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알랭 들롱, 사진=연합뉴스|AFP© 연합뉴스
향년 88세로 일생을 마감한 들롱의 젊은 날 모습
트렌치 코트 깃을 올리고 걸어갈 때, 푸른 담배연기를 허공에 뿜을 때, 느닷없이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때 알랭 들롱보다 아름답고 알랭 들롱보다 고독하고 알랭 들롱보다 쓸쓸한 배우는 없다. 남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환유이기도 하며,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남성적인 것에 대한 은유이기도 한 제일 유명한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의 회고전이 12월15일부터 24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영화제 시간표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를 참조하시길). <태양은 가득히> <로코와 그의 형제들> <지하실의 멜로디> <수영장> <암흑가의 세 사람> <형사> <고독한 추적> <암흑가의 두 사람> 등 대표작 10편이다. ‘그보다 더 멋지게 쓰러져 죽은 남자는 없었고 죽을 때 마지막 입김을 극장에서 코로 맡기까지 했다’는 오승욱 감독의 간증, ‘제임스 딘이나 객기를 부리는 장 폴 벨몽도의 반영웅적 이미지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여성 관객의 에로틱 판타지’를 자백하는 유지나 교수의 글로 알랭 들롱을 먼저 만나길 바란다. 알랭 들롱 전성기의 싸늘하면서도 우수어린 아우라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알랭 들롱은 미남이다. 그러나 그 미는 하층계급 남자의 것이다. 기품이랄까 품위랄까 그런 것과는 관계없는 미남이다. 확실히 매력은 있다… 알랭 들롱은 스타가 되기에 마땅한 눈매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왠지 풍기는 분위기가 천하다. 그런 만큼 밑바닥 인생을 연기하면 그의 매력이 살아난다. <태양은 가득히>에서의 알랭 들롱은 정말 좋았다.” 시오노 나나미의 <남자들에게>에서 ‘식사법의 문명에 대하여’에선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시오노 나나미가 질린 것은 ‘벼락부자가 교과서대로 열심히 실행하려는 듯해 보는 쪽이 힘들어진’ 알랭 들롱의 테이블 매너였다. 확실히 들롱은 우아한 식사법의 배우는 아니다.
그러나 팬들은 그가 우아한지 그렇지 않은지 상관하지 않는다. 깊은 눈, 짙게 눈을 드리운 속눈썹, 눈 바깥으로 전달되는 야성의 에너지를 느끼면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 주로 맡은 배역이 도둑이거나 갱이어서 그 아름다움은 더 사랑스러운 것이 된다. 식사법에 대한 불평은 “나의 머리와 온몸의 세포들이 기억하는 알랭 들롱은 여전히 아름답다”(채윤희)는 열광의 부대들이 지르는 탄성 저편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건 뒤틀린 우아한 애정 고백일 뿐이다.
알랭 들롱은 <사무라이>류에서의 차갑게 뿜어내는 연기나 안토니오니의 <일식>류에서 쓸쓸하고 무기력한 연기 사이에서 평생 서성댔다. 로맨틱코미디와 보잘것없는 흥행영화들에서 스타가 되고자 했고, 비스콘티와 고다르와 멜빌과 안토니오니 등 거장과 작업하는 지적인 배우도 되고 싶었다. 그가 서성이든 말든 팬들은 근사한 얼굴 뒤에 숨은 열정, 얼음장 같은 고독의 포즈 속에 있는 관능을 사랑했다. 그는 이러한 정서적 기억으로 먼저 호명되는 배우다. 언제나 말끔하고 냉정한 톤의 연기를 지속시키는 미남 배우라는 생각은 나중에 떠오른다.
<사무라이>
<로코와 그의 형제들>
1935년 파리 근교 출생. 네살 때 부모가 이혼했고 그는 계부 품에 맡겨졌다. 품행제로의 태도로 인해 가톨릭 기숙학교 등에서 쫓겨났지만(그를 쫓아낸 학교는 여섯개였다) 들롱은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한다. 선생님들은 그에게 신부 수업 받기를 권유하기도 했다. 열네살 때 학교를 나와 계부의 푸줏간에서 일을 했고(자신도 훗날 푸줏간 일을 하고 싶어했다) 3년 뒤 자원 입대, 인도차이나로 갔다. 5년간 낙하산부대에 있었지만 역시 품행불량으로 11개월간 감옥에서 지내기도 했다. 불명예 제대를 한 뒤 파리로 돌아왔다. 웨이터, 세일즈맨 등을 전전하다가 브리지트 오베르, 장 클로드 브리알리 등 배우들과 맺은 친분으로 칸영화제에 갔고 거기서 영화 경력이 시작되었다(여기까지는 감독 트뤼포의 유·청년 시절과 무척 비슷하다).
1959년 <태양은 가득히>는 프랑스 관객에게 얼음처럼 차갑고, 천사처럼 부드러운 미남을 선사했다. 라루스 영화사전이 적은 대로 ‘천사 같은 얼굴 뒤에 가려진 악마의 모습’이 도착했는데 이것은 들랭에게 선물이자 저주였고, 두고두고 그의 평생의 이정표가 될 것이었다. 그 이름은 스테레오타입이었다. 들롱은 1960년대 초 비스콘티 감독과 <로코와 그의 형제들> <표범> 등을 찍었고 이 작품들은 비스콘티에게 베니스 심사위원대상과 칸 황금종려상을 안겼다. 1970년대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와 <암흑가의 세 남자>는 트렌치코트 깃을 세우고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사랑스럽고 쓸쓸한 도둑의 이미지를 선사했다(사실 1969년 마약 스캔들 이후 마르세유 마피아 연관설 등을 시인했으니 그게 이미지만은 아니다).
1970년대 후반 그는 가죽과 향수, 와인 사업을 시작했고 1980년대에는 감독이 되었다. 감독이 되었지만 추락하는 연기자로서의 지위를 감독하지는 못했다. 이후 그의 영화들은 박스오피스에서 추락과 재앙 사이를 서성댔다.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열광은 시들고 시오노 나나미 같은 까다로운 감식안이 승리하는 듯 보였다. 1997년 한때 연기 포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만큼 유명한 프랑스 배우는 없다. 1990년 정부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고 1996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길고 긴 그의 영화편력을 회고했다. 최근 뱅상 카셀이 참여하는 <공공의 적> 프로젝트에 함께한다는 소문이 들렸고 2007년 1월, 연극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나올 예정이다. 글 이종도
자료출처: 씨네21
첫댓글
들롱의 영화 중 딱 한 편을 고르라면, 참 어려운 질문이다. 성공작이야 '태양은 가득히'지만 시간이 갈 수록 연기는 내공을, 그 내공은 연기자의 들롱이 아닌 세상의 연인이 된 들롱으로 자리매김. 그러나 배우로서의 가장 또렷한 족적은 '암흑가의 세 사람'(원제, 구멍), '지하실의 멜로디' '사무라이'(원제, 고독), '암흑가의 두 사람'으로 자리할 터다. 그러나 내게 있어 들롱의 최고작은 '암흑가의 세사람'이다. 알랭 들롱, 부르빌(1917-07-27~1970-09-23. 너무 일찍 눈을 감았다. 프랑스의 희극배우지만 제대로 만개하지 못하고 죽은 배우. 그러나 그의 연기는 할리우드나 프랑스 그 어떤 배우도 넘볼 수 없는 연기파다. 마테이 형사 역), 지안 마리아 볼롱테, 이브 몽탕 그리고 프랑수아 페리에가 출연하는 이 필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다. 은행털이나 보석털이 혹은 나쁜 짓을 할 때는 절대로 지켜야 할 규칙, 그건 가정이 있는 놈하곤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암흑가의 세 사람'의 프랑수아 페리에가 그 예다. 그뿐인가. '새벽의 7인'에서도 가정때문에 조국을 배반하지 않는가. 독일이 패망하고 배반자는 사형을 받지만 죽은 동료들은---
들롱의 필모그래피
여자가 다가올 때(57)
사랑은 오직 한 길(58)
태양은 가득히(60)
로코와 그의 형제들(60)
태양은 외로워(62)
레오파드(63)
비하실의 멜로디(63)
위기탈출(64)
검은 튤립(64)
강 건너 텍사스(65)
로스트 고맨드(66)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66)
한밤의 암살자(67)
대모험(67)
아듀 라미(68)
그대품에 다시 한 번(68)
시실리안(69)
수영장(69)
볼사리노(70)
암흑가의 세 사람(70)
미망인(71)
레드 선(71)
트로츠키 암살(72)
형사(72)
스콜피오(73)
암흑가의 두 사람(73)
볼사리노 2(74)
르 지탕(75)
형사 이야기(75)
부메랑(76)
비밀수첩(77)
에어포트 79(79)
세 번째 희생자(80)
암살자(82)
분노는 오렌지처럼 파랗다(88) 등
그의 첫연인은 로미 슈나이더(사랑은 오직 한 길 58)
가수 니코와 연인.
나탈리 들롱(64~69)과 결혼, 5년 후 이혼.
미레유 다르크와 15년간 연인으로.
배오로선 성공했지만 한 인간으로선 대실패한 인물이 들롱이다.
다 쓸 수 없을 만큼 많은 영화에 출연한 들롱,
이젠 천상에서 편안하게 쉬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