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등장」으로 특징지어지는 20세기는 세계대전과 혁명, 이념 대결의 시대이자 세계적 규모의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진행된 시대이기도 하다. 신문과 방송 등 이른바 매스 미디어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20세기를 살아온 인류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정치세력들은 미디어를 통한 프로파간다(선전)에 의해 대중을 장악하고 대중을 무기화했다. 또 20세기의 걸작품인 TV 등 전파미디어는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어 「세계는 하나」라는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켰다. 『만약 마르크스가 20세기에 살았더라면 그의 테마는 「자본」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한 학자도 있다.
이러한 매스 미디어의 위력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사람은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이었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 레닌은 스위스 망명지에서 앞으로 전개될 혁명전략과 관련한 중요한 메시지를 남겼다. 레닌은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가」라는 제하의 논문에서 『신문은 비단 집단적 선전자, 집단적 선동자일 뿐 아니라 집단적 조직자』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했다. 하부구조의 상부구조 결정론에 입각한 마르크스의 소극적 언론관과 달리 레닌은 언론 그 자체를 혁명의 수단이자 주체로 규정한 것이다. 이러한 언론관은 이후 모든 공산정권에 있어 신문뿐 아니라 영화 라디오 TV 등 매스 미디어 전반에 적용되는 전체주의적 언론통제의 패러다임으로 발전했다.
레닌에 이어 라디오·TV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매력에 심취한 사람이 바로 천재적 대중선동가였던 아돌프 히틀러였다. 그는 혁명이나 쿠데타가 아니라 32년의 합헌적 총선에서 나치당의 의석수를 불과 4년만에 20배나 늘리는 「기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정권을 장악했다. 바흐나 괴테, 칸트를 배출한 나라에서 일개 병졸 출신 정치꾼을 우상화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공황과 중산계급의 몰락 등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경제적 상황외에 매스 미디어를 통한 현기증나는 정치선전이 있었다.「민족지상」 「국가지상」을 내걸고 마치 집단최면을 일으키듯 대중을 광기로 몰아넣은 파시즘체제나, 미디어를 대중봉기와 통치수단으로 삼은 공산정권이나, 전체주의정권의 언론장악 논리와 방식은 대동소이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천황제하에 침략과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고, 전쟁동원을 독려하는 수단으로 대중매체를 활용했다. 「대동아공영권」이란 미명아래 태평양전쟁의 길로 들어서면서 신문이 전쟁을 부추기면 부수가 늘어나기도 했다.
레닌의 계승자인 스탈린은 혁명수단이었던 언론매체를 파시즘 정권에서와 같이 강력한 통치수단으로 이용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중국혁명의 양대지주를 「붓과 창」, 즉 선전·선동과 무기로 규정했다. 나아가 공산주의의 종주국이 무너지는데도 동요하지 않은 북한에선 가장 완벽한 인간세뇌작업이 이뤄졌다. 북한지배층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주체사상이라는 가부장(家父長)적 지배사상으로 발전시키고 매스 미디어를 통한 「당과 대중의 일체화」에 성공했다.
전체주의 정권 뿐 아니라 어떤 체제, 어떤 정치세력도 미디어 없이는 정치적 명분과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1978년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도 검열을 뚫고 유포된 카세트 테이프라는 미디어 때문에 가능했다는 주장도 있다. 제3세계나 개발도상국에 있어 미디어는 전체주의적 통제와 언론자유, 상업주의라는 서로 다른 가치와 이념의 경쟁과 갈등 속에서 방황해왔다. 한국의 경우 개화기의 계몽주의적 언론이 일제의 식민통치로 압살당한 이래 해방과 남북분단, 개발독재, 민주화시대를 거치며 영욕의 역사를 걸어왔다.
「열린 사회」를 표방하는 미국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우 매스 미디어는 자유민주체제의 상징이자 전체주의에 대한 강력한 대항무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소외된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켜준 매스 미디어의 상업주의 경쟁은 할리우드로 상징되는 서구 대중문화의 세계지배를 가능케 했으며, 미디어의 공익성과 상업성에 대한 끝없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밀스의 「파워 엘리트」 연구가 보여주듯 이들 사회에서도 정보를 장악한 엘리트집단, 정치권력에 의한 교묘한 대중조작이 진행되기도 했다.
1930년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에 직면하자 매일밤 라디오에 출연, 국민적 단결을 고취시켰다. 60년대 이후에는 「권력은 TV에서 나온다」는 말이 등장했다. 젊은 케네디가 미 대통령으로 당선된 선거혁명은 TV 토론에 힘입은 것이었다. 할리우드 출신인 레이건이 뛰어난 화술과 용모, 매너로 유권자를 사로잡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TV가 만들어낸 신화」로 불렸다. 비단 미국만이 아니다. 대선후보 TV토론이 정착된 한국도 TV에 나타난 이미지와 연기력이 정치인에 대한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었다.
20세기의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잠자던 대중을 일깨워 정치적 변혁의 소용돌이에 몰아 넣기도 했지만, 「닫힌 사회」를 깨어나게 하는데도 결정적 기여를 했다. 미디어를 장악해 통치기반을 구축한 전체주의 정권은 결국 미디어의 본질적 속성을 간과함으로써 「열린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할 수 없었다.
본래 미디어의 등장은 특권계급이 독점하던 지식을 대중에 확산시켰다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15세기 중반 금속활자의 발명이후 인쇄술의 발전에 따른 지식과 정보의 보급은 구체제 타파, 시민혁명 등 일련의 역사전개를 이끌어간 원동력이었다. 인류사상 최고의 발명으로 「인쇄기술」이 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세기초만 해도 소수계층이 이용했던 미디어는 19세기후반부터 상품의 대량생산에 의한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 함께 정보와 지식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1백만부를 넘게 발행하는 「밀리언 페이퍼」가 나오는가 하면 영화 라디오 TV 등 전파매체들은 나온지 반세기도 안돼 전세계 수억명의 시청자를 장악했다. 나아가 20세기 후반에는 인터넷, 위성방송, 디지털, 멀티미디어 등 이른바 「뉴 미디어」가 세계화의 흐름과 맞물려 국경을 붕괴시키면서 새로운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 경향신문
* 군사독재시절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하던 한국의 언론들은 오랜 동안 언론의 본분을 망각하고 살아온 탓인지 지금까지도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다음은 각 언론사들과 언론관련단체, 그리고 청와대가 바라본 언론개혁입니다. 현 한국언론의 실상과 문제점은 물론 향후 한국 언론의 나아갈 길도 충분히 제시된 대담이라고 생각되어 올려 봅니다.
"노무현 정부 '증오정치' 매몰된 듯...'조중동' 비굴한 과거 반성해야"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 : 이제 정부와 언론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다. 72년 10월 유신에서 87년 6월 항쟁까지는 정부의 일방적 억압과 언론의 암흑시대였다. 75년, 80년 언론인 대량 강제해직의 유산으로 부정적인 영향은 아직까지 계속 되고 있다. 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전, 국민이 언론의 자유를 찾아줬다. 그러나 부끄럽고 비굴했던 언론의 과거청산이나 자기반성은 없었다. 억압적 권력이 사라진 권력의 공백기를 틈탄 언론권력 '조중동'이 등장해 사회 어젠다 세팅을 주도했다. 반성은 없고 일방적 피해자에서 거만한 압제자로 바뀌었다. 그 때는 사회리더십 면에서 정부보다 언론이 더 큰 힘을 발휘했던 시기였다.
98년 이후는 정부와 보수언론의 헤게모니 투쟁이었다. 기자협회 창립 40주년 기념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이 최고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발언했는데, 그 발언에서의 ‘언론’은 조중동을 겨냥한 게 아닌가. 조중동이라는 보수신문의 헤게모니는 97년 대선부터 균열되기 시작했는데 지난 대선에서 두 번 졌다. 노무현대통령이 당선됐던 것은 조중동의 헤게모니가 약화되었음을 보여준다. 80년대까지 언론 하면 신문, 90년대 이후에는 방송, 최근엔 인터넷까지 언론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조중동에서는 TV가 더 힘이 센 거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조중동을 주적으로 설정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 뒤 대미관계, 대재벌정책, 대노동정책에서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집권세력으로 일정정도 불가피한 타협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조중동에 대한 분노는 강화되고 있다. 조중동을 주적으로 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게 아닌가 싶다. 4.15 총선으로 국회권력까지 장악한 이후 노무현 정부는 필요하고도 정당한 과제일 수 있으나 행정수도 이전, 과거사청산 등에서 상당히 정략적 요소가 가미돼 있지 않은가 보여진다. 대북송금, 이라크파병 등 한반도 차원에서 중요한 문제는 대범하게 양보하고 국내 파워게임에서는 조중동을 주적으로 삼으면서 지지세력의 결집 노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한다.
정부주도의 언론개혁에 대해 보면, 2001년 언론사 세무조사가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고 생각한다. 결과를 보고 나서 너무 정략적 계산이 많이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정부가 언론개혁을 정치적 고려 없이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산업화, 민주화라는 과제를 거친 지금 남북문제 위주로 남한 사회의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을 통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이분법적 정치, 증오의 정치에 상당히 매몰된 듯하다. 언론정책이 잘못됐다고 할 때 정부에 책임 있다고 하면 51%가 아닐까. 정부주도의 언론개혁이 어렵게 된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조중동은 잘하고 있는가.
과거에 대한 반성과 청산이 없었다. 70∼80년대 비겁한 시대를 비굴하게 살았지만 단 한번도 반성하지 않았고 과거도 청산하지 않았다. 권력에 비판을 얘기하지만, 지나치게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다. 비이성적으로 비판하고 있지는 않은가. 매체가 친노냐, 반노냐로 갈라지는 게 문제다. 방송은 5공 시대, 심지어 김대중 정부에 비해서도 인사권 등 자율성이 신장됐다. 누가 우리 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가. 노무현 정부측에서 조중동을 설정했다고 하더라도 과제를 제시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정부이기에 정부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과제는 국내 정치에서 주도권 싸움 매몰되기보다는, 적어도 남한 차원의 비전 제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면이 도외시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링컨 대통령을 존경한다며 링컨의 언론정책을 연구하는데, 링컨도 비주류였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노무현 대통령과 비슷했다. 링컨 대통령과 관련 지난 5월에 나온 <링컨은 신문과 싸우지 않았다>는 책 서문에 ‘자신의 지지층을 끌어들이고 반대층을 지나치게 적대시하지 않는 방식으로 여론을 다루는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던 것’이라고 써 있다. 대국적이고 미래를 바라보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반노-친노로 분류되기보다 '非노批노'가 돼야 하지 않을까. 언론은 공정한 심판관으로서 역할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론은 정치세력의 도구로 활용된 게 아닌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언론은 정치세력의 하수인, 대리인이 아니고 독자적인 세력으로 서야한다. 언론이 국내정치에 포로가 돼 있고 국내정치의 작은 주도권을 놓고 싸우느라 모두가 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정부와 언론의 건강한 관계를 위해 생각을 크게 하자. 언론도 그렇고 노무현 정부도 그렇고 한반도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국민여론 움직이는 정보소통, 의제설정에서 언론은 강자"
양정철 청와대 홍보기획 비서관 : 청와대 관계자가 정부와 언론의 관계를 놓고 토론자로 나온 것은 처음이라서 생각을 많이 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게) 청와대 공식 입장이 아니고 언론담당 비서관으로서 청와대 참여정부의 대언론관, 언론정책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공감대 확산하자는 차원에서 나왔다. 쓴 소리는 달게 받고 깊이 유념할 것은 유념하겠다. 박인규 대표의 발제 중 재미있는 가설과 가정이 있는데, 사실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 노무현 대통령 참여정부의 언론관에 대한 몇 가지 오해에 대해 입장을 설명하는 게 좋을 듯하다.
첫째, 언론과 참여정부는 대단히 소모적인 투쟁을 하고 있다. 청와대의 원칙은 균형과 상호보완을 두 축으로 하는 생산적인 긴장관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수십 년 지속돼온 정치권력의 통제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취해지고 있는 정책이 굴절, 과장되면서 생긴 오해가 아닐까. 언론에 대한 투쟁이나 적대감으로 본다고 하면 참여정부의 대등하고 역동적인 한미관계를 반미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참여정부에 들어서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성역화된 권력이 제자리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법 위에 군림하거나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집단은 없다. 상호 검증 받으면서 견제 받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나 청와대, 검찰, 국정원도 마찬가지로 절제와 투명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국가권력이나 정치권력이나 나신과 같은 존재로 검증 받고 있다. 고통을 수반하고 있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이라고 본다. 언론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검증, 견제, 감시 받아야 한다. 그것을 마다한다면 유일한 성역으로 남고자 하는 것이다. 오보가 있다면 교정하고 편파에 대해서는 공론의 장으로 가져가서 국민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참여정부는 물리력, 강제력, 인사권 등을 이용해 보도 논조를 강제한 적이 없고, 그러한 의사도 없다. 언론의 합리적 상식과 판단을 바라볼 뿐 상식과 합리가 아닌 다른 요인으로 굴절, 왜곡된다면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구제를 받으면 된다. 국민여론을 움직이는 커뮤니케이션 정보소통, 의제설정 기능면에서 언론은 막강한 권력자이고 강자이다. 그 부분만 놓고 본다면 정부는 상대적으로 약자다. 오보에 대응하고 편파보도를 지적하는 일을 정부의 압박으로 본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보자. 언론자유가 이렇게 만개한 적이 있는가. 절제하자는 것이지 군림하려고 한 적은 없다. 각자 권한의 균형에 맞춰 서로 당당히 비판하고, 감시 견제 받고 남용을 절제하면서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자.
두 번째 오해는 특정 신문을 주적으로 삼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일부 신문을 주적으로 삼아 투쟁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조선, 동아와의 싸움 아니라 우리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일부 집단광기와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로 개혁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측면이 아니냐는 것이다. 아니다. 1년 반 동안 정부와 언론은 첨예한 대립각을 이뤘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참여정부 지지율이 왜 그렇게 떨어졌겠는가. 생산적 긴장관계를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언론인의 직업적 자존을 훼손할 일이 일부 있을 수 있지만 본질을 봐 달라.
"조선일보 고민은 '뉴스가 무엇이고 신문을 제대로 만들고 있는가'이다"
진성호 조선일보 미디어팀장 : 양 비서관 말 자체에는 동감한다.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서 정부-언론 관계가 좋아진 부분은 많다. 노무현 정권에 들어와서 적당한 긴장관계가 형성되고 과거의 잘못된 유착이 사라졌다면 발전이라고 본다. 그러나 감정적인 표현이 나오고, 얼마 전 ‘저주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표현을 했는데, 청와대 언론 담당자라면 논리적으로 밝혀야 할 것이다. 이러이러한 부분이 팩트가 아니라고, 바로잡아 달라고 해야지 그것을 신문기자 칼럼 형식으로 쓰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에 대해 피해의식 받을 만한 과거 사건 몇 개 있었다. 그래도 언론이 강자, 정부는 약자라는 논리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사실, 과거반성 문제를 얘기했는데 할 말은 없다. 제가 88년 입사했는데, 검열 이 없어진 뒤 들어와서 선배들이 과거 반성 안한 것을 제기할 수는 있겠지만, 과거 잘못이 있기 때문에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밖에서 조중동을 보면 힘이 커 보이겠지만 내부에서 보면 그렇지도 않다. 기자의 숙명은 비판하는 것인데, 조중동이 청와대를 비판하는 것을 보면 다소 감정적인 부분이 보인다. 우리 사설 같은 것을 보면 표현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낀다. 정부와 언론은 서로 에스컬레이트(상승) 되는 것 같고, 내부에서도 사설의 표현을 좀더 고급스럽게 할 수 없냐는 얘기가 나온다.
정부가 언론만 보고 살 수 없듯이 언론도 정부만 보고 살 수는 없다. 기자나 PD들은 대부분 정부와 관련 없는 일을 한다. 쓰레기만두 문제에서 보듯 한국의 신문, 방송은 저널리즘의 위기를 맞았다. 청와대와의 관계, 소유지분 제한 문제는 상당히 정치적이고 또 시간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고 본다. 조선일보 내부 고민은 ‘뉴스는 무엇이고 신문을 제대로 만들고 있는가’이다.
그런데 대단히 잘못되고 있다. 정치 기사가 왜 이렇게 많이 실리는지, 중요한 국민의 문제를 왜 다루지 못하는지. 분석기사는 없고 전문가 코멘트를 실어서 비판하는 것은 깊이가 없는 기사라고 생각한다. 방송에서도 깊이 있는 다큐멘터리나 역작들이 왜 자주 나오지 않는가를 생각할 때 노무현 정부와의 감정적인 싸움만은 아니라고 본다.
(노무현 정부가 한) 기자실 폐지는 잘됐다. 브리핑제 도입 취지였던 유착을 없애겠다는 측면은 성공할지 모르지만 정보접근 등 잘못하면 피해자가 국민일 수 있다. 청와대와 언론의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대통령이 조중동을 겨냥한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너무 기사 하나하나에 연연해하는 것 같다. 기자들도 고쳐야 할 점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더라도 대통령 됐다고 하면 한국이 잘 돼야 하고 노무현 정부도 잘 돼야 하는데, 양측이 다 생산적이지 못하고 과거를 향한 싸움이 될 것 같다. 조금만 대화를 하면 양측의 오해가 풀릴 것 같다. 양측의 앙금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데, 프로페셔널 의식이 부족한 거 같다.
"언론개혁 한다고 한겨레 나아질 것 같지 않다..공멸위기 더 심해"
권혁철 한겨레신문 기자 : 언론개혁이 무엇인가 생각해봤다. 언론개혁 한다고 해서 한겨레가 더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언론개혁에 대한 국민 지지도는 높게 나오는데 당연한 질문을 하니까 그렇게 보는 것이다. 언론개혁의 개념이나 범주는 각자 다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논란 구도가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언론개혁이라는 것이 특정세력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지 않나.
지금의 구도가 물량 중심의 공세라면 기존 신문사들이 경품 등 물량비용을 콘텐츠 비용으로 돌린다면 어떨까. 편집권 독립 문제도 필요하다. 편집권 독립이 거론되고 있는데 국가보안법,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등에서 사회구성원 합의를 거치면, 가령 조선일보 편집국 기자들이 모여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고 합의하고 보도하면 합리적 절차가 있을 수 있다.
의제설정 기능은 절차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신문판매시장을 보고 자전거일보, 상품권일보라고 하는데 기사를 쓰면 독자들 항의가 온다. 한겨레도 돌리지 않는가라고 항의한다. 그럼 잘못된 것이니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라고 답한다. 언론개혁에 대해서 누가 유리한가를 얘기하는데, 최근 언론이 처한 상황에서 공멸 위기는 한겨레가 더 심하다. 광고물량이 줄고, 독자의 신뢰도 줄고, 독자 수 줄고 신문 산업 전반의 위기이자 우리 내부의 싸움이다.
왜 신문을 읽지 않는가. 최근 최병렬 전 대표가 (방송에서) 네이버로 뉴스를 보는 장면을 보고 놀랐다. 종이신문 기자 출신으로 나이도 많은 분이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조중동이 언론개혁을 놓고 '비판언론 죽이기’라는 것은 엄살 같다. 설마 조중동이 죽기야 하겠는가. 우리 (한겨레) 같은 신문이 더 어렵다. 현재 신문이 공짜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미디어담당 기자로 현 정부의 언론정책을 취재하면서 어디에서부터 취재해야 할 지 난감했다. 문화관광부 출판신문과도 아니고 국정홍부처에 물어봐야 할지, 노무현 대통령에게 물어보면 확실하겠지만 그럴 수도 없고(웃음). 언론정책이 꼭 있어야 하는가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노무현 정부의 언론정책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대신 언론대책은 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일부 신문과 정부의 관계는 적대적 상호의존 관계라고 해석한다. 최근 조선일보 사설을 보면서 참 품위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 사실을 거르지 않고 난폭하게 나오는지 의문이 든다. 참여정부의 가판폐지, 출입기자제 폐지, 기자실 폐지 등은 잘 했다고 본다.
"100년 넘은 영국 BBC에서도 정치적 독립은 진행 중인 과제"
김영삼 언론노조 KBS본부 위원장 : 보수신문과 정권과의 긴장관계가 형성된 것은 김대중 정부 출범에서 탄생됐다. 최장집 교수는 이를 위임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 충돌로 해석했다. 위임 민주주의를 점한 사람이 대의민주주의도 장악하는 것으로 변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위임된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의회권력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심판자 역할을 해야 할 언론이 선수로 뛰고 있는 것이다. 야당이 그 역할을 하게 되면 정리되겠지만 야당이 대변하기에는 정치적으로 취약한 형태이기 때문에 대의민주주의가 국회와 언론에 분점 되어 있는 상황이다.
최고 권력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언론에서 나온다는 취지의 얘기를 한다. 정보생산과 유통은 언론인데, '의도'라는 게 들어가야 권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포털사이트) 네이버, 다음 등이 정보생산과 유통을 잘 하고 있다. 그러나 3자의 의도를 갖지 않는다. 반면 신문은 자신의 의사를 공격적으로 설파할 수 있다.
판세, 이념적 지향이 변했다. 이념적 지형보다 토양의 변화가 크고, 이보다는 정치문화의 변화가 더 크다. 정치적 문화가 바뀌는 게 더 큰 변화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판세의 변화에서 지형과 토양의 변화보다 문화의 변화가 먼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올해 영국 BBC가 '박살'난 사건이 있었다. 이라크전쟁 관련 오보 책임을 지고 이사장과 사장이 물러났다. 사장이 퇴진하면서 영국 정부를 세게 비판했다. 그걸 보면서 100년 넘은 공영방송 BBC에서도 정치적 독립이 영원한 과제, 진행 중인 과제임을 느꼈다. KBS도 과거보다 상당히 나아졌지만 정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됐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물론 과거와 달라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방송개혁과 관련 민영화 등이 논의되고 있다. 공영방송이 어떤 방식으로 각 나라에 존재하는가. KBS 사장이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거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사회가 사장을 선임하기 때문에 추천과정에서 국회의 간접적 추천이 존재한다. (국회가) 추천과 검증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지 둘을 동시에 하겠다는 것은 맞지 않다.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임명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시민사회단체의 추천을 받아 국회에서 검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KBS는 팀제 도입으로, 적응 중이지만 어려움이 많다. 보수신문에서 (KBS를) 비판할 때 감정적 비판이 있다. 팀제 도입은 신자유주의 개념이 도입된 조직개편이다. 감사원의 감사보고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방만한 경영을 한다고 KBS를 비판했다. 팀제는 경영효율성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들어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대우받자는 것인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힘 실어주는 언론사에서는 이런 문제는 힘실어줘야 하지 않는가. 때로는 보수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때로는 진보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냉·온탕식이다. 하나의 입장에 서서 비판해주면 좋겠다.
"조중동-참여정부 대립 팔자소관...기자들 세대교체로 건전한 긴장관계 이룰 것
김당 오마이뉴스 기자 : ‘건강한 긴장관계’는 청와대 대언론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토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모토가 방향을 잘 잡았는지, 소통 주체들간의 인식의 간극은 없는지, 초심이 제대로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양 비서관이 ‘생산적 긴장관계’, 권 기자가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라는 용어를 썼고, 발제자가 98년 김대중 정부와 보수언론의 투쟁에 문제제기를 했는데 98년 이후 상황을 헤게모니 투쟁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98년 이후에도 정부와 언론은 공생을 했다. IMF 특수상황이 전제됐지만, 김대중 정부의 대언론관계의 상징적 인물인 박지원 전 장관과 조중동 그리고 한국일보, 경향신문 등은 끊임없는 긴장과 유착을 통해 심지어 퇴직자 취업문제를 비롯해, 은행융자 상환·연장 등 온갖 혜택을 받았다. 그것을 범죄시 하지는 않는 입장이다. 다만 탈법이라고는 볼 수 있다.
노무현 정부와 김대중 정부의 언론관계 시각은 굉장히 다르다. ‘(정부에서) 너희도 부도덕하면서 왜 돌을 던지느냐. 그럴 자격이 있느냐’,‘(언론에서) 너희들이 그렇게 나오면 맞장 한번 떠보자’하는 식의 인식 간극을 메우기는 힘들 듯하다. 현재 정부와 언론의 관계는 건전한 긴장관계 형성에 기여하겠지만 소모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측면은 일정부분 동의하고, 판을 넓게 보자는 (발제자) 말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건강한 긴장관계는 구질서에 익숙한 기자들이 점점 현장을 떠나고 젊은 기자들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에 낙관하는 것이지, 노무현 정부가 어떤 정책을 쓰기 때문이라고는 보지는 않는다.
건전한 긴장관계를 상징하는 의식은 청와대 비서관들과 기자들과 식사나 술자리를 할 때 긴장!’,‘긴장!’구호를 외치면서 술을 마시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긴장관계는) 청와대측 수요에 의해서 유지되기보다 언론과 정부, 양측의 수요에 의해서 유지된다. 그러나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청와대에서도 기자들과 가장 많이 접촉하는 곳이 대변인실과 춘추관인데 이곳 비서관들은 여전히 조중동 기자들과 가장 많이 식사하고 술자리를 하고 있다. 거기서도 '긴장!'을 외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국 노무현 정부 임기가 끝나거나 구질서에 익숙한 기자들이 현장을 떠나면 자연스런 세대교체가 이뤄질 것이고, 그럴 때 건강한 긴장관계가 이뤄지지 않겠는가. 그 이전에는 조중동과 노무현 정부의 팔자의 소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론, 국민여론 반영보다 정부정책 깨려는 경향 눈에 띄어"
김영욱 언론재단 미디어연구팀장 : 조중동의 힘은 얼마큼 셀까. 이견 있었다. 기자생활 오래한 전직 언론인들이 "내가 당신을 잘 되게 할 수는 없지만, 못되게 할 수는 있어”라고 통화하는 걸 들었다. 신문이나 언론도 (기자들 모습과)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점차 조중동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다. 대통령을 만들거나 국민여론을 거슬러 역행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정부 정책을 반대하고 곤란하게 할 수는 있다.
정부는 인기 있는 정책만 할 수는 없다. 호소하고 설득하고 달래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주요 정책이다. 그런 과정에서 몇몇 전파력 있는 신문이 마음먹고 방해하면 그 힘은 크게 보일 것이다. 특히 양 비서관처럼 정부정책을 하는 입장에서, (신문이) 악의를 갖고 하는 것처럼 보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양비서관 말처럼) 정부와 언론이 대등한 긴장관계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국민이 뽑아준 대통령이 있고 수많은 관료를 거느리고 있고, 때로는 국민의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는 힘있는 정부가 언론(조중동) 보고 “힘이 세다”며 대등한 관계라고 보는 것은 답답한 일이다.
다행인 것은 유착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유착관계만큼 국민에게 불안감 주는 상황 없다. 언론의 순기능이 잘 되고 있는가에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막스베버가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말했다. 신념윤리는 내 원칙이 옳으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내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고, 책임윤리는 내 원칙이 아니라 내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미칠까 하는 것이다.
정치가는 책임윤리를 수행한다. 내가 언론에 대해서 바른 자세를 취해도, 정치시스템 이론에서 보면 아웃풋(정책결정과 정책수행), 인풋(국민여론) 두 개를 연결해주는 고리가 있다. 이를 피드백이라고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피드백을 언론이 담당하지만 지금은 그 연결고리가 깨져 있다. 언론이 보도하는 것은 국민여론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정책을 깨려는 경향이 가장 눈에 띄고 있다.
(언론의) 경제위기론을 보면 정부정책을 방해하려는 시도에서 한 것 같다. 조중동의 잘못인 것 같다. (저조차) 정권을 흔들려고 경제위기론을 내세웠다고 느껴지니 정책담당자는 오죽 했겠는가. 언론을 통한 자연스런 피드백, 여론형성 및 전달 기능이 잘 되고 있지 않다. 여기에서 피해자는 국민이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누가 잘못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도움되지 않는다. 대통령과 정부가 독자를 책임져야 할 신문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박인규 : 궁극적인 책임은 누군가. 정부가 아닌가. 정부가 포용력 있고 통 크게 가야 되는 것 아닌가.
"수치스런 과거사 가진 언론, 뼈아픈 점검과 자성 왜 없는가"
양정철 :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이중성이 있다. 제왕적 대통령 권력, 청와대 권력의 집중 폐해를 우려한다. 하지만 역대 어느 정부보다 대통령 워딩(말)이 거의 가감 없이 기자들에게 공급돼 풀로 나가고 있다. 그런 정권은 없었다. 언론과 국민이 그대로 판단해달라는 뜻이다. 대통령이 ‘말이 많다’, ‘거칠다’고 얘기하는데 상당 부분 이중잣대를 갖고 있다.
(제가) 저주의 굿판이라 얘기한 바 있는데, 청와대 참모나 청와대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고립무원의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생각해줬으면 한다. 일몰 이후 통로를 통해 권력과 정부의 수많은 거래가 있었다. 참여정부 이후 청와대 그 누구도 기사를 ‘빼달라, 넣어달라’ 전화 한번 한 적 없다. 혁명적 변화이다. 그런 긍정적인 순기능에 대해서는 별로 부각되지 않고 우려하는 부분이 많은데, (정부는) 스스로 무장해제하는 것이다. 과거처럼 힘과 통제력, 인사권을 가지고 주무를 수 있는 언론사에 상식과 원칙에 따른 합리적인 의사에 맡기고 있다.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커뮤니케이션 공간에서는 정부가 약자이다. 정부는 의제설정만 할 수 있지 헤드라인을 정하는 등에서는 힘이 없다. 정부가 가질 수 있는 입장 설명에 대해서 이중적인 폄하가 안타깝다. 원칙과 상식에 의해서 분수를 지켜나가는 대단히 까다로운 요구를 받고 있다. 청와대가 커뮤니케이션 광장으로 내려온 것을 긍정적으로 보지 못할망정 과거 잣대로 보는, 패러다임 문제가 있다. 감정적이라고 지적한다면, 언론인의 직업적 자존에 흠집 낼 게 있다면 유감이지만 청와대 입장 전하는 것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조선일보 등 일부 신문의 과거사 문제를 선배들이 얘기하니까 얘기하고 어렵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고구려사 문제 왜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역사는 미래를 여는 창이고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특정 신문은 친일문제 과거사 문제를 자유롭게 비판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지금까지 친일 부역 역사 독재정권에 협력했던 역사 광주항쟁을 폭도로 매도했던 역사, 전두환 장군을 찬양했던 역사를 반성한 적 없다. 그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던 역사에 대해서 어떻게 당당하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의 언론자유는 노무현 정부가 부여한 것 아니다. 일제시대부터 선배언론인들이 피와 땀을 흘려서 쟁취한 언론자유를 마음껏 구사하고 있는 것이 일부 언론이다. 왜 이러한 모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자기점검이 없는지 이해가 안 간다. 언론개혁에서 상반된 요구가 있다. 적어도 언론개혁은 언론계 내부에서 스스로 먼저 이뤄져야 할 일이다. 시민단체, 학계, 국회에서 이뤄져야 한다. 또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왜 언론계의 뼈아픈 점검과 자성이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이 얘기를 왜 내가 꺼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언론개혁 관련해서 상반된 입장이 있다. 한쪽에서는 언론개혁 하라고 뽑아줬는데 왜 안하느냐 얘기하고, 한쪽에서는 특정언론, 적어도 언론개혁은 언론계 내부에서 스스로 이뤄져야 할 일이고 동시에 시민단체, 학계에서 이뤄져야 한다. 다만 정부는 국민이 부여한 권능을 가지고 불법 탈법 시장원리 훼손하는 일에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게 입장이다.
기대가 크기 때문에 실망이 큰 것은 이해하지만, 너무 많은 분들이 대통령만 바라보고 있다. 언론개혁도 마찬가지다. 87년 언론사 노조가 생긴 이래 정부를 바라보고 언론개혁 얘기한 적 없다. 그런데 참여정부 들어서는 기대하기 적절치 않은 부분도 있다. 정부가 모든 책임과 총대를 메고 해야 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 언론계 내부의 진지한 논의가 너무 밖으로 모아지고 있지 않은가.
"독자의 (조선일보) 신뢰도 떨어졌다는 것에 위기 느낀다"
진성호 : 양 비서관이 5:1(로 싸운)다고 했는데, 매체성향으로 보면 나도 비슷한 상황이다. 언론사의 과거사 문제는 따로 한번 토론할 문제이고, ‘니들이 감히 청와대를 비판하느냐’는 접근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언론은 하는 일이 비판인데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기자하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요즘 자체적으로 내부 조사하면 신뢰도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위기감을 느낀다. 왜 떨어졌는가. 답이 많이 나오는데, 밖에서 안티조선이 비판하는 것과 맞아떨어지는 게 많다. 정부와 조중동이 철전지 원수질 일이 없는 것 같고, 청와대도 신문만 보고 흥분만 할 게 아니라 여론조사 해봐야 할 것 같다.
조선일보가 아무리 한나라당 비판해도 밖에서는 훈수 두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 책임은 조선일보의 몫이다.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독자이다. 독자들의 파워란 조선일보를 한 달만에 구독율 뚝 떨어뜨릴 수 있다. 신문은 예술이 아니고 과학이다. 독자가 판단하고 그날그날 데이터 나오니까 불공정하게 만들면 반성하게 될 것이다. '조중동은 악하고 정부는 선하다'는 전제를 깔고 얘기하면 발전 없을 것이다.
"노 대통령, 조중동과 감정 유발할 말만 했지 언론정책 한 게 없다"
신학림 언론노조 위원장 : 양 비서관이나 노무현 대통령은 매우 억울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다섯 분이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는)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에 비해서 형식과 내용이 많이 진전됐다고는 하겠지만 내용적, 본질적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한쪽에서는 개혁하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노무현 정부가 언론개혁 주체가 돼달라고 한 적도 없고 될 수도 없다. 정부가 언론개혁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올바른 언론정책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언론자유 영역(편집권의 독립, 취재·기사작성의 자유)와 사적 기업으로서 시장의 자유가 있다. 언론자유 영역은 정부의 철저한 불간섭, 언론자유 보장을 추구하고 사적기업의 자유에서는 철저하게 법적용이 됐어야 한다. 그러나 거꾸로 됐다. 김영삼정부, 김대중 정부는 기업으로서 시장의 자유 영역에서는 아무 것도 안했다. 노무현 정부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로는 조중동과 감정을 유발할 말만 했지 시장자유의 영역에서는 한 게 하나도 없다.
노무현 정부는 고도의 기법으로 언론과 흥정한 게 있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하고 3시간 대담했을 때 거래가 있었다고 본다. 참여정부 초대 검찰국장이 홍석현 회장 동생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모르는 상태에서 삼성그룹이 한나라당에 수백 억씩 대선자금을 줄 수 있었겠는가.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대선 불법자금 수사로 미국에서 도망다니고 있는데, 이건희 회장은 건재하다. 이를 연관해 볼 수 있다. 지금의 신문시장 불·탈법 행위를 조장한 게 홍석현 회장, 신문협회장이다. 노무현 정부는 제대로 언론정책을 한 게 없다. 똑바로 하라는 것이다. 조중동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뭔가 (싸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신문시장 이렇게 엉망으로 되고 있는데도 왜 위장하는가. 제대로 하라!
장재열 언론광장 회원 : 24년 동안 언론이 얼마나 변했느냐. 예전에도 기자들끼리 모여 뉴스가 무엇이고 우리가 바른 길을 가는지 우리 글이 상대방에게 ‘우리가 정말 잘못 했구나’를 느끼도록 쓰자고 다짐했었으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변화가 없다. 언론은 남을 비판하는 정신적인 강자라고 할 수 있다. 지금 기자들이 10년, 20년 후에 죄책감과 자괴감을 갖지 않으려면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박상규 문화일보 기자 : 참여정부 들어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실질적인 관행은 바뀌지 않았다. 예전 관행이 그대로 되는 것은 엠바고 시스템이다. 기자단을 없애고 공개하겠다는 건데, 예전관행 그대로 하고 있다. 분명히 알릴 필요가 있고 비공개할 이유가 없는데도, 조간에 먼저 뿌려야 한다는 관행이 맞는 것인가. 기자실은 없앴지만 취재하다 보면 기자들과의 술자리 관행은 그대로 있고, 조간 엠바고 시스템 등도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기자실만 폐지한 게 노무현 정부의 언론정책인가.
이재국 언론노조 신문특별위원장 : 경향신문 기자로써 얘기하는 것이다. 열려있는 토론보다 사회자가 던져준 발제 범위에 제한된 것이 유감스럽다. 노무현 대통령의 조중동 주적 설정, 정부주도 언론개혁 등 (발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친노언론, 반노언론이라는 구도로 몰아가면 생산적이고 구조적인 논의 할 수 없다. 사회자의 말이 조선일보적 성격을 규정한 것이 아닌가. 언론개혁을 주도했던 언론노조는 노무현 정부의 반민주적이고 보수적 행태를 문제삼았다. 정치권 얘기를 하자면 민주노동당은 언론개혁을 공약으로만 받았을 뿐이고 정책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은 아예 공약도 없었다. 정부주도의 언론개혁 등의 논리는 발제자가 '조중동' 프레임에 갇힌 것 아닌가.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언론이냐 아니냐, 이라크파병 보도를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하다.
양정철 : 신학림 위원장의 쓴 소리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중앙일보 문제는 오해가 있는 듯하다. 중앙일보쪽에서 대담 요청이 있었고, 검찰수사에 (대통령이) 언급을 했다고 해서 검찰이 그것에 흔들린 적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고 본다. '저주의 굿판을 걷어치워라'에서 왜 조선과 동아만 했느냐. 실수냐 의도냐. 이는 역사에 대한 문제인데, 신문의 창간연도가 다르고 세 신문이 각각 짊어질 역사 무게가 다르기 때문에 조선, 동아일보로 표현했다. 기자실 관행개선 문제는 챙기고 있고, 지적해준 부분은 잘 살펴보겠다.
"언론개혁 입법은 수년간 시민·언론단체 등에서 추진한 것"
김영욱 : 언론개혁과 정부와의 관계 등 복합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국가미디어 정책을 생각할 수 있다. 국가는 헌법이 규정한 언론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국민이 의견을 밝힐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의무가 있다. 여론 다양성이 확보돼야 하고 저널리즘의 질이 높아야 한다. 당장은 권력을 갖고 있는 정부가 역할을 해야 한다. 국가가 수행하는 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고 비판을 수집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책추진 과정에서는 언론구조를 담당하는 정책담당자와 홍보담당자는 구분돼야 한다. 우리는 구분이 없고 뒤섞여서 혼란이 있는 것 같다.
박인규 : 하나의 가설이었고, 노무현 정부가 조중동을 주적으로 하는 정책을 하는 게 아니냐는 가설을 낸 것일 뿐, 합의된 것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화두를 던진 것뿐이다. 정부주도의 언론개혁은 외부 주도의 개혁을 얘기하는 것이다. 언론 자체가 상당히 파당적으로 갈라져 있고, 조중동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약화시키려는 것으로 보고 있고, 반노-친노 구도는 매체가 정치권 중심으로 자기 정체성 가져가고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파당적 정치에서 한 발 떨어진 언론은 없는 것 아니냐는 차원에서 본 것이다.
김학천 전 EBS 사장 : 노무현 정부와 언론에 대한 오늘 토론회가 격의 없고 솔직하고 많이 절제된 표현이라는 점에서 희망을 준다. 언론정책에서 정부의 역할이 손놓고 관여하지 않는 게 능사가 아니다. 국민이 개혁과 언론에 대한 개념을 잘 주워 담을 그릇은 내줘야 한다. 그 그릇에 금이 간 것 아닌가 살펴보자는 것이 오늘 토론회이다. 수용자가 정부에 대해 갖는 언론에 대한 기대는 뭘 빼거나 넣거나 하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 탄핵방송으로 논란이 일 때 정부도 입장을 내줘야 했다는 것이다. 여론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분석하고 의견을 봐 달라. 방송위원회도 남한테 맡기지 말고 책임지고 해달라는 요구이다. 국민들의 요구수준은 높아졌다. 신문은 너무 대부분 갈등만 있고 방송은 대부분 합의만 있다.
김영삼 : 탄핵방송 논란 일었을 때 애초 조중동 인터넷사이트 온라인폴(인터넷투표)에서도 공정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나중에는 불공정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조중동의 비판적 보도에 영향받았다고 본다. 언론권력화의 문제를 얘기할 때 '의도성 개입'을 전제로 했는데, 신문과 방송은 '의도성 개입' 문제가 차원이 다르다.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다. 그래서 일단 접은 것이지, 발제자가 표현한 방송의 맹목적 당파성을 얘기하자면 2시간 넘게 토론할 수 있다.
김영호(언개연 공동대표) 언론개혁국민행동 상임 공동대표 : 노무현 정부 언론정책 있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주제발표자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정부 주도의 언론개혁이라고 얘기하는데 그동안 언론개혁 입법을 추진하면서 청와대, 문화부, 국정홍보처의 어떤 사람과도 커피 한잔 마셔본 적 없고 전화 한번 받아본 적 없다. 어떤 근거로 정부주도의 언론개혁이라고 말하는가.
최근 방송위원회가 심의위원 27명을 뽑았는데, 구성절차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안을 냈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을 10여명 추천했는데 3명밖에 안됐다. 그런데 방송위원회는 방송협회에서 추천한 3명을 모두 썼다. 방송협회는 사업자단체이다. 또 광고업계가 추천한 사람 3명도 썼다. 광고업계에서 온 사람이 어떻게 광고를 제대로 심의할 수 있겠는가.
조선, 동아일보는 이런 것은 쓰지 않고, '대표적인 친정부단체인 언개연'이라는 식으로 '3명 뽑혔다'고 하는데 보도하더라도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보도를 보다 보니까 오염됐는지... (이런 토론회라면) 언론광장 정체성과도 관련 있다. 그럼 언론개혁 하겠다면 노빠인가. 언론노조 위원장이 노빠인가, 내가 노빠인가. 이런 식의 발표를 하니까 본질적인 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정부도 시민단체에서 안을 만들어오면 그를 받아서 (언론개혁 입법추진을) 하겠다고 했는데, 시민단체가 입법추진에 참여하겠다고 해서 정부의 하수인이라고 보지 않는다. 언개연은 96년 결성됐는데 그때 이미 정간법 개정안을 국회에 내서 입법청원했다. 2000년도 했다. 96년에는 민변이 입법청원했다. 시민사회단체에서 수년간 계속 추진해온 것이다. 이번에는 정간법 개정으로서는 안되니까 입법 주체인 국회의원이 소속돼 있는 국회 정치커뮤니케이션연구회와 언론개혁 대토론회 연속 5회 토론을 열면서 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15, 16대 국회가 임기만료되면서 청원안이 자동폐기됐다. 새로운 국회가 구성돼서 200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언론개혁국민행동을 중심으로 또 개정안을 입안하려고 추진 중이다.
첫댓글 넵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