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 크레이지 (Gun Crazy)
1950년 미국영화
감독 : 조셉 H 루이스
각본 : 달톤 트럼보
출연 : 존 달, 페기 커밍스, 베리 크로저
해리 루이스, 아나벨 쇼, 러스 탬블린
모리스 카노브스키
1967년 아메리칸 뉴시네마가 떠오르기 시작하던 시절,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영화가 '졸업'과 함께 떠올랐습니다. 젊고 매력적인 워렌 비티와 페이 더너웨이, 두 선남선녀 배우가 놀랍게도 은행강도 2인조로 출연했습니다. 이 도발적인 영화는 전미 흥행가를 강타하며 영화계의 세대교체를 선언했습니다.
보니와 클라이드, 은행강도 2인조의 이름이고 이 영화의 원제였습니다. 남녀 은행강도 2인조의 영화를 질문하면 당연히 먼저 떠오를 작품이지요. 그런데.... 이 '보니와 클라이드 이야기'가 나오기 전 18년전인 1949년에 촬영된 유사소재의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건 크레이지' 입니다. 이 영화 역시 젊은 남녀 강도의 이야기입니다. 일종의 보니와 클라이드의 원조격 영화입니다.
'건 크레이지'는 1949년 조셉 H 루이스 라는 '덜 유명한 감독'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감독보다도 훨씬 덜 유명한 배우들이 주인공입니다. 일종의 B급 영화로 인식될만한 작품인데 재미나 수준이 놀랍습니다. 가히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견주어 절대 무시당할 영화가 아니고 오히려 그 영화에 톡톡히 영감을 제시한' '원조 영화'로 평가받을 만 합니다. 고전 흑백 영화로서의 투박함과 작위적인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긴박감과 빠른 전개, 그리고 긴장남을 불어넣는 화면의 구도, 주인공의 심리 등이 매우 놀랍게 표현된 수작입니다. 흑백 필름느와르 전성시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걸작들의 틈바구니에서 당당히 평가받을만한 영화이고, 더구나 소재 자체와 전개 방식이 남다르고 독특한 면이 있는, 당시로서는 꽤 신선한 작품이지요.
10대 소년 바트(러스 탬블린)가 비오는 날 밤 권총을 훔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바트는 바로 현장에서 붙잡히게 되고 재판에 넘겨집니다. 바트의 누나 루비와 절친한 두 친구가 적극 바트를 변호해줍니다.
바트는 매우 어릴때부터 지나칠 정도로 총에 집착한 소년이었습니다. 장난감 총을 갖고 놀던 시절부터 총에 몰입했고, 뛰어난 사격술을 익혔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총은 그냥 갖고 있어야 할 필수품일 뿐, 남을 해햐는 무기가 아닙니다. 바트는 동물조차 죽이지 못하는 심성이 착한 소년이었습니다. 이런 바트를 잘 아는 누나와 친구들이 적극 변호해 주었지만 결국 바트는 소년원에 넘겨집니다.
어린시절 바트의 이야기는 짧은 분량입니다. 감독, 배우 중에서 이 영화에 출연한 인물중 그나마 가장 알려진 인물이 소년 바트를 연기한 러스 탬블린 입니다. '7인의 신부' '페이톤 플레이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의 영화에서 젊은 청년을 연기하면서 젊은 조연배우로 50년대 ~ 60년대 초반까지 제법 유명한 영화에 얼굴을 비춘 배우입니다. 살 미네오 라는 배우와 함께 동시대 앳된 외모로 청소년~20대 역할로 활약한 배우지요.
이후 세월은 빠르게 지나고 바트는 소년원, 군대를 거치면서 청년으로 성장합니다. 군에서 사격훈련을 가르치다가 제대한 바트는 고향으로 돌아오고 어릴적 두 친구가 반겨줍니다. 한 친구는 부모의 뒤를 이어 마을 보안관이 되었고, 또 한 친구는 신문기자 입니다. 두 친구와 함께 동네 축제를 갔다가 미모의 여인이 펼치는 뛰어난 사격술 쇼를 보게 되고, 이 여인에게 도전한 바트는 아슬아슬한 대결끝에 승리합니다. 이후 그녀와 함께 쇼단에서 함께 활동하게 된 바트, 애니라는 이름의 그녀는 바트와 좋은 콤비가 되어 함께 활동하고 악덕 단장을 피해서 독립하는데 둘은 어느덧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 되어 버리지요. 여전히 선량하고 온순한 바트와 달리 애니는 산전수전 다 겪으며 거칠게 자라온 여인으로 강한 욕망을 가진 여성입니다. 가난하지만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바트와 달리 못된 짓을 해서라도 멋지게 살아보려는 한탕주의자입니다. 결국 바트는 애니의 불만과 요구에 휘말리게 되고 둘은 뛰어난 총솜씨를 살려서 강도짓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건 크레이지' 라는 도발적 제목, 총에 미친 두 남녀의 이야기입니다. 아직 앳된 분위기가 남아있는 10대 중반의 러스 탬블린이 연기한 청소년 바트도 곱상한 외모였지만 존 달 이라는 배우가 연기한 청년 바트는 매우 해맑고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바트의 맑고 순수한 모습 때문에 애니라는 여인을 만나서 강도로 변하는 내용이 더더욱 가슴아픈 여운으로 남습니다. 총을 든 강도지만 절대 사람을 죽이지 않는 바트, 하지만 이런 바트의 선량함은 애니 라는 여자가 발산하는 매력에 끌리게 되고 결국 애니의 품안에서 늪에 빠지듯 허우적거립니다. 이럴 바에야 오히려 헤어지자고 하는 애니, 하지만 바트는 결코 애니의 곁을 떠나지 못합니다. 총을 사랑하는 공통점이 있는 두 사람은 이렇게 '총' 이라는 매개체 사이에서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립니다. 둘은 서로를 '총과 총알과 같은 관계' 즉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인정합니다. 아무리 애니가 못된 짓을 일삼고 종용해도, 아무리 바트가 양심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고 죄책감을 갖고 후회해도, 둘을 떼어놓기에는 역부족입니다.
1997년에 발간된 메이틀랜드 맥도나우 라는 작가가 지은 '세계에서 가장 에로틱한 영화 베스트 50' 에 실린 영화이며 그 책을 보고 자세히 알게 된 영화입니다. 책 제목과 달리 기계적인 노출이나 외설적 영화를 선정한 것이 아니라 무성영화 시대부터 현대까지 각 시대별로 도발적인 독특함을 가진 영화들이 골고루 수록되었습니다. '건 크레이지' 역시 1950년 1월에 처음 등장한 영화라는 시대적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이 영화에서 노출장면이나 에로틱한 장면이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속 설정에서 동물조차 쏘지 못하는 여린 바트가 강도로 변하게 되는 이유는 애니 라는 여인에게 끌렸던 것이고 애니와 바트가 처음 만나는 인연을 '총'이라는 물건이 역할을 했습니다. 젊고 가녀린 여인 애니가 서부의 여걸 같은 복장을 하고 아슬아슬하게 표적물을 기막힌 사격솜씨로 맞추는 장면, 이 영화에서 결국 총 이라는 존재는 남녀의 성적인 욕망을 이어주는 상징적 도구입니다. 너무나 다른 성격과 상이한 사고방식을 가진 바트와 애니, 하지만 총 이라는 공통적 도구는 두 남녀를 서로에 대한 탐닉과 욕망으로 강하게 맺어줍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바트의 선량하고 순수한 표정과 행동이 계속 눈에 밟히는 영화입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서의 너무나 착착 잘 맞았던, 보니와 클라이드의 못되고 비도덕적인 부분과는 다른, 천성이 착하던 바트는 너무나 악명높은 무장강도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 바트를 누구보다도 안타까워 하던 두 친구, 어릴때부터 거의 삼총사와 같았던 세 사람, 결국 이 영화는 바트 라는 청년의 안타까운 인간사 입니다.
필름 느와르의 비정함, 범죄영화로서의 긴박감, 남녀간의 강렬한 사랑에 대한 로맨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파멸되어 가는 한 남자의 인간사, 총 이라는 도구를 기가 막히게 잘 활용한 내용, 정말 독특하면서도 재미있고, 안타까운 여운이 남는 영화입니다. 투박함 속에 도발적인 당돌함이 섞여 있고, 선함 속에 깊은 욕망이 담겨 있고, 유명 배우, 유명 감독의 정형화 된 영화와는 다른 굉장히 자유분방하면서도 거침없음이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50년대에 발표된 덜 유명한 배우들을 출연시킨 필름 느와르 수작으로는 아이다 루피노 감독의 '히치 하이커'와 함께 2대 영화로 꼽고 싶습니다.
바트 역의 존 달, 애니 역의 페기 커밍스, 두 주연 배우는 결국 유명스타가 되지 못했고, 메이저급 영화에 거의 출연하지 못했습니다. 이 무명배우 둘의 드라마틱한 주연작인 '건 크레이지'는 여느 필름 느와르 영화보다 도발적이고 강렬했으며 아메리칸 뉴시네마 걸작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는 또 다른, 무장강도 남녀의 비극적 파멸을 다룬 수작이었습니다. 필름 느와로 고전 팬들 이라면 당연히 매혹적으로 느낄 영화입니다.
평점 : ★★★☆ (4개 만점)
ps1 : 중후반부의 분위기가 프리츠 랑 감독의 '그내는 살아있다(암흑가의 탄흔)' 가 연상되고 엔딩 부분은 스태리 크레미어 감독의 '흑과 백'이 연상됩니다. 물론 가장 비슷한 영화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지요.
ps2 : 완전 무명에 가까운 두 주연배우에 비해서 그나마 감독 조셉 H 루이스는 '장진호 전투' 라는 한국전쟁 소재 영화를 연출한 독특한 이력이 있습니다. 나름 종종 괜찮은 영화를 툭툭 연출해내는 인물인데 기회 있으면 이 감독의 영화를 몇 편 더 소개할 예정입니다.
ps3 : 이 영화는 전개나 설정상 허점도 많은 영화지만 거침없는 투박함이 무엇보다 매력인 영화입니다. 좀 고급스런 B급 같은 느낌이 난다고 할까요.
ps4 : 보니와 클라이드는 1930년대 존재했던 실존 인물인데, 이 영화가 둘을 참조하여 쓰여진 시나리오 입니다. 결국은 연관성이 있는 작품이지요. 시나리오는 달톤 트럼보의 작품인데 공산주의자로 몰리던 시절이라서 크레딧에 예명을 쓰고 등장했습니다. 달톤 트럼보는 매카시즘 광풍에 희생된 할리우드의 대표적 영화인이지요.
ps5 :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네멋대로 해라'에 많은 영향을 미친 영화라고 합니다.
ps6 : 마로니에 북스의 '죽기전에 꼭 봐야 할 1001편의 영화'에도 선정된 작품이지요. 이래저래 후대에 많이 재평가 되고 각광받는 고전 범죄극이지요.
[출처] 건 크레이지(Gun Crazy, 50년) 총에 미친 남녀|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