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태는 1960년대 초 남파간첩에게 포섭되어 4차에 걸쳐 북한을 다녀왔다. 그는 김일성에게 충성을
서약한 뒤 공작금 한화 3천만 원, 미화 7만 달러, 일화 50만 엔을 받아 서울시내 여러 곳에 학사주점
을 차려놓고 젊은이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대학생‧노동자‧종교인 등이 主대상이었다. 나도 광화문
에 있는 학사주점에서 몇 차례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얼마 뒤 주인이 간첩혐의로 체포되고 학사주
점이 폐쇄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아찔했던 기억이 난다.
김종태는 북한 조선노동당의 지시로 통일혁명당(통혁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발각
되어 全 조직원과 함께 일망타진되었다. 통혁당은 민중 봉기, 무장 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요
원 포섭, 집단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띠고 있었다. 1968년 6월 중앙정보부는 김종태를 검
거했다. 그 이전에 중앙정보부는 다른 간첩활동의 주역인 이문규를 검거한 뒤 북한에서 그를 구출하
러 올 것으로 예측하고 일체 비밀에 붙였는데, 김종태의 집에서 압수한 암호문을 이용하여 통신공작
을 벌인 결과 보다 큰 사건을 해결하게 되었다.
검거망이 좁혀오자 정보당국의 예측대로 북한은 일당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공비를 남파했다. 북한
제753부대 소속 무장간첩선은 1968년 8월 20일 김종태‧이문규 등을 구출하기 위해 제주도에 도착했
지만, 미리 암호문을 해독하여 매복해 있던 우리 군경과 교전 중 12명이 사살되고 송승환‧이관학 등 2
명은 생포되었다. 뇌물죄로 2년 간 징역을 산 민주당 소속 前 총리 한명숙과 그녀의 남편도 당시 통혁
당 소속 간첩이었다. 노무현은 하필 그런 女ㄴ을 골라 총리로 임명했다. 한명숙은 국정은 팽개친 채
뇌물만 받아 챙기다가, 정권이 바뀐 뒤에야 구속‧처벌을 받았다.
통혁당은 1961년 12월 전남 무안군 임자면 면장을 지낸 최영도가 생질인 남파공작원 김수영에게 포
섭되어 조직을 시작했다. 최영도는 3회에 걸쳐 평양을 다녀왔으며, 조선노동당에도 입당했다. 그는
남로당 전남도당위원장 재임 중 체포되어 10년형을 살고 나온 정태묵도 포섭했다. 최영도는 서울에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김종태를 포섭했고, 김종태는 최영도보다 적극적으로 북한에도 자주 다녀오고
노동당에 동조하여 김질락‧이문규‧이진영‧임진영 등을 포섭하여 서울시 지도부를 구성하는 등 통혁
당의 실질적인 주역으로 활약했다. 학사주점‧새문화연구회‧청맥회 등을 조직하여 반정부 감정을 일
으키는 선동활동도 적극적으로 벌였다. 김종태는 수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조직을 완성한 뒤 마지막
으로 무기 수령을 시도하다 체포되었다.
김종태에게 포섭되어 통혁당의 핵심 간부 역할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질락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反제국주의‧反봉건주의‧反식민주의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였다. 통혁당은 북한 노동당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왜국 공산당과도 형제 당이 되는
것이며, 결국은 국제공산당의 일원이 되어 대한민국을 흡수할 계획이었다.>
김질락처럼 통혁당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중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자들은 하나같이 당시의 잘못
된 판단과 선택을 후회하며 자신의 과오를 자세하게 진술하고 반성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빨갱이
들은 상굿도 박정희 정권이 통혁당사건을 조작했다고 줄기차게 억지를 부리고 있다.
중앙정보부 대공요원으로 통혁당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정규는 당시 사건의
인지 과정과 체포 활동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통혁당의 꼬리가 잡힌 것은 1968년 7월에 적발된 임자도(전남 신안군 임자면) 간첩단사건이 출발점
이었다. 주범 정태묵이 북에서 공작교육을 받은 뒤 공작금을 받아 왔다. 정태묵은 함께 북한에 다녀
온 동생 정태상과 공작금 배분 문제로 심하게 다퉜는데, 남편을 간첩으로 만든 데 화가 난 정태상의
처가 시아주버니인 정태묵을 친척인 검사에게 신고하면서 임자도 간첩단사건에 이어 통혁당사건까
지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통혁당사건으로 총 158명이 검거되어 이 가운데 5명은 사형, 30명은 10년 이상 징역, 나머지는 그보
다 낮은 형벌을 받았다. 2000년에 출간된 정창현의 「가까이서 본 김정일」에 의하면, 김정일도 정태
묵‧태상 형제로 인해 통혁당사건이 터진 데 대해 매우 분개하고 있었다.
통혁당사건에서 사형을 면하고 살아남은 최고위급 간부는 신영복이었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한 뒤 1988년 특사로 풀려났다. 그는 성공회대 교수를 역임하면서 좌파 원로 대접을 받았
는데, 2016년 죽을 때까지 조국을 전복하려 한 잘못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다. 신영복은 사회주의 경
제를 강의하여 현 정권 경제정책의 토대가 되고 있다. 한명숙의 남편 박성준도 1967년 6월 신영복에
게 포섭되어 김국주‧박경호‧한명숙 등을 포섭하고 수많은 조직을 결성하여 대한민국 전복을 기도하
다 불발에 그쳤다. 현 정권 실세들 가운데는 상굿도 통혁당 잔당들이 남아 있어 여전히 신영복을 정
신적 지주로 떠받들며, 외교‧국방‧교육‧문화‧경제‧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망치기 위해 사
력을 다하고 있다. 파렴치한 인간쓰레기 조국을 법무장관에 기용한 것도 그 일환인지 모른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97세 노년의 생활면을 다룬 아침 방송 인간극장 에서 입니다. 부인을 사별하고 혼자사는 노인의 일상이 참으로 표상이 되고 있어 그 삶의 뜻과 의지를 귀담아 시청하고 있습니다. 테니스 운동까지 동우회와 함께 하고 과수원 가꾸기등 참으로 부지런한 일상 입니다. 병이 들고 활동이 불편해 지면 요양원으로 간다는 본인의 굳은 결심 역시 우리네 처지에 생각해 볼 사안 입니다. 녹화 한 후 종종 틀어 보아야 할 교훈으로 여겨 집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