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92 ~ 1924
‘영화유럽’ 건설론 대두
미국영화 팽창에 저항 목적, 유럽식 영화 위한 무역체계 확립 시도
유럽영화여, 단결하여 할리우드에 저항하라! 1924년 독일의 UFA와 프랑스의 배급업자 루이 오베르가 협약을 체결함에 따라 ‘영화유럽’이 현실화됐다. UFA-오베르 협약은 오베르가 UFA의 영화를 프랑스에 배급하고, 오베르가 배급하는 프랑스영화를 UFA가 독일에 배급하기로 한 계약으로, 이에 따라 양국간 영화 교류는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곧 지금까지 두 나라 영화사간 계약이 개별 작품에 머물렀다면 이번 협약 체결로 상호간 배급이 정규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포스터
<뒤바리 부인>
세계대전 종결 뒤 유럽에서는 미국영화의 팽창에 맞서 유럽영화를 보호하기 위해 각국의 영화산업을 통합하는, 이른바 ‘영화유럽’, ‘범유럽영화’에 대한 논의가 계속 존재해왔다. 사실 유럽 각국 영화산업의 경쟁력은 미국영화와 맞먹기에 역부족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시장인 미국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은 자국의 영화시장만으로 막대한 수입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따라서 외국에서의 수입은 대부분 순수 이윤으로 남는 터라 그들은 싼값에 영화를 팔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영화시장에 버금가는 통합시장을 만들어야 유럽영화의 경쟁력이 확보될 것이라는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제작에서 배급까지, 유럽 각국의 영화산업을 하나로 묶는 ‘영화유럽’의 창설론으로 이어졌다.
UFA-오베르 협약도 이런 분위기에서 성사된 것이다. UFA의 수장인 에리히 폼머는 “유럽의 제작자들이 결국에는 협조체제를 확립해야 한다. 제작자가 제작비를 빨리 회수할 수 있는 정규적인 무역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 더이상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영화가 아니라 대륙의 영화인 ‘유럽식 영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라고 밝혔다. 한편, 협약과는 별개로 UFA는 영국인 제작자 겸 감독인 그레이엄 윌콕스, 미국 배우 라이오넬 배리모어, 독일 배우 베르너 크라우스 등 다국적의 제작진을 구성해 <데카메론 나이트>를 제작하기로 했다. 이 영화의 성공 여부 또한 영화유럽의 성공을 가늠할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몇년 전만 해도 ‘영화유럽’ 운운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1918년에 전쟁은 끝났지만 국가간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예컨대 프랑스의 극장 소유주들은 앞으로 15년 동안 독일영화를 상영하지 않을 것에 동의했다. 여기에 해빙 무드를 조성한 것은 두편의 독일영화, 곧 에른스트 루비치의 <뒤바리 부인>과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이었다. 각각 영국과 프랑스에서 뒤늦게 공개된 이 영화들은 대중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뒤 독일영화에 대한 보이콧도 해제됐다. 그리고 유럽의 영화는 정치상황과 무관하게 ‘하나’를 꿈꾸기 시작했다.
거대 영화사 MGM 탄생
제작부터 상영까지, 영화 유통 전 과정 수직적으로 통합
1924년. 할리우드 최대 영화사인 파라마운트에 버금갈 거대 영화사 MGM(Metro-Goldwin-Mayer)이 탄생했다. 대규모 극장 체인을 소유하고 있던 마커스 로는 메트로 영화사를 사들여 제작과 배급에 뛰어든 데 이어 1924년 초에는 제작사인 골드윈 영화사를, 같은 해 말에는 스타 제작자 어빙 탈버그가 소속되어 있던 루이스 메이어 영화사를 구입해 MGM을 설립했다. 이로써 MGM은 제작에서 배급, 상영까지 영화 유통의 전 과정을 수직적으로 통합하는 거대 회사로 태어났다.
파라마운트-퍼블릭스에 이은 MGM의 설립은 할리우드의 수직통합화 경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표다. 애초 수직적 통합은 일종의 방어체제로 시도됐다. 곧 파라마운트 등 거대 영화사들이 ‘묶어팔기’ 등으로 사실상 배급을 지배해 들어오자 지방의 극장 체인들은 연합해 제작회사인 ‘퍼스트 내셔널 상영업자 연합’을 세웠다. 그러자 파라마운트도 이에 질세라 극장 체인인 발라반 앤 카츠를 합병해 파라마운트-퍼블릭스를 설립했다. 이같은 움직임은 다른 영화사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이번 MGM 설립은 대표적인 예이다.
MGM과 함께 이미 수직통합을 완성한 파라마운트, 퍼스트 내셔널 연합, 현재 할리우드를 좌지우지하는 이 세 회사가 소유한 극장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미국 전역의 1만5천개 극장 중 파라마운트 소유는 대략 500개, MGM은 200개 정도다. 하지만 이 극장들은 수천석의 객석을 갖추고 입장료도 더 비싼 대개봉관이라 수익 규모가 엄청나다. 재개봉 프린트를 받기 위해 일정 기간을 기다려야 하는 도시의 소규모 극장과 지방 극장은 여기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렇듯 미국의 영화산업 전 과정은 점차 소수 영화사에 집중돼가고 있다.
단 신 들
<북극의 나누크> 흥행 선전
1922년. ‘북극의 나누크’가 심상치 않다. 로버트 플래어티의 다큐멘터리영화 <북극의 나누크>가 예상을 깨고 흥행에 선전하고 있다. 뉴욕 캐피톨 극장에서 개봉한 <북극의 나누크>는 개봉 첫주에 4만3천달러의 입장수익을 올렸다. 플래어티가 프랑스의 모피회사 레빌롱 프레레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16개월 동안 북극에 머물면서 족장인 나누크 일가의 일상을 담아낸 <북극의 나누크>는, 하지만 미국의 배급사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에 레빌롱사는 플래어티에게 뉴욕의 캐피톨 극장을 대여해주었다.
소, “영화는 가장 중요한 예술”
“모든 예술 중에서 영화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1922년 레닌이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의 영화제작과정을 결정지을 두 가지 성명을 발표했다. 그중 하나의 핵심이 위의 문장이라면, 다른 하나는 ‘레닌의 조화’라는 성명으로 이 문서는 영화가 오락과 교육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요지를 담고 있다.
파리에 예술영화 전용관 개관
1924년. 장 테데스코가 파리에 최초의 예술영화 전문상영관인 비외-콜롬비에 극장을 열었다. 이 극장에서는 최근의 아방가르드영화뿐만 아니라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채플린의 초기작들, <아르네경의 보물>, 그리피스의 <꺾인 꽃들> 등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작품들이 상영될 예정이다. 글 이유란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