. 고난이 없이는 번영을 누릴수 없는 철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