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기녀와 우리의 기생
중국의 기녀
기녀의 탄생
서양의 경우 기녀의 기원을 종교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기원 전3000년에 세워진 바빌론 왕국에 기녀가 나타났고 함무라비 왕이 정권을 잡았을 때 신전에는 남자 사제, 종, 장인 이외에도 존경받는 여사제가 적지 않았다. 그녀들은 유복한 가정 출신이었다. 또 신과 기도자 사이에서 종사하는 성직기녀가 있었는데 그녀들의 수입은 신전의 중요한 재원이기도 하였다. 바빌론 신전의 기녀는 일생 동안 한번은 신전에 들어가 낯선 남자에게 몸을 주어야한다. 이때 남자는 은이나 비단을 성직 기녀의 치마에 던져주고 동침하는데 여자에게는 선택 권리가 없으며 여신에게 임무를 다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당시 기녀들은 어떠한 치욕감도 느끼지 않았다.
중국의 경우 서양의 성직 기녀와 유사한 역할을 한 이는 무녀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녀란 신에게 바쳐진 여성에게서 폐경기가 될 때까지 처녀여야만 했으며 몸가짐은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이러한 처녀 무녀들과 함께 신전에서 일하는 여성이 사원창부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기녀의 기원을 은상의 여무에 두고 그 시대를 무창 시대라고 한다. 그 시대 지배계급 사람들은 공적, 사적인 일을 계획하고 처리할 때 신탁에 의지하였다. 이들은 점술 혹은 톱풀의 마른 줄기 묶음을 움직여 보는 것으로 다가올 미래를 점쳤다. 아울러 접신 상태에서 신착의 말을 할 수 있는 영매를 청하기도 했다. 영매에는 남자영매와 여자 영매가 있었지만 신탁을 푸는 일은 본시 여자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종교 기녀의 성고 목적은 종교 신앙, 즉 신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이지 금전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지만 여무가 기녀의 기원이라는 견해는 증거가 희박하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이러한 주장은 여무가 후세의 창기아 마찬가지로 노래와 춤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후세 여자들이 기녀가 된 까닭은 경제적 혹은 정치적 압박 때문이었음을 홀시하고 있다는 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주장은 서양에서 말하는 종교 매음설의영항을 받고 있다.
*기녀의 성적 도구화
일반적으로 기녀라고 하면 매춘을 업으로 삼는 여자를 말한다. 매춘이란 육체를 금전과 바꾸는 행위이다. 이러한 의미로서 현재의 기녀를 보면 완전히 부합하지만 고대의 기녀와는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서 고대의 기녀는 음악과 가무와 같은 예술에 종사하며 사람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여자로서 결코 매춘을 본업으로 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기녀가 돈을 받고 육체를 파는 식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런 기녀는 당송대 때 나타나기 시작하여 명청대에 형성되어 매음으로 기녀를 대신하기도 했다. 기녀는 처음에는 주로 예술만을 팔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색과 예술을 팔게 되었고 그 후에는 색만을 파는 과정을 밝게 되었다.
중국의 기녀 발달은 통치자들의 음란한 기풍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실상 악무 노예는 통치자의 수요에 따라 나타났다. 갑골문 복사 가운데 무신은 노예 신분의 전업 부용인을 말한다. 악무 노예는 그 주인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 이외에도 제사나 기타 악무 활동에 참가해야한다.
사유제 사회가 정착된 이후 각 조대의 통치자는 다처의 특권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또 많은 여자들이 제공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역사상 노예 사회로 진입한 초기에는 통치자들이 성색을 탐닉했는데 그들이 즐긴 음악과 무용은 원시 시대의 그것과는 달리 압박, 착취, 음란을 특징으로 한다.
*기녀의 유형
기녀의 범위는 협의적인 것과 광의 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말할 수 있다. 매춘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협의적 의미로서의 기녀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고 자기의 미색과 재능을 공개적으로 팔아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여자를 말한다. 광의적 의미로서의 기녀는 다변화된 기녀를 포괄하는 것으로 주로 수도권에서 매춘을 부업으로 하여 비공개적으로 몸을 파는 여자를 말한다. 그리고 매춘 내용으로부터 보면 협의적 의미로서의 기녀는 전통 개념 속의 성교를 내용으로 하는 성과 금전 간의 교역을 가리킨다. 그리고 광의적 의미로서의 기녀는 나그네를 위해 각종 색정을 제공하는 행위를 포괄한다.
기녀의 호칭은 매우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그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면 신녀,야도랑, 풍성부인,정로,고해인,소랑 등이 있다.
중국역사상 기녀의 종류는 매우 많지만 중요한 것이 영업을 기준으로 하는 가기, 관기, 시기, 영기, 궁기, 승기 등이 있다.
*가기
가기란 가정에서 양성한 기녀를 말한다. 가기를 양성하는 풍조는 한대에 시작되여남북조때 번성하였다. 그녀들은 그 시대 가무 예물의 대표자이며, 통치 계급의 수요에 부합하기 위해 엄격한 훈련을 받아 훌륭한 문화적 소양을 쌓았다.
중국 고대 가기의 출현은 비교적 복잡하다. 처음에는 '가기'로 시작하여, '무기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후 또 '궁기' '관기' '시기' '사기'로 발전하여 사회 생활 속으로 광범위하게 파고들었다. '가기'는 하걸이 양성한 여락, 창우 3만 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여지는데, 이들이 '노예 창기'이다. 이후 이런 기풍은 성행하여, 위로는 천자와 왕후 장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대부나 부호들에 이르기까지 여자 노예를 양성하여 즐겼을며 그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권세와 재산 정도를 나타냈다. 이러한 여자 노예는 몸과 재능을 모두 바쳤다. 가기는 대부분 노래와 춤이 뛰어나고 미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락'이라고도 부른다. 이 밖에도 시희, 소첩, 성기, 가희, 무희, 미인, 창기, 등으로 세분되고 있다. 황제의 가기에 재해서는 후세에 '어기', '궁기' 라고 부른다. 서주는 노예 제도 가 매우 번성한 사회로 여자 노예를 양성하는 기풍이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에, '가기'는 서주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가기의 탄생 원인은 우선 정치적 불안과 성도덕의 문란이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왕이나 제후 등 지배층 인사들은
자신들의 집에서 개최하는 연회나 자신의 음탕함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무하는 여자들을 두었다. 이 여자들이 가기이며 여락 이라고도 한다. 그 당시에는 외모가 빼어난 가기들을 다른 나라의 제후들에게 보내는 것이 관행이었으며 또 사고 파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가기의 구성원은 대부분 여자 노예 중 가무에 탁월한 자나 전쟁 포로로 잡힌 여자 등이었다. 또한 가기는 훗날 관기의 효시가 된다.
*관기
권세 가의 통제를 받던 가기는 점점 변하여 관기가 되었다. 관기는 지방 관청에 소속된 기녀를 말한다. 관기는 지방장관에게 오락을 제공하고 관청에서 거행하는 각종 연회에서 가무와 음악 등을 제공하였는데 동침하지는 않았다.
관기는 또 공기, 관노, 관류, 부기, 현기 등으로도 불렸다. 관기는 하왕조 때 처음으로 나타났다.
관기는 당대에는 관사부인, 관사여자, 관노 등으로 불렸다. 당나라 초 각 지방 관청에서는 일정 수준을 갖춘 관기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었다. 중당시기에는 지방 관기가 보편화되었으며 심지어 현급에서도 관기를 두었다. 관기는 만당 시기에 더욱 흥성했다. 송대에 들어서면서 관기는 영기와 더불에 상품화되었는데 이것은 송대 도시 경제의 번영과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다.
*사기
사기란 사사롭게 육체를 파는 여성들로서 일반적으로 매춘녀와 다를 바없었다. 그녀들은 가기와 달리 어떤 관료나 지주 혹은 부호에게 전속 되어있지 않았으며 개별 혹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몸을 팔지 않았고 병사들만을 위해 종사하지도 않았으며 사회의 모든 남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녀들 중 절대 다수가 수준 높은 가무나 기예를 이용하여 남자의 환심을 사는 일도 없었고 이러한 훈련은 받지도 않았다. 일반 남자들 또한 그녀들에게 많은 돈을 지급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주로 남자들의 성적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이 사기에도 고, 중, 저 의 구분이 있었다. 고급기녀는 미색과 예능을 겸하여 문화적 소양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사고가 민첩하며 심지어 훌륭한 가기보다도 뛰어난 이도 있었다. 그녀들은 주로 몇몇 상류층 인사들만 상대하였다. 사기는 춘추 전국시기에 이미 출현하였다.
*영기
영기는 군기라고도 하며 군영에 설치한 기녀로서 주로 병사들에게 성적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당송 이후로는 대외 영업을 하고 항상 문관을 접대했다. 특히 육조 시대의 영기와 가기는 모두 노예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영기는 춘추말 전국 초에 이미 출현했지만 영기 제도의 정식 확립은 한대에 이루어졌다. 이렇듯 영기의 원류는 이 시기에 이미 갖추어졌다. 울전서, 오월춘추 등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470년경에 월왕 구천은 산 정상에서 지나가는 과부를 만나게 되자. 여성을 그리워하는 군사들에게 성을 제공하도록 하여 사기를 증진 시켰다. 이러한 일은 임시 방편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제도화되지는 않았지만 중국 영기 제도의 원류라고 볼 수 있다.
*시기
춘추 시대 초 시기는 기원의 탄생과 더불어 중국 기녀사에 있어 큰 사건이다. 시기는 상기라고도 하며 일정한 대가를 받고 공개적으로 색을 파는 여자를 말한다. 제나라의 재상 관중이 여려를 설치했는데 여란 문이라는 뜻으로 당시 귀족들이 머물던 곳이다. 그러므로 여려란 궁궐 안의 여자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곳을 뜻하며 국가에서 경영하는 기원의 시초이다. 기원이란 기녀들의 매음 장소를 말한다. 기원이라는 명칭 이외에 청루,구란, 수국, 행원 등 그 수는 매우 많다.
*궁기
궁기는 궁궐에서만 가무를 제공하는 기녀로 궁첩, 궁아 등으로도 불렸다. 궁기는 황가에서 거행하는 각종 연회나 행사에 출연하였고 평상시는 황제를 위해 여러 가지 오락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동침은 하지 않았다.
궁기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크게 발달하였다. 궁기는 진시황이 지은 여러 채의 궁궐에서 기거하면서 그를 우해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었다. 당대 시인 두목은 아방궁부에서 당시 진시황과 궁기의 모습을 노래했다. 한대의 제왕들 또한 궁궐에 수만 명의 후궁을 두고 음란한 생활을 하였다
★우리의기생 1 기생에 관하여..
춤*노래 또는 풍류로 주연석(酒宴席)이나 유흥장에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관기(官妓) ·민기(民妓) ·약방기생 ·상방기생등
예기(藝妓)의 총칭.그 원류(源流)는 신라 24대 진흥왕 때에
여무적(女巫的) 직능의 유녀화(遊女化)에 따른 화랑의 원화(源花)에서
발생하였다고도 하고, 정약용(丁若鏞)과 이익(李瀷)은 고려시대부터
생겼다 하여 “백제 유기장(柳器匠)의 후예인 양수척(楊水尺)이
수초(水草)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李義旼)이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라 주장하고 있다. 이 밖에도 전쟁 포로 중
부녀자의 노비화, 사노비(私奴婢)의 매음녀화(賣淫女化:天官女의 경우),
신라시대의 가척(歌尺) 및 여악(女樂) 제자의 유녀화(遊女化) 등의
예를 추정할 수 있다. 고려 문종 때에는 팔관연등회(八關燃燈會)에
여악(女樂)을 베푼 것이 관기(官妓)의 시초라고도 하며, 여악은 후에
창기희(唱技戱)로 발전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와 많은 관기가 생겨
태조가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천도할 때 많은 관기가 따라갔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관기 설치 목적은 주로 여악(女樂)과 의침(醫針)에 있었으
며, 따라서 관기는 의녀(醫女)로서도 행세하여 약방기생, 또는
상방(尙房)에서 침선(針線:바느질)도 담당하여 상방기생이란 이름까지
생겼으나 주로 연회나 행사 때 노래 ·춤을 맡아 하였고,
거문고 ·가야금 등의 악기도 능숙하게 다루었다. 관기는 지방관아에도
딸려 지방관의 위락(慰樂)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역대의 왕이나 왕족으로 기생을 즐긴 예는
성종(成宗) ·수양대군 ·연산군 ·양녕대군(讓寧大君)
안평대군(安平大君)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기녀들의 가무(歌舞)에 있어 지방적 특색으로는
안동기(安東妓)의 송대학지도(誦大學之道), 함흥기(咸興妓)의 송출사표
(誦出師表), 관동기(關東妓)의 창관동별곡(唱關東別曲),
의주기(義州妓)의 치마무검(馳馬舞劍), 제주기(濟州妓)의 주마지기
(走馬之技), 평양기(平壤妓)의 창관산융마시(唱關山戎馬詩),
북청기(北靑妓)의 치마지기(馳馬之技), 영흥기(永興妓)의
창용비어천가(唱龍飛御天敬) 등이 특히 유명하였다.
중종 때는 사회 풍기에 관해서 여러 가지 규제를 하는 가운데 의녀(醫
女) ·창기(娼妓)의 연회 참여를 금지시킨
일이 있는데, 1510년 중종은 크고 작고간에 연회를 할 때 의녀나
창기를 부르는 것을 엄금하도록 사헌부(司憲府)에 명령하고 절목(節目)
을 만들도록 하여 위반자는 물론, 의녀나 창기도 중벌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왕명이 얼마나 잘 지켜졌는지는
의문이다.기생을 관장하는 기관으로는 기생청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가무(歌舞) 등 기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行儀) ·시(詩) ·서화(書畵) 등을 가르쳐 그들이 접대하는
상류 사족(士族)의 교양과 걸맞게 연마시켰다. 기생청은 후에 권번(券番)
으로 개칭되어 기생청의 기능을 맡았거니와, 서울과 평양에는 기생학교
가 있어 15세에서 20세까지의 처녀를 입학시켜 가음곡 외에 예의 ·서예
등을 가르쳐 예능과 교양을 겸비하도록 하였다.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으로는 서울 ·평양 ·성천(成川) ·해주(海州)
강계(江界) ·함흥 ·진주 ·전주 ·경주 등이었다. 또한 시(詩) 등
문장으로 유명한 명기(名妓)로는 황진이(黃眞伊) ·매창(梅窓) ·소백주
(小柏舟) 등이 있으며, 의기(義妓)로 유명하기는 평양의 계월향(桂月
香), 진주의 논개(論介), 가산(嘉山)의 홍련(紅蓮) 등이 있다.
기생제도는 조선시대에 발전하여 자리를 굳히게 되어 기생이라 하면
일반적으로는 조선시대의 기생을 지칭하게 되며,
사회계급으로는 천민에 속하지만 시와 서에 능한 교양인으로서
대접받는 등 특이한 존재였다.
★우리의기생2
妓生 전통사회에서 술자리의 시중을 들던 특수한 계층의 여성.
조선시대의 한량들은 말하는 꽃이라는 뜻으로 해어화(解語花)라 부르기도 했다.
기생의 유래에 대한 정설은 없으나 고대 부족사회의 무녀(巫女)에서 비롯되었
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제정일치 사회에서의 사제(司祭)였던 무녀가 제정이 분리되어 국가가 성립
되는 과정에서 지방 세력가와 결합하여 기생과 비슷한 신분층을 형성하였다는
견해이다.
한편 《후한서(後漢書)》와 《수서(隋書)》에는 고구려의 유녀(遊女)에 대한 기
록이 보이는데, 이들은 고대국가가 다른 부족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피정
복 부족의 부녀자들로 국가체제가 확립되면서 이른바 관기(官妓)와 같은 제도
가 서서히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기생은 기본적으로 노비와 같은 신분이었고 이들이 일반 노비와 다른 뚜
렷한 계층을 이룬 것은 중앙집권이 정착한 고려 때부터이다.
고려의 교방(敎坊)은 제도화된 기생을 배출하는 학교였으며 조선시대에도 그대
로 이어졌다.
한편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사대부의 유교문화와 융합하여 독특한 기생문화를 낳
았는데 황진이(黃眞伊)·이매창(李梅窓) 등은 시조시인으로 문명을 날렸으며, 문
학성이 뛰어난 고려가요도 기생층이 향유, 전승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어 이들이
한국의 문학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러나 조선말기에 오면 기생이 일패(一牌)·이패·삼패 등으로 분화되는데, 일패
는 관기의 총칭으로서 한국 전통가무의 보존·전승자로 뛰어난 예술인들이었으
며 이패는 밀매음(密賣淫), 삼패는 공창(公娼)의 기능을 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말기의 기생학교·기생조합 등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
대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사회적으로 비중있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진주(晉州) 기생 산홍(山紅) 같은 이는 <기생 줄 돈이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흘
리는 젊은이에게 주라>고 친일파 인사를 꾸짖어 논개(論介)로 대표되는 의기(
義妓)의 맥을 이었으며, 1919년 3·1운동 때는 진주·수원(水原)·해주(海州)·통영
(統營) 등지의 기생조합원들이 궐기하여 만세시위를 크게 벌였고, 이에 용기를
얻어 참여한 민중을 선두에서 주도하기도 했다.
한편 1907년의 한성기생조합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생겨났던 조합은 일제강
점기에 들어오면서 권번(卷番)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광복 후 이것이 폐
지되어 제도적인 기생은 사라졌다.
70년대 이후 생겨난 이른바 <기생파티> 등의 현상은 관광문화가 다소 그릇되
게 전개된 것으로, 뛰어난 문학과 예술을 낳은 전통사회의 기생과 전혀 다르며
관련성도 없다. |